[선장과 함께하는 도시 항해] 4. 우암동 소막마을
부산일보 기사 입력일 : 2018-03-07
글·사진=이준영 선임기자 gapi@busan.com
길잡이·자료제공=이성훈 선장
산업화가 외면한 도시의 역사 되밟는 길
변방은 말 뜻대로 중심과 동떨어져 있다.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미처 그에 못 따라가는 게 변두리 신세다. 심지어 중심의 변화로 생긴 배출물을 고스란히 안아야 하는 처지가 되기도 한다. 언젠가 쓸모가 생기면, 그곳에 또 수고로움을 안기는 것도 도시의 못된 속성이다. 이익 추구란 비수를 등 뒤에 감춘 채 주거시설 개선이란 명분을 내걸며 불도저 날을 주저 없이 들이댄다. 수려한 바다와 화려한 빌딩과 충만한 문화를 자랑한다는 부산도 예외가 아니다. 해양수도란 명성을 얻을 때까지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던 지역에 또다시 고된 역할을 맡기는 경우가 어찌 없을까.
부산 남구 우암동(牛岩洞)의 현재와 과거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이런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 오른다. 그곳은 일제강점기 때 한국 소들의 반출지였고, 그 소막사가 해방 후 귀향자와 한국전쟁 피란민들의 삶터가 된 지역이다. 이들은 이후 우암동 일대에 들어선 여러 공장에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 세월도 오래가지 않았다. 산업구조 재편으로 공장과 사람이 밀려났고, 쓸쓸한 공기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곳에 다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이름하여 재개발 열풍. 지금의 모습이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해방 귀향자·전쟁 피란민의 터전
얽힌 미로엔 소막사 형태 가옥들
옛 모습 지워나가는 재개발 바람
주민들과 고락 함께한 동항성당
부산진시장으로 향하는 장고개
도시화에 밀려난 삶의 흔적만…
그래서 이번 도시 항해는 기억을 각인하는 작업이다. 잊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이전의 도시 항해와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이렇게라도 종적을 남겨놔야 훗날 항해의 좌표가 되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역사를 기록하고, 공부하는 이유이니까. 이성훈 선장이 뱃고동을 울린다.
■리우데자네이루를 찾아서
우암동에 이런 풍문이 돈다. 리우데자네이루 풍경을 볼 수 있다는. 당장 눈 앞에 펼쳐지는 건 가득한 컨테이너와 크레인, 그리고 군데군데 쓰러져 가는 가옥들이다. 이런 곳에서 세계 3대 미항의 경치를 과연 찾아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밀려온다. 마술을 부리는 카메라의 재주일지 모른다는 추측도 해본다. 피사체의 크기와 색상, 채도, 명도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기에 대상을 더 매력 있게 잡아내는 게 사진기 속성이므로.
이런 기대와 의문을 마음에 담고 길을 잡는다. 남부중앙새마을금고 정류장이 출발점이다. 길 너머 새마을금고와 우암2동 우편취급국 건물이 매립 전에 있었던 옛 적기 뱃머리 자리다. 일제강점기 때는 새마을금고 건물 뒤쪽에 우역검역소와 소막사들이 있었다. 거기에 있던 조선 소들이 여기서 배에 실려 일본으로 반출됐다. 해방 이후에는 부산시청(현 롯데백화점)까지 '편리사'라는 통통배가 다녔다. 출퇴근이나 볼일 보러 오가는 우암동 주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이 일대는 적기(赤崎·아까사끼)로 불렸다. 나이 지긋한 이들 중에 지금도 이곳을 그렇게 부른다. 이 지명에 대한 설명은 두 갈래이다. 붉은 산이 있는 우암동의 지질 상 특징에 따른 것이라는 설이 있다. 오랑캐를 물리친다는 뜻의 이 일대 지명인 '감만(戡蠻)'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싫어 일제가 의도적으로 적기라는 지명을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1930년대에 우암로 앞쪽이 매립되면서 적기 뱃머리가 사라졌다. 매립지에 부두와 컨테이너 장치장이 들어섰다.
마을을 바라보는 방향에서 오른쪽으로 발길을 내디딘다. 길가에 낡고, 먼지투성이인 술집 간판이 하나둘 버티고 있다. 호경기로 손님들이 넘쳐났던 시절의 영화는 오간 데 없다. 이곳에도 사람 어깨를 부딪치지 않고 길을 걸을 수 없었던 시기가 있었다. 1960~1970년대에 성창목재와 제분공장, 양말공장 등이 번창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이다. 사람과 돈이 돌고 도는 세상, 술집도 어찌 흥청망청하지 않았으리.
SK 명성주유소를 지나자 산 쪽 도로를 만난다. 거기에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이는 길이 우암로 200번길이다. 우암동 새 시장이다. 아니, 우암동 새 시장이었다고 과거형을 써야 하나. 인구가 급증하던 시절, 기존 우암시장에 과부하가 걸리자 새로 조성된 시장통이다. 그러나 지금은 썰렁하다. 과연 시장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양달마을 행복센터는 우암동의 유일한 영화관이던 동원극장 터였다. 인구도 줄고, 멀티플렉스 광풍도 부니 영화관 운영이 제대로 될 리가 만무했을 것이다. 그만큼 쇠락의 속도와 범위는 빠르고도 넓었다. 노동자와 주민에게 현실의 아픔을 잠시라도 잊게 했던 영화관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행복센터가 이름 그대로 주민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도로 폭이 꽤 넓은 우암양달로로 올라선다. 군데군데 지붕이 무너진 가옥들이 우암동 쇠퇴를 다시 한번 보여준다.
■소막사 지붕 모습이 그대로
동항성당(東港聖堂)이 우측 산 쪽으로 어깨를 드러낸다. 우암동 주민과 고락을 같이 한 성당이다. 한국전쟁 이후 지역 빈민 사업과 사회 복지 사업에 큰 역할을 했다. 지역 사회의 빛과 소금이었다. 1959년 3대 본당 신부로 부임한 독일인 하 안토니오 신부는 '판자촌 성자'로 불린다. 사재를 털어 빈민을 구제하고, 전쟁고아를 돌보고 가르치는 등 교육 사업에 헌신하며 일생을 보낸 인물이다. 그가 당시 촬영한 사진들은 여러 전시회에서 '시간 속에서 걸어 나온 우암동 사람들을 '이란 평가를 받았다. 신부는 지난해 95세로 선종했다.
동항성당 정문을 나와 정문 뒤편 '우암동 도시 숲'으로 방향을 잡는다. 그 길로 올라가면 동항성당 옥상에 있는 예수상이 보인다. 멀리 보이는 부산항대교를 품에 안은 듯한 모습이다. 낯익은 광경이다. 그렇다, 찾았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항구를 내려다보는 예수상과 모습이 비슷하다. 코르코바도 언덕의 그것과 비교해 크기는 작지만, 포근함은 그에 못지않다. 우암동 주민들에게 동항성당이란 존재의 크기가 그렇다. 아쉬운 건, 이 멋진 조망 포인트가 거미줄 같은 전깃줄에 가려있다는 점이다.
감동과 아쉬움을 뒤로 하고, 소막마을로 향한다. 출발점이었던 새마을금고 뒤쪽 동네다. 우암동은 그 이름처럼 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는 우역검역소와 소막사들이 있었고, 한국전쟁 때는 소막사가 피란민들의 수용소로 변했다. 이후 이들은 그곳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소막사가 삶의 터전이 된 것이다. 소막마을은 출발지인 남부중앙새마을금고 뒤쪽과 장고개길 왼쪽, 아신아파트 아래쪽에 형성돼 있다. 검역소는 현재 아신아파트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적으로 우사 40곳에 19개 건물이 배치돼 있었다고 한다. 소막 하나의 크기는 폭 5칸(약 9m), 길이 15칸(약 27m)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막마을 골목길로 들어선다. 한 번 들어가면 되돌아 나오기 어려울 정도의 실핏줄 같은 미로가 이어진다. 소막마을을 양분하는 우암번영로를 제외하곤 모두 좁은 길이다. 이성훈 선장과 공경식 피란자산해설사가 지도를 펴놓고 위치를 가늠한다. 소막 형태가 그대로 남은 집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어떤 집은 지붕의 반쪽만 소막사 형태다. 지붕 일부만 소막사 흔적이 남아 있는 가옥도 보인다.
무허가이다 보니 전면적인 개보수를 하지 못하고 조금씩 고치다 보니 그런 모양새가 된 것이다. 그 가운데 전면은 일본식 가옥이고, 지붕은 소막사 형태인 한 곳이 '소막사 주택 기념관'으로 조성될 계획이다. 골목길 안에는 옛 우물터가 있다. 골목 분위기를 밝게 하려고 칠한 노랑 페인트가 정겹다. 아직도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은 탓에 좁은 골목길에서 오토바이를 운전하느라 곤욕을 치르는 가스 배달부가 안쓰럽다.
■누굴 위한 재개발인지
옛 검역소가 있었다는 아신아파트 뒤편 동항로에 우암동 쌈지 도서관이 있다. 우암2동 파출소가 있던 자리다. 우암동 인구 격감으로 파출소 통폐합이 이뤄지면서 도서관으로 변모했다. 공장들이 폐업하거나 외지로 이전하면서 지역 경제가 계속 침체 상황이다. 젊은이들이 많이 빠져나가면서 고령화 현상도 심각하다. 이런 상태에서 부는 재개발 바람 속에서 오갈 데 없어진 노인들의 신음이 떠다닌다. 경제력과 활동력이 부족한 그들이 보상비로 부산 어디에서 삶터를 마련할 것인가. 그 고통이 도시 항해 중 만난 여러 사람의 입을 통해 들려 온다.
그들이 젊은 시절에 신발이 닳도록 다녔을 장고개를 넘는다. 우암동 쪽에서 문현동 쪽으로 넘어가는 언덕이다. '장을 보러 갈 때 넘는 고개'라는 뜻으로 장고개라는 이름이 붙였다. 장바구니와 보따리를 이고 지고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며 고개 너머 부산진시장으로 향하던 우암동, 감만동 사람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직선으로 새로 닦인 장고개길을 피해 옛길을 걷는다. 그 도중에 있는 우암동 주민체력단련장 마당에 '수출소 검역소 옛터 표시석이 있다. 국립수의과학검역원 100주년을 기념해 세운 것이다. 원래 위치와는 동떨어져 있지만, 기록적 가치가 있어 보인다.
남구 문현동 경계 지점인 상경전원아파트 앞이 장고개 마루다. 그곳을 넘어 서니 문현동이다. 길 끝자락에 있는 문현동 곱창거리를 지나면 큰길이다. 우측으로 350m 정도 걸으면 도시철도 2호선 지겟골역 3번 출구가 나온다.
우암동에서 맛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내호냉면(051-646-6195)이다. 'since 1919' 표시가 뚜렷하다. 부산 밀면의 원조로 자부하는 곳이다. 문현동 곱창거리의 칠성식당(051-632-0749)은 영화 친구의 촬영 장소로 유명하다. 지금도 간판에 영화 포스터가 그려져 있다. 같은 곱창거리에 있는 백년 전통곱창(051-633-6847)과 원조양산곱창(051-635-1571)도 탐식가들로부터 호평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이 일대에 가축시장이 있었다. 가난한 시절, 도축장에서 나오는 고기와 부산물을 재료로 하는 음식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곱창이었다.
부산 우암동 소막마을 위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