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원 몽심재(南原 夢心齋)
남원 몽심재
중요민속자료 제149호
전라북도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796-3
남원의 몽심재(夢心齋)는 조선 후기 전북 지방 상류 가정의 전형적인 가옥 형태를 잘 보전하고 있는 가옥이다. 남원에서 19번 도로를 따라 구례 방면으로 가다가 다시 60번 도로로 접어들어 낮은 고개 하나를 넘으면 저수지를 따라 잘 생긴 소나무들이 늘어선 호곡마을이 보인다. 이 마을 안쪽에 몽심재가 있다. 몽심재는 잿들에서 흘러내린 물이 집 앞을 둥글게 감싸 안고 흐르는 지점에 있으며, 숙종 20년(1700)에 박동식(朴東式, 1753~1830)이 산 아래의 따뜻한 터를 잡아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이 가옥이 위치한 터는 풍수지리학적으로 호랑이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데, 앞의 안산은 호랑이의 꼬리 형상을, 즉 좌청룡을 대신하고 있다. 집 뒤로 보이는 산은 아미산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는 초승달 형태로써 여자 후손에게 복이 많을 형상이라 한다. 그런 이유인지는 모르나 이 마을은 집안마다 여자들이 훌륭한 분이 많다는 이야기를 마을 어른들이 전해 주었다.
이 가옥은 사랑마당이 작은 대신에 대문 앞에 넓은 마당을 두고 있다. 대문은 솟을대문이며, 토석 담장이 대문 문설주에서 약간 옆으로부터 이어져 나오다가 둥글게 담장을 돌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막다른 고샅 같은 느낌이 드는 형태다. 대문은 상방을 격자로 상하 구획하여 장식하고 앞쪽 벽선에 맞추어 문을 달았다. 대문에 들어서면 산을 오르는 것 같이 자연스럽게 형성된 언덕 위로 사랑채와 안채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우측으로 행랑 마루 옆에 커다란 바위와 함께 넓은 사랑마당이 보이고, 행랑 누마루 앞쪽으로 안채와 사랑채에서 빗물을 모아 연지를 만들었다. 이 가옥은 경사진 지형을 이용한 가옥으로 사랑채와 옆에 붙은 중문채가 높은 축대 위에 올라 앉아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ㄷ’자형의 안채를 중심으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단을 낮추어 ‘一’자형의 사랑채가 있으며, 서쪽 중문채에 고방과 광을 두었다.
솟을대문의 문간채 서쪽에는 한 칸의 곳간을, 동쪽에는 한 칸의 온돌방을 두었다. 온돌방 앞에는 마루가 놓였는데, 계자난간을 갖추었으며 삼면을 벽 없이 개방적으로 만들어 나즈막한 누마루에서 연못과 뒷산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주인이 아래 사람의 거처에 내려준 특별한 배려이며 선물이다.
연지 주위에는 여러 나무들이 심어져 있는데, 여름에는 빨간 배롱나무 꽃이 운치를 더해준다. 사랑채 앞마당 중간에서는 이 집만의 특별한 모습으로 원래부터 거기 있었다는 3m 가량의 커다란 화강암 바위를 볼 수 있다. 집 안에 이처럼 큰 바위가 있으면 범상치 않은 인물이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 가옥의 바위에는 ‘주일암(主一岩)’, ‘존심대(存心臺)’, ‘청와(淸窩)’와 같은 글자들이 새겨져 있어 이 집안의 선조들도 이 바위의 존재를 특별하게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사랑채는 넓은 사랑마당과 높은 축대 위에 자리하고 있다. 지형의 경사를 이용하여 다듬은 자연석을 6벌대로 막돌허튼층쌓기로 쌓고, 그 위에 다시 단을 두어 화계를 만들고 난과 기암괴석을 이용하여 석가산을 만들어 놓았다. 사랑채는 정면 다섯 칸, 측면 두 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며 덤벙 주춧돌 위에 전면의 기둥을 팔각주로 세워 집의 품격을 높이고 있다. 서쪽으로는 한 칸의 계자난간을 두른 누마루를 꾸미고 나머지 세 칸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몽심재의 사랑채는 세 칸의 툇마루 가운데 두 칸에 쪽마루를 덧대어 마루를 실용적으로 확대한 특징을 보여준다.
여기에 동편의 한 칸에는 쪽마루 대신 긴 통나무를 대강 면치기하여 나무 발판을 만들어 마루로 올라가도록 꾸미고 있다. 자연스럽게 처리된 디딤판에서 나무를 이용해 다양한 기능을 선보이는 우리 전통 건축의 묘미의 한 부분을 느낄 수 있다. 또 다른 특징의 하나로 사랑채의 기둥은 민가에서 보기 드문 팔각형이며 정교하게 다듬었다. 일반 주거용 가옥에서는 보기 드문 예로, 매우 격 있는 건물을 지으려는 집 주인의 정성이 느껴진다. 아울러 디딤판 옆의 굴뚝도 부끄럽게 숨어 있는 형태로 매우 흥미로운 모습으로 서 있다.
사랑채의 공간 구성을 보면, 가운데 세 칸은 머름대를 대고 청판을 끼운 문틀 위에 2분합 띠살무늬 덧문을 꾸미고, 섬돌이 있는 오른편에는 머름대가 없이 이분합 덧문을 단 정면 한 칸에 측면 두 칸의 대청을 두었다. 그리고 누마루에는 전면 한 칸, 측면 두 칸 크기의 온돌방을 두고, 온돌방 서쪽으로 중간에 외닫이 띠살무늬 창문을 달아 밖을 내다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누마루는 툇마루보다 단을 높여 우물마루판을 대고 그 아래에는 아궁이를 두었다. 불을 때는 아궁이는 뒤편으로 서쪽에서 두 번째 칸을 들여 아궁이를 꾸미고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대청마루 2분합문 옆 벽의 여백 아래쪽에 판재로 만든 눈꼽재기 창이 꾸며져 있다는 점이다.
이 매우 독특한 형태의 창으로 실용적인 표현의 아름다움으로 관찰하면 좋을 것 같다. 사랑마루의 벽기둥에는 이 집의 당호인 몽심재의 뜻을 이해 할 수 있는 시구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주련에서 〈동류안원량몽洞柳眼元亮夢〉은 “마을을 등지고 늘어서 있는 버드나무는 도연명이 꿈꾸고 있는 듯 하다”는 말이다. 〈등산미백이심登山嶶伯夷心〉은 “산에 오르니 고사리는 백이숙제의 마음을 토하는 것 같다”는 말이다. 고려시대의 충신 송암 박문수가 정몽주에게 충절을 다지며 보낸 시를 생각해 보면서 사랑채의 아름다운 멋을 느낄 수 있다. 이 뜻을 “몽심재”라는 당호로 삼았고 이를 주련으로 풀어서 표현하는 모습에서 이 집을 지키는 주인의 심성을 느낄 수 있는 매우 인상적인 모습이다.
기둥머리는 툇보 아래에 보아지를 대고, 보아지는 전면으로는 보와 같은 길이로 직절하고 안쪽으로는 45도 정도로 사절된 나무로 받치어 놓았다. 전면 도리 아래는 장여와 창방 사이에 소로를 받쳐 공포 없는 민도리집의 장엄한 분위기를 표현하고 있다. 사랑마루에 앉아 앞을 보면 안산이 아닌 둥근 산마루가 앞을 병풍처럼 감싸 안은 듯하고, 그 언덕에는 오래된 노송들의 송림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사랑채 동쪽에는 세 칸의 중문채가 사랑채의 기단보다 한 단 낮게 위치하고 있다. 통상 대문이라 함은 공간의 구획인데, 여기 몽심재에서는 대문 옆에 담장을 두지 않아 중문은 그저 형식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의 문으로 서 있다.
단순하지만 둥근 곡선의 자연석 표현이 아름다운 중문앞 중문채를 지나면 안채다. 안채에는 ‘ㄷ’자형으로 정침과 광채, 그리고 헛간이 배치되어 있다. 부속채는 모두 서쪽에 배치되어 있는데, 동쪽에는 죽산박씨 종가댁 담장이 가까이에 있어 건물의 확대는 서쪽으로만 가능한 지형이었던 것 같다. 안채 뒤로는 3벌대의 축대 위에 넓은 텃밭이 있으며, 부엌 쪽으로는 자갈을 이용하여 축대를 만든 장독대에 다양한 크기의 옹기들이 모여 있다.
중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건넌방 측면에 있는 굴뚝이 먼저 보이고, 조금 더 들어가면 좌측으로 안채가 빼꼼히 보인다. 중문채와 안마당은 2단 높이의 단 차이를 두고 있는데, 이곳에 올라서면 안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마당의 가운데로 나서면 안마당 끝자락 중앙에 계단이 있다. 이 계단 옆으로 기단 위에 커다랗고 잘 생긴 돌확이 있어 매우 흥미로운데, 이 돌확은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는 장소로, 청결을 유지하도록 한 배려를 엿볼 수 있다.
안채는 둥근 강돌을 이용하여 쌓은 2벌대 기단 위에 덤벙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네모난 방형 기둥을 세웠다. 세 칸의 안채는 방과 대청을 중심으로 툇마루를 두고, 서쪽으로 한 칸의 온돌방을 두었으며, 모서리에 두 칸의 부엌이 있는 형태다. 부엌 안쪽 깊숙이 아궁이를 만들었는데, 그 위로 특이하게 부엌방이 한 칸 더 있다. 날개채 쪽으로도 한 칸의 온돌방과 방에 딸린 부엌이 있다. 서쪽 날개의 부엌 부분에는 따로 대청마루를 두어 부엌에서 이루어지는 가사활동을 마루에서 할 수 있도록 편리하게 구성했다. 그리고 동쪽 날개채 쪽으로는 마루로 꾸민 고방과 건넌방을 이어 놓고 부엌을 방 옆에 두었다. 부엌 위에는 다락을 두었는데, 부엌 문 위로는 광창을 두고 남쪽으로는 외닫이 띠살문을 달아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 눈에 띈다. 건넌방에 기거하는 자녀들이 높은 곳에서 밖의 경치를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도 이 집의 특징이다. 이러한 모습은 전라남도 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특색이다. 구례에 있는 운조루에서도 다락에 마루를 매달아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몽심재 안채의 안방과 부엌
안채의 중심 칸은 남부지방에서나 있을 법한 넓은 우물마루 대청이 건넌방을 북쪽으로 감싸 안고 있는 형태이며, 대청 앞쪽에는 분합문을 설치하였다. 또 분합문 밖의 툇마루 앞에도 마루널을 반 칸 정도 덧대어 건넌방에 기거하는 자녀들에게 넓은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다. 이 집 주인의 자녀에 대한 특별한 배려가 돋보이는 장면이다.
호곡리는 죽산박씨 씨족마을로, 크고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당연히 종가도 이 마을에 있으며, 몽심재와 담을 같이 한 집이 바로 그 집이다. ‘삼강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솟을대문 좌우로 효자비가 세워져 있다. 삼문에 들어서면 약간 언덕진 경사면에 아름답게 가꾼 정원이 나타나고, 그 뒤로 막돌허튼층쌓기 한 기단 위에 팔작지붕의 사랑채가 자리하고 있다. 이 사랑채는 툇마루와 대청마루 앞의 기둥이 모두 둥근기둥이며, 일반적인 두 칸의 기둥 간격 사이사이에 한 개씩 기둥을 더 세워 매우 장중하게 느껴진다. 반면에 둥근기둥 사이의 간격이 너무 좁아 기둥이 두껍게 느껴지고 약간 답답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서쪽에 있는 두 칸의 온돌방은 일반적인 가옥의 기둥 간격을 유지하고 있어 답답한 느낌은 없다. 대청마루에 앉아서 앞을 바라보면 멀리 지리산 자락이 보이고, 몽심재 앞을 푸른 송림이 병풍 같이 집을 감싸 안고 있는 주변 풍경은 선비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공간이었을 것이다.
팔작지붕의 죽산박씨 종가댁 사랑채
안채는 몽심재와 형태가 비슷하며 크기도 비슷하다. 진입 방법도 대문에 들어서서 사랑채 오른편으로 돌아 올라가는 형식은 같다. 그러나 이 집에는 현재 중문채가 보이지 않고 동편 언덕 가장 높은 담장 아래 사당을 배치하고 있다. 대문에서 좌측으로 돌아보면, 안채의 정침은 ‘ㄷ’자 평면으로 되어 있다. 안채의 전열 외 진주기둥은 건물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비교적 굵은 둥근기둥을 사용하고 있어 어색하지만, 종가집의 위상을 표현하기에는 손색이 없다. 아울러 기둥 상부에 매달아 놓은 선반의 소반이나 채, 많은 광주리 등을 보면서 제사와 같은 행사가 많은 종가집의 분위기도 읽을 수 있다. 특히 부엌 위의 다락방에서 남쪽으로 창문과 난간을 만들어 놓은 모습은 몽심재와 같은 모습이다.
이 가옥의 동쪽 양지바른 곳에 송암 박문수 선생을 불천위로 모시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사당은 둥근기둥에 솟을삼문의 형태이며, 가운데 칸에 박문수 선생을 나타내는 ‘충현공부조묘’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막새기와와 단청을 하여 매우 화려하게 꾸몄다. 정면 세 칸에 측면 한 칸의 크기이며, 전면 반 칸을 퇴로 사용하고 있다. 원기둥의 상부에는 창방을 걸고 익공집에 사찰에서처럼 화려한 단청을 하였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에 겹처마로 꾸몄다. 여기 모셔진 박문수 선생은 고려 말의 충신이자 포은 정몽주 선생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고려의 국운이 다하자 태조 이성계가 회유 함에도 불구하고 ‘충신은 불사이군’이라며 만수산 두문동에 칩거하면서 쑥과 고사리만을 먹으며 충의를 지키던 선생의 위패를 여기 모시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