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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 게시판 스크랩 임방울 -「춘향가」 중 <옥중가(獄中歌)> 쑥대머리
입면이당 추천 0 조회 89 11.06.14 19:00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임방울 -「춘향가」 중 <옥중가(獄中歌)> 쑥대머리 

 
 

<판소리계 최고의 로맨티스트 임방울 명창(1904년~1961년)>

 

 

임방울 명창은 을사보호 늑약을 맺기 1년 전인 1904년에,

전남 광산군 송정리 도산동 수성마을에서 아버지 임경학씨와

어머니 김나주씨의 팔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은 예술가 집안이었고, 본 이름은 승근인데

방울 같은 소리를 내며 크라고 방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그는 어릴 때 외삼촌이자 국창이라 불리던
서편제의 김창환 명창에게

기초를 닦았고, 자라면서 여러 명창들에게 배운 뒤, 15세 무렵에는

동편제의 유성준 명창에게 소리공부를 했습니다.


유성준 명창은 성질이 급하고 괴퍅해서 어린 임방울은

기다란 담뱃대로 머리통을 수도 없이 얻어 맞았다고 합니다.

같이 공부하던 여자애들을 맨발로 북 위에 한 시간씩 세워두기도 했다니,

제가 연기했던 「서편제」의 유봉보다 더 지독한 선생님이었나 봅니다.


임방울은 목소리가 맑고 청아하면서도 슬픈 느낌을 주고,

고음과 저음이 시원시원하게 터져나오고, 어떠한 경우에도

목이 쉬지 않을 정도로 좋은 성대를 타고 났습니다.


그런데 변성기를 맞아 소리가 마음대로 나오지 않자

골방에 틀어박혀 문을 걸어 잠그고 연습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이 무렵의 임방울 명창에 대한 전설같은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그가 무덤가에서 하루종일 소리공부를 하는데 원하는 소리가

죽어도 안나오자 "마마(천연두)에 걸리면 목이 트인다는데

마마나 걸려라!" 하고 소원을 빌었더니 과연 천연두에 걸려서

소리가 트이고, 그 대신 얼굴이 얽었다는 것입니다.

이 얘기는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이처럼 소리 공부에 전력을 기울인 뒤,

그는 대명창이 되겠다는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가 스물을 갓 넘은 1925년 9월,

'조선명창연주회'가 매일신보사 주최로 열렸습니다.

명창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관객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습니다.

먼저 그의 외삼촌인 김창환 명창과 당대 최고의 명창인 송만갑 명창,

이동백 명창, 정정렬 명창들이 특별출연으로 무대에 올라 소리를 했습니다.

그뒤를 이어 무릎 위로 올라간 짧은 검정 두루마기를 입고, 땅딸막한 키에,

약간 얽은 데다가 별로 잘생기지 않은 얼굴의 임방울이 무대에 나타났습니다.

 

초라한 행색의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하여 판소리

「춘향가」 중 <옥중가(獄中歌)>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노래는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다 곤장을 맞고 옥에 갇힌 춘향이가

한양으로 떠나 간 이몽룡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목에 칼을 쓰고 산발한 머리가 마치 쑥대처럼 생겼고,

얼굴은 창백하게 귀신처럼 생겼다고  해서

'쑥대머리 귀신형용'이란 충격적인 가사로 노래를 시작합니다.



이처럼 참혹한 지경에서도 일편단심 사랑하는 님을 간절하게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이 너무도 절실하게 묘사된 명곡입니다.

 

오페라로 치면 <남 몰래 흐르는 눈물>이나

<공주는 잠 못 이루고>와 같은 대표적인 아리아인 것입니다.



뱃속에서 바로 소리를 뽑아서 내는 통성에

약간 쉰듯 칼칼하게 터져나오는 수리성을 섞어,

춘향이의 비통처절한 심정을 애절하게 토해내는

임방울의 판소리는 단박에 청중을 휘어잡았습니다.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춘향이의 심정이
절망적인 시대의

정서와 어울어지면서 관객들을 열광의 도가니에 빠뜨렸습니다.

이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이 된 <쑥대머리>인 것입니다.

 

 

그 공연 이후 임방울은 하루 아침에 명창의 반열에 올랐고, 콜럼비아 레코드나

빅터 레코드나 OK 레코드와 같은 유명 음반사가 앞다투어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의 출세작 <쑥대머리>가 실린 음반은

한반도와 만주와 일본까지 불티나게 팔려나가,

각 음반사마다 120만장이라는 경이적인 판매기록을 세웠습니다.

 

그후 1930년 전국명창대회에서 장원의 영광을 차지한 임방울은

본격적인 소리꾼으로 나서서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공연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 즈음, 광주의 기관장들이
환영파티를 열어 준 '송학원'이라는 요릿집에서 운명의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임방울이 소년시절에 광주의 부잣집에서 고용살이를 했는데,
그 집에 동갑내기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습니다.
소녀와 소년은 철부지의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나 소녀의 부모가 반대하는 통에 소년은 그 집을 떠나야 했고,
소녀는 어느 부잣집 아들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그후 소녀의 결혼 생활은 실패로 끝났고,
광주에서 송학원이란 요릿집을 차리고 예명을 김산호주로 지은 소녀는
광주 유지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여주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날, 그 자리에서, 명창이 되어 돌아 온 임방울과
여주인 김산호주가 십여년도 훨씬 흐른 뒤에 해후를 한 겁니다.
 
그동안 서로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두 연인은 곧바로 불같은 사랑을 불태웠습니다.

임방울은 2년 간 송학원의 내실에 숨어 살며 세상과 담을 쌓고 지냈습니다.
 
세상에서는 임방울이 잠적했다는 소문이 무성했고, 전속계약을 한
OK 레코드 회사에서는 그의 행방을 찾느라 혈안이 되었습니다. 

미색이 빼어났던 김산호주는 천하명창 임방울을 2년 동안
송학원의 내실에 숨겨 놓은 채, 사랑의 포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임방울은 자신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토록 기름졌던 목소리가 탁해지고, 고음이 마음대로 나오지 않고,
소리를 조금만 질러도 땀이 뻘뻘 나는 것이었습니다.


대경실색한 그는 어느 날,
산호주에게 알리지도 않은 채 지리산으로 떠나 종적을 감추었습니다.
그는 지리산 토굴에 숨어 살며 소리공부에 매달렸습니다.


임방울의 행방을 알지 못한 채,
미칠듯한 그리움과 슬픔에 빠진 산호주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습니다.
천지사방을  수소문한 끝에 간신히 임방울의 행방을 알아 낸 산호주는
임방울이 소리공부를 하는 토굴 앞에서 만나기를 간청했습니다.
 
그러나 임방울은 끝내 그녀를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깊은 절망에 빠져 집으로 돌아 온 산호주는 임방울을 애타게 그리다가 병이 깊어져,
마침내 30세도 안된 꽃 다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산호주의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온 임방울은 죽어가는 애인을 가슴에 껴안고
슬피 울며 즉석에서 자신의 비통한 마음을 노래로 만들어 불렀습니다. .  
 
-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 -

 

 1959년 7월 17일 조선일보 후원으로 원각사(圓覺寺)에서

국창임방울 독창회가 열렸다 그는 몸이 쇠약 했으나

소리를 하고 싶은 의지와 집념으로 계속 공연을 했다.

 

주위 동료들이나 후배들이 좀 쉬면서 건강을 회복하라고 충고하면

 "소리하는 사람이 소리를 안 하면 죽은 목숨인 거여! 그래 나보고

산송장이 되란 말여! 소리를 하다가 콱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소리를 계속 헐 테여" 하면서 되려 나무랬다.

 

그해 가을 임방울은 쇠약해진 몸을 이끌고 주위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김제 공연에 나섰다. 그는 소리를 하다가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결국 전북 김제의 장터에서 소리를 하다가 피를 흘리고 쓰러졌다.

그 길로 서울 초동 집으로 옮겨졌으며 6개월 후인 1961년 3월 7일 밤

끝내 일어나지 못한 채 57세를 일기로 임방울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국 판소리계의 마지막 대들보가 무너진 것이다.

장례식날 2백여명의 여류 명창들과 기생들이 소복을 입고 상두꾼이 되었다.

  

소복을 한 상두꾼들이 상여를 메고 지날 때 서민들은 서민의 목소리

국창 임방울을 잃은 슬픔에 잠겼다. 김소희씨의 목멘 조장이 한결 애끓게 했다.

 

그것은 소리광대의 슬픈 운명의 종장이었다.

앞선 트럭에서는 삼현육각(三絃六角)을 잡히고 그 뒤를 이어

소복의 여인들이 끄는 꽃상여는 우리나라 마지막의 소리광대를 싣고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다. 57세를 일기로 61년 봄 임방울은 망우리 공동묘지에

다시는 들을 수 없는 아름다운 한(恨)의 소리와 함께 묻힌 것이다.

(현재 그 묘지는 여주 남한강 사설공원 묘지에 이장되어 있다.)

 

그의 유산이라고는 데뷔당시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쑥대머리, 함평천지,

빅터 레코드사에서 이중선, 김소희 등과 함께 취입한 춘향전

그리고 해방 후에 취입한 몇몇 음반이 전부였다.

 

그가 죽었을 때 미국인 알란 헤이만 씨는

신문에 국보를 잃은 큰 손실이라는 제목 하에 임방울씨의 죽음은

한국에게만 슬픈 손실이 되는 것은 아니고 전 세계의 크나큰 손실이며

그와 더불어 한국문화의 위대한 일부도 갔다고 썼다.

 

임방울은 어린 딸이 관속에 넣어준 낡은 음반 한 장만을 가지고 갔다...

 

쑥대머리의 줄거리

 

남원 고을 월매의 딸인 춘향과 이 사또의 아들 몽룡은

단오날 광한루에서 만나 백년가약을 맺는다.

 

그리고 몽룡은 과거시험을 위해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떠나게 되고

춘향과 과거 급제 후에 다시 만날 것을 굳게 약속한다.

 

남원 고을에 새로 부임한 신관 사또 변학도는

춘향이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을 듣고 수청을 들라고 한다.

 

그러나 춘향은 이미 몽룡과 백년가약을 맺었음을 고하며 수청을
거절한다. 이에 분노한 변사또는 춘향을 하옥시켜 강제로 굴복시키려 한다.

 

갖은 고초를 견디며 몽룡이 과거에 급제하여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춘향.

마침내 과거에 급제한 몽룡이 변학도의 생일 잔치에 나타나고

변학도가 춘향을 처형하려는 순간 몽룡은 암행어사로 출두하게 되는데...  

 

“오리정 이별후로 일장서(一長書)를 내가 못봤으니“

(춘향과 이몽령이 헤어진 장소가 남원의 오리정이라 하는

정자였으며 장문의 연애편지를 일장서라고 함)

 

"여인신혼 금실우지"(與人新婚 琴實友之) 나를잊고 이렇던가?

(나 말고 다른 상대를 만나 금실이 좋아서 나를 잊어버렸나)

 

"계궁항아 추월같이"(桂宮姮娥 秋月) 번듯이 솟아서 비취고져

 

(산중턱에 계수나무로 지은 정자에 앉아 건너편 산에서 솟아오른

가을달은 유난히도 뻔듯이 솟아 자신의 자태를 비추게 되면

조명을 받듯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양에 있는 이몽룡이 창문에

비춰주고 싶은 춘향의 상상속에서 나온 글이 아닌가 생각되는

옥중에 있는 처지에도 예쁘게 보이고 싶은 춘향의 심정..

 

목칼차고 헝클어진 쑥대머리를 하고 있을 지언정 사랑하는 님에게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여인들의 본성을 표현.)

 

"막왕막래(幕往幕來) 막혔으니 앵무서"(鸚舞書)를 내가 어히보며

 

(오도가도 못하고 길이 막혔으니 "앵무서"(연서, 러브레터)는 어찌 보며)

 

"전전반측(轉輾反側) 잠 못 이루니 호접몽(蝴接夢)을 어이 꿀 수 있나"

 

(잠이 오질 않아 누워서 이리 뒤축 저리 뒤축 몸을 돌리는 행위를

전전반측이라하며 꽃과 나비가 만나는 꿈을 호접몽이라함)

 

다음 가사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간장에 썩은 눈물로 님의 畵象(화상)을 그려볼까”?

 

애간장이 얼마나 녹았으면 눈물이 새커멓게 나올까요?

그 새커먼 눈물로 낭군님의 얼굴을 그리고 싶다고 했으니..,

 

"이화일지 춘대우(梨花一地春玳雨)에 내눈물을 뿌렸으면"

 

(봄비맞고 떨어지는 배꽃과 함께 춘향의 눈물도

함께 뿌리고 싶다는뜻 한양도 배꽃은 있을터이니)

 

"추우 오동 엽락시(秋雨梧桐 葉落時) 잎만 떨어져도 님의 생각"

 

(가을비 맞고 떨어지는 오동잎만 봐도 그대생각)

 

"녹수부용(綠水芙蓉) 연캐는 채련녀와

제롱망채엽의 뽕따는 여인들도 낭군생각은 일반이지"

 

(연못가 나무 그림자 밑에서 採連女(채련녀)연캐는 여인들과

採籠忘採葉(채롱망채엽, 뽕담는 뽕 바구니) 뽕따는 여인들도

남녀 사이의 사랑과 그리움은 양반 상놈이 따로 없이

사랑의 감정은 같을거란 생각이 들어 나온 대목)

 

춘향가」중 <옥중가(獄中歌)>

               쑥대머리 /국창 임방울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의 찬자리에
생각난 것이 임뿐이라
..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낭군 보고지고
오리정 정별후로 일장서를 내가 못봤으니
부모봉양 글 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이러난가
여인신혼 금슬우지 나를 잊고 이러난가
계궁항아 추월같이 번뜻 솟아서 비치고저


막왕막래 막혔으니, 앵무서를 내가 어이 보며
전전반측의 잠못 이루니 호접몽을 어이 꿀수 있나
손가락으 피를 내여 사정으로 편지헐까
간장의 썩은 눈물로 님의 화상을 그려볼까


녹수부용으 연캐는 채련녀와 제룡망채엽의
뽕따는 여인네도 낭군 생각은 일반이라
옥문밖을 못나가니 뽕을 따고 연 캐겄나
내가 만일으 임을 못보고 옥중원혼이 되거드면
   
무덤 근처 있는 돌은 망부석이 될것이요
무덤 앞으 섯는  남귀는 상사목이 될것이요
생전사후 이 원통을 알아줄이가 뉘 있드란 말이냐,
아무도 모르게 울음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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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06.15 12:26

    첫댓글 쑥대머리 구신형용.....
    보고지고 보고지고.....

    사랑은 그토록 어려운 곳으로 흐르는 강인가요?

    오랫만에 듣는 창 한 대목, 오래 된 얼굴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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