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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방문 계획
롬 15:22-29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3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4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6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29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롬 15:22-29 / [바울의 로마 방문 계획] 이러한 이유로 나는 번번이 여러분을 방문하지 못하였습니다. 23) 그러나 이제는 여기서 해야 할 일도 끝나고 오랫동안 기다렸던 보람도 있어 곧 여러분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4) 지금 나는 서바나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그 도중에 로마에 들를 생각입니다. 그곳에서 잠시 여러분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에 여러분의 후원을 얻어 서바나로 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25) 그러나 지금은 우선 예루살렘에 있는 형제들에게 구제금을 전해 주러 가야 합니다. 26) 여러분이 아시는 대로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형제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예루살렘 형제들을 위해 헌금을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27) 그들은 평소부터 예루살렘의 형제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해 왔던 터라 이 일을 기쁜 마음으로 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루살렘 교회에서 전해 받아 그 놀라운 영적 복을 누렸으므로 다만 얼마라도 물질적인 도움을 주어 보답할 수 있었으면 하고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28) 그러므로 나는 이 헌금을 전해주어 그들의 선한 일을 이루어 주는 즉시로 여러분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려고 합니다. 29) 내가 여러분에게 갈 때는 주께서 주신 충만한 복을 함께 갖고 가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마지막 선교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에 있던 바울은 로마교회가 서바나의 선교 기지로서 그 역할을 감당해 주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여러 번 막혔더니(22-24) 바울은 로마에 가서 일하고 싶은 계획이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그래도 계속해서 로마행의 소망을 품어왔습니다. 이제 복음 전파에 대한 그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를 지나 서바나까지 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를 땅에 묻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고 싶은 열정입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곳에 가지 못해서, 복음을 꼭 들어야 할 사람을 만나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마음입니다.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25-27) 바울은 로마에 들러서 서바나로 가기 전에 예루살렘에 갈 계획을 밝힙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이방인 교회가 모은 헌금을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방인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에 영적인 빚을 진 마음으로 물질을 모았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하나로 묶어 주는 감동적인 수단이 되었을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섬기기 위해 준비된 마음입니다.
서바나로 가리라(28-29) 복음 전파에 대한 그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를 지나 서바나까지 향하고 있습니다. 서바나는 지금의 스페인으로 요나서에 나오는 다시스가 위치한 곳입니다. 시편에서 다시스는 땅 끝으로 묘사됩니다(시 72:8-10). 이사야서에서는 다시스를 하나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으로 언급됩니다(사 66:18-19). 바울은 서바나, 즉 다시스로 가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는 그곳이 세상의 끝이었기 때문입니다(행 1:8).
적용: 바울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려 했습니다. 이 사역은 바울 시대에 완성되지 않고 계속 이어져 우리의 사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역은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도울 수 있습니다.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길 수 있습니다. 넓은 자가 좁은 자를 안을 수 있습니다. 깊은 자가 얕은 자를 품을 수 있습니다. 사이즈와 힘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실과 체력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좋아진다는 것은 곧 믿음의 그릇이 커진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좋아져서 다른 사람을 안고 품을 수 있다면, 내가 받은 복으로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길 수 있다면 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 설 교 >
서바나를 향한 바울의 비전
로마서 15:20-29 / 김남수 목사
실패하는 사람은 늘 과거의 말을 합니다. 평범한 사람은 현재의 말을 합니다. 위대한 사람은 미래를 말합니다. 항상 과거에 묶여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현실에 묶여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미래를 바라보고 말하고 꿈꾸는 사람은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항상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그는 내일을 바라보고 꿈꾸며 마음에 비젼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는 서반아를 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당시의 서반아는 지금과는 다른 위치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스페인 - 그는 스페인을 늘 마음속에 바라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헬라어로는 이베리아라하고, 라틴어로 히스페니아, 영어로는 스페인이라고 하는, 우리말로 서반아라고 하는 서쪽, 유럽에서 맨 땅끝이라고 말하는 서쪽을 바라보고 항상 꿈꾸고 거기를 갈 꿈에 늘 불타 있었습니다. 스페인은 문명세계의 끝이었고, 구라파의 맨 마지막을 스페인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은 좀 다릅니다. 고린도 그리스에서 본다면 로마-그리스-스페인입니다. 그리고 영국, 구라파, 미국대륙이 있습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세계문화권의 중심이었고, 스페인이 그 끝이고, 그 넘어서 구라파는 해적떼들이 우글거리는 섬나라였을 뿐입니다. 스칸디나비아, 영국, 독일과 같은 번창한 문명국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 고린도에서 이 책을 쓰고 겐그리아에서 이 편지를 뵈뵈라고하는 집사님을 통해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부흥되고 열심있는 로마 교회에 이 편지를 전하면서 "내가 당신들을 서반아로 갈때에 당신들과 교제하고 약간의 유익을 받고 당신들의 후원을 받아서 저 서반아까지 선교를 가고 싶습니다"하고 개인적인 편지를 쓰게 되었던 내용입니다.
사실 15장 이전에는 교리와 실천이라고 하는 교리적인 문제와 교리를 받은 사람의 실천의 문제를 다 쓰고 난 다음에 15, 16장에는 거의 개인적인 마음 깊은 곳의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불타는 꿈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나누면서 서반아를 가고 싶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서바나를 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체포되고, 가이사랴 감옥에서 고생을 하다가 미결수로, 죄수로 로마로 후송되어 로마 감옥에서 억눌린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마침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서반아를 갈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고 주석가들은 분석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겨준 꿈을, 못다 이룬 꿈을, 그 후대에게 모든 사람들에게 남아 있는 서반아를 그 마음속에 품고 기도할 제목을 두고 그는 순교하고 세상을 떠났다는 생각을 할 때 서반아를 향한 사도바울의 비젼은 과연 어떤 것이며 어떤 의미를 주는가를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매일 매일 성령께서 선교의 꿈과 환상을 주십니다. 성령은 선교의 영이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증인이 됩니다. 선교는 성령이 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선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선교를 날마다 불타는 열정과 꿈을 매일같이 성령이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매일 주시는 성령의 은혜와 은사와 마음속에 불타는 환상을 무시하고 현실에 묶여서 사는 것입니다. 현실에 묶여 살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의 매일 주시는 환상에 대해서 무시하게 됩니다. 그러면 얘깃거리가 많아지고 할 일이 많아지고, 쓸데없는 시간에 비본질적인 것에 본질을 잃어버리고 비본질적인 것에 묶이게 됩니다.
사도바울은 바다를 건너 구라파의 맨끝이라고 하는 서반아로 가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매일 주시는 성령의 꿈이 매일같이 무시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복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복음의 의미,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기적인 것에 빠졌기 때문에 저 이방인들을 무관심하고, 유대인들의 우월감에 빠져 있는 동안에 그 복음은 복음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었습니다.
돈케라는 선교사 출신의 유명한 부흥강사는 복음은 전파될 때에만 복음이다. 그것이 전달될때만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에 12명이 모였었는데 은혜 받고, 사도 바울이 목회를 하므로 큰 부흥이 일어났지만, 계시록에 보니 에베소 교회가 책망을 들었습니다 "너희가 첫 사랑을 버렸다" 은혜 받고 뜨거웠던 첫 사랑을 잃어버렸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교회가 부흥되고 많은 사람이 모이고, 은혜 받고, 은사가 충만했지만 나중에 밖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자기들에게만 관심이 있을 때에 저들은 안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가운데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리고 성령이 주신 은혜의 목적을 잃어버리고 교회가 결국 영적 침체에 들어가고 사랑이 없는 형식적인 그런 교회로 타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가 선교의 본질을 잃어버릴 때 교회는 변질됩니다. 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리고 변질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못다 이룬 꿈을 남겨두고 간 꿈을 우리 마음속에 뜨거운 꿈을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선교라는 것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선교팀들이 짧은 기간동안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이 복음은 여기서 시작해서 순복음 뉴욕교회가 한 시대에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실하게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뉴욕복음화와 함께 세계를 바라보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인물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못다 이룬 이 꿈을 우리 마음속에 지니고 남아프리카 끝까지, 카나다를 넘어 알라스카를 지나 중국과 인도까지 보이고 전 세계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가 이루어 질 곳, 하나님께서 우리시대에 맡긴 우리의 선교지인줄 믿습니다.
웨슬레는 세계는 우리의 교구다라고 말했든 것처럼 세계가 교구가 되어질 줄 믿습니다. 이번에 부흥회 하면서 보니 교구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큽니다. 이제는 교회라는 개념을 가지고 선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교구가 한 나라씩을 맡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홀트 양자회에서 입양을 하듯이 최근에는 미전도종족을 입양하는 기관이 생겼습니다. 전 세계의 동일한 언어권에 한번도 선교사가 가보지 않은 복음전파하지 않은 선교부족 미전도종족이 15,000이나 된다고 합니다. 리스트를 만들어서 한 교회씩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들마다 마치 아이를 입양하듯이 한 종족을 입양한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꿈을 우리 마음속에 계속해서 받아들였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여 주실줄 믿습니다. 우리가 선교의 마음이 있으면 꿈이 있으면 우리는 얼마든지 선교를 갈 수 있습니다. 멀리 스페인을 가지 않아도 되고 히스페닉이 있는 곳 어디든지 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에 우리가 갈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선교를 복잡하고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서 함께 있어주고, 한번 안아주고,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에게 신발을 신겨주고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머지않아 그들이 반드시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사도바울이 가졌던 거룩한 꿈의 열정을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에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이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 본질을 이해하고, 교회가 무엇을 해야 되는 줄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준비할 때에 하나님은 축복하시기로 결심하신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축복하셔서 우리에게 넘치게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아프리카 선교, 중공 선교, 그리고 남미까지 어렵고 고난당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려는 마음을 아시고 우리에게 많이 축복 하실수록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것을 아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기로 마음 잡수시고 시작하신 줄 믿습니다. 시작일 뿐입니다. 여러분 가정과 산업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결심하시면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축복하시지 않을 수가 없는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고아 사업부터 시작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우리가 어렵고 힘들 때에도 허리띠를 졸라매고 선교하고, 앞으로도 우리 자체의 fact 비만에 걸려 교회가 변질되지 않도록 하나님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일을 계속 하려는 중심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 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은 불타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번에 선교팀이 한 자리에 모여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께서 강하게 믿음과 확신을 주셨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10년 20년 이내에 하나님의 역사에 위대한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확신을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속에 도장을 찍어 주셨습니다. 이 역사는 미국에서 시작해서 아르헨티나 그리고 땅끝까지... 하박국 선지자가 예언했듯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편만할때까지" 하나님의 역사의 거대한 물결이 일어날 줄 믿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그 사명을 받고 여러분이 뜨거운 마음으로 사도 바울의 꿈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 북극에서부터 시작해서 적도인 에콰도르에서 저 남극까지 티베트의 히말라야산 꼭대기에서 시작해서 남태평양의 폴리네이션스까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편만하고 우리가 받은 축복이 저들에게도 축복이 될 수 있는 영원한 복음의 전달자로 이 불타는 꿈이 사도 바울에게서 여러분 마음속에 전달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비전의 사람
로마서 15:22-23 / 조상호 목사
EX) 찰리 패덕은 유명한 달리기 선수였습니다. 찰리 패덕이 어느 날 클리브랜드에 있는 고등학교에 가서 연설을 했습니다. 연설하는 중에 "바로 이 강당 안에 미래의 올림픽 챔피언이 있을지 누가 알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연설이 끝난 후, 언제나 주변에서만 어슬렁거리는 아주 야위고 다리만 껑충한 흑인아이가 찰리 패덕에게 다가와 수줍어하며 말했습니다. "제가 미래의 어느 날엔가 최고의 달리기 선수가 될 수 있다면, 저는 그 일을 위해 제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찰리 패덕이 그에게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할 수 있네! 젊은이! 자네가 그것을 자네의 목표로 삼고 모든 것을 그 일에 쏟아 붓는다면, 분명 자네는 그렇게 될 수 있네." 그 흑인 아이는 찰리 패덕의 말을 가슴에 새기고 열심히 달렸습니다. 드디어 1936년 뮌헨 올림픽에서 그는 세계 기록을 갱신하고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가 바로 제시 오웬즈라는 선수입니다. 제시 오웬즈가 고향에 돌아왔을 때, 사람들을 그를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그날 껑충한 또 다른 한 흑인 소년이 사람들 틈을 헤치고 다가와 오웬즈에게 말했습니다. "저도 꼭 언젠가는 올림픽 출전 달리기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제시 오웬즈는 옛날을 생각하면서 그 소년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 "얘야, 큰 꿈을 가져라. 그리고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그것에 쏟아 부어라." 제시 오웬즈의 말을 들은 이 흑인 아이도 열심히 달렸습니다. 정확히 오웬즈의 말을 들은 지 12년 후, 1948년의 올림픽에서 그도 금메달을 땄습니다. 그가 바로 헤리슨 달라드라는 선수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제시 오웬즈와 헤리슨 달라드처럼 여러분들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을만한 꿈이 있습니까? 남은 인생동안 계속해서 달려갈 비전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고도 아깝지 않은 그런 꿈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오늘날 가장 큰 문제중의 하나는 비전 없이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어떻게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려운 분들을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는 먹고 살 돈은 있습니다. 배고픔을 해결할 빵이 있습니다. 집안에 돈도 있고, 냉장고에 빵도 있지만, 마음속에 꿈이 없습니다. 가슴속에 불타오르는 비전이 없습니다.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갇혀 있습니다. 울타리 밖을 볼 생각도, 나갈 생각도 못하는 것이 오늘의 비극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다릅니다. 우리 기독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나아가는 비전의 종교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비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세상에서의 안주를 소망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꿈꾸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거룩한 비전을 품은 사람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비전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꿈의 그릇만큼, 비전의 크기만큼 역사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 사도 바울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거룩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그는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탁월한 비져너리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하여 비전의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기를 바랍니다.
1) 목표를 세우라(Set Your Goal)
비전을 이루는 가장 첫번째 단계는 목표를 설정하는 것입니다. 비전의 사람, 바울에게는 분명하고 확실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9장 21절과 우리가 이미 살펴 본 로마서 1장 13절과 15절 등을 보면, 그는 당시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로마를 향한 비전이 있었습니다.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불붙은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에 가는 것이 바울의 1차 목표였습니다. 그 다음 그에게 2차 목표가 또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겠습니다.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려는 원이 있었으니" 바울은 지중해 동부지역인 서바나, 즉 지금의 스페인으로 가는 것을 2차 목표로 삼았습니다. 또 2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바울은 실현 가능한 로마를 공략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세웠습니다. 그는 실현 불가능한 꿈을 가지고 나아가는 허풍장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단계를 밟아 가고자 했습니다. 그는 로마를 거쳐서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땅 끝으로 여기던 서바나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장기적인 2차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는 서바나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 바로 주님께서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말씀하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이루는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비전의 사람, 바울에게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명령하신 세계 복음화를 위해 로마를 전진기지로 정하고 그곳을 통해 당시에 땅 끝으로 여기던 서바나를 공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비전의 사람은 말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말은 코메디언이나 개그맨이 잘합니다. 시장통의 약장수도 말은 잘합니다. 비전의 사람은 구체적인 각론이 있어야 합니다. 비전의 사람에게는 구체적인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목표는 믿음의 선언이요, 비전의 옷이기 때문입니다. 비전을 이루기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목표설정입니다. 목표를 정하고 나면, 그 순간부터 목표가 우리들을 이끌어 가는 견인차 역할을 합니다. 목표는 온갖 어려움과 역경을 극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EX) 여러분이 잘 아시는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농촌에서 태어나 16세에 디트로이트로 가 유명한 토마스 에디슨이 세운 회사의 직공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헨리 포드는 점점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그가 한번은 에디슨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에디슨에게 한 가지만 질문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가솔린이 기계를 돌릴 수 있는 힘을 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을 들은 에디슨은 두말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포드는 에디슨의 이 한마디 대답에 할 수 있다는 확신으로, 자동차 엔진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자동차 엔진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1년이 지나고 2년,3년이 지났으나 실패했습니다. 다시 5년,6년이 지났으나 또 실패했습니다. 7년,8년이 지나도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13년만에 헨리 포드는 자동차 엔진을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목표가 분명한 사람은 아무리 실패의 난관이 있다고 할지라도 목표를 이룰 때까지 좌절하지 않습니다. 꾸준히 목표를 향해 달려갑니다. 바울에게는 세계 복음화라는 비전과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 비전을 가지고 나아갔습니다. 매를 맞아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돌에 맞아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배가 파선을 당하여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비전으로 인하여 어떠한 난관에서도 좌절하지 아니하고 나아갔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도 바울과 같은 비전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살맛 나게 하는 비전, 어떠한 어려움도 극복하게 하는 비전이 저와 여러분들의 가슴속에서 활활 타오르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2) 최선을 다하라(Do your best)
목표를 세웠으면 목표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목표는 얼마든지 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향해 끝까지 나아가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비전의 사람은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시대의 요셉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그는 큰 꿈을 가졌지만, 현실을 무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애굽으로 끌려갈 때, 어떻게 하면 도망갈까 궁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보디발 장군의 집에서 종살이할 때도 도망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종살이하면서도 최선을 다하여 일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보디발 장군의 모든 살림살이를 책임지는 가정총무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또 그는 옥중에서 억울하게 옥살이할 때도 어떻게 하면 쇠사슬을 벗어날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히려 감옥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오늘날의 교도소장과 같은 전옥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옥에 있는 모든 죄수를 관리하는 자리에 앉게 되었던 것입니다. EX) 미국의 베리학교는 유명한 학교라고 합니다. 그 학교를 창설한 사람이 마르다 베리 여사입니다. 베리 여사는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농촌의 가난한 아이들을 위하여 어떻게 하든지 교육을 시키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베리의 꿈은 꺼지지 않고 불탔으나 돈은 없었습니다. 그녀는 기도 중에 당시 거부였던 헨리 포드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포드는 그녀에게 고작 한 다임,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해서 80원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모욕과 멸시감을 느낀 나머지, 화를 내고 받은 돈을 팽개치고 나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리여사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포드로부터 받은 한 다임을 가지고 가서 씨앗 한 봉지를 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정성껏 길렀습니다. 첫해에 작은 수확을 거두었습니다. 그것을 다 팔아 씨앗을 사서 점점 농사의 규모를 키워 나갔습니다. 여러 번 반복 끝에 드디어 그녀는 건물을 하나 세웠습니다. 그리고 헨리 포드를 다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포드씨! 몇 해전에 주었던 한 다임으로 이루어 놓은 성과를 보십시오.건물 한 채가 지어졌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포드는 자기 귀를 의심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찾아가 보았습니다. 헨리 포드는 베리여사가 세워놓은 건물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는 100만불을 즉석에서 헌금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베리 학교는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80원을 가지고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크나큰 복을 주셨던 것입니다. 진정한 비전의 사람은 주어진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처해진 현실을 인정합니다. 비전의 사람은 현실을 도외시하는 이상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미래는 무시한 채, 현실만을 바라보는 현실주의자도 아닙니다. 비전의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처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울은 로마를 거쳐서 서바나에 가고자하는 비전과 목표를 세웠지만, 그에게 놓여있는 현실은 암담 했습니다. 로마에 가기를 수차례 시도했지만, 번번이 길이 막혔습니다. 22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그가 비전을 성취할 수 있는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제자리에 주저 않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해 주의 일을 했습니다. 25절과 26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 사도 바울의 비전은 로마와 서바나까지 가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지만 그 길이 막히자, 그는 예루살렘으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그는 핍박과 어려움에 처해 있는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고린도와 갈라디아와 마게도니아 등 많은 이방인들이 드린 구제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향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해외선교에 대한 비전이 있었지만, 그 길이 막히자 그는 모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를 돌보았습니다. 그는 처해진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하며 해외선교의 길이 열리기를 기다렸습니다. 여러분! 오늘 사도 바울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현실을 통하지 않고 미래가 오지 않습니다. 현실을 거쳐서 미래가 주어집니다. 찬란한 미래가 저절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EX) 지금은 고참가수가 되었지만, 가수 조용필씨를 아실 것입니다. 그가 70년대 중반에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통해 일약 정상급 가스로 발돋움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가 대마초를 피워 가수활동을 오랫동안 못하다가 겨우 80년에 해금되었던 것으로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가 <창 밖의 여자>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정상급 가수에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창 밖의 여자를 모르면 간첩이었습니다. 엄청난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인터뷰에서 밝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거의 20년이나 지났지만, 그의 인터뷰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그가 창 밖의 여자를 부르기 위해서 엄청난 양의 피를 목에서부터 토해내었다는 것입니다. 그 노래 중에 고음을 내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 고음을 내기 위해서 대야에 피를 토하며 연습했다고 합니다. 또 일반적으로 가수들이 노래를 취입할 때 2~30번 정도 녹음을 하는데, 반해 조용필씨는 <창 밖의 여자>를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때는 무려 100번 이상을 계속해서 녹음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창 밖의 여자가 저절로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류 가수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가수들 뒤에서 춤추는 댁밴서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관절이 다 상하도록 연습을 해야 댁댄서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의사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과학자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최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사도 바울과 같은 열심과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듯이 사방이 꽉 막혀 있어도 주어진 여건 속에서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미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해 지금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습니다.
3) 자신을 점검하라(Feed Back Yourself)
본문 25절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 교회에서 드린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 모교회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로마를 거쳐 서바나로 가려고 했습니다. 28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를 지나 서바나로 가리라." 그런데 여기에서 한가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는 이방인 교회에서 모은 구제 헌금을 직접 가져가지 않고, 그의 신실한 동역자들을 통해서 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가는 길은 멀고, 또 주위에 바울의 생명을 위협하는 무리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그런데 그는 직접 예루살렘을 방문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 때문에 바울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예루살렘 행을 감행하고 있습니까? 그는 예루살렘 모 교회에 자기의 선교사역을 보고함으로 하나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확증하기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영적인 점검과 새로운 영적 충만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휴가철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자동차를 점검하지 않고 운전을 하다가, 큰 코 다칠 수도 있습니다. 엑셀레이터를 밟는다고 자동차가 무한정 움직이는 것은 아닙니다. 엔진 오일도 점검하고, 라디에이터의 물도 점검하고, 타이어도 점검하고 브레이크도 점검해야 합니다. 자동차를 점검하여 수리해 주지 않으면 자동차가 어느 날 갑자기 길거리에서 멈추어 버리기도 합니다. 돌이킬 수 없는 대형사고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목표를 향해 열심히 달리는 것도 좋지만, 때때로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합니다. 스스로를 점검해야 합니다. 뉴질랜드에서 6개월에 한번 씩 자동차를 점검하고 W.O.F(자동차 정비필증)를 받는 것처럼, 우리의 삶을 점검하고 재충전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비전의 사람, 사도 바울의 선교행적을 추적해 보면, 한가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또 2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과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3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항상 베이스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베이스로 돌아왔습니다. 그것은 자기 점검과 새로운 충전을 위해서였습니다. 충전 없이 계속해서 일할 수 없습니다. 건전지를 계속해서 사용하면 방전되는 것처럼, 우리도 계속해서 나아가면 새로운 충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순복음교회에서는 매년 세계선교대회를 개최합니다. 전세계에 흩어져 사역하고 있는 선교사들이 1년에 한번씩 모교회에 모여서 영적 재충전을 갖습니다. 그리고 민족과 열방을 그리스도 앞에 인도하기 위한 선교사명을 재확인합니다. 건강진단을 해서 선교사들의 건강상태를 점검해 줍니다. 여러 가지 목회자료와 사역자료들을 공급해 줍니다. 선교대회에 참석한 사역자들은 선교대회가 끝나면, 다시 각 임지에 돌아가 1년 동안 열심히 사역을 합니다. 사역자들에게 자기 점검과 재충전이 필요합니다. 무작정 뛰어다닌다고 말씀이 쏟아지지 않습니다. 무작정 달린다고 목표에 빨리 도착하는 것은 아닙니다. EX) 17세기 초, 미국 이민 초창기 때의 이야기입니다. 영국에서 미 서부에서 금이 난다는 소식을 듣고 금을 캐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건너와 미국 동부에 도착하였습니다. 도착한 그들은 서부에 있는 금광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서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었습니다. 한 무리는 하루도 쉬지 않고 말을 타고 서쪽으로 달린 반면에, 다른 한 무리는 6일을 달리고 꼭 7일째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예배를 드리고 휴식을 취하며달리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의 눈앞에, 앞서 가던 무리들이 길가에 앉아 있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앞으로 가지 못한 채, 제자리에 멈추어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앞서 타고 가던 말들이 계속 달리다 보니, 병에 걸려 꼼짝도 하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열심히 달린다고 빨리 가는 것은 아님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목표를 세우고 최선을 다하되, 스스로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충전 받으시기 바랍니다. 비전의 사람, 바울은 자기를 점검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새로운 충전을 받으며 사역하던 사람이었습니다.
4) 함께 기도하라(Prayer With Others)
많은 바울의 서신들을 보면, 수신자들에게 기도를 부탁하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에도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30절을 보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고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바울은 매우 간절하게 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서바나 선교계획과 앞으로 예루살렘 방문시 닥쳐올지 모를 유대인들의 위협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긴급히 SOS 구조 요청하듯, 중보기도를 부탁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0절 이하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비전을 이루기 위해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이후에 가장 크게 쓰임 받았던 사도 바울도 기도가 필요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기만 해도 병이 낫고, 악귀가 나가고, 수많은 무리들 앞에서 담대하게 말씀을 전하던 능력의 사람, 바울도 기도하며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중보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는 (마18:19)의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는 합심 중보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EX) 여러 해 전 달나라를 향하여 아폴로 13호를 쏘아 올릴 때에 미국의 과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아폴로 13호는 현대 과학의 걸작품입니다. 이것은 매우 정교하면서도 완벽합니다. 이것이 고장날 확률은 백만분지 일입니다." 모든 사람의 확신 속에 아폴로 13호는 달나라를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지구로부터 2만 마일을 벗어나지 못한 지역에서 그만 고장이 나고 말았습니다. 산소통이 터져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여행을 계속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돌아올 방법도 막막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미국 텍사스 휴스톤에 있는 우주 지휘소에 비상연락을 취하고 회신을 기다릴 수 밖에 도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휴스톤에서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2만 마일이나 떨어진 우주선으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우주 지휘소에서는 다만 북극성을 바라보며 방향을 잡아서 돌아오라고 회신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주 비행사들은 영원한 우주의 미아가 될 위험에 빠진 것입니다. 그때에 미국의 대통령은 전국민에게 함께 아침 9시에 기도하자고 호소했습니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군인도, 어린이도, 온 국민이 함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아폴로 13호가 무사히 태평양에 떨어진 것입니다. 구조된 우주 비행사는 배에 오르자마자 군목의 손을 잡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머리를 숙이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장면이 그 주간 타임지 표지에 실렸습니다. 우주 비행사 중의 한 사람인 스위저트는 기자회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들은 지구에 계신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우리가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기도의 힘이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의 기도 보다, 두 사람의 기도소리가 큽니다. 두 사람의 기도보다 열 사람의 기도 소리가 큽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의 기도에도 들어주시지만, 함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기도를 서둘러서 들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좋은 중보기도자, 신실한 기도의 동역자를 만나시기 바랍니다. 때마다 시마다 함께 기도함으로 비전을 성취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바울처럼 여러분들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을만한 꿈이 있습니까? 남은 인생동안 계속해서 달려갈 비전을 소유하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쏟아 붓고도 아깝지 않은 그런 꿈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비전이 없는 분들은 오늘 이 시간 비전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을 꼭 붙잡으십시오. 또 비전이 있는 분들은 비전의 사람, 바울을 배우십시오. 구체적으로 바울의 삶을 배우십시오. 비전에 따른 목표를 세우고,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때때로 자신을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을 충전하며, 다른 사람과 함께 기도함으로써 세운 비전을 이루어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주 안의 사귐과 나눔과 기쁨
로마서 15:22-33 / 이수영 목사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널리 알려지자(롬1:8) 그들을 만나보고 싶은 간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들을 만나서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 그들을 견고하게 하고(롬1:11) 피차에 안위함을 얻으며(롬1:12) 다른 이방인 교회에서 거둔 것과 같은 열매를 로마 교회에서도 맺기 위해 여러 번 로마로 가기를 원했습니다(롬1:13).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로마서를 쓰며 그 머리 부분에서 이미 밝힌 바 있습니다. 롬1:10-13로 돌아가 읽어봅니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가 언급하고자 한 기독교 신앙의 핵심교리에 대한 설명을 사실상 다 마치자 로마를 방문하여 그곳의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고자 하는 그의 희망과 계획을 다시 언급합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합니다. 첫째는 사도 바울이 로마로 가기를 원한 것은 거기에 오래 머물기 위해서나 거기를 궁극목적지로 삼아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궁극적으로 가기를 원하는 곳은 서바나 곧 스페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에 가서 눌러앉아 전도를 하거나 목회를 할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 바로 앞서서 쓰기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 이는 남의 터 위에 건축하지 아니하려 함이라.”(롬15:20) 한 것과 일치하는 생각입니다.
사도 바울이 스페인으로 가기를 원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는 오늘 본문 23절에서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다”고 썼습니다. “이 지방”이란 롬15:19에서 읽듯이 그가 두루 다니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한 예루살렘으로부터 일루리곤까지의 지역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선교의 지경을 넓혀 일루리곤까지 복음이 전파되게 한 바울에게 있어서 이제 서쪽으로 더 나아가면 로마인데 로마에는 이미 복음이 전해졌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신자들이 생겨났으므로 그가 일할 곳으로 남은 지역은 로마를 넘어 서쪽 끝에 있는 스페인이었습니다. 그 당시 스페인은 로마 제국 내에서 비교적 새로 개발된 지역이었지만 그러면서도 이미 저명한 시인, 극작가, 저술가 들을 배출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스페인이 새로운 세계이기에 복음을 전해야겠다는 뜻을 품었을 것이고, 또 높은 지적, 정신적, 문화적 토양의 땅이기에 거기서 기독교가 크게 성장하리라 생각하여 가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는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먼저 예루살렘을 다녀오는 일이었습니다. 본문 25-28절을 봅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목적은 가난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교회에서 거둔 연보를 전달하는 것이었습니다. 마게도냐는 빌립보나 데살로니가 같은 도시들이 있는 그리스 북쪽의 지역이었고, 아가야는 아덴이나 고린도 같은 도시들이 있는 그리스 남쪽의 지역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연보에 참여한 그리스도인들은 아마도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일 것입니다. 이들에게서 거둔 연보를 예루살렘 교회에 전달하는 일은 사도 바울에게는 스페인으로 가는 일을 잠시 연기할 가치가 있을 만큼 중요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거둔 연보이니만큼 지체하지 않고 빨리 전달해야 했을 것이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 사이의 유대와 일치감을 공고하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아직도 이방인 교회에 대하여 의구심이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을 예루살렘의 교회지도자들이나 성도들의 마음을 보다 활짝 열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향해 품은 사랑의 열매를 확실하게 전달한 다음에 로마에 들렸다가 스페인으로 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루살렘에 먼저 들렸다가 로마를 거쳐 스페인으로 가려한 것이 사도 바울의 마지막 선교계획이었음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우리는 오늘 본문의 사도 바울의 글 속에서 또 다른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 무엇인가 하는 데 대한 귀중한 진리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지역과 족속의 벽을 넘어서서 주 안에서 갖는 사귐과 나눔과 기쁨을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22-24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 번도 얼굴을 본 적도 없는 로마 교회의 성도들을 그토록 만나고 싶어 몇 번이고 로마로 가려고 했습니다. 그들과 사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들과 만나 사귀면 기쁨을 가질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이 자기를 스페인으로 보내주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는 그 담대함은 어디서 나온 것이겠습니까? 한 주님 예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나눔의 정신 때문일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9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합니다. 바울은 자기가 로마의 성도들과 만나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복을 충만히 그들과 나누게 될 것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 충만한 복을 그들과 너무나 나누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또 본문 32절에서는 “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합니다.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을 만나러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 여기며, 그들에게 기쁨으로 갈 것이라 하고, 자기로 하여금 그들과 편히 쉬게 하라는 부탁까지 합니다. 참으로 편안하게 도움도 청하며 서로 나눌 것을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에게 자기를 위하여 기도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하며 그들이 기도로 자기의 사역에 동참해줄 것을 구하기도 합니다. 본문 30-3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의 예루살렘 행이 위험한 길임을 예감하고 있었습니다. 행20:22-23에 보면 그 자신이 말하기를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신다.” 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기도를 부탁한 것입니다. 그는 이방인들인 로마의 성도들에게 기도를 부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뒤늦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자들이라고 얕보지 않았습니다. 동등하게 사귀고 모든 것을 꼭 같이 나누는 자세를 보여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소개하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성도들은 또 어떻습니까? 본문 26-27절을 다시 봅니다: “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도 서로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역과 족속의 차이를 뛰어넘어서 기쁨으로 연보를 한 것입니다. 나누기를 기뻐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 지방의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에게 일방적으로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먼저 예루살렘의 성도들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복음의 빚을 졌고 그들에게서 영적인 것을 나누어 받았다는 것입니다. 받았으니 주기도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영적인 것으로든 물질적인 것으로든 서로 나누며 도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사귐과 나눔과 기쁨은 어디서 온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모든 글을 본문 33절에서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이라는 기원으로 끝냅니다. 하나님께서 평강을 주시기를 비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만이 평강을 주실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 안에서 누리는 사귐과 나눔과 기쁨을 말한 후에 기원하는 평강이기에 그 의미가 더욱 살아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평강이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우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사귐과 나눔과 기쁨 아니겠습니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지은 첫 번째 죄의 결과가 무엇이었습니까? 형이 아우를 시기하고 미워하여 쳐 죽인 일 아닙니까? 형제 사이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사귐과 나눔과 기쁨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인류의 역사는 반목과 원수짐과 싸움과 슬픔과 고통의 연속이 아니었습니까? 서로 사이에 이기주의의 높은 담을 쌓고 상호의 무관심과 의심과 불안과 경계 속에 살아온 것 아닙니까? 한 마디로 평강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인간 스스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음이 역사 속에서 입증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먼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벽을 치우시고 화목한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우리 사이의 모든 막힌 담을 허시고 평강의 관계를 다시 세우시려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는 믿음 안에서만 우리에게 사귐과 나눔과 기쁨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대림절이 시작되는 첫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오시기를 고대하는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다시 깊이 묵상하는 이번 대림절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번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 교우들 사이에, 교회와 우리 사회 사이에 평강이 회복되는 역사가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특히 이념적으로, 계층 간에, 한미자유무역 협정 때문에 갈리고 대립하는 정치세력들이나 국민들 사이에서 화해와 일치가 이루어지도록 우리 모두 간절히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행복한 의무
로마서 15:25-29 / 임덕순 목사
자식을 키우는 일은 부모의 의무입니다.
그런데 이 의무는 국방의 의무나 납세의 의무보다 훨씬 더 힘든 의무입니다.
오늘같이 학비부담이 많은 사회에서 자식 한 명을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학비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생활 전체를 아이에게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식을 키우는 일은 단지 고달픈 의무만이 아니라 행복한 의무입니다.
자식을 잘 키우면 그게 보람이 되기 때문이고, 키우는 것 자체가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한 의무를 위해서 부모들은 기꺼이 모든 것을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식을 키우는 일과 마찬가지로 보람 있고 행복한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선교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선교를 명령 받았다는 것을 압니다. 그게 성경의 내용입니다. 나는 교회의 존재가 선교라고 알고 있으며, 이것을 힘쓰는 것을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신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에 우리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말씀과 체험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선교가 우리들이 꼭 해야만 할 사명이라면, 기왕이면 부득이 해서 억지로 하지 말고 기쁨으로 해야 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선교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기도요, 다른 하나는 물질로 헌금하여 선교사를 뒷받침하는 것인데, 헌금을 드리면 우리의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기에 기도보다 더 기본적인 것이 헌금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선교헌금을 힘껏 하는 일은 내가 선교사가 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것으로 전문가인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고 결국 피선교지의 영혼들은 구원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목사가 성도의 죄를 꾸짖고 회개하라고 책망을 하면 대개 "아멘" 하며 받지만 물질 문제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면 그때부터는 귀를 닫아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네 물질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시면서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바르게 관리하는 청지기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돈에 특별히 인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더러 있는데, 그런 분에게도 오늘 말씀이 힘들지 않기를 바랍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선교헌금 좀 잘 드리자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선교헌금을 힘껏 해야 하는가? 구체적인 이유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 복음에 목말라 하는 영혼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디 소풍을 가서 준비해 간 좋은 음식을 먹으려고 하는데 옆에 굶주리고 배고파서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면, 돌아앉아서 자기 가족끼리만 먹을 수 있겠습니까? 오라고 해서 나누어 먹던지, 아니면 그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 가서 몰래 먹을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데로 가서 자기 가족들 하고만 먹으면 마음이 걸리지 않겠습니까? 차라리 그들을 불러 나누어 먹는 것이 떳떳할 것이고, 나누어 먹고 나면 보람 있고 행복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일이 그런 일입니다. 배고픈 사람 외면하고 너만 먹으면서 맛있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우리나라는 복음이 풍성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고 있습니다. 도시에는 보이는 것이 교회요 농촌에도 교회가 마을마다 세워져 있으며, 우리나라에는 문맹이 거의 없어서 누구나 성경책을 쉽게 사서 읽을 수 있습니다.
말씀이 듣고 싶거나 은혜가 그리워지면 언제든지 가까운 교회에 찾아가면 거기에는 새벽마다 말씀을 설교하는 목사님이 있고, 기도할 분위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한국처럼 은혜생활 하기 쉬운 나라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적으로 볼때 한국은 먹을 것이 넘치고 넘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가까운 일본에는 가도 가도 교회가 보이지 않으며 주일에 예배한번 참석하려고 한다면 수 시간씩 자동차로 달려가야만 예배에 참석할 수가 있습니다.
북한에는 태어나서 한 번도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이 거의 전부이고, 그와 비슷한 형편에 있는 사람들이 저 모슬렘 권과 불교권의 나라들에 수도 없이 많습니다.
남미나 필리핀 등지에는 기독교라는 이름의 천주교에 출석은 하고 있으나,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고, 다만 자기들의 수호신의 이름이 예수인줄로 아는 그런 정도의 신자들이 태반입니다.
이 세상에는 교회가 없는 곳이 많고, 교회에 가더라도 복음은 들을 수 없는 곳도 많습니다. 어떤 지역에서는 초등학교 아이들이 책상도 책도 공책도 없이 공부를 하는데, 땅바닥에 돌로 글씨를 쓰고 왼손으로 지우면서 공부를 하지만 저녁과 아침밥을 굶고 왔기 때문에 어깨가 축 늘어지고 눈동자가 풀어져서 공부할 수 없는 형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교사가 아침마다 죽을 끓여 먹이고 있는데, 그 죽을 얻어먹기 위하여 부모들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과 육이 디룩디룩 살쪄 있는데, 이렇게 잘 먹고 잘 산다고 자랑만 하면서 그들의 굶주림을 몰라라 해도 될까요? 그래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성안의 사람들이 다 굶어죽는 것을 보고 차라리 적진에 가서 구걸을 하자고 아람 진에 갔던 문둥이 네 명은, 적은 모두 도망했고 먹을 것만 산더미같이 쌓여있는 것을 보고 실컷 먹다가, “성중은 주려 죽는데 우리만 먹고 마시고 있으니 우리의 행위가 선하지 못하구나. 만일 밝는 아침까지 우리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벌이 우리 머리에 임하지 않겠느냐”(왕하7:9) 하고 밤중에 가서 소식을 전했다고 했습니다.
모르드개가 “너는 왕궁에 있으니 문제없다고 이때에 잠잠하면 우리는 다른 데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겠지만 너와 네 집은 멸망하리라.”(더4:14)고 했을 때,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왕에게 가서 자기 민족을 구해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문제없이 평안하다고 자랑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남을 구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것을 알고 의무를 이행해야 합니다.
서양 나라들은 옛날에 선교를 하면서 선교사를 이용하여 피 선교국가의 정보를 빼내고 침략하여 식민지를 삼아 지배 한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선교를 받았던 나라들은 서구의 선교사를 침략자의 하수인으로 생각하고 적대감을 갖는 게 사실이며, 또한 서양 나라들의 경제 사정도 어려워졌고, 그들의 믿음도 식어져서 요즈음은 서방 선교사가 격감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대신 한국은 6.25 후인 1953년 지엔피 40달러밖에 되지 않는 가난한 나라였는데 지금은 2만 불이나 되었으니 500배나 성장했습니다. 모든 나라가 다 이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한국에 나타난 기적이며 축복입니다.
그런데 한국경제의 성장은 한국 교회의 부흥과 시기를 같이 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 한국교회에 부흥을 주시고 한국에 경제발전을 겸하여 주셨겠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일본은 경제는 있으나 교회가 없고, 한 때 한국과 함께 네 마리의 용이라고 일컬었던 홍콩, 대만, 싱가포르는 너무나 작은 섬에 불과합니다.
아세아에서 선교할 수 있는 나라는 한국뿐입니다. 한국만이 고난 속에서 자란 순수하고 뜨거운 믿음이 있고, 하나님이 주신 경제력도 있습니다. 이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매우 복스러운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계가 우리를 향하여 손을 내미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려운 사람들이 손 벌릴 때 눈 감고 외면하면 벌이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주신 물질을 바로 관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8:17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모든 물질이 하나님께서 맡기신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적든 많든 물질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또한 그 물질을 얻은 자신마저도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다섯 달란트 맡은 자도, 한 달란트 맡은 자도, 다 주인의 것을 맡았노라고 돌아와 회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주신 물질은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 원하시는 만큼 사용해야 합니다.
호흡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에 산소로 채워주셨고, 물을 마셔야 하기 때문에 바다와 강과 지하에 물을 채워 주셨습니다. 자녀를 주신 하나님은 그 자녀에게 먹이고 입히고 신기고 교육시키는데 얼마의 물질이 필요한 줄을 아십니다. 그래서 필요한 물질을 얻도록 건강도 주시고 일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얻은 물질을 순전히 자기 가족들만 먹고 마시고 입고 가르치는 일에 주신 물질을 다 소비해 버린다면 기뻐하지 않으신 다는 것을 밝혀 주셨습니다.
“이웃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힘껏 일하라.”(엡4:28)고 하신 말씀을 보면, 우리의 수입 중 상당한 부분을 다른 사람을 위하여 쓰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구제이며 해외 선교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얼마 전 국민여동생이라는 문근영양이 기부를 많이 한다는 소식이 들려서 국민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습니다. 가수 김장훈씨도 남모르게 기부한다고 합니다.
그 김장훈씨와 친구사이인 홍콩의 배우 성룡이라는 사람이 김장훈의 선행을 듣고 돈 만불과 함께 한글로 격려하는 편지를 보내고는 자기도 그동안 번 5천억원 정도의 재산 전부를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밝혔다고 합니다.
엊그제 뉴스를 보니까 개그맨 유재석씨와 박명수씨도 억대의 기부를 했다고 합니다. 나 혼자 잘 먹고 마시는 것이 행복이 될 수 없습니다. 많이 모아서 자식에게 유산으로 남겨준다고 자식이 잘되는 것도 아닙니다.
뼈 빠지게 벌어서 유산으로 다 주고 가면 자식들이 그것으로 잘되고 성공하는 경우보다, 게으르고 타락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차라리 내가 모은 재산은 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위해서 사용하고, 자식들에게는 바르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지혜롭고 하나님의 말씀에 맞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사회에 기부하는 일보다 훨씬 더 급하고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을 찾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이 일에 급하십니다. 명심하십시다.
나는 내 주위에 있는 분들이 땀 흘리며 애써서 모은 재산을 잘못 관리하여 사기도 당하고 손해도 보는 일들을 들으면서 마음이 몹시 안타깝습니다.
여러분이 모은 물질이 여러분에게 행복을 주며, 자손들에게 축복이 되어 물려지며, 남들에게도 유익을 주도록 사용했으면 하는 바람이 가득합니다.
그것은 구제와 선교를 위해 사용하는 것 이라는 것을 확신하기에 이일을 권고합니다. 순종해 주기를 당부합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물질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하나님이 더 주십니다. 이것은 나의 확신이며 성경의 약속입니다. 주인의 한 므나를 가지고 가서 열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는 열 므나를 더 맡겼지만, 한 므나를 가지고 갔다가 도로 한 므나 가지고 온 사람에게서는 한 므나마저도 빼앗았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맡기신 재능과 물질을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계획성 있게 사용한다면, 틀림없이 하나님은 지금보다 넉넉하게 하실 것이요 여러분이 하고 싶은 만큼 선한 일을 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배부르게 하실 것이라는 말씀의 진의입니다.
돈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물욕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은 필경 망하고 말지만, 의로운 일을 남보다 더 많이 하고 싶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책임지고 의에 배부르게 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셋째, 빛 된 삶을 살 것을 명령받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어디에 마음을 쏟고 살아갈까요? 다른 사람 볼 것없이 자신이 요즘 어떻게 사는지 생각해보면 알 것입니다.
요즘 무엇에 신경 쓰고 무엇에 목매달고 무엇 때문에 실망하고 무엇 때문에 죽을 지경인지, 무엇 때문에 싸우고 무엇 때문에 속이고 무엇 때문에 자살하기도 하는지 가만히 보시기 바랍니다.
최진실 안재환이 왜 자살했나요? 그들이 돈이 없나요? 인기가 없나요? 남보다 미모가 없나요? 아마도 더 벌기 위해서이고 더 많이 모으기 위해서이고, 현실에 만족하지 못해서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일까요?
경제가 어려워져서 크게 실망하는 사람들의 실망하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더 많은 이익을 남기려고 주식을 사고 투자했는데 투자한 돈을 잃게 될지도 몰라서 근심하는 것이지요? 요즘 사람들은 거의가 먹고 입고 살만큼은 살기 때문에 지금보다 더 잘 살고 더 부자 되는 일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진실이나 안재환만큼 가진 것도 없고 인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지요? 경제위기라고 아무리 떠들어도 그렇다고 우리가 굶게 생겼습니까?
먹는 것이야 얼마나 들겠습니까? 사실은 너무 먹어서 비만이 문제 아닙니까? 옷이 없어서 헐벗는 사람 있습니까? 옷이야 한 두 해 안산다고 헐벗겠습니까? 그동안 산 옷도 많지 않습니까? 한 두해 옷을 사지 않는다고 해서 벗고 살 사람 있습니까? 그건 아니지요?
요즘 세계적으로 경제위기가 심각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위기의 실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정말로 벌써 월급이 줄었습니까? 신문이나 방송을 보고 ‘아 위기가 오는구나, 그럼 절약해야겠다.’ 하고는 지갑을 닫고 물건을 사지 않으니까 위기가 현실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소비를 축소시키면 물건이 팔리지 않으니 공장 가동을 축소하거나 문을 닫습니다. 물건이 팔리지 않으면 공장을 닫게 되고, 공장이 닫히면 공장과 매장의 직원을 해고하게 됩니다.
직원들이 해고당하면 수입이 없어지니까 이제는 사고 싶어도 물건을 살 수가 없습니다. 전에는 살 수 있었지만 경제위기라는 말에 절약하느라고 일부러 사지 않았지만, 물건을 사지 않았더니 정말로 살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경제위기라는 위기감이 진짜 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위기감과 위기는 어디서 오느냐? 더 부자가 되려고 하는 인간의 욕심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위기의 원인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식량 소출이 적어서 생기거나 석유가 나지 않아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금융업자들이 돈을 더 벌려고 신용 없는 사람들의 집을 잡고 돈을 빌려주고, 그 증서를 채권으로 만들어 팔고 다시 파는 등 파생상품을 만들어 팔았는데, 집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생긴 문제입니다.
즉 끝없는 돈 욕심이 오늘의 경제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사는 돈 문제만 크게 생각하면 정말 위기가 옵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하고 가치 있는 문제가 있다는 것을 우리 성도는 알아야 하고, 돈보다 가치 있는 것을 위해 살면 경제 위기도 오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살다가 어떤 노후를 맞이하려고 하십니까? 자식들만 위해서 살다가 손자나 봐주고 집이나 지켜주는 노인이 되렵니까? 돈만 오그려 쥐고 날마다 고민하,며 자기가 하고 싶은 일에 한 푼 써보지 못한 채 저금통장만 남겨놓고 죽으렵니까?
“저분은 일평생 주님 뜻대로 사신 분이다. 저분은 평생을 남들 도우며 산 어른이시다. 저분은 우리의 삶의 참된 모범이 되어 주셨다.” 하면서 우리들을 존경하고 뒤따라오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국교회의 모범이 되라고 부름 받은 한가람 성도들이여, 두고두고 뒤따라 올 자손만대에 축복의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만 하는 자식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여, 정말로 바르게 살아 봅시다.
우리 혼신의 힘을 다하여 하나님의 명령인 선교에 열심을 내봅시다.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셨는데 죽도록 은 못해도 힘은 다해봅시다.
강경제일교회에 이복순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집도 땅도 남편도 아들도 없는, 정부에서 주는 배급 쌀과 교회가 드린 방에서 사는 80대 여 집사님이셨습니다.
그분에게 선교가 주님의 명령이라고 알려드렸더니, 노구를 이끌고 가서 남의 비닐하우스 농장에 품팔이하여 한 달 분 만원씩 열 두 달치 12만원을 벌어다 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다시 십 이 만원을 더 벌어 가지고 와서 하는 말씀이, "목사님! 내가 가만히 생각하니 내년도에도 살아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올해 죽으면 내년도 선교헌금을 못 할 것 같아서 내년 치도 내려고 다시 벌어 왔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분의 선교헌금을 건네받으며 얼마나 존경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분은 자식도 없고 땅도 없고 남겨놓은 유산이 없었지만 그렇게 산 아름다운 삶의 자세를 우리에게 남겨주셨습니다. 그렇게 사는 분이 존경스러운 분입니다.
어느 대전의 김밥장수 할머니는 김밥 팔아 모은 50억 재산을 충남대학에 희사했답니다. 충남대학은 그 돈 50억 없어도 정부가 주는 보조금과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얼마든지 해나갈 수가 있지만 단돈 몇 백 달러가 없어서 선교지에서는 사역이 중단되고 굶주린 사람들을 돕지 못하는 안타까운 선교사가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생명 값으로 죄에서 구원받고 영생의 내세를 확약 받은 성도인 우리가 평생 내 자식만 위해서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아이에게 태권도나 피아노 하나만 가르쳐도 한 달에 10만원은 들어가는데 그 하나 가르쳐 준 것이 그의 생애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부모가 성실하게 일하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주님의 일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그것은 나 자신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일 뿐 아니라 자식의 장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됩니다.
건강보조식품 하나 사먹는 데는 얼마나 돈이 필요합니까?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도움이 될 줄 아십니까? "
선교한다." 하면서 아이 한명의 과외비보다도 적게 작정했다면, 건강식품 하나 사먹는 것 만큼도 하지 않는다면 말로만 선교하는 것이 아닌지 생각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입으로만 선교하고 입으로만 헌신하는 사람이 아닌가?
나는 여러분이 선교헌금을 얼마 드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선교를 위하여 사업하고, 선교를 위하여 자녀를 기르고, 선교를 위하여 장래 계획을 세우는 분들이 되시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아야 여러분과 자녀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여러분이 사는 것 답게 사는 당당함을 누릴 것을 알기 때문 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고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참되고 가치 있고 보람 있고 복이 되는 삶이 있다는 것, 행복이 있고 자랑할 만 한 삶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그렇게 살아드리는 생활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렇게 삶으로 예배하는 사람들과 그런 교회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교회가 하나님께서 찾는 교회가 되어 보십시다. “한가람 교회는 정말 교회가 할일을 다하더라. 그 교회 가서 배우자! 저 한가람 교회 사람들은 성실하고 진실하게 일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해서 번 돈을 정말 가치 있게 쓰더라. 그들을 보니 왠지 머리가 숙여지더라! 우리도 그들처럼 살아야겠다.”라고 하게 해봅시다. 그것이 세상의 빛이요 교계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갖 세워진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교회들이 자기들의 모 교회 인 예루살렘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해 주어서 감사한다는 이야기입니다.
27절에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 진자니, 만일 이방인 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누어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라고 하는데, 이 말은 “그들이 헌금을 기쁜 마음으로 보냈지만 사실 이방인들이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정신적인 축복을 나누어가졌으면 물질로 도울 의무도 있지 않으냐”는 말입니다.
기왕에 해야 할 의무를 기쁜 마음으로 하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선교를 기왕이면 기쁨으로 감당하여 행복한 의무로 삼읍시다. 그래서 우리 자신과 우리 후손들과 우리 이웃들 모두에게 복이 되게 살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