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2테살로니카 3,6-10.16-18 마태오 23,27-32
혼인을 앞둔 젊은이들과 혼배 면담을 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은 알아도 혼인 당사자들은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제가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방법은
편지를 써 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만났는지, 결혼 준비는 어떻게 하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메일을 보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젊은이들은 진솔하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제게 해 주곤 합니다.
저는 당사자들의 편지를 요약해서 강론 때 전해 주기도 합니다.
혼인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강조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물론 신앙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하느님께 의지하고 기도하도록 당부합니다. 둘이 마주 보려하지 말고,
같은 곳을 보라고 이야기를 해 줍니다. 마주 보면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이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면 화복한 가정, 충실한 신앙생활을 바라본다면
파도처럼 밀려오는 삶의 도전들을 극복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성실함입니다.
아내에게 성실한 남편이 되기를 부탁합니다. 남편에게 성실한 아내가 되기를 부탁합니다.
자신의 삶에 성실하기를 당부합니다. 주어진 일에 충실할 수 있기를 이야기합니다.
만나는 이들에게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실함은 많은 부족함을 극복할 수 있게
합니다. 하지만 게으름과 나태함은 많은 장점들을 빛바래게 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주제는 성실함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과 비교할 때 정말 근면하고, 성실하다고 합니다.
일주일의 노동시간도 그렇고, 휴가를 보내는 시간도 그렇습니다. 이민 가서 한국 사람들이
하는 일들은 대게는 편의점과 세탁소의 일입니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그 일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어야하고,
늦은 시간까지 일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렇게 힘든 일을
정말 열심히 해서, 처음에는 고생을 하지만 나중에는 다들 집도 장만하고,
나름대로 삶의 기반을 잡습니다.
뒤에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봉사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새벽에 쓰레기를 치우는 환경미화원이 있기에 거리는 깨끗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시가 생각납니다.
나태주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 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는 드러나지 않지만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 하십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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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도 치릴로 신부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2테살로니카 3,6-10.16-18 마태오 23,27-32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동기의 현저한 갭(Gap)
오늘 복음도 월~화요일에 이어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망하시는 내용입니다. 그 책망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께서는 여러차례 내면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 하셨습니다.
마태오 5.8에서 “예수께서는 오직 마음이 깨끗한 자들만이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또 입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힐 수 없으며 참으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과 말이라고 마태오15장에서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또 오늘 복음 앞 구절 23, 25-26 에서는 정결예식에서는 중요한 것은
외적인 의식 즉 컵과 그릇은 닦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이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들의 외적인 행위와 내적인 동기는 심히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그들의 삶을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책망 하십니다.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시골에 있는 무덤들을 사람들이 즉시 알아오고 우발적으로라도
무덤을 만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회를 칠해야만 했습니다.
왜냐하면 무덤에 닿게 되면 의식상 부정하게 되어 기도나 예배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한 것은
무덤은 겉에서는 그럴싸하게 보이지만 그 속은 썩는 것으로 가득 차 있듯이 그들도
겉으로는 의로운 사람같이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율법학자들과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무딘 마음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의 묘소를 돌면서
“우리가 우리 조상들 시대에 살았다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의 피를 흘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합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들이 조상들보다 더 훌륭하며 자기들이 무덤을 꾸며 놓은
의인들의 편에 서 있다고 뻔뻔스럽게 생각하십니다.
이러한 착각으로 인해 그들의 눈은 더 멀어졌고 마음이 더 무디어 진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바오로 사도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 게으른 생활을 하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빵을 거져 얻어 먿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중 어느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수고하며 애써 노동을 했습니다.
그렇게 한 것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요구할 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에게 우리를 본받게 하려고 스스로 모범을 보인 것 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마음을 깨끗이 하고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할 수만 있다면
그들의 외적인 행동과 사람들에 대한 태도도 즉시 깨끗하고 진실한 것이 될 것입니다.
언젠가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갑자기 쏟아지던날 공소 미사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제 차안에는 반주자와 그 딸이 함께 타고 있었는데 천둥소리를 듣고 무서워하던 그 아이가
곧바로 엄마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는 것 이었습니다.
금방 무섭다고 했는데 엄마를 믿고 엄마품에 안겨 금방 잠이든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를 보면서 왜 예수께서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는지?
왜 그렇게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그렇게 책망하셨는지를
조금이나마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외적인 것에, 세상의 것에 매여 불안과 위선 속에 살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스스로에게 정직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되겠습니다.
아울러 우리 본당의 아이처럼 하느님품에 안겨 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대구대교구 박홍도 치릴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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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2테살로니카 3,6-10.16-18 마태오 23,27-32
"겉은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
오늘 <복음>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의 계속입니다.
곧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불행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번째 불행선언’에서 그들 위선자들을 “회칠한 무덤”(마태 23,27)에
비유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영혼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삶이 생명의 본성을 뿜는 것이 아니라, 무덤의 냄새를 뿜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하기에 때문에 무덤을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은 부정을 타지 않도록
그들을 경계하라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고,
겉은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마태 23,27-28)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거짓된 선”, 곧 “위선” 입니다.
마치 “선”인양 자신의 얼굴을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위선’은 악보다 더 추악합니다.
사실, ‘종교적 위선’이란 단순히 거짓으로 꾸미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행위,
곧 선한 행위로 다른 사람의 존경을 받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을 말합니다.
곧 겉으로는 하느님을 위하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면, 기도나 자선이나 단식, 미사나 전례나 성사와 같은 종교적 행위를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기 위해서’ 한다면 그렇습니다.
‘위선’(ùποκρισισ)은 그 행동과 마음 속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만,
이와 같은 마음과 입술 혹은 행동 사이의 차이는 나아가서, 못된 속셈을 교묘한 방법으로
감추고, 자기 체면을 세우기 위해 오히려 상대방을 올가미에 씌우려 하기도 합니다(예레 18,18).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했던 것처럼(마태 22,18) 말입니다.
나아가서, ‘위선’은 마음을 완고하게 하고, 하느님의 명을 자신의 탐욕과 방종을 위해 이용하며,
더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에게 믿게 하려던 허위를 자기 자신이 진실로서 생각해버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고’(루카 18,9;20,20), 마치 무대 위의 배우처럼(ùποκριτησ)
자기의 배역을 계속하면서 결국 그들은 ‘눈 먼 길잡이’(마태 15,3-14)가 되고,
그들의 가르침은 ‘나쁜 누룩’(루카 12,1)에 불과하게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 먼 이들’이라고 부르십니다(마태 23,25-26).
다른 사람들을 속이려고 애쓰면서 자신을 속이게 되며 자신의 모습에 눈을 감고 빛을
볼 수 없게 되어 오히려 빛을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위선자들을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째 불행선언’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예언자들의 무덤은 꾸미면서도 실은 그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지혜이신 당신을 핍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 진실을 가려보지만, 진리는 어김없이 가리고 있는
허울을 벗기고 맙니다.
진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로막고, 드러난 진실마저 덮고 조작하려 해도, 빛은 끝내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가림 막을 태울 뿐,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겉을 그럴싸하게 꾸미고 치장하고 있지만, 사실은 더러운 속을
감추고, 은폐하고, 기만하고, 심지어는 조작하기도 하는 우리의 위선을 하느님께서는
환히 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위선의 껍데기를 벗게 하소서!
당신이 담아주신 마음 속 진리를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마태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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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 진실을 가려보지만,
진리는 어김없이 가리고 있는 허울을 벗깁니다.
감추어진 진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가로막고 드러난 진실마저 덮으려 앙탈이지만,
빛은 끝내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가림 막을 태울 뿐,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냅니다.
위선의 껍데기를 벗고 진리 편에 서게 하소서!
핍박과 폭행을 당해도 물러서지 않게 하소서!
불의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으로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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