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1코린토 1,26-31 마태오 25,14-30
우리는 하느님께 저마다 다른 특은과 직무, 자질을 받았습니다. 누구는 좋은 성격으로
많은 이들을 화합시키고, 어떤 이는 기획력이 뛰어나 일을 잘해 나갑니다.
또 성실함 그 자체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능력을 소중히 여기며, 하느님께 받은 능력을 공동체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각자 받은 능력을 더욱 계발하고 가꾸어 나가야 하겠지요.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반대로 받은 능력을 가꾸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구든지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우리는 장점뿐만 아니라 아픈 약점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 약점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장점들을 찾아 활용해야만 합니다. 적지 않은 경우 자신의 약점을 두려워하며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함을 안타까워합니다. 그럴수록 약점을 덮어 줄 장점을 찾는 노력이 중요합니다.
약점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을 이겨 낼 특별한 장점도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저마다 소중한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실수도 잦고, 때때로 잘못도 저지릅니다.
그러니 주님을 더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의 삶입니다.
내가 가진 재능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내가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공동선을 위해
노력해 나갈 때 주님께서는 나에게 멋진 삶을 주실 것입니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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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진 요셉 신부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1코린토 1,26-31 마태오 25,14-30
오늘 복음은 유명한 탈렌트의 비유입니다. 과거에는 탈렌트의 의미를 지나치게 왜곡하거나
축소하기도 하면서, 흔히 타고난 재능, 자연 본성으로 지닌 능력, 지성, 아름다움이나
건강으로 여겼습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 복음의 탈렌트가
말하는 것과 비교하였을 때 좀 더 부차적인 것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 교회에 주신 것은 이보다 더 본질적이고 영적인 것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받았고, 믿음을 받았고 은총을 받았으며 그분의 나라를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탈렌트는 그분께서 주신 유산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당신의 삶을 통하여 남겨 주신 것은 물질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요한 13,34 참조).
또한 당신의 영과 사랑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바쳐 우리에게 선물을 남겨 주신
것입니다. 배고픔이 없는 세상, 용서하는 세상, 형제애가 실현되는 세상,
다른 이를 구해 주려고 애쓰는 세상을 위하여 남겨 주신 유산입니다.
첫째 종과 둘째 종과 달리 셋째 종은 주인에 대하여, 곧 그의 하느님에 대하여 나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인이 무섭고 모질다고 생각합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그가 주인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두려워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떤 모험도 위험도 희생도 감수하지 않은 채 자기 자리만 지키려고 한 사람입니다.
혼인하여 자식을 세상에 내놓고 자녀를 신앙으로 기르며 행복을 위하여 애쓰는 모든 일도
모험이고 위험한 일입니다. 믿고 기도하며 증언하고 사랑하며 용서하는 일들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를 가능성을 알고 인정해야 합니다.
탈렌트는 선물이고 유산이기도 하지만 책무이자 과제이기도 합니다. 어떤 신자들에게 세례는
마치 땅에 묻은 탈렌트와 같을 수 있습니다. 귀한 선물을 받았는데 그것을 뜯어보지 않고
방치하여 쓸모없게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고 사는데 주님은 무엇을 더 내게 바라시는가?’ 하고 말하지 맙시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사랑의 의무를 실행하며 아파하고 상처받더라도 끊임없이 주님께서 주신
탈렌트를 열심히 활용하기를 애타게 바라십니다.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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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1코린토 1,26-31 마태오 25,14-30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젊은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간 젊은이의 장례미사에 꼭 가고 싶었습니다.
오후 3시에 연도가 있고, 3시 30분에 장례미사가 있었습니다. 그날 저는 오후 3시에 바꿀 수 없는
중요한 약속이 있었습니다. 2시에 갔더니 다행히 예약시간이 아닌데도 서류를 받아 주었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일이 10분 만에 끝났습니다.
미리미리 일을 하는 저의 성격 때문에 장례미사엘 갈 수 있었습니다. 장례미사를 하는 동안
아들을 하느님의 품으로 보내야 했던 부모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신앙으로는 더 이상 슬픔도, 아픔도, 고통도 없는 하느님의 품으로 갔음을 믿지만
사랑하는 아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슬픔에 괴로워하는 부모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성당을 가득 메운 교우들과 함께한 사제들이 있었기에 그나마 위로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세상에 올 때는 순서가 있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그러기에 순간을 살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동안 달란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세상은 능력을 존중하고, 업적에 따른 보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이 발전하기 때문입니다. 회사는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보험사는 고객을 많이 유치한 직원에게 특별 수당을 주기도하고, 휴가를 보내 주기도 합니다.
회상에 공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한 직원에게는 진급을 시켜주기도 하고,
특별 포상금을 주기도 합니다. 그만큼 회사에 기여한 공이 크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능력과 업적을 세상의 기준으로 보상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성당을 많이 신축한 사제라고 특별 수당을 주는 경우가 없습니다.
선교를 많이 해서 세례를 많이 주었다고 더 큰 성당으로 보내는 경우도 없습니다.
수도자들은 장상을 했었지만 다시 평회원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능력과 업적이 있다고 해서 특별한 보상이나 특혜를 주는 경우가 없습니다.
오늘 문득, 달란트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시간의 길이는
우리가 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이는 100세까지 장수를 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한참 일 할 나이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불의의 사고로 일찍 하느님의 품으로 가기도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길이가 아닙니다. 오래 살았다고 하느님의 품으로 가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일찍 죽었다고 하느님께 가지 못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25년을 살았지만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유대철 베드로는 13년을 살았지만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시간의 길이가 아닙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에 무엇을 채워 넣느냐 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을 채워 넣어서는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원망, 불신, 탐욕을 채워서는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겸손, 순명, 청빈입니다. 희생, 자선, 기도입니다.
이런 것들을 채워 넣는다면 짧은 삶이었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속된 기준으로 보아 지혜로운 이가 많지 않았고 유력한 이도 많지 않았으며
가문이 좋은 사람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있는 것을 무력하게 만드시려고,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것
곧 없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지나온 날들을 생각하며 나는 주어진 시간에 무엇을 채우려 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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