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둘째 오빠 경석의 권유로 일본의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화가의 길에 들어섰다.
유학 이듬해 동경의 조선인 유학생 잡지 ‘학지광’(學之光)에 기고한
최초의 글「이상적 부인」에서 ‘양부현부(良夫賢父)의 교육법’이 없는
‘양처현모(良妻賢母)의 교육법’은 ‘여자에 한하여 부속물(附屬物)된 교육주의’라며
비판하는 것으로 페미니스트의 삶을 시작한다.
1916년 첫사랑 최승구(崔承九)가 병사한 빈자리에 다가온 남자가
상처(喪妻)한 기혼남 김우영(金宇英)이었다.
교토제대생 김우영은 도쿄를 오가며 열심히 구애했지만 당시 그녀의 관심은
남성과의 결혼이 아니라 ‘여성’과 ‘민족’에 있었다.
그녀는 1917년 ‘학지광’에 게재한 「잡감(雜感)-K언니에게」라는 글에서
‘내가 여자요, 여자가 무엇인지 알아야겠다.
내가 조선 사람이오, 조선 사람이 어떻게 해야할 것을 알아야겠다’라고 썼다.
이런 의식을 가진 나혜석이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3월 5일 이화학당 학생들의 만세 사건에 관계된 혐의로 체포되어
5개월 간 옥고를 치렀는데, 이 사건은 그녀에게 식민지 치하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존재를 깊이 각인시켰다.
1920년 1월 조선노동공제회의 기관지 ‘공제(共濟)’ 창간호에 실은 판화
‘조조(早朝)’에서 열심히 노동하는 남녀 농부들 위에 떠오르는 태양은
민족 해방에 대한 그녀의 갈구를 담고 있다.
그러나 나혜석은 민족해방 운동보다는 김우영과 결혼을 택했다.
1920년 4월 그녀는 ‘평생 지금처럼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前室) 딸과는 별거(別居)하게 해 줄 것,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 등의 조건이 받아들여지자
서울 정동예배당에서 조선을 떠들썩하게 한 결혼식을 올렸다.
시대를 수십년 앞서 살았으니 그 삶이 얼마나 고통이었을지... 이름답게 사셨네요.. 저도 요즘 조선왕독살하고 조선선비살해살건 읽고 있는데 가슴 치면서 읽고 있어요. 철학이고 사대고... 그 당시엔 그게 진리인줄 알았겠지만 그게 다 무에야... 어리석은지고... 속상합니다.
첫댓글 나혜석 정말..멋진 여성..그리고 그만큼 안타까운 사람
멋있네요 ㅠㅠ그리고 쫌 딴 소리지만 수원에 나혜석거리도 있다구..한달에 몇번씩 화가들? 그림전시 하고 그러던데..
삭제된 댓글 입니다.
33333 시대를 앞서간 여성이긴 하지만...... .. 너무 앞서가셧네 ;
잘읽었어요^^ 추천해 준 책도 꼭 읽어보고싶네요!
나혜석씨 나문희씨 고모맞져??
고모할머니로 알고있어요~^^
우와~또 그런 인연이...@@
어머 정말요? 우와....대단하네요!!
나혜석 책 읽어보면 최린 정말 나빠요..
이덕일 여인열전 베드에서 보고 찾아서 재미있게 읽었어요. 내가 좋았던 건 역시 미실과 어우동.으크크.
시대를 수십년 앞서 살았으니 그 삶이 얼마나 고통이었을지... 이름답게 사셨네요.. 저도 요즘 조선왕독살하고 조선선비살해살건 읽고 있는데 가슴 치면서 읽고 있어요. 철학이고 사대고... 그 당시엔 그게 진리인줄 알았겠지만 그게 다 무에야... 어리석은지고... 속상합니다.
나혜선도 친일쪽으로 기운 사람 아닌가요?나중에는..
저두 미술선생님한테 그렇게 들은것 같은,,, 암튼 가슴에 큰 열정을 품고 산 여인임에는 틀림없어요
좋은자료 잘 읽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