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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디아스포라
διασπορά는 헬라어에서 ‘흩어 뿌림, 흩어져 유랑하다’와 같은 의미로 쓰이는 단어이다. 이스라엘 역사를 통하여 볼 때, 이 말은 두 개의 중요한 역사적 사실에 사용되었는데, 첫째는 바벨론 포로 사건이요, 둘째는 유대 전쟁 후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표현할 때이다. 바벨론 포로 사건은 영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었지만,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출애굽 이후 최대의 시련이요 치욕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이 시기를 통하여 유대교를 정착시켰으며, 종교적으로,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체험을 하였다.
한편 유대 전쟁이 있은 다음 흩어진 유대인에 대한 연구는 유대교적 입장에서는 율법의 보전과 연구, 그리고 유대교의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으며,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복음의 전파와 초대교회의 성립이라는 면에서 아주 중요하다. ‘하르낙’(Harnack)은 유대 전쟁 후 로마제국 내에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의 수가 약 4백만 내지 450만으로 추정하며, 학자들에 따라 6백만 내지 7백만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때 흩어진 유대인은 포로기 이후 팔레스타인 지방의 지배자였던 셀류커스 왕조나 로마의 정책에 의하여 이주했거나, 경제적인 상행위를 위하여 이주했던 사람들과, 한편으로는 정치적 탄압과 종교적인 이유로 이주했던 사람들이었다. 본고에서는 지면의 한계로 포로기에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에 대한 논의는 접어두고, 유대 전쟁 후 로마 제국 내에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에 대하여만 살펴보고자 한다.
I. 디아스포라의 배경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계약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땅이었다. 그러므로 이 땅은 이스라엘 민족이 지키고 가꾸고 정결하게 해야만 했다. 가나안 땅 중에서도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중심지는 역시 예루살렘이었다. 이곳은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곳이며, 희생 제사를 드리는 곳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 가나안과 예루살렘을 귀중하게 생각했다. 이들이 가나안 땅을 귀중하게 생각한 배경에는 축복에 대한 간절한 소망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으며, 그것은 곧 하나님이 주신 기업과 축복의 근거를 상실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생각은 이방 나라와 민족에 대한 배타적인 의식으로 성장했으며, 이방 나라를 불결하게 여겨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 나라로 이주하는 것은 더러운 이방 나라의 불결한 땅에 흩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A.D. 1세기경을 전후로 하여 로마 제국 내에는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보다 더 많은 유대인이 살고 있었다. 흩어진 유대인의 수가 이 시기를 통하여 이렇게 증가하고 확대되었던 원인으로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소가 작용하였다. 그 중에서 가장 표면적인 원인으로는 경제적인 빈곤이었다. 경제적인 빈곤의 문제는 척박한 가나안 땅에서 오랜 세월 살아왔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질적인 문제였지만, 포로기 이후 이방 민족의 지배가 계속되면서 가중된 경제적인 수탈은 가난한 민중들의 생존권마저 위협했다.
특히 이 당시의 세금은 시리아의 지배 아래서 생산한 곡식물의 ⅓이 바쳐졌다. 여기에 각종 세금이 부과되었는데, 로마의 지배 아래 있을 때에 이러한 상황은 거의 변함이 없었다. 더욱이 A.D. 67년에 시작된 제1차 유대 전쟁부터 A.D. 132~135년 사이에 있었던 제3차 유대 전쟁까지 계속되는 반로마 전쟁은 사회적인 불안과 함께 빈궁과 고통을 더해 주었다.
때문에 빈궁한 민중들은 자유와 부와 행복을 얻기 위하여 스스로 가나안 땅을 떠났다. 이들 이주한 유대인들은 대체로 북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나 소아시아 지방, 또는 시리아와 지중해의 상업 도시에 정착하여 살았다. 자발적인 이주 외에도 팔레스타인을 지배했던 여러 나라들에 의해서 강제로 이주된 경우도 있었다. 예컨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던 유대인들 중에는 페르시아에 의하여 압제가 풀렸음에도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지 않고 정착하여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보다 정책적인 차원은 헬레니즘 시대에 팔레스타인 지방을 지배했던 셀류커스 왕조에 의하여 실시되었다. 셀류커스 왕조는 소아시아와 시리아 지방에 헬라적인 새 도시들을 건설했는데, 유대인들이 이 도시들에 이주할 수 있도록 광범위한 특권을 부여하여 옮겨 살도록 권장하였다. 이 시기를 통하여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소아시아와 시리아의 여러 도시들로 이주하게 되었으며, 자녀 생산이 타민족에 비하여 많았기 때문에 인구수가 급격히 불어났다. 또 하나의 원인으로 로마에 의하여 이탈리아나 로마로 끌려갔던 포로들과 오랜 옛날부터 로마의 용병으로 이주했던 사람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용병에서 풀려났거나 노예에서 해방되었는데도 팔레스타인에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로마나 주변 도시들에 정착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로마에 살던 상당수의 유대인들을 바로 이들이었다.
이렇게 자발적으로나 강제적으로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의 수는 아구스도(아우구스티누스) 황제 시대에 로마 제국 전체 인구의 7%에 달하는 450만이었다. 유대인들이 로마 제국 내에서 인구수가 급격히 불어났던 원인에는 로마의 정책도 큰 역할을 하였다. 즉 유대인 사회는 로마 황제로부터 병역이나 안식일에 재판에 참석하는 일과 같은 비 율법적인 일은 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락 받았으며, 독자적인 규례에 따라 생활을 하여도 되었다.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에는 이집트 전역에 산재된 소수의 유대인과 더불어 약 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실제로 독자적인 공동체 생활을 하였다. 로제(E. Lohse)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전부 순수한 이주 유대인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즉 로제(E. Lohse)는 말하기를, 이방 지역에 성립된 유대인 공동체에는 많은 수의 이방인들이 공동체에 참여를 하였는데, 아구스도 황제 때의 계수는 이들을 포함한 숫자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타당성을 가지고 있는데, 구약 시대 말기의 유대인의 숫자가 450만 명에 훨씬 못 미치는 데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분포된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지방의 이동 지역, 시리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소아시아, 헬라와 마케도니아, 이탈리아와 로마 등 전 세계에 흩어지게 되었다.
Ⅱ. 흩어진 유대인의 분포 상황
1. 팔레스타인 이동 지역
바벨론에 포로된 유대인들은 바벨론뿐만 아니라 주변의 메대, 엘람, 아르메니아, 파르티아 등지에도 분포되었다. 이 지역들은 헬레니즘이나 로마의 영향이 없었기 때문에 이곳에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 공동체는 여타 지역과는 다른 독특한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요세푸스 증언에 따르면, A.D. 1세기경에는 이 지역에 있는 유대인의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어쨌든 이들 유대인들은 대단한 호감을 받았으며, 공동체의 자유와 제도적인 보호를 받았다. 이 지역의 유대인들은 종교적(유대교적) 자만심이 대단했으며, 율법을 연구하고 장로들의 전승에 충실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에 의하여 A.D. 6세기경에는 일명 바벨론 탈무드가 만들어졌는데, 이 작품은 성경이 형성된 이후 유대교 문학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중요한 작품이다.
2. 시리아
팔레스타인 지역에 인접해 있는 시리아는 팔레스타인과의 지역적 관계로 일찍부터 이주민이 정착하여 살았다. 특히 셀류커스 왕조의 지배 하에 있을 때에는 이 왕조의 헬레니즘 정책으로 인하여 많은 유대인들이 시리아의 헬라적 도시들로 이주하였다. 다메섹과 안디옥은 대표적인 도시들이다.
3. 애굽과 알렉산드리아
애굽은 일찍부터 유대인의 이주가 있었다. 이 사실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글(참조, 렘 43장)인데, 여기에 보면 예레미야 당시에 벌써 애굽의 믹돌, 다바네스, 놉 등지에 유대인의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들은 이민족과의 동화와 바벨론 침략으로 인하여 포로로 끌려가기도 했으나, 남은 사람들은 유대교를 중심으로 공동체적 결속력을 유지하였다. 필로와 요세푸스는 애굽의 유대인들이 A.D. 1세기경에는 애굽 내의 강력한 소수 민족이었음을 증거한다. 알렉산드리아는 헬레니즘 시대에 발달한 도시로서, 애굽 내에서 유대인의 영향력이 가장 강력했던 도시였다. 이 도시의 유대인들은 많은 특혜를 누렸으며, 필로의 증언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의 독립된 두 개의 구역에는 유대인만이 살았다고 전한다. 이들 유대인들은 학자들에 따라 견해가 조금씩 다르지만, 완전한 시민이었거나 시민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필로의 추정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에는 약 1백만 명의 유대인이 거주하였으며, 강력한 유대교적 공동체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4. 소아시아
시리아와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도 셀류커스 왕조의 헬라화 정책에 의하여 헬라적 도시들이 건설되었다. 그래서 이 도시들에도 유대인의 집단 이주가 시행되었는데, 안티오커스 3세 치하에서 유대인 2천 세대가 집단 이주한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집단 이주가 셀류커스 왕조의 정치적 목적으로 시행되었지만, 이주된 유대인들은 재빨리 정착을 하였고, 강력한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5. 헬라와 마케도니아
이 지역은 시리아나 소아시아 지방보다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은 적었으나, 중요한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예컨대 신약성경에는 빌립보, 베뢰아, 고린도, 아테네, 데살로니가 등지에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음을 보여 준다. 구브로(키프러스)와 고린도, 데살로니가 등은 대표적인 도시들인데, 헬라인과 마케도니아인들이 사는 곳에서 유대인들은 큰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유대적 전통을 지켜나갔다.
6. 로마와 이탈리아
이탈리아 반도에 언제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이 얼마만큼 거주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명백한 자료는 없다. 단지 로마 시에 다수의 유대인이 존재하였기 때문에 반도 전역에로 소수의 유대인이 공동체를 형성하였으리라고 추측할 뿐이다. 로마에는 유다 마카비 시대이후부터 유대인들의 이주가 있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왜냐하면 유다 마카비는 B.C. 151년에 로마 원로원과 우호 조약과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했는데, 마카비 시대 이후로는 상호 외교관계를 목적으로 사절단이 오고 갔다. 이때를 전후로 하여 함께 갔던 사람들 중에 정착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나 로마에 본격적인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계기는 B.C. 63년경 폼페이우스의 유대 침공 후 잡아간 많은 수의 포로 노예들이 자유민으로 풀려 나와 로마에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하면서이다. 이 공동체에 A.D. 1세기까지 상인들과 여타의 다른 이유로 로마로 몰려든 유대인들의 회당을 짓고 상호 결속력을 강화하였으며, 이때 이후로 유대인 공동체가 더욱 견실해졌다. 요세푸스와 당시의 여러 학자들은 A.D. 1세기경 로마에 거주하는 유대인의 수가 4만 명에 달하였으며, 황제들과 로마 제국 내의 특혜로 더욱 번성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Ⅲ. 흩어진 유대인들의 성격과 특성
1. 정치적 성격과 특성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되어 세계 각지에 흩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계약의 백성 이스라엘 민족이라는 자긍심이 대단했다. 이들은 흩어진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유월절에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며, 성전세 납부를 계속했다. 이와 같은 일체감은 이스라엘 민족공동체의 결속에 큰 영향을 미쳤다. 흩어진 유대인 공동체는 지역과 나라마다 각각 특징을 가졌다. 어떤 유대인들은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여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수행하였으며, 공직에도 임명되었고, 어떤 공동체는 스스로 자치권을 획득하여 로마의 통치 아래서 자유를 누렸다. 특히 A.D. 1세기경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로마 시민권을 돈으로 구입하였으며, 이들은 로마 시민의 의무 및 군복무에서 면제받고 특권만 누렸다. 유대인 공동체는 회당이 모든 생활의 중심이었는데, 이 회당에서는 유대인을 보호 관리하고 교육하며 자체 내의 질서를 위해 재판도 실시하였다.
2. 사회 경제적인 위치
디아스포라 된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무척 가난했다. 이때에는 아직 유대인의 상술이 발달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상인이나 행상인, 농부, 장인 등 다양한 업종에 종사하였다. 때로는 지역에 따라 부유한 유대인들이 있기도 하였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은 경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적으로도 높은 위치에 있었으나, 이것은 극히 예외에 속한다.
3. 이방 민족의 반유대주의
경제적, 사회적으로 지위가 낮았던 유대인들은 로마 정부로부터는 비교적 호의를 받았으나, 로마의 식민지와 로마 시민들로부터는 반유대주의의 도전을 받았다. 키케로나 타키투스 등 로마의 문필가들은 반유대적인 글로써 유대인을 경멸하였으며, 소아시아와 시리아에 있는 안디옥과 다메섹 등지에서는 반유대적 폭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유는 유대인들이 식민지의 다른 사람들보다 로마로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것과 유대교의 배타적 성격으로 인한 지역 주민들과의 마찰, 그리고 사회 경제적으로 보잘것없음에도 불구하고 배타적인 생활 방식으로 자신들만의 공동체적 결속을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4. 문화적 보존의 능력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된 상황에서도 그들의 신앙과 전통을 고수하였는데, 학자들은 이 사실에 대하여 의아함과 원인을 규명하는데 고심했다. 특히 당시 사회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으로 대부분의 문화가 헬레니즘 문화에 동화되었는데, 오직 유대인들만이 문화를 보존하고 유지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여기에는 두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 유대인들은 헬레니즘 문화의 외형은 수용하였으나, 본질적인 내용은 보존했다는 설이고, 둘째 유대인들도 회당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토대로 볼 때, 사상과 생각들이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 준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확실한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알렉산드리아의 필로나 팔레스타인 주변의 상황을 비추어 볼 때 헬레니즘의 영향이 상당히 깊은 부분까지 유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종교적인 정통성과 개종 운동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들이 유대교에 지나치게 비정통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회당을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예배와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년에 한 번씩 있는 예루살렘 순례를 하였기 때문에 본토에 있는 유대인들과 종교상으로 커다란 차이점이 없었다. 이는 바울이 전도 여행을 하면서 유대인의 거주지 및 회당에서 만난 유대인들이 정통 유대교적인 신앙을 유지한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참조, 행 21:17~29).
세계 각 지역의 유대인 공동체가 굳건한 신앙을 유지함에 따라 유대교 안에도 이방인 개종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때의 개종자들의 숫자는 상당수에 달했는데, 타키투스와 같은 사람은 사람들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것을 탄식하기도 하였다. 아무튼 이방인들이 유대교로 개종했던 이유는 당시의 쾌락적이고 퇴폐적인 사회 풍조와는 달리 유대교는 금욕적이고 경건한 신앙생활과 강력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방인 스스로 이 공동체에 참여하고자 했으며, 유대인들도 자신들의 선교가 이방인에게 빛이 된다고 생각하여 선교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Ⅳ.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과 초대교회 형성의 상관성
디아스포라라는 역사적인 상황은 기독교의 선교와 교회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특히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들로부터 이루어진 성경의 번역과 회당의 성립, 유대인 공동체의 형성, 이방인에 대한 선교, 로마로부터의 법적인 인가 등은 아주 밀접하게 초대교회의 선교와 성립에 도움을 주었던 요소들이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는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를 하나님의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한 섭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면 여기에서는 위에서 언급했던 중요한 몇 가지 요소를 들어 디아스포라와 초대교회의 성립과 선교의 상관성을 살펴보겠다.
첫째, 성경의 번역 즉 70인역(LXX)의 번역은 초대교회의 성립과 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 이 70인역(LXX) 성경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인데, 당시 지중해 연안의 대표적인 언어가 헬라어였기 때문에 헬라어로 번역된 성경은 이방 지역의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널리 읽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 전도자들은 70인역(LXX) 성경에 친숙한 이방인들에게 전도함으로 인하여 복음 전파에 보다 많은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둘째, 이방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 공동체에 거의 필수적으로 세워졌던 회당은 선교에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이방 지역에 있던 회당은 팔레스타인에 있던 회당보다 더 많은 기능(생활의 중심지, 교육, 문서고, 예배)을 담당했으며, 초대교회의 선교사들은 회당을 중심으로 전도 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가장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던 장소였던 것이다. 특히 초기 선교사였던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는 우선적인 선교 전략이 유대인에 대한 선교였기 때문에 회당과 선교의 상관성은 가장 밀접했던 것이다.
셋째, 유대인들은 자신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전도를 하여, 많은 이방인들을 개종시켰는데, 이방인들 중에는 유대교의 각종 규례와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개종은 하고 싶으나,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초대교회의 선교사들이 전하는 복음을 쉽게 받아들였던 사람들이며, 고넬료나 유스도, 리디아 같은 사람이 여기에 속한다.
넷째, 유대교와 로마 정부 사이의 좋은 관계는 기독교 선교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왜냐하면 유대교내에서는 기독교를 배척하였지만 이방인들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동일한 종교로 보았기 때문에 선교 초기에는 로마 정부의 직접적인 탄압을 받지 않았다. 그래서 법적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특권을 누리고 있던 유대교처럼 초기 기독교도 비교적 종교적 특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디아스포라는 하나님이 세계 선교를 하시기 위한 섭리였으며, 유대인에게는 자신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의 기간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적 입장에서는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으로 인하여 복음 전파가 가능했으며, 초대교회의 성립이 디아스포라 된 유대인을 기반으로 되어졌던 점에서 중요시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그리스어: διασπορά)는 '흩뿌리거나 퍼트리는 것' 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특정 인종ethnic 집단이 자의적이든지 타의적이든지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현상을 말합니다.
유목과는 다르며, 난민 집단 형성과는 관련되어있습니다.
'디아스포라'는
본토를 떠나 항구적으로 나라 밖에 자리잡은 집단에만 사용합니다.
(난민 외에도 노동자, 상인, 제국의 관료로서 이주한 사례도 디아스포라에 해당합니다)
'디아스포라 문화'는 원주지역 사람들의 문화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디아스포라 집단'에서 문화적 결속은 흔히 이들 집단이 언어 변화에 대해 집단적으로 저항한다거나
고유의 종교 의식을 계속 유지하는 등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 기원과 발전
디아스포라가 처음으로 언급되는 부분은 신명기 28:25의 추방에 대한 내용인 "그대가 이 땅의 모든 왕국에 흩어지고"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 기원전 607년 바빌로니아인들과,
기원후 70년 로마 제국이 유대 지방에서 유대인들을 쫓아내는 부분에서 '디아스포라'라는 낱말이 쓰여 이 말이 지금의 의미를 얻게 되었습니다.
'디아스포라'는 이스라엘의 유대인 민족 집단이 해외로 흩어진 역사적 현상과 그들 집단 그 자체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아시리아인들이 피정복민에 대해 장래 이들이 자기네 몫의 땅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사민정책(徙民政策)을 펴면서 이 낱말은 용례가 확대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해외 식민시로 이주한 중심 도시국가의 시민들을 일컫는 말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근대 '디아스포라'는 1876년의 '그리스 디아스포라'입니다.
서로 다른 기원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민족이 섞인 피난민들도 '디아스포라'로 불리기도 하지만
'피난민'과 '디아스포라'는 동의어가 아닙니다.
영어에서 '디아스포라'란 낱말은 1950년대 중반부터 널리 쓰이게 되어,
상당수의 인구 집단이 다른 특정 국가나 지역으로 쫓겨나 오래 살게 되는 데에도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디아스포라' 가 가지는 의미의 범위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습니다.
윌리엄 사프란William Safran은 '디아스포라'와 이주 공동체를 구별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디아스포라'를 구성원들이 특정한 조건을 공유하는, 고향을 떠난 소수 공동체로 정의했습니다.
사프란이 주장한,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특정한 조건' 은
첫째로 구성원들이나 구성원들의 조상이 원래 살던 본원지에서 두개 이상의 주변지역이나 외국으로 흩어지고,
둘째로 본원지에 대한 집합적인 기억과 신화를 보유하며,
셋째로 그들이 현재 살고 있는 곳에서 완전히 받아들여지지 않아 사회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느끼고,
넷째로 그들의 본원지를 조건이 만족되면 되돌아 가야할 진정한 고향으로 여기며,
다섯째로 집단적으로 본원지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본원지를 유지하거나 복구하는데 힘써야 한다고 믿으며,
여섯째로 그들의 본원지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민족적 공동체 의식과 단결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 디아스포라의 사례
□ 유대인 디아스포라
오늘날 이스라엘 지역 바깥으로 흩어진 유대인들이나 유대인 공동체를 총칭합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세계 도처에 흩어진 물리적인 현상을 가리키지만,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과 자신들과의 특수한 관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종교적·철학적·정치적·종말론적 의미를 함축하기도 합니다.
이 관계에 대한 해석은 마지막에 '유배당한 자들을 한데 불러모은다'는 전통적 유대교의 메시아 희망에서부터,
하느님이 세계 전역에 순수한 유일신앙을 촉진하기 위해 유대인들을 흩어놓았다는 개혁 유대교의 견해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최초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BC 586년의 바빌로니아 포로 때문에 생겼습니다.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유대 왕국을 정복한 뒤 유대인 가운데 일부를 노예로 삼아 끌고 갔습니다.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페르시아의 키루스(고레스) 대왕이 BC 538년 유대인들에게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했을 때 유대인 공동체 가운데 일부는 자발적으로 유배지에 머물러 살았습니다.
초기 유대인 역사에서 가장 크고 중요하며 문화적으로도 가장 창조적이었던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번성했는데,
BC 1세기 그곳의 인구 가운데 40%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AD 1세기경에 팔레스타인 바깥에 살던 유대인들의 수는 대략 5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가운데 4/5는 로마 제국 안에서 살았지만, 팔레스타인을 자신들의 종교생활과 문화생활의 중심지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은 AD 70년 예루살렘이 멸망하기 전에도 이미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의 수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뒤 유대교의 주요중심지는 바뀌었으며(예를 들면 바빌로니아·페르시아·스페인·프랑스·독일·폴란드·러시아·미국),
유대인 공동체들은 점차 뚜렷이 구별되는 언어·의식·문화 들을 받아들였는데, 그중 어떤 공동체들은 다른 공동체들에 비해서 비유대교적 환경 속으로 보다 철저히 빠져들어갔습니다.
어떤 공동체들은 평화롭게 살았지만, 다른 공동체들은 격렬한 '반유대주의anti- Semitism'의 희생이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유대인 디아스포라'들의 역할과 민족적 동질성을 유지할 필요성 및 그 중요성에 대해서 매우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정통파 유대인들은 시온주의 운동(유대인들의 이스라엘 귀환 운동)을 지지하는 반면,
일부 정통파 유대인들은 현대의 이스라엘은 하느님이 미리 정하신 때에 자기의 메시아를 보내려는 뜻을 방해하는 불경건하고 세속적인 국가로 여기고 그것에 반대합니다.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지하는 '셀릴라트 하갈루트'(shelilat ha-galut:유배를 부정함) 이론에 따르면,
'디아스포라' 안에서의 유대인의 삶과 문화는 동화(同化)와 문화적 특성의 상실로 말미암아 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으며,
이스라엘로 이민하는 유대인들만 유대인으로서 존속할 희망을 갖는다고 합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러한 입장을 비롯해 이스라엘에 호의적인 다른 어떤 입장도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의 성립이 메시아 시대의 도래에 관한 성서 예언의 성취라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개혁파 유대인들은 미국을 포함해서 다른 여러 곳에 사는 '디아스포라'가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전히 주장하지만,
1937년 미국 랍비 중앙협의회는 유대인들이 더이상 이스라엘로 귀환할 소망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선언한 1885년의 피츠버그 강령을 공식적으로 폐지했습니다.
이 새로운 정책은 유대인들에게 조국 수립을 지원하도록 적극 장려했습니다.
그러나 1943년에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유명무실해진 '미국 유대교 협의회'는 유대인은 종교적인 의미에서만 유대인이며,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의 고국에 주는 일체의 지원은 그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불충스런 행위라고 선언했습니다.
유대인 국가 설립을 위한 지원은 종종 박애적인 이유만 가지고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유대인들이 대량으로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난 뒤로는 본격적으로 늘어났습니다.
오늘날 전세계에 사는 약 1,450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310만 명 가량이 이스라엘에, 590만 명 이상이 미국에, 그리고 210만 명 이상이 소련에 살고 있습니다.
□ 집시 디아스포라
인도 북부지역에서 기원한 민족인 집시Gypsy는 꾸준한 이주를 통해 11세기에 페르시아에,
14세기 초에는 유럽에 노예로서 공급되었습니다. 이들은 로마니어를 사용하며 고유 언어와 문화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대개 떠돌아 다니는 생활을 하면서도 공동체를 유지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박해를 받는 경우가 많았으며, 여러 국가로부터 추방당하기도 했습니다.
□ 아일랜드 디아스포라
19세기에 아일랜드인은 영국,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메리카 등지로 많은 사람이 이주했습니다.
이주의 규모는 당시 아일랜드 인구의 45% 에서 85% 사이로 추산됩니다.
이주의 주요 원인은 아일랜드 대기근 때문입니다.
아일랜드 대기근 외에도 종교적 차별, 산업 약화, 강제퇴거 등을 디아스포라의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합니다.
□ 아프리카 디아스포라
노예 무역은 자주 노예들을 먼 곳까지 이동시켰습니다.
그 중에서도 16세기부터 본격화된 대서양 노예 무역은 중서부 아프리카 흑인 원주민을 대규모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구가 유럽인들의 전염병으로 심각하게 줄고, 유럽 세계에서 설탕과 담배등 상품작물의 수요가 늘자 흑인들의 강제 이주가 더 늘어났습니다.
18세기까지도 꾸준히 증가한 노예 무역으로 수많은 흑인들이 고향에서 벗어난 채 비참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한편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 노예제가 폐지되면서 노예제에 대한 의견 대립과 흑인과 백인 사이의 사회적 갈등이 문제로 떠올랐습니다.
이에 19세기 초에 미국 식민 협회의 후원으로 자유민 흑인과 해방 노예가 라이베리아로 이주하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초에는 마커스 가비 등이 중심이 되어 아프리카 복귀 운동이 펼쳐졌습니다.
■ 디아스포라의 영향
한 국가가 경제적으로 낙후되었거나 경제적 위기를 맞이하였을 때,
자국 출신의 디아스포라에 경제적 지원을 받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과 인도는 경제적 위기를 맞았을 때 디아스포라 채권을 발행하여 도움을 받았습니다.
2011년에는 재정 위기를 맞은 그리스 정부도 디아스포라 채권을 발행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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