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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도청 사수대, 여성 시민군 - 이윤정
‘화려한 휴가’는 5.18 광주항쟁시 광주초토화 임무를 부여받고 투입된 계엄군의 진압 '작전명'입니다. 그 많은 어휘 중에 왜 하필이면 ‘화려한’ ‘휴가’라는 단어를 골랐을까.. 그 작전명 속에 군부독재자들과 그 수하 군 수뇌부의 오만함과 잔인함 그리고 뻔뻔스러움이 스며있어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마치 왜놈의 명성황후 시해 작전명 ‘여우사냥’을 듣는 것처럼 말입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는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닌 영화 속 9인의 캐릭터를 통해 27년 전 그날의 모습을 관객들에게 생생하게 전해준다 합니다.
31세의 시민군 지도자 윤상원, 그는 도청 사수대를 이끌고 최후까지 저항하다가 계엄군의 총탄에 무참히 스러졌지만, 그의 분노와 그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와 함께 그는 전남도민, 광주민주시민 그리고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뜨거운 열정처럼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1980년 5월 26일, 죽음을 하루 앞두고 광주항쟁 시민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 자격으로 외신기자들과 회견을 가진 故 윤상원 열사에 대해 미국의 ‘볼티모어 선’지의 브래들리 마틴 기자는 1990년대 중반 그의 기사를 통해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에게 강한 충격을 준 것은 바로 그의 두 눈이었다. 코 앞에 임박한 죽음을 분명히 인식하면서도 부드러움과 상냥함을 잃지 않는 그의 눈길이 인상적이었다.”
광주의 영웅들은 모두 평범한 시민들이었습니다.
그 분들 모두 영웅입니다. 모두 사실상 항쟁의 주역이었지만, 자신의 목소리로 스스로의 공과를 말하지 못합니다. 이미 고인이 되었거나, 아니면 살아남은 죄책감으로 침묵 속에 살아온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느 구석에 담겨진 자료를 통해 그 분들의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그 혹독한 시절, 쉽지 않았을 세월의 아픔을 감히 마음에 그려 봅니다.
영화밖 실존 영웅들 - 도청 최후의 사수대 여성 시민군 - 이윤정
이윤정. 당시 25살이었던 그녀는 광주 YWCA의 간사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YWCA에서는 70년대 투옥된 민주인사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송백회(松柏會·소나무와 잣나무같이 늘 푸르고 기백이 있는 모임이라는 뜻)를 조직하였고 주로 구속인사 부인, 운동권 학생, 단체 활동가 등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여성들 20여명이 회원으로 참여하였습니다.
5.18이 일어나기 전까지 송백회는 광주·전주·대구 교도소에 수감 중인 양심수 및 민주구속인사들을 위해 털양말을 짜거나 농성현장 식사제공, 영치금 모금, 백제야학 비품마련 등 활동영역을 넓히는 가운데 회원도 50여명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5.18 민주항쟁이 터지자 이들은 시민군의 밥을 해 먹이고 투사회보를 만드는 등 전설같은 활약을 펼치게 됩니다.
송백회.. 5.18의 소용돌이에 깊이 휘말렸던 이들은 이후 죽음·구속·수배·질병·이혼 등 온갖 고초와 고난의 길을 겪게 됩니다. 조아라(YWCA 회장·작고), 이애신(YWCA 총무·작고), 정현애는 구속되고, 정유아·임영희는 수배를 피해 도망다녀야 했으며, 여성 시민군으로 도청 최후 사수를 하였던 이윤정은 전국수배자 명단에 오르고, 신군부의 수사망이 좁혀들면서 송백회는 해체의 운명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조직의 틀 없이도 생활 속에서 오월 광주의 정신을 실천하고 구속자 가족의 상처를 어루만지는 데 정성을 쏟습니다. 회원들의 도피처와 살림집은 5·18의 진실과 운동권의 가요를 녹음해 배포하는 거점이 되고, 수배자들의 도피 자금과 도피 장소를 마련하는 등의 활동을 펼칩니다. ( 그로인해 송백회 회원들은 시국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번번이 수사선상에 오르내리기를 반복합니다. )
광주항쟁 파장막기위한 신군부의 그물망식 검거작전
사진의 인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러 행보를 거쳐 우리에게 낮익은 인물도 적지 않네요.
오모씨 김태홍 이병주 정태기 김홍업 박정훈 계훈제 안희대 박계동 김규복
1982년 이윤정은 '80년 도청항쟁지도부' 일원이었던 죄로 기소되어 징역2년, 집행유예 2년의 실형을 받습니다.
끝없이 치루어야 했던 민주운동의 댓가
시의원이 되기 2년 전인 1989년, 조국에서 야만스러운 군사정권의 폭정을 안타까워하며 매년 5월 독일에 모여 민중제(추모제)를 치러오던 유럽거주 민주인사들은 그해 광주시민군 가운데 마지막까지 현장에 남아 있던 인물 중 한명을 초청키로 하고 당시 민중항쟁동지회 수석 부회장을 맡고 있던 이윤정씨를 독일로 초청하게 됩니다. 그녀는 유럽 전지역을 40일간 돌아 보면서 많은 민주통일 인사들을 만났고 교류하게 됩니다.
이역만리에 있는 그들로부터 조국에 대한 사랑과 통일에 대한 뜨거운 염원을 보며 감동을 받은 그녀는 이듬해 5.18 동지회장을 맡으면서 5.18의 전국화와 세계화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였고, 그 사업의 일환으로 해외 민주화 인사 초청 등 국제교류 연대사업을 본격화 하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1990년 5.18 행사때 송두율, 정규명, 윤은섭, 곽동의씨 등 해외인사의 초청을 시도하지만 좌절되었고, 대신 정규명 박사(유럽 한국민족민주운동연합 의장)의 연대사가 도청 앞 5월 행사 때 낭독됩니다. 그후 광주는 해마다 해외인사에 대한 초청노력을 벌였으나 초청대상자 대부분이 반국가단체 성원으로 분류되고 있어서 성사가 쉽지 않았고 이윤정은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해외인사 초청사업의 단초를 제공했던 이윤정은 이후 '공안정국'(김일성 사망이후 전개된 조문 파동과 박홍씨의 주사파 발언 등으로 조성)의 와중에서 일본 사회당 당수와의 정신대문제 협의 그리고 해외 민주화운동 인사들과의 교류가 문제가 되어 1994년 8월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됩니다. 이후 1998년 2월 석방되기까지 그녀는 광주 및 청주여자교도소 등에서 옥고를 치릅니다.
30여년의 재야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통해 반독재투쟁, 우리 민족의 자주교류와 평화통일운동, 주민자치운동 등을 전개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오직 정도만을 걸어온 민주 여전사 이윤정은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여 여성중앙위원으로 활동하며 전남.광주지역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노무혀니즘을 외치고 있습니다.
2004년, 대통령 탄핵에 실패하여 거대한 역풍을 맞고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민주당, 마지막 구원투수로 나선 추미애가 망월동까지 3보1배에 나섰습니다. '그런다고 용서가 되겠냐' 혹은 '쇼하지마라' 등 반응은 냉담하고 싸늘했지만, 그래도 바닥에 온몸을 던지는 모습에 가슴이 '짠~'했던 것이 광주사람들의 여린 마음이었습니다. 이때 상복 차림으로 '탄핵무효' 피켓을 들고 뒤를 따랐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이윤정입니다.
그녀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27년 전 광주 금남로에서 밥을 지어 나르고, 투사회보를 찍어 내고, 부상자들을 돌보던 '오월의 누이'들과 함께 이 땅에 민주화를 위협하는 세력들이 완전히 소멸될 때까지 그리고 민주영령들이 뿌리고 간 씨앗들이 완전히 꽃 피울 때 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80년 5월 광주는 용광로였습니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5월의 광주에서 분노의 목소리로 사자후를 토하던 사람들, 카빈으로 계엄군의 장갑차에 맞선던 사람들.. 이들은 27년이 지난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요. 광주민주화 항쟁의 주역은 '광주 시민들'입니다. 계엄군의 잔혹한 학살을 목격하고 의분을 참지 못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졌던 용감한 광주시민들 그들이 바로 주역입니다.
무용학원 강사였다가 광주항쟁에 참여한 차량을 타고 시내 전역을 돌아다니며 애절한 목소리로 심금을 울렸던 전옥주 차명숙, 시민군에 취사를 제공한 송백회, 로케트전기 여성노동자들, 그리고 피투성이되어 밀려오는 부상자들을 눈물을 흘리며 치료하던 의사와 간호사들.. 그들 모두 우리의 영웅입니다.
도청 최후 사수대 여성 시민군 이윤정, 그녀 또한 우리의 영웅입니다.
ⓒ 독고탁
5.18 항쟁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고 역사적 사실을 간직한 분들이 고인이 되니 많은 사실들도 함께 묻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성이 화자(話者)가 되면서 남성 중심의 역사로 조명되었던 느낌도 없지 않았습니다. 하여, '5.18과 여성'이라는 관점에서 한번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광주항쟁의 주역은 평범한 광주시민들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앞으로 '화려한 휴가'가 개봉되고 우리 사회가 많은 담론을 쏟아내리라 생각됩니다. 100억을 투입한 블록버스터가 천만명 관객을 돌파할지 초미의 관심사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우리가 그동안 무심하게 놓쳤던 부분들과 외면했던 부분들 그리고 꼭 조명해야 할 많은 과제들을 다시 찾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첫댓글 원두막님 참조 하시길~
나는 안 되던데. 내가 201호에 살고 있다면 한봉형은 101호. 박관현은 103호. 박효선은 206호에 살고 있어요. 참 사이좋은 사이이지요.
201호 사시는분 참 잘 생기셨네요. 지금은 신고를 할래도 못하겠어요 얼굴이 넘 달라서
끝까지 잘 읽었습니다. 이윤정님의 생에 한없는 존엄을 느낌니다. 이윤정님이 그토록 싸웠던 옛 전남도청이 허물어질 위기에 있습니다. 한번 방문해 주시면 용기를 얻겠습니다. 옛전남도청지키기(http://cafe.daum.net/5.18jikim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