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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1일
루카 1,39-45
자기를 긍정하려면 성당 다녀도 소용없는 이유
저에게 지금 교황님이 거의 이단이라는 식의 카톡을 보내오는 분이 계십니다.
세례명도 있고 신자인데 어떻게 사제에게 계속 교황님을 거의 악마처럼 여기는 이들의 글을
보낼까요? 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알아보지 못할까요?
예수님은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를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하늘 나라 열쇠를 지닌 베드로가 계시고 사도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교황이시고 사도들은 주교들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파견하신 이들 안에 은총이 있음을
알아보지 못하며 성체나 고해성사한다면 효과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은총은 그것을 알아보는 이들만의 것입니다.
KBS Joy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아프다며 돈 요구하는 집 나간 엄마, 도와드리는 게 맞을까요?’
라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사연자는 초4 때 엄마가 집을 나가셨는데, 최근에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운을 뗍니다.
엄마는 이혼했을 때 한 달 정도 아빠가 큰 사고를 당해 자신들을 한 달 동안 돌봐줘야 했는데, 병원에 있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아빠에게 애 돌봐주는 값으로 100만 원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또 고3 때 약 3개월을 함께 생활했는데 같이 살던 집 보증금을 다 까먹었다며 천만 원을 달라고
요구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천만 원, 언니는 300만 원 주고 인연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지막 말처럼 딸의 양심을 건들며 돈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도와주지 못해 엄마가 죽으면 장례식에서 친척들에게 날아올 따가운 시선이 두렵다고 합니다.
서장훈은 “평생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으면서 고작 스무 살짜리 딸한테 겨우 석 달 생활했다고 천만 원을 내놓으라는 엄마가 사람이냐?”라며 크게 격분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일한 부모인 엄마를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는 사연자에게 서장훈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고 “이거 보통 일이 아니야, 너도 네 삶을 찾아.”라고 충고합니다.
사연자는 잘 받아들이고 기분이 좋아져서 떠났습니다.
은총을 받으려면 자신이 찾아온 사람 안에 은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를 부정하고 그 말을 따릅니다.
만약 자기가 옳다는 마음으로 은총을 받겠다면 어떨까요?
절대 그 은총이 은총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이런 사연도 나왔습니다.
사연자는 14년 동안 서울 올라와서 한 달에 약 천만 원씩 열심히 일한 청년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 결혼도 못 하고 나이가 마흔이 다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속초 고향에 내려가야 할지, 아니면 돈을 서울에서 더 벌어야 할지가 고민입니다.
보살들은 묻습니다.
지금 돈을 얼마나 저축해 두었느냐고. 의외로 적습니다.
14년 동안 모은 돈이 고작 1억 5천입니다. 사기당하고 투자를 잘못해서 다 날려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집이 세 채나 있고 가게를 차릴 땅도 있습니다.
보살들은 어머니의 그 땅이 탐나서 그러는 것 같아 의심스럽습니다.
1억 5천으로는 건물을 짓고 식당을 차리기에도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서 한 달에 천만 원씩 버니까 조금 더 자주 어머니를 찾아뵈라고 조언합니다.
그러자 상담하러 온 사람은 어머니가 자주 오는 것도 귀찮아하신다고 말합니다.
아프신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는 제주도와 일본 여행이 계획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온 것일까요? 자기가 이런 처지라는 것을 이해해 달라는 것밖에 안 됩니다.
또는 귀찮아하는 어머니가 땅을 자신에게 주고 좀 도와주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미 결론을 내리고 보살들을 찾아왔다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형이 둘이 있는데 한 명은 어머니와 같은 동네에 삽니다.
아무리 조언해주어도 다 튕겨내는 이 다 튕겨내는 이 사람에게 서장훈과 이수근은 말투부터 고치라며 “그렇게 답을 잘 알면서 여길 왜 왔어. 네가 알아서 해!”라고 소리 지릅니다.
위 여자 청년은 “엄마 걱정하지 말고, 네 행복을 찾아!”라고 하는 말에 위안받고 웃으며 갔습니다.
그러나 아래 남자는 욕만 먹고 갔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래 사람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서 왔고 위 청년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은 알 수 없어서 해답을 들으려고 온 사람입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상담하다 보면 많은 경우 자신의 옳음만 어필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해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정당화하고 싶어 합니다.
은총을 주려는 이 앞에서 자기를 긍정하면 은총은 부정하는 것입니다.
말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순종과 함께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버리라는 말과 단어가 다릅니다.
나를 부정해야 주님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나를 긍정하는 이에게는 성령께서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 못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총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모님 안에 하느님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었다면 그녀는 자기를 부정하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 주인만 섬길 수 있고 그래서 하나의 ‘나’만 긍정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긍정하려는 이들은 성당에 나와도 은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자기 긍정을 위해 이용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 21일
루카 1,39-45
친절과 환대와 공감의 효과!
특강을 하러 꽤 먼 장거리 여행을 했습니다.
요즘 대목이라 피곤이 많이 누적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성당에 도착하고 자상하신 신부님과 교우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니...쌓였던 피로가 눈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친절과 환대와 공감! 얼마나 사람을 기분좋게 하고 기를 살리며 살맛나게 하는 원동력인지!
힘겨운 여행 끝에 아인카림에 도착한 마리아께서도 엘리사벳의 극진한 환대와 배려에 순식간에 여독이 풀렸습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 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한 사람은 이제 겨우 열 서너 살 먹은 소녀입니다.
더구나 정식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혼모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의 여인은 더 황당했습니다.
너무나 쑥스럽고 머쓱해서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산모인 엘리사벳의 나이는 가임연령을 넘어도 훨씬 넘어 이제 인생을 마무리지어야 할 그런 나이였는데 아기를 가졌습니다.
두 분의 만남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어이없고, 정말로 이해할 수 없고, 정녕 황당한 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맞이하며 교회 역사 안에 길이 남을 찬미의 송가,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2월 21일 강론>
(2023. 12. 21. 목)(루카 1,39-45)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이 이야기는,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에게 한 말들은 틀림없는 진리라고 엘리사벳이 ‘증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사는 인류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성모님에게 전해 준(루카 1,26-38) ‘첫 번째 증인’이고, 엘리사벳은 그 일을 다시 확인해 준 ‘두 번째 증인’입니다.>
그 일은, 어떤 일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정 지으려면 둘이나 세 증인이 증언해야 한다는(마태 18,16; 신명 19,15) 율법에 연결되는데, 그 율법은 범죄 사실을 확정 지을 때뿐만 아니라 복음 선포에도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 일도(마르 6,7) 바로 그 율법에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일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냥 단순히 인간적인 판단으로, 또 개인적인 이유로 방문하신 것이 아니라, 엘리사벳이 증언을 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가셨을 때에도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4,1).>
아마도 성모님께서는 ‘성령 잉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요셉 성인에게 알리셨을 것이고, 그 다음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엘리사벳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리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일은 단순한 친척 방문이 아니라,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한 일이었고, 성모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는 셈입니다.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라고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성모님께서는 의례적인 인사만 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 잉태’ 사실과, 메시아의 구원 사업에 관해서 천사가 알려 준 말들도 모두 전하셨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마리아가 전해 주는 ‘기쁜 소식’을 듣자 엘리사벳은 크게 기뻐하였다.”입니다.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라는 말은, 엘리사벳의 큰 기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고, 구원에 관한 기쁜 소식은 인류 전체에게 큰 기쁨을 주는 소식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 자신의 기쁨도 나타냅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큰 소리로 외쳤다는 말은, 성령의 힘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외쳤다는 뜻이 아니라, 성모님이 전해 주신 기쁜 소식의 의미를,
‘성령의 인도’로 깨달았고, 믿었고, 그래서 기쁨에 넘쳐서 찬양했다는 뜻입니다.
<깨닫는 것까지는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지는 일이겠지만, 믿고, 찬양하는 것은 인간 쪽에서 자유의지로, 또 능동적으로 하게 되는 일입니다.>
여기서 ‘여인들 가운데에서’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입니다.
성모님은 남자들을 제외하고 여자들 가운데에서만 복되신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입니다.
성모님이 가장 복되신 분이 되신 이유는, 하느님께서 구세주(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시려고 한처음부터 뽑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 태중의 아기, 즉 예수님이 복되신 분인 이유는,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내 주님의 어머니” 라는 말은,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신(메시아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내 주님’이라고 고백한
첫 번째 신앙인입니다.
<우리 교회가 성모님을 “천주의 성모(하느님의 어머니)” 라고 부르면서, 해마다 1월 1일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메시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안 믿는 종교는 이단입니다.>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라는 엘리사벳의 말은, ‘메시아 강생’에 대한 기쁨을 나타낸 말입니다.
따라서 ‘저에게’ 라는 말은, 뜻으로는 ‘저희에게’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두 어머니의 만남이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사적인 만남으로만 보이지만, 뜻을 생각하면,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한 ‘공적인 방문’입니다.>
45절의 “행복하십니다.”는 “복되십니다.”로 바꿔야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받으신 분이라는 찬양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천사가 전해 준 말들을,
즉 인류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뜻과 계획 등을 가리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 준 말들 가운데에서, 성모님이 특별히 선택되었고,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는 말은, 과거와 현재의 일을 나타낸 말이지만,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또 예수님께서 하실 일들은 모두 미래의 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까지도,
또 먼 미래의 일들까지도 모두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복되신 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