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벌레는 언제 쯤 나비가 될까?
박연숙
중학생 때 나의 별명은 책벌레였다. 수업이 끝나면 마음에 드는 책을 대출 받으려고 부리나케 도서실로 달려갔다. 1960년대 말의 우리 학교 도서실은 교실 한 칸을 반으로 나눈 읽을 만한 책도 별로 갖추지 못한 열악한 시설이었다. 내가 이렇게 도서실을 열심히 드나든 데에는 평소에 책 읽기를 좋아도 했지만 글솜씨가 있으니 대학은 국문과를 가라는 국어 선생님의 칭찬 때문이었다. 도서실의 웬만한 책은 다 읽었다. 나중에는 겉멋이 잔뜩 들어 뜻도 모르는 두께가 10센티미터 정도나 되는 셰익스피어 희곡집도 빌려보았다. 지금 생각하니 정말 낯 뜨거운 일이다.
우리의 청소년기는 대다수의 사람이 먹고 살기 바빠서 교과서나 참고서 외의 책을 사서 읽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한 시절이었다. 처음으로 내가 책을 사게 된 것은 참 재미있는 사건이었다. 남쪽의 예쁜 꽃들이 봄소식을 알리는 4월 초순인데도 깊은 산골에는 난데없이 창밖으로 봄눈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이제 겨우 발령을 받은 지 한 달이 지난 새내기 선생은 윗분들과 동료들이 함께 하는 교무실이 몸에 맞지 않은 새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고 불편했다. 눈 둘 곳이 없어 벌겋게 달아오른 조개탄 난로를 응시하다가 용기를 내어 교무실 창가에 붙어 서서 내리는 눈을 멍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길을 헤치고 온 집배원 아저씨가 우편물을 주고 가셨는데 사환 아가씨가 내 것도 있다며 엽서를 건네주었다.
‘봄의 향기가 아름다운 계절입니다.
발령을 축하드립니다. 새로운 인연을 꿈꾸며 수일 내로 찾아갈게요.’
엽서의 인쇄된 우표 옆에는 노란 압화가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글씨체는 남자 같은데 누구일까?
나의 발령과 임지는 어떻게 알았을까?
예쁜 꽃까지 붙여 보내온 그가 무척 궁금하고 설레기까지 했다.
수일이 지나고 정말 그가 왔다. 월급날에 맞추어 찾아온 그는 월부 도서판매원이었다.
새로운 인연과의 상상의 나래에 실망이 컸지만, 축하엽서를 보내준 감사함과 화장실까지 쫓아오는 그의 열정에 못 이겨 한국문학전집 12권과 세계문학전집 20권을 샀다. 낯선 곳에 혼자 뚝 떨어져 비 맞은 참새처럼 오들오들 떨리고 추웠던 그 시절 나의 헛헛한 마음을 잘 저격한 그의 상술의 쾌거였다.
2018년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지정한 책의 해이다. 2017년 국민독서실태조사에 의하면 지난 1년간 일반 도서를 한 권이라도 읽은 사람은 59.9%라고 하니 10명 중 4명은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학창 시절에는 장르를 불문하고 보이는 대로 다독을 했으나 요사이는 책과 많이 멀어졌다. 서점에 가본 지도 오래고 집에 있는 책도 저자에 대한 나와의 다름과 편견으로 읽다가 말거나 바쁨을 핑계로 아예 못 읽은 책이 점점 쌓이고 있다.
7월 말에 동네 도서관에서 기초영어 회화 수업을 듣고 종강을 하면서 설문조사를 했다. 올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본 횟수와 권수를 묻는 항목이 있었다. 인문학 강의 등 교양강좌는 여러 개 들었지만 강의와 관련된 책을 빌려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책을 직접 읽기보다는 강사의 잘 정리된 지식을 편하게 듣는 것으로 만족하는 나의 게으름이 부끄러운 통계 수치에 일조한 것 같아 창피했다.
책은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고 보물창고이다. 어느 가정에 80권 정도의 책이 구비되어 독서 환경이 조성되어 있으면 그 집 자녀들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대학 졸업 수준의 문해력과 수리력이 생긴다고 교육 방송에서 대담하는 것을 들었다. 요즈음 나는 유아도서를 열심히 읽고 있다. 이야기 할머니로 어린이집에 봉사를 하러 가기 때문이다. 다섯 살 꼬맹이들의 책에도 삶의 지혜와 많은 교훈이 담겨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책과 친해질 수 있도록 수준에 맞는 쉬운 책, 재미있는 책을 골라 캐릭터의 분위기를 살려 실감나게 읽어주려고 반복연습을 한다. 한때는 시간만 나면 읽을거리를 찾던 책벌레가 지금은 눈이 침침하다, 바쁘다, 두 줄 읽으면 한 줄 반은 잊어버리고 생각이 나지 않는다 등 핑계의 껍질에 둘러싸여 꽉 막힌 알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 이야기 할머니를 계기로 도서관을 찾고 준비과정에서 여러 책을 읽으며 활력을 찾게 되었다. 책벌레에서 그쳤던 나의 책 사랑이 좀 더 성숙하여 번데기가 되고 고운 나비가 되어 아이들과 같이 깔깔거리며 아름다운 동화의 세상으로 함께 날아오르고 싶다.
2018.11.18
첫댓글 책 벌레가 번데기 기간이 너무 길었군요. 그래도 이제 예쁜 나비가 되어 아름다운 동화의 세상에서 아이들과 함께 날아오르시는 모습이 너무 좋습니다. 벌레 중에는 그래도 책벌레가 가장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도서관에서 책읽기를 좋아하던 책벌레가 이제 나비가 되어 어린이들을 도와주는 뜻깊은 일을 하고 계시는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책과 관련된 초임시절의 에피소드에서 책판매원은 책벌레 선생님을 잘 공략한 부분도 있지만 객지생활에 쓸쓸하고 외로움을 달래는데는 책만한 친구도 없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에벌레에서 작은 나비로 변모하셨으니 이제 훨훨 날아 오르며 아동들을 잘 인도해 주시면 되시겠습니다. 선생님의 봉사와 노력에 찬사를 보내드립니다.
발령 받고 가면 가장 먼저 인사를 해 주는 낯선이가 책 파는 아저씨였던 경험을 잔잔히 잘 표현하셔서 마치 제 추억인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켜 입가에 미소가 번집니다. 책을 사랑하시는 책벌레님, 아름다운 동화와 함께 나비가 된 이야기 할머니를 맞이하여 행복한 웃음을 뿜어내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이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감사합니다..최상순드림
우리 젊을 때는 전집류 판매원이 학교마다 방문했었지요.
어떻게 알았는지 늘 그들의 표적이 되어 열권, 스무권의 책 대금으로 시달렸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야기 할머니(새댁)의 꿈 꼭 이루시기 바랍니다.
선생님께선 이미 나비가 되셨습니다. 동화를 읽어 주는 할머니,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할까요? 아이들이 귀가 솔깃하며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를 기다리는 장면을 생각하니 저도 흐뭇해집니다. 저도 학교로 찾아온 책 판매원의 전략에 말려 세계 문학, 한국 문학 전집을 들여 놓았는데 비교적 잘 활용하여 읽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읽어 보고 싶어 책을 꺼내드니 양장본에다 4.6배판(B5)크기, 두꺼운 두께를 감당할 수 없어 그림의 떡이 되는 것 같습니다. 공감하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선생님의 책사랑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그시절엔 도서외판원이 참 많았습니다. 몇 권 사 본 기억이 납니다. 저도 공부는 못 하지만 책은 좋아 합니다.
이미 나비가 되셨네요. 어린이집 봉사를 통해 꼬맹이들과 동화의 세상으로 훨훨 날고 계시니 말입니다. 말단 시절 북 세일 외판원의 권유를 뿌리치지 못해 봉급에서 책값이 떼어나간 적이 있었습니다. 집안 살림이 어떻게 꾸려지고 있는지도 모르는 철없는 양반이라고 아내로부터 잔소리를 들었던 게 엊그제 같건만...., 그때가 그립습니다. 공감하면서 잘 읽었습니다.
대단합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봉사는 가장 적합할것 같습니다. 착한성품에 목소리까지 좋으셨어 아이들이 행복할것 같습니다. 그 많은 독서량이 선생님을 마음의 부자로 만드신것 같습니다. 기대를하며 잘 읽었습니다.
새로운 인연을 꿈꾸며 찾아오는 이에 대해 궁금했는데 반전이었네요~ 결과적으로 책벌레 선생님에겐 풍성한 선물이 되었습니다. 저도 교무실로 찾아온 도서 외판원에게 산 전집 책이 아직도 집에 있습니다. 이제 나비가 되셔서 아이들에게 꿈과 행복을 실어나르는 모습이 참 좋습니다.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책은 스승, 보물창고"라는 내용에 동감합니다. 좋은 글 잘 앍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벌레와 나비의 관계를 형상화하는 발상이 신선감을 줍니다. 벙래가 나비가 되는 것은 당연한데 그 기간에 차이가 있겠지요. 어린 시절 책 벌레가 여류 수필가가 되었으니 벌써 나비가 된 셈이네요. 이제 훨훨 날아다닐 일만 남았읍니다. 꿈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학창시절부터 늘 책과 함께 해 온 선생님의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이제 나비가 된 선생님께서 꼬마 애벌레들에게 동화를 통해 꿈을 심어주고 계시니 너무나 보람되시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과 비슷한 경험을 저도 있습니다. 시골중학교에 처음으로 도서책을 진열하던해 책을 빌려 밤새껏 할머니 방에서 읽었지요. 호롱불 밑에서 읽고나면 코밑이 서커멓토록 국어시간에 책안에 넣고 읽다 눈길이 다른곳에 둔것을 안 선생님께서 나를 지적해 읽어라면 페이지를 몰라 허둥댔답니다.지나간 시간들이 그립습니다. 비슷했던 지난 시간들을 보낸 사람끼리 만난곳이 지금 우리들인가 봅니다.선생님께서는 벌써 애벌레가 변해 호랑나비가 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