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1코린토 8,1ㄷ-7.11-13 루카 6,27-38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어렵다고,
그래서 예수님 말씀을 실천하려면 상당한 노력과 깊은 신앙심이 있어야 한다고들 말하겠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원수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우리는 복음 말씀의 실천이
어렵다고 합니다. 성급히 단정 지어 말하자면, 원수는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닐까 합니다.
다른 이가 내뱉는 몇 마디로 원수라 규정하고, 이웃의 불편한 행동 몇 가지로 ‘웬수’를
만들어 버리는 우리의 옹졸함이 상상의 원수를 매일같이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막바지에서 원수를 사랑하는 이유를 이렇게 정리하십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원수를 사랑하겠다는 결기는, 우리가 때로는 타인을 너무나 차갑게 심판한다는 것을
전제하는데, 이를 기억해야 합니다.
서로 뜻이 다른 것을 두고 ‘틀렸다’ 말하고, 비판이라는 미명 아래 비난을 일삼고서,
그럼에도 나는 용서하고 사랑한다고 낯 뜨거운 언행을 밥 먹듯 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니까요.
우리가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은, 우리 존재의 목적과 이유를 위한 것이지
타인의 잘잘못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아버지처럼 자비롭게 되는 것, 나의 용서로 나의 삶이 사랑으로 풍요로워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사랑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애당초 원수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겠지요.
원수는 내 마음이 만든 우상입니다.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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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귀웅 토마스 신부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1코린토 8,1ㄷ-7.11-13 루카 6,27-38
무지렁이의 신앙
시골 본당 어디나 고령화가 심각합니다.
젊은 사람들이 희망을 가질 일자리가 없으니 당연할 것입니다. 처음 시골 본당에 부임해
미사를 드리기 시작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좀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신자들이 주보도 가져가지 않고 성가책도 없이 멍하니 서서 입당하는 사제를 맞고 있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이유를 알았습니다. 어르신들 대부분이 글을 모르거나
노쇠하시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소공동체 모임에 가 보아도 성경을 읽을 줄 아시는 분이 열에 한두 분도 되지 않습니다.
복음을 두 번 세 번 읽어드려도 어떤 구절도 다시 되뇌이질 못하십니다.
그래서 올 초부터 소공동체 모임 때에 예화를 들려주고 그와 비슷한 경험들을 나누게
하였더니 훨씬 말문이 쉽게 열렸습니다.
성경도 읽을 줄 모르고 금방 들은 말씀도 기억하기 어려워하지만, 양심에 따라 살아가며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면서 기꺼이 희생하고 그러고도 자신을 내세울 줄 전혀 모르는
삶의 모습들이 펼쳐집니다.
한여름 뙤약볕이라도 제초작업 한다고 하면 모자 쓰고 손에 호미 쥐고 성당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일하시다가 일 끝나면 슬그머니 사라지시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배운 것과 사는 것의
차이를 다시 생각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성장하게 합니다.
서울대교구 김귀웅 토마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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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1코린토 8,1ㄷ-7.11-13 루카 6,27-38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세상에는 내가 잘했던 잘못했던,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거나 내 뺌을 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에게 어떻게 대응하나요? 만약 우리가 그들을 사랑하기를 멈춰버린다면 그것은
중책이요, 그들이 한대로 되돌려주거나 보복한다면 그것은 하책이요,
악을 선으로 갚는다면 그것은 상책입니다. 우리는 어떠한지요? 상책을 행하고 있는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 행복’을 선언하신 뒤에 제자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윤리를
말씀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황금률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느님의 자비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남이 너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루카 6, 31)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루카 6, 36)
대상을 가리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본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미 자비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미 받아서 가진 존재이기에,
그것을 내어줄 수가 있습니다. 곧 하느님께서 당신 자비의 거룩한 형상을 우리 안에 심어놓으셨습니다.
그러니 자비로운 사람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형상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느님의 자비의 얼굴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것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네 가지 동사로 표현하십니다.
“심판하지 말라.”, “단죄하지 말라.” “용서하라.”, “주어라.”
앞의 둘은 하책을 행하지 말라는 것이요, 뒤의 둘은 상책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앞의 둘을 행하게 되면 나빠지지는 않지만 그저 그 자리에 머물 것이요,
뒤의 것을 행하게 되면 우리 안에 심어준 하느님의 형상으로 돌아가 거룩하게 해줍니다.
곧 심판하지 않고 단죄하지 않는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한 것은 아니지만,
용서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은 이미 심판과 단죄를 벗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우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요,
하느님의 뜻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곧 타인들 앞에 자신을 앞세우지 않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다소곳이 내려놓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우리 안에
베풀어진 하느님의 자비가 울려 퍼져 타인에게 흘러들게 될 것입니다.
이미 자신 안에 들어온 용서가 울려 퍼져 타인을 용서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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