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암종택 가는 길
서정문
맑은 물이 산자락을 휘감아 돌며, 햇살을 등에 업고 굽이굽이 흘러가는 길. ‘청산(靑山)은 엇뎨하야 만고(萬高)에 푸르르며, 유수(流水)는 엇뎨하야 주야(晝夜)에 긋디 아니난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萬古常靑) 호리라’. 퇴계가 지은 ‘도산십이곡’의 첫 연이 등장하는 그 길을 걷는다.
도산서원 입구를 지나 개울 소리 따라 안으로 한참 들어가면, 농암종택이 나온다. 작은 고개를 지나면 산세가 낮아지면서 제법 너른 농토들이 맞아준다. 휘돌아 가는 강, 아니 개울이라고 해도 좋을 맑은 강이 산자락을 휘둘러 내려가고, 그 옆으로 작은 길이 따라 흘러간다. 오르막길에 서면 건너편에 바라다보이는 고즈넉한 정자가 있다. 우측으로 절벽을 끼고 물이 돌아가는 강물을 바라다보면서 나지막하게 선 정자, 고산정이다. 정자 마당에는 탱자나무가 오랜 시간을 말해주는 듯 주렁주렁 풋탱자를 매달고 있다.
물길은 어쩌면 이리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흘러가는 것인가. 곁을 허락하여 낸 조붓한 길은 또 어떠하고. 길은 물길을 따라, 능선의 아랫도리를 휘돌아 가면서 오래전부터 걸었을 발자국을 덧대어 다시 길을 만들어내고 있다. 간혹 바위가 숨을 멈추는 곳에 아늑한 쉴 공간을 만들어 주는 여유. 그곳에 앉아 강물을 바라보면 동쪽에서 내린 햇살은 은빛 강물에 눈이 부시게 비치며 물과 어우러져 새 생명을 만들어내고 있다. 강물은 햇살과 몸을 뒤섞어가면서 생명을 잉태하듯 소리내기도 하고, 또 고요히 어깨를 겯기도 한다. 강바닥에 바위 하나라도 있으면, 그 바위에 몸을 비비면서 고요하게 지나온 침묵의 시간을 위해 소리를 내어 노래한다.
강을 따라 농암종택으로 가는 길, 그곳을 멀리서 보면 곡선의 모양이다. 강이 흘러가는 대로, 물길이 일러준 대로 길을 내고 있다. 그 길은 오래전 우리의 선조들이 길을 낼 때, 강을 따라 내라고 이야기라도 들은 듯, 그 흐름대로 길을 만들었다.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순간순간은 늘 직선으로 살아야 했다. 내가 지금 걸어가는 이 길을 짧게 바라보면 언제나 직선이었다.
그러나 그 길을 되돌아보면, 결코 직선만은 아니었다. 바르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늘 바르게 길을 걸어야 했다. 선조들도 그 길을 그렇게 걸어가며 바른 삶을 생각했으리라.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산을 보고, 그 흘러내린 능선을 생각하며, 강물이 흘러가는 대로 걸어갈 일이다. 그 강을 따라 흘러가는 길을 걸어볼 일이다. 때로는 나무들도 만나고, 숲길에 가려진 숨겨진 길도 맞닥뜨릴 것이다. 그러나 강은 길을 잃었다고 생각할 때, 물소리로 길을 일러주고, 흰 물줄기로 내일을 열어준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농암종택은 자연의 순리에 적절하게 지어진 집들이다. 서로 손을 모아 강의 흐름과 나란하게 자리를 잡았다. 산세를 따라 능선과 강의 중간쯤에서 그 장점들을 고루 껴안고 있다. 서원에 서면, 강은 가슴을 내어 보여준다. 가식 없이 오늘을 살라 하는 메시지 같다. 눈을 들어보면, 건너 절벽 아래, 물이 흐르다가 천천히 맴을 돌 듯 원을 그리며 흐른다. 살아가면서 저렇게 다른 사람들의 어깨를 둥글게 감싸 안아주라는 의미로 보인다.
종택 담장을 오른편에 끼고, 강물의 은빛 물줄기를 왼편에 잡고 걸어보면, 강물은 절로 어깨를 들썩이며 소리를 높인다. 아래로 흘러갈 때, 가끔은 낙차 큰 삶의 길에 조심도 하라는 듯하다. 실망하지 말고 다시 고요히 흘러갈 시간이 머지않았음을 일러주며 어깨 두드려 주라는 것이다. 소리를 내며 흘러가면서 물이끼를 걷어내고, 고이지 말라고 일러주는 것이다. 언제나 흘러가면서 새로운 길을 열고, 새로운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웃음을 띠라고 하는 듯하다. 그 물소리는 바로 사람과 사람들이 만나서 소리를 내는 웃음소리가 틀림없다.
길, 사람들이 굴착기를 사용하여 닦지 않아도 좋다. 몇 사람이 가는 길이 바로 내가 갈 길이요, 나의 아이들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 길은 순리라는 목전으로 안내할 것이며, 그 쌓인 두툼한 발자국을 엮어 탄탄한 내일을 안내해 주고 있다. 비가 그친 뒤, 아직 마르지 않는 질경이 가득한 길을 걸어보자. 물이 중간중간 고여 하늘이 맑게 비치고 있다. 들풀들이 어떻게 서로 손을 잡고 절로 자라는지 눈여겨볼 일이다.
하늘을 바라보지 않아도 길에 고인 물에 비친, 언제나 아름다운 하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강물이 흘러가는 언저리에 눈부시게 비치는 햇살을 보면, 하늘이 절로 맑음을 한결같이 내려 보내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오르는 계단에 앉아 건너편 능선을 바라보면, 아득한 시절 저 강물에 첨벙대며 놀았을 새끼 공룡의 귀여운 발가락도 보일 것이다. 무수히 바위에 찍힌 발자국들 사이, 가을 국화가 피어 있는 것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강물을 따라 산자락을 걷고 걸어가면, 천천히 걸었을 그 옛날의 농암도, 퇴계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거기 그 자리, 그 길. 새끼 공룡이 걸었던 길. 농암과 퇴계가 오래 걸어 삶의 지혜와 자연의 순리를 터득했던 길. 걷다가 앞이 막히면, 물길이 손을 잡아 바로 일러주는 길. 그 물길과 오솔길이 어우러져 삶을 올바른 곳으로 이끌어 주는 길. 처진 어깨를 붙잡고 일어서게 하는 생명의 길이다. 마음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울 때, 어디론가 훌쩍 떠나 내일을 위한 충전을 하고 싶을 때, 농암종택 가는 길을 걸어볼 일이다. 농암이 걸었고, 퇴계가 다녔던 그 길을 걸어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