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가 신문을 읽다/ 박재희 초여름이면 포도가 서서히 익어간다 농부는 포도에 신문지로 만든 봉지를 씌운다 빼곡히 적힌 기사들 푸릇한 포도송이에게도 철지난 신문이 배달되었다 세상에 무슨 일들이 일어났을까? 시끄러운 사건들이 포도알에 박힌다 푸른 눈알을 반짝여 본다 기름 냄새에 절은 눈알들 무엇일까? 무엇일까? 까막눈으로 읽고 또 읽고 …… 달포가 지나 오늘 신문에 자신이 주인공이 된 <**포도축제> 기사가 크게 났다 머지않아 그에게도 사건이 일어날 것 같다 감싸고 있던 신문기사를 북북 찢고 시끄러운 세상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다 시집 『쟁기』 (시와반시, 2007) ...............................................................
여름 과일의 여왕격인 포도가 본격적으로 출하되고 있다. 이 시에서는 의인화된 포도가 출하를 앞두고 세상 소식을 전하는 신문을 읽었다. 정확히 말하면 신문이 아니라 구문이고, 요즘은 신문지로 포도송이를 감싸지도 않는다. 포도에게 봉지를 씌우는 이유는 병충해와 폭염으로부터 과일의 손실을 막고 농약이 묻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다. 지금은 규격 봉지가 따로 나와 편하긴 한데, 시에서처럼 포도가 신문을 해독한다면 읽을거리가 없어져 심심해할 지도 모르겠다. 아닌 게 아니라 포도 알을 보면 데굴데굴 눈동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포도 먹을 때의 느낌을 순하디 순한 짐승의 눈망울을 씹는 느낌에 비유한 장옥관의 시도 있다.
오랫동안 경기 남양주에서 포도농사를 지었던 류기봉 시인은 재작년까지 매년 19차례나 포도밭 예술제를 열었다. 그때 바흐나 모차르트의 음악을 듣고 자란 포도들은 유난히 탱글탱글하여 풍성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음악에 따라 와인 맛이 달라진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기는 어느 된장마을에선 된장을 숙성시킬 때 주인장이 직접 연주하는 첼로 음악으로 한층 더 깊은 맛이 든다고 하지 않았던가. 어디 포도와 된장뿐이랴. 물조차 음악에 따라 입자가 변한다는 사실을 현대과학으로 증명한 걸 보면 모든 생물들은 미세한 변화에도 영향을 받고 반응이 달라지리란 것은 충분히 유추할 수 있겠다.
어쩌면 그 포도에게도 말끔한 봉지와 신문지의 차이, 같은 신문지라도 기사의 내용에 따라 포도 눈동자의 움직임이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세상 그 어떤 책보다 많은 철학을 담고 있다는 와인의 모체인 포도의 눈으로 어지럽고 시끄러운 기사만 대한다면 과연 그 맛이 제대로 들겠나 싶다.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과일로 인식되고 있는 포도는 비교적 고급의 과수 작목이다. 포도농사 자체의 수익성도 일반 과수에 비해 높은 편이지만, 과거 토지가 수용되어 보상이라도 받을라치면 조금이라도 보상을 더 받기 위해 맨땅에 마구 심어대었던 게 포도묘목이 아닌가. 그런 값나가는 과수라 지능지수가 특별히 높은 걸까.
고영민의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란 시가 있다. 산길에서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을 뒤져 휴지를 찾는데 휴지가 될 만한 종이라곤 증정 받은 신작시집 한 권이 전부. 한 장을 북 찢어 밑을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구기고구기고 또 구겨서 결이 부들부들해진 휴지를 갖다 대는데 부드럽게 읽혔다고 했다. 신문이든 시집이든 세상의 어떤 책이든 종이에 활자가 인쇄된 것은 사람만이 아니고 포도가 고양이가 된장이 똥구멍이 읽고 세상만물이 다 읽나니, 읽어서 눈을 더럽힐 것들은 아예 생산되지 않는 편이 좋겠다. 대표적인 포도축제인 '영동포도축제'가 다가온다. ‘시끄러운 세상으로 튀어나올’ 그들의 눈망울이 궁금하다.
권순진 |
출처: 詩하늘 통신 원문보기 글쓴이: 제4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