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儒學)은 본질적으로 실천철학이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이념을 현실 속에 구현하는 것을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는다. 유학이 추구하는 이상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도(道)를 현실세계에 실현하는 것이다.
◆선비들이 추구하는 이상향은?
유학자인 조선의 선비들은 이 같은 이념을 바탕으로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사는 조화로운 공동체 질서를 이 땅에 일구어 나가기 위해 애를 썼다. 성리학적 정신을 현실 속에 전면적으로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유학의 본향인 중국에서도 실현하지 못한 일들이다.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30대의 선비들이 주축이 된 기묘사림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퇴계 이황이 '중종조의 현인과 군자'로 표현한 기묘사림은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해 이 땅의 정치`사회`경제 분야는 물론 정신 질서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인 변화를 지향했다.
이들의 꿈은 하늘의 이상을 지향하는 조화로운 공동체 질서, 즉 대동사회(大同社會)의 구현이었다. 유교적 이상사회를 추구했던 조광조와 기묘사림, 그리고 이를 주목한 퇴계에 관해서는 고카와(小川晴久) 일본 도쿄대 교수도 중요하게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오래전 '퇴계학보'에 기고한 글에서 '퇴계는 조광조가 소학으로 인재를 기르고 향약으로 백성을 교화하는 방법의 올바름과 그 자신을 규율하는 엄격함을 높이 평가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성리학(주자학)의 핵심개념은 理(리)이다. 그것은 우주만물의 존재 근거인 동시에 운행의 법칙이며 인간이 따라야 할 표준이다. 성리학에서는 그것을 하늘(天)에다 귀의시킨다. 천즉리(天卽理) 즉 하늘이 곧 理라는 것이다.
理는 인간세상을 초월하는 지존의 존재라는 점에서 천주교의 '하느님'(神)과 플라톤의 '이데아', 헤겔의 '절대정신'에 비견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理는 서양의 지존들과는 달리 인간의 내면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도 "인간의 본성이 곧 理(性卽理)"라고 했다. 理는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내재적인 개념임을 말해준다. 성리학의 이상은 이러한 理를 세상에 구현하는 것이다.
퇴계학 연구가인 김호태 씨는 '헌법의 눈으로 퇴계를 본다'란 저서에서 "理가 인간의 형상을 하고 나타난 것이 성인(聖人)"이라며 "모든 사람이 더불어 사는 사회 즉 대동사회가 바로 理의 사회적 표현"이라고 했다. 그래서 성리학에서는 理는 철학의 출발점이며 또한 종결점이기도 하다.
퇴계는 이 같은 理를 이기론적(理氣論的)으로 표현하며 유교적 이상사회를 추구했다. 하늘의 이치(天卽理)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본성(性卽理)에도 내재하는 理는 다름 아닌 인의예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퇴계는 그래서 사화(士禍)가 빈발하던 16세기와 같이 타락한 기(氣)가 압도하는 절망적 구도를 떨치고, 도덕과 정의의 표상인 理가 우위에 서는 세상을 열기 위해 사림과 선비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 같은 성리학 이념을 향촌사회에 보다 구체적으로 접목하고자 했는데 그 방편이 바로 향약이었다. 향약(鄕約)은 조선시대 향촌사회의 자치규약으로 시행 주체나 규모 및 지역 등에 따라 향규(鄕規), 향헌(鄕憲), 동약(洞約), 동계(洞契), 동규(洞規), 촌약(村約) 등 명칭과 내용이 다양했다.
근본적인 취지는 모두가 유교적인 예속(禮俗)을 보급하고 농민들을 향촌사회에 동화시켜, 토지로부터 이탈을 막고 공동체적인 결속을 강화해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려는 것이었다.
향약을 보급하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가 이루어진 것도 16세기 중종대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사림파에 의해서였다. 훈구척신세력의 향촌사회에 대한 수탈과 비리가 심화되자 훈척들의 지방통제 수단으로 이용되던 경재소(京在所)와 유향소(留鄕所) 등을 철폐하는 대신 향약의 시행을 적극 제안한 것이다.
이는 소농민경제의 안정을 바탕으로 한 중소 지주층 즉 사림을 중심으로 향촌 지배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향약은 기묘사화로 일단 좌절되었으나 사림파가 정권을 장악한 선조대에 와서는 각 지방의 여건에 따라 서원(書院)이 중심이 되어 향촌(里) 단위로 시행되었다.
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당시 농촌경제와 삶의 방식에 주자가례나 사창제 혹은 향약이나 동약과 같은 주자학적 통치원리를 어떻게 착근할 것인가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이 있었을 것"이라며 "생로병사 등 삶의 본질적인 질문에 대해서도 불교나 당시의 기존 신앙들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우월한 대답을 해줄 수 있어야 했다"고 말한다.
정 교수는 16세기 경북지역의 한 사례로 의성 김씨 가문을 든다. 학봉 김성일의 아버지인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경우 가문에서 가장 중요시한 사업의 하나가 주자가례와 소학이 제시하는 예교를 향촌사회에 그대로 실행하는 것이었다는 지적이다.
청계는 문중의 성원들이 서민의 기존 습속이나 상인들의 잡스러운 놀음을 따라하지 못하게 했다. 또한 무속과 미신에 대해 단호한 태도를 취하고 동리의 신당을 철거했으며, 부모상(喪)에 주자가례를 준용하는 등 유학적 예교를 일상생활에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이 같은 내용은 청계와 다섯 아들의 문집인 연방세고(聯芳世稿)에도 기록되어 있다.
선비들은 당시의 무속신앙이 세상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대로 못해 준다고 생각했으며 그 새로운 대안으로 주자 성리학을 농촌사회 깊숙이 끌어들이고자 했다. 주자학적 예론이 당시의 농촌 문화를 좀 더 합리적으로 조직할 수 있고, 삶의 보편가치를 제시하는 데 유용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경북 선비들은 선구자였다
16세기 경북지방에 형성되기 시작한 선비집단은 이렇게 새로운 철학 사조를 수용하는 일에 매우 적극적인 엘리트 계층이었다. 이러한 성리학적 수용을 한 차원 높은 삶의 철학으로 승화하고 조선 고유의 철학으로 이끌어 간 인물이 퇴계 이황이다.
퇴계는 중국의 북송(北宋) 시절 향촌을 교화`선도하기 위해 만들었던 자치규약인 여씨향약(呂氏鄕約)의 강령 즉 '좋은 일은 서로 권하고(德業相勸), 잘못은 서로 바로잡아주며(過失相規), 예속으로 서로 사귀고(禮俗相交),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서로 도와준다(患難相恤)'는 취지를 살려 조선의 실정에 맞는 향약을 제시했다.
이것이 예안향약(禮安鄕約)으로 오늘날 지방의회의 조례와 같은 성격을 지닌 것이다. 퇴계의 예안향약을 증보해 향촌사회에 구체적으로 실행한 경북의 선비가 바로 영`정조 때 인물인 최흥원이다.
평생을 팔공산에 은거하며 당시 영남 유림사회를 이끌었던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이 시행한 향약이 유명한 부인동향약(夫仁洞鄕約)이다. 부인동향약은 조선시대에 가장 성공한 향약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가 살던 마을 이름인 옻골을 따 칠계(漆溪) 선생으로도 불렸던 백불암은 퇴계 학맥을 이은 대산 이상정, 남야 박손경과 함께 영남삼로(嶺南三老)로 추앙을 받은 유학자이자 경제지사(經濟之士)였다.
정진영 안동대 교수(사학과)는 "경제지사란 나라를 경영하고 민생을 구제할 수 있는 선비를 말한다"며 "당대의 대유학자요 정치가였던 안정복과 채제공이 그런 평가를 내렸다"고 소개한다. 안정복이 백불암의 성과를 두고 "말학(末學)들은 천박하여 다만 입과 귀만 숭상하는데 공은 근본을 돌이켜서 오로지 실천에 힘을 쏟았다"며 학문의 내적인 수양과 더불어 외적인 실천에도 노력한 점을 주목했다는 것이다.
백불암이 35세 때인 1739년(영조 15년)에 시작한 부인동향약은 이후 200여 년이 넘게 지속되었다. 팔공산 부인사 아랫동네인 시골마을, 오늘날 대구시 동구 용수동 일대에서 진행된 향약은 조정에까지 알려져 정조 임금이 칭송하는 전교를 내릴 정도였다.
양반 중심 사회체제의 모순이 드러나고 농촌사회에 새로운 욕구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던 18세기에 시행된 부인동향약이 오랜 세월 성공적으로 계속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그것은 농민들의 생활안정을 우선 고려하면서 유교적 이상사회를 실현하려 한 의지에 있었다. 백불암은 향약을 통해 양반들의 신분적인 특권과 유교적인 예속을 강요하기에 앞서 농민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먼저 해결하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그래서 선공고(先公庫)와 휼빈고(恤貧庫)라는 제도를 창안했다. 향약에서 기금과 토지를 마련해 농민들의 세금을 대납해주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농사지을 땅을 주선해 주기 위한 것이었다. 즉 선부후교(先富後敎:먼저 생활의 여유를 제공한 뒤에 예절을 가르친다)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백불암은 백성들의 삶의 문제에 주목하면서 유교적인 이상사회를 실현한 선비의 전형이다. 양반들만의 이상사회가 아니라 농민들도 함께할 수 있는 대동사회를 이루어내려 했다는 점에서 다른 지방의 여타 향약과도 차별화되는 것이다.
조선 선비들의 이상은 인간의 마음에 있는 본성(本然之性)을 되찾아 참된 나를 회복하고 마침내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었다. 경북 선비들이 특히 그러했다.
내성외왕(內聖外王) 즉 안으로는 성인의 세계를 꿈꾸고 밖으로는 왕도정치를 실현해 유가적인 유토피아를 이루는 것을 최후의 목표로 삼았던 것이다. 향약은 그 같은 이상을 항촌사회에서 실현하고자 했던 한 방편이다.
한 시대를 이끈 사회의 주체로서 진지하게 이상을 추구하며 학문과 행동을 일치시켜 나갔던 경북의 선비, 특히 문치주의 시대인 조선의 선비는 한국적 리더십의 전형으로 오늘날 우리 사회 지도층과 지식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