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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독립운동사 원문보기 글쓴이: 신동현
유정 조동호와 대한민국임시정부
李 炫 熙(본 사업회 회장: 성신여대 명예교수)
大韓民國 三年(1921년) 一月 一日 제1열 왼쪽부터 ~.전재순田在淳,김구金九,오희원吳希元,~,~,유기준 劉基峻,정태희鄭泰熙,김재덕金在德,김붕준金朋濬,엄항 섭 嚴恒燮,정재형鄭載亨 이시영李始榮,이동휘李東輝,이승만李承晩,손정도孫貞 吳永善,윤현진尹顯振, 서병호徐炳浩,조완구趙琬九 金容喆,~,송병조宋秉祚,양헌梁憲,조동호趙東祜이유필
2. 망명과 항일투쟁의 인식
3. 임시정부의 산파역과 정부의 수립선포
4. 사료편찬부의 설치와 기여도
5. 독립신문의 창간과 논설집필
6. 한중호조사의 조직과 참여
7. 한국노병회의 목표와 유정
8. 결론
1.서론
“1년 내 독립을 못하면 2년, 그도 못하면 3년 4년 내지 10년을 가더라도 한민족 2천 만이 다 죽기까지는 맹세코 기필코 우리의 신성한 국토 내에서 우리를 노예로 하는 원수의 왜 민족을 축출하고 말리라 함이 2천만 대한민족의 결심인 줄 알고 왜적은 전율할 지어다.” (유정 의 대전 국립현충원 묘 비문 어록)
애국혁명투사 유정 조동호(榴亭 趙東祜:1892-1954)는 우리나라가 국권을 일제에 탈취당한 1910년 전후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간 국내외에서 민족, 공산 사회 항일독립투쟁을 전개, 큰 성과를 거둔 대표적인 항일독립투사중의 한 분이었다.
그러나 그가 조국광복을 위해 항일투쟁에 일생을 분골쇄신, 헌신하였음에도 아직까지 그의 업적이 국민들 사이에 널리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유정이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27년사 중 수립초기 4년여 정도밖에 임정과 산하단체에서 주요 인사로 참여, 활동하였고, 이후에는 국내로 귀국하여 1945년 8.15광복 때까지 항일공산주의운동에 가담하였던 영향이 있었던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정의 60애국평생은 조국광복을 위한 응징작탄적인 항일투쟁가이자 혁명가로서 적극적이고 강인함의 실적을 표출하였고, 지속적인 투쟁의식을 서거할 때까지 간직했었다는 장점이 오늘의 유정을 진정한 애국자로서 그 위상을 높이 평가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유정 연구, 평가의 일환으로 필자는 이 논문에서 유정이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초대 의정원의원(제헌의원)과 그 산하단체의 주요 결사 지도인사로서 활발히 전개한 항일독립투쟁을 살펴 그 애국지사로서의 고귀한 위상을 인식, 평가해 보고자 한다.
2. 망명과 항일투쟁의 인식
유정 조동호는 18세가 되던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백주에 강점당하는 국치를 당하자 큰 충격 속에 조국광복을 위한 진로모색에 부심하였다. 이즈음 동대문밖에 살면서 고향 양평 묘곡을 왕래하던 몽양 여운형을 지우하게 되었는데, 그로부터 몽양이 서거할 때 까지 국내외에서 그와 수시로 상담 시국문제를 협의 토론하면서 탄압과 공포, 질곡의 식민통치하에서는 효과적인 광복투쟁을 펼 수 없다는 현실을 상호 인식하고 중국으로 망명길을 계획하게 되었다. 유정은 몽양과 함께 처음에는 멀리 구미로 건너갈 생각을 가졌으나 중국에서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난 것을 알게 된 이들은 문제의 해결을 중국에서 찾아보기 위하여 국제도시의 이로움이 있는 중국 상해로 망명할 계획을 세웠다. 유정과 몽양은 그 때의 시국상황을 이렇게 인식하였다.
혁명의 새로운 음파가 유지청년들의 귀에 난타하는 즈음에.... 중국에 점점 동경이 농후하여져서 미국을 단념하고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유정은 몽양과 중국으로 가기 위해 먼저 풍토와 지리를 익히고 국내외 정세를 연구하는 한편 현실적으로 생계를 위한 직장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판단을 하고 건너가 중국 남경의 금릉대에 입학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이에 몽양은 금릉대(현 난징대) 신학부에 입학할 계획 하에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를 찾아가 추천서를 요청하였고, 유정도 같은 목적의 추천서를 받아 챙기고 1914년 12월 하순 개성 신의주를 거쳐 중국 상해로 떠나게 되었다. 이해는 세계 제1차 대전이 일어난 해였다. 그런 정세 전환을 활용하자는 계획이 확고하게 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동지인 이만규의 『여운형투쟁사』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음에 확인된다.
「유정은 1914년에(12월) 몽양과 함께 개성에 와서 필자(이만규)의 집에서 하룻밤 자고 상해로 갔다.」
평생 동지 조동호도 10년 뒤 귀국하여 동아일보사의 논설 반에 재직 중 봉천(심양)특파원으로 그곳에 파견되어 「전지행」이라는 종군기를 동아일보 상에 연재할 때 몽양과 압록강을 도강하던 때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내가 이 강(압록강)을 건너기는 이번이 제2차인데 첫 번째는 지금으로부터 正히 10년 전 즉 1914년 12월 하순 白雪이 遍滿하고 彤雲이 密布한 冬日 中에도 가장 陰沈한 날이었다. ....하물며 그때에는 여운형군 같은 好伴侶가 있었음에랴....」
이듬해인 1915년 1월 하순 선편으로 압록강을 건너 상해에 도착한 유정은 2월초 계획하였던 대로 남경으로 가 우선 금릉대학을 찾아갔다. 유정은 한문에도 능하였지만 중국에서 자유롭게 활동하고 중국의 유력한 각계인사와 교류하려면 먼저 어학에 능통해야 편리하다는 생각을 굳히고 이 대학의 중문학부(사범과)에 입학하여 충실하게 열심히 수학하였다.
그는 1917년 7월 이 대학의 중국문학과를 우등으로 마치고 다시 상해로 와 몽양과 친분이 두터운 황자오(黃覺)가 운영하던 『救國日報社』의 기자로 채용되었고, 상해지역에 있는 한국인의 반제항일운동을 고취하는 날카로운 기사를 써서 기자로서의 예리하고 정곡을 찌르는 필봉을 구사하기 시작하였다. 그 기사에 중국인도 감명을 받았다. 이때 몽양도 유정과 함께 상해로 건너와 협화서국에 취직하여 위탁판매부의 주임이 되었다. 그리고 유정은 망명초기인 1920년까지 상해 중화신보의 기자도 겸직, 유창한 중국어를 구사하면서 중국인과 교류하고 있었다.
이와 함께 1912년 신규식이 상해로 망명하여 조직 운영해 오던 동제사에 동참하고 항일투쟁을 보다 조직적이고 제도적으로 펴나가기 시작하였다. 1918년 말 경 세계 제1차 대전이 종료된 후 이를 기반으로 몽양 등과 새로운 독립운동단체로 임시정부 조직을 의식하고 그 전제 단계로 우국청년들을 모아 신한청년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여기서부터 유정의 항일투쟁의 본격적인 문이 열리기 시작하게 되었으며, 국내외로부터 들어온 중국 내 항일투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통해 1917년 이래 대동단결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임시정부 수립에 주도적으로 참여, 이동녕 등 의정원 의원 29명 중의 한분으로 임정 수립에 나서서 이동녕 이회영 등 원로 선배를 모시고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주도적이고 실무적으로 맡게 되었다.
3.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산파역과 정부의 수립선포
민족운동 단체의 하나인 상해의 동제사를 기반으로 1918년 8월 이후 결성된 신한청년당의 핵심멤버인 유정은 국내외에서 온 선배 동지들과 함께 3.1혁명 직후 상해에서 수립 선포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성에 주동적 임무를 수행하였다. 국내에서 3.1혁명을 일으키기 위하여 각지에 파견하였던 신한청년당원들은 1919년 3월 하순에 일제에 체포당한 장덕수를 제외하고 모두 상해로 재집결, 임정 수립에의 당위성과 시급성을 논하고 세계 혁명 추세에 따라 대동단합의 의미로 정부수립을 논의, 실현한 것이다. 이에 신한청년당은 본국에서 연락책으로 상해에 온 현순과 협의하여 상해내 프랑스조계 보창로 329호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차리고 본국으로부터 현순을 총무로 선출하여 본국 및 각 지역과의 연락을 취하면서 임시정부 수립을 다각적으로 준비하였다.
신한청년당 당원 중에서도 정부를 수립하여야만 국제경쟁력이 있다는 의견에 따라 상해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상해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의원 29명의 공식 발기회의가 보창로 사무소는 협소하고 불편하여 1919년 4월 10일 상해 프랑스조계 김신부로의 의정원회의실이며 현순의 임시거처에서 개최되었다. 이러한 29명의 발기 회의에서는 이 회의를 곧 정부 탄생을 위한 임시의정원으로 변경하자는 조소앙의 동의가 채택되고 조동호의 찬성발언으로 의정원이 성립되었는데, 29명의 임시의정원의원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표는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당원)
조동호(趙東祜)*, 여운형(呂運亨)*, 손정도(孫貞道)*, 조소앙(趙素昻)*, 김철(金澈)*, 선우혁(鮮于爀)*, 한진교(韓鎭敎)*, 신석우(申錫雨)*, 이광수(李光洙)*, 현순(玄楯), 신익희(申翼熙), 조성환(曹成煥), 이광(李光), 최근우(崔謹愚), 백남칠(白南七), 김대지(金大地), 남형우(南亨祐), 이회영(李會榮), 이시영(李始榮), 이동녕(李東寧), 조완구(趙琬九), 신채호(申采浩), 진희창(秦熙昌), 신 철(申 鐵), 이영근(李渶根), 조동진(趙東珍), 여운홍(呂運弘), 현장운(玄彰運), 김동삼(金東三)
임시의정원에서는 국내외에서 집결한 노장층 의원 전원이 동참, 철야 회의 진행 속에서 토의한 결과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자는 신석우의 동의를 가결하고 국무총리에 명망 있는 이승만을 선출하였다. 이어 10개조의 <대한민국임시헌장>을 축조심의 통과시킨 다음 하루 쉬고 4월 13일 오전 석오에 의하여 내외에 이 사실을 선포하고 초대 임시정부 각료를 다음과 같이 선출하였다.
임시의정원 의장 이동녕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차장 신익희
외무총장 김규식 차장 현순
재무총장 최재형 차장 이춘숙
법무총장 이시영 차장 남형우
군무총장 이동휘 차장 조성환
교통총장 문창범 차장 선우혁
국무원비서장 조소앙
이때 유정 등 신한청년당 세력은 의정원조직의 주도세력이었음에도 임정 수립초기에는 김규식, 조소앙, 선우혁 외에 임정 주요각료로 참여하지 못하고 있다. 유정도 당시 조완구 조소앙 등과 같이 국무원의 국무위원 및 각부 차장 등으로 참여하고 있다. 내각명단은 다음과 같다.
국무원: 국무총리 이승만 위원: 조완구 조동호 조소앙 홍도 이춘숙
내무총장: 안창호 위원: 신익희 윤현진 서병호 한위건 조동진 배형식
김구 최근우 김대지 임승업
외무총장: 김규식 위원: 현순 여운형 백남칠 이광수 장건상 이광
재무총장: 최재형 위원: 김철 김응선 최완 김홍서 서성권 송세호 구영필
한남수
법무총장: 이시영 위원: 남형우 김응섭 한기악
군무총장: 이동휘 위원: 조성환 김영선 신철 박숭병 김충일
교통총장; 고한 윤원삼 이규정 김갑 손진형 이영찬 이범교 선우혁
양준명 신국권 이봉수 임현
이때 조각상 유정은 조완구, 조소앙, 홍도, 이춘숙 등 5인을 국무위원으로 하자는 배형식의 동의와 강대현의 재청으로 ‘국무위원’으로 선임 되었다.
그 뒤 그는 고향이 옥천이었음으로 충청도대표로 임시의정원의원에 선임되어 계속되는 의정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행정부와 입법부에서 각기 광복투쟁을 정책적으로 전개하였다. 이같이 유정 등 한국독립지사들이 상해를 중심으로 구국투쟁을 전개하자 상해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는 한국독립지사들을 체포 구금할 여러 가지 방도를 강구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이 외무차관에게 조회한 내용을 보면 당시 중화신보기자로 나타나는 유정을 위시하여 신규식, 김규식, 신석우, 여운형, 서병호 등의 체포를 은밀히 협의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상해재류 한인독립운동자 체포에 관해 1919년 4월 10일자로 조선총독부정무총감이 외무차관에 조회한 요지
상해재류 한인 독립 운동자에 관한 건
(중략)상해는 이번 사건에 중대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명료하며 또 同地는 유래 한국과 중국각지와 아울러 노령방면과 미 본토 및 미령 지방 재주 한인독립운동자와의 연락 중계지인 관이 있다. 또 한인 청년자제로서 불평을 품고 미국으로 출국을 기하려는 자는 일단 이곳에 머물러 독립운동자배의 주선에 의해 밀 도항을 하는 사실도 있다. 더욱이 최근 과격파의 일부가 집합한다는 소문이 있는 때인 만치 차제 동지 한인독립운동자의 수령으로 인정되는 다음 수명을 체포하여 한국으로 송치하는 귀 배의를 얻는다면 이번 사건에 간여한 진상을 구명하는데 있어 가장 형편이 좋을 뿐 아니라 장래를 위해 매우 유리하다고 생각되는 바, 그들은 외국조계에 잠복하였으므로 이들을 체포하는 것은 지난의 일에 속하며 오로지 동지주재 일본영사의 요해와 그의 진력에 기대하지 않으면 이 목적을 달 할 수 없을 것이므로 귀관께서 동지 영사에 대해 이 뜻을 시달해 주기 바란다.
본적 경성남대문외 동리사(야소교목사)
김규식 삼십칠, 팔세본적 경성부수표정 신석우 이십칠세 본적
경기도양평군양서면신원리
여운형 삼십오세
본적 황해도장연군대구면송천리
남경 금릉대학생 서병호 삼십오세
본적 평안북도정주군서면하단리
선우혁 삼십칠세
본적 불명
상해중화신보기자
조동호 삼십세가량
이처럼 신한청년당원인 동시에 신문기자인 유정은 일제 측에 거물급 독립지사로 인식되어 선배 동지들과 함께 요시찰 내지 검거대상자로 지목받고 있었다.
유정은 제1차 의정원회의에 29명의 의원으로 참여 활동한데 이어 4월 21일 개회된 제2차 회의에 70여명의 의정원의원과 함께 산적한 의안을 심의 처리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국무원비서장과 차장에 대한 사면청원의 수리를 비롯하여 차장제의 폐지와 위원제의 시행을 결의하고 각부 위원을 인선하였다. 이때 유정이 국무위원 5명 중의 한사람으로 선임되었고, 임시의정원 법을 발포하였다.
계속하여 4월 25일 제3차 회의에 참석한 유정은 임시의정원 법 심사위원으로 추천되었으나 투표결과 낙선되었다. 그리고 의원선거와 선거세칙 및 임시정부 관제제정방법에 관한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그는 4월 30일 개회된 제4차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의정원회의록에 그의 명단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유정은 다시 제5차 회의부터 의정활동에 참여하였다. 이번 회의는 그전 장소와는 달리 7월 7일부터 프랑스조계 장안리 민단사무소회의실에서 개회되었는데, 유정 등, 각도 대의원 37명이 참여한 가운데 엄숙히 진행되었다. 이때 그는 충청도대표의원으로 이규갑, 유정근, 신채호, 이정규 등 5명과 함께 의회에 참여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상임위원회 조직, 내무총장 안창호의 시정방침 연설, 공채발행조례에 관한 토의, 외교특사에 관한 결의 등 열띤 찬반토론을 통한 의결, 투표 등 활발한 의정활동을 전개하였고, 중국어에 능통하고 중국혁명인사들과의 연분이 깊어 임정의 진로에 대해 항상 중국 측 유력 인사의 자문을 받아 왔다.
또 제6차 의정원회의에도 역시 충청도대표의원으로 참석하여 정, 부의장의 경질 문제와 임시정부 개조 및 헌법개정 등에 관해 열띤 토론을 전개 의정단상에서 그의 젊은 패기와 애국열정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이 자리에서 부의장을 경질하고 석오의 뒤를 이어 오른 손정도 의장이 병환으로 결석하였다. 이에 부의장 신익희가 법무차장으로 전임되어 의론 뒤 유정 등이 나서서 보선한 결과 정인과가 그 후임으로 당선되었다.
이어 유정은 국무총리대리 안창호가 8월 27일 임시의정원 회의에 상정한 임시헌법개정안과 임시정부개조안을 동료의원들과 심사숙고한 뒤 결의하였다. 이어 임시대통령을 선출하는 절차에 들어가 9월 6일 16표를 얻은 이승만이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임시의정원법 개정안을 결의하였는데 이 때 유정은 그 개정의 기초위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이번 회의에서는 국제연맹에 제출할 안건의 제작방법 등을 결의하였는데 이 같은 중요내용이 일제 측이 조종한 밀정에게 탐지될 우려가 있다는 의견에 따라 유정은 특별위원의 선출을 주장하였다. 이에 위원선출을 위한 투표결과 조완구, 장붕, 김병조, 고일청 등 10명의 위원이 선임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이처럼 유정은 제1차 의정원회의 개회 시 부터 줄기차게 참여하여 시종 활발한 의정활동상을 보여주고 있다. 다만 그 스스로 전면에 나서지 않음으로 그의 의정활동이 부각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쉽다. 이는 그가 소극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겸양이 짙은 오륜 오상의 유교적인 겸양의 성품 때문이라 하겠다. 그러나 유정이 활동한 대한민국임시의정원은 독립협회의 민권개혁운동 이후 추구되어온 의회설립의지의 법제제적인 마무리였으며, 일제에 의해 강점당한 후 정부를 수립하고자 한 노력이 중국 본토지역에서 1919년에 와서 달성된 것이었다. 즉 유정의 초기 활발한 의회활동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과 출범의 견인차의 임무가 부여되었던 것이다.
4. 사료편찬부의 설치와 기여도
최초의 민주공화정부인 임정을 수립하는데 산파역을 해낸 의정원의원인 유정은 선배 동료들과 함께 국내외를 통할 통치해 나가는데 있어서 선도적으로 광복투쟁을 위해 신명을 다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 내에 선전과 기록 보존을 위해 임시사료조사편찬부를 설치함에 있어서 크게 조력하고 편찬 집필 등으로 기여하였다. 특히 유정이 중국계 신문기자로서 편집, 간행 업무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동갑내기인 이광수가 도산 안창호에게 추천하여 독립신문을 창간배포하면서 도산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도산은 유정 등과 협의하여 임시사료편찬부를 임시정부의 한 기관으로 설치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 목적을
조선역사의 독립 및 실력과 日韓관계를 명확히 편사하여 국제연맹에 제출케 함
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즉 이러한 목적을 검토해 보면
첫째, 일본의 한국침략에 관한 유래가 되는 정한론전후부터 심층적으로 분석 검토해 보자는 의도가 내면에 깊게 깔려 있었다. 정한론은 대원군의 書契거척사건으로 인해 즉자적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고 내가 이미 연구결과 지적한 바와 같이 깊은 일본의 한국관 인식부족이나 멸시 관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에 임시사료조사편찬부는 <한일관계사료집>전4권을 간행하였는데, 이의 저술 간행으로 일본의 침략 행동을 예의 분석 비판하여 앞으로의 선전, 홍보운동에 기본 자료로 활용한 바 있다. 이를 국제연맹에 보내 우리의 현실을 읍소한바 있고 태평양회의(1921.11-1922.2)에도 그 자료를 번역하여 우리 측 대표 이승만 등 5명이 이를 휴대하고 미국 워싱턴에까지 간 바 있다.
둘째, 3.1혁명 전후의 자세한 기록들을 수집 정리하여 선전 자료로 삼는 동시에 수많은 희생자들의 공로, 성과, 기여 등을 누락 없이 기록에 남겨두자는 계산이 이에 작용한 것이다. 그것은 도산, 유정, 동암, 일재 등 독립 운동가들의 역사인식이 그만큼 투철하였다는 것이다. 이는 자료화하여 국제연맹에 보내 독립의 가능성, 타당성을 타진해 보자는 강력한 자립적 의지도 있었고 역사자체로 영구히 보존하자는 의도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임시사료조사편찬부의 위원은 유정을 비롯하여 이광수, 김병조, 이원익, 김두봉, 김홍서, 이영근, 박현환, 김여제, 장붕 우승규 등 10여명에 이르고 있다. 이의 업적으로는 <한일 관계 사료 집>전4권 이외에 박은식이 주로 편집에 고심 노력하였기에 이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그의 저서 『한국통사』『한국독립운동지혈사』등이 그 자료에 힘입어 비로소 간행되었다.
이는 임정이 하나의 단일통합 민주정부로 정통 화 과정을 거친 단일 중심기구로서 제1차 개헌에 의한 대통령중심체제가 출범하던 1919년 9월 8일 해산하고 그 사업을 국무원에서 직접 맡아 경영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의 위원으로는 도산이나 춘원 등 도산 계는 물러나고 김병조와 이원익만 이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동년 9월 23일 사료조사편찬업무는 완료되었다.
이처럼 유정은 약 3개월간 유지되었던 임시사료조사편찬부에서 그 조사편찬위원으로 춘원, 김병조, 이원익, 김철 등 10여명과 <한일관계사료집>전4권이라는 방대한 자료집을 편찬 간행해 내는 등 혁혁한 업적을 냈다. 이러한 노력으로 사료조사편찬부는 한일교섭의 유래와 독립운동의 전반적인 상황을 짧은 기간이나마 총 점검, 정리하였다. 아울러 일본인의 국내외 각지에서의 학살 고문 탄압 납치 미행 등 만행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국제연맹에 제출할 상당량의 내실 있는 자료를 준비해서 실제로 활용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사료편찬과정에서 임정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창간 준비가 진행되어 1919년 8월 21일에 신문이 유정 등의 참여로 발간되기에 이르렀다.
5. 독립신문의 창간과 논설집필
유정은 일찍이 신문이 발행 유통되고 있던 중국 상해지역에서 광복투쟁을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절실하고도 효과적인 선전과 사업전파나 동참호소의 실효는 신문이 으뜸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선진 정보국 미국에서 체류하다가 상해로 온 안창호의 첫 발의로 매스컴 문제가 제기된 것에서도 그 참의미를 알 수 있다.
이에 유정은 일찍이 임정의 수립선포 이후 신문의 필요성을 제기 역설하였다. 또한 임정도 독립운동에 있어 신문과 선전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지실하고 있었다.
그리고 1919년 5월 12일 임정 국무위원 조완구도 국무원에서 결의한 시정방침 연설가운데 정치고문과 신문고문 각1명을 두어야 한다고 역설하였으며, 안창호도 열성을 기울여 추진했던 일이 선전사업이었다. 특히 상해가 국제도시인 만큼 외국인들의 신문인식도와 실용도도 깊고 컸었다. 원래 상해는 인쇄시설이 중국 내 타 지역보다 가장 먼저 발전한 도시였다. 그러므로 중국인들이 여러 개의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기에 망명한 한국 독립지사들도 그것은 매우 호의적으로 이해, 수용하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필요성이 절실하다고 공감하게 된 것이다.
유정이 1917년 금릉대학을 졸업하고 구국일보와 중화신보의 기자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은 그같이 상해가 신문의 도시임을 입증한 실례라고 본다. 따라서 유정은 임정이 수립되면서부터 이동녕, 여운형 등 임정 수뇌부에게 그의 필요성을 인식시키고 알려 신문의 유용성을 강조 인식시킨 바 있다.
이에 따라 임정이 수립 선포되는 1919년 4월 13일 이후 신문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임정의 기관지 발간이 논의된 바 있다. 그것은 안창호가 상해에 도착하여 한인대회를 개최한 동년 5월 25일 이전에 독립신보의 발간논의가 구체적으로 있었던 것으로 본다.
그러나 독립신보는 일제의 의촉을 받은 상해프랑스조계 관헌의 압력으로 발행이 정지되자 그 임정의 기관지 간행의 준비과정으로 임시사료편찬부의 업무부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료편찬이 한창 중이던 8월 21일 임정의 기관지로서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상해판 독립신문은 유정을 비롯한 이광수, 차리석, 최명우, 이유필, 김석황, 주요한, 최근우 등 20여 명이 상의하고 주 3회(화, 목, 토)발행하여 1925년 11월 11일까지 6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모두 189호가 발행되었다.
창간 당시 제호는 <독립>이었는데 10월 25일 제22호부터 <독립신문>이라 고쳤고, 다시 1924년 1월 1일자 제169호부터 한글로 <독립신문>이라 바꾸었다. 이 독립신문은 일제 강점 하 민간인에 의한 민족 언론의 효시로 손꼽을 수 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심적인 기관지로서의 소임을 다해 중국지역에는 물론 국내 및 미주 유럽등지에까지도 인편이나 우편으로 송부되어 임정의 광복투쟁 상황을 널리 광포 인지시켰다.
유정은 독립신문 발행에 있어 기자로서 10여명의 동료와 참여하였는데, 초창기 지면구성을 보면 유정의 논설이 주조를 이루었는바 사설을 비롯하여 국무원령, 시무감언, 시사만평, 의정원의 동정, 독립군의 활동상황, 해외 각지의 교포들의 움직임, 구미각국의 약소민족에 대한 정치동향, 국내소식 등을 싣고 있다.
특히 유정은 기자로서 기사를 수정하고 교열하는데 힘썼는데, 이때 신문제작에 있어 문제가 되는 것은 한글 활자였다. 이를 일본에서 들여오자면 위험이 뒤따르고 국내에서 가져온다는 것도 현실적으로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어려운 상황에 봉착하자 유정의 고안으로 한글자모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안창호전기에 보이는
「정청을 정제하는 외에 큰일은 독립신문발행과 민족운동 거두를 일당에 모으는 일이었다. 독립신문은 어렵지 않게 발행되었다. 조동호의 고심으로 국문자모도 마련되고 미주 국민회의 송금으로 자금도 조달되었다.」
라는 글속에서 유정의 손재주 있는 작업이 자모를 만들 수 있어서 독립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유정은 한글성경의 활자를 한자 한자 떼 내어서 중국인 기술자를 시켜 사진 동판을 떠서 자모를 만들어 4호 활자를 주조하였고, 이를 다시 확대 축소하여 호수별 활자를 자유자재로 완성한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비로소 국한문의 활자신문을 발행할 수가 있었으니 유정의 독립신문 발간에는 기자로서의 임무뿐만 아니라 工務분야의 기여 면에서도 그 비중이 컸다고 할 수 있겠다. 도산은 ‘유정이 아니었으면 독립신문은 창간할 수 엇었을 것이라‘고 회고한 바 있다.
이러한 독립신문은 상해를 중심으로 중국 각지와 동삼성 지방, 미주 하와이 등 해외동포들에게 송부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비밀리에 상당부수가 반입되었다. 이 신문의 배포는 주로 임정의 교통국과 연통제 비밀조직망을 이용하였다
.
그러나 독립신문은 창간된 이후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인해서 한때 정간이 되기도 하고 거듭되는 어려운 경영난에 직면하게 되어 몇 번이나 끊어질 듯한 고비를 넘기면서도 6년 동안에 걸쳐 발행된 것이다.
이에 당시 20세의 젊은 나이에 참가한 주요한도
「조동호 선생과 함께 신문반절형사항을 조판, 교정을 끝내서 기계로 넘기고 나니 날이 딸꾹 새었다. 우리는(조동호와 함께:필자주) 맞은편 집에서 아이스크림을 한잔씩 사먹고 쾌재를 불렀다. 8월 27일이었다고 기억된다. ....자금부족으로 우리들의 반절형신문은 발간한 날보다 휴간한 날이 많은 형편이었다. 비록 1주 1회의 정기간행이었지만... 」
이라고 하여 독립신문의 재정적 압박상황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시 독립신문사의 경영난은 독립신문에 게재된 社告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신문대금 4만원은 원래 한푼도 수입되지 못하고 또 적립한 자본이 없으매...이제는 애국동포 제위에게 泣願할 길밖에 없사오니 동포여, 다소를 불구하고 독립신문을 도우소서」
독립신문은 창간이후 어려운 형편임에도 주3회 격일간제로 발행하였으나 결국 일본총영사관의 방해공작 및 자금압박, 사장인 이광수의 건강이상 등의 시련에 봉착하여 1920년 5월 11일 자 이후 발행횟수를 주2회로 줄이고 일제의 압력으로 6개월간이나 중단되었다.
그 후 12월 18일 독립신문은 속간되었으나 주1회 발행으로 주간형태나 다름없었고, 이광수가 1921년 4월 귀국함으로 영업부장 이었던 이영열이 주필을 맡았고, 유정이 조력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조계당국은 6월 9일 독립신문인쇄소(三一印書館)의 폐쇄를 명함으로 도 네 번째 정간을 당하였는데, 복간요청으로 겨우 10월 5일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다. 이영열에 이어 독립신문 발행의 운영을 맡게 된 김승학은 윤해를 주필로 불렀으나 그도 오래지 않아 1923년 3월 초순 러시아방면으로 가자 후임으로 박은식이 주필이 되었다가 1924년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하지만 그는 1925년 11월 1일 사망함으로 신문은 10호도 발간치 못하고, 독립신문도 그의 사망기사가 실린 11월 1일자 189호를 마지막을 발행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나 독립신문의 공적은 1922년 6월 3일자 “독립운동과 독립신문”이라는 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몇해를 두고 일해 나가는 동안에 우흐로 정부당국의 정책을 도우며 아래로 동지 동포의 혈셩을 고동하며 안흐로 독닙군의 단결을 힘쓰고 밧그로 세계에 우리사업을 선전하여야 하리니 우리 독닙운동에 대하야 독닙신문의 적지 안음은 스사로 붓그럼 업시 장담하는 바로다......」
이처럼 유정이 기자 겸 인쇄 직공으로 창간동인으로 참여 발간하기 시작한 상해 판 독립신문은 3.1혁명 후 국내에서 민간신문의 발행이전에 창간되어 임정과 중국 동삼성지방의 민족독립운동 소식을 국내외에 알리면서 민족의 통일과 단결을 주장하였고 민족 언론의 정통을 세운 신문이라는 점에서 6년여의 발간의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이 신문의 속간을 위해 이동녕 등 원로들이 나서서 구제위원회를 만들어 모금운동을 일으켜 상당액을 모아 속간에 기여하였다. 이 신문에 유정이 쓴 글을 모아 2003년에 “한민족의 독립”(동방도서 간행)이라는 단행본을 출간한 바 있다.
6. 한중호조사의 조직과 참여
유정은 1911년 신해혁명에 중국혁명군으로 참가한 이후 상해와 난징, 광둥을 왕래하며 중국의 혁명가들과 친분을 맺고 있으면서 상해에 독립운동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던 신규식이 조직한 동제사에 합류, 중국에서의 첫 결사운동에 참가하였다. 이는 상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운동단체의 효시로서 이후의 단체결성 및 이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전개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으로 주었다. 또한 동제사의 협력 확대단체인 신아동제사를 통해 중국혁명세력의 동참이나 지원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과 저력을 기반으로 유정은 1920년대 여운형, 윤현진 등 동지들과 함께 중국인 친구들을 독려하며 한중호조사를 조직하였다. 당시 중국 상해로 망명해 온 많은 동지들과 중국 혁명당 동지들을 연결하는 데는 중국대학에서 정식으로 중국어를 정통적으로 전공한 유정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에서 한중 항일활동을 유효 적절히 전개하기 위해서는 중국의 동지와 함께 항일연합 결사조직을 통해 동시 다발적으로 항일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 길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였다.
1919년 5월경 유정은 중국인 黃介民과 친분을 갖고 프랑스조계 霞飛路(현 회해로, 淮海路) 에 있는 그의 사무소에 드나들었는데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중호조사 발기의 모체가 되었다.
1919년 5월경부터 블란서 조계 하비로(보창로, 회해로)에 있는 중국인 황개민의 사무소에 한중인 몇몇이 모이게 되었는데, 이것이 한중호조사의 모체가 되었다. 처음 여기에 조동호가 드나들었다. 1921년 몽양은 상해 포석로 14호 반송원에서 한중호조사 발회식을 가졌다. 참가자는 중국 측에서 광동정부 사법차장 오산을 비롯하여 황개민, 황흥의 미망인 황종한 등 다수의 중국인과 한국 측에서는 여운형, 김규식, 이유필, 조동호, 여운홍 그 밖의 2,3인이었다. 목적은 한중친선,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에서 상호협조, 한국청년의 중국유학과 구미유학을 위한 여권 주선 등이었다. 손문도 이 조직을 찬성했으나 몽양이 잡힌 뒤에 흐지부지 없어졌다.
라고 하여 한중호조사는 1919년 5월경 상해에서 조직되었고, 그 뒤 1921년 한중국민호조총사의 조직으로 확대 발전하였다.
임정과 중국인이 합작하여 한중호조사를 조직하기까지에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임정이 수립되기 이전부터 많은 한국의 독립지사들이 동삼성과 상해를 중심으로 중국 각 지역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들은 주로 국내 지하운동을 지원하거나 한중 양국 접경지역의 항일유격 군사 활동을 지원하였다. 그것은 국제적으로 세계 각국의 성원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지원을 중국정부로부터 얻고자 외교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물론 임정은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27년간 세계 여러 나라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국제적인 승인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임정과 중국과의 외교관계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도 밀접하였다. 당시 손문의 호법정부의 상황을 보면 중국의 민족주의 혁명가들이 청조의 무능과 열강의 제국주의에 항거하여 1911년 10월 10일 신해혁명을 일으켰다.
그 결과 민족혁명의 지도자인 손문이 난징에서 초대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그런데 손문이 임시대총통으로 즉위하자 원세개가 청제를 퇴위시키고 자신이 총통이 되기를 희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손문은 위안스카이(원세개)와 타협하여 즉시 청제퇴위와 공화정을 선포하는 조건으로 원세개를 제2대 임시총통으로 당선시켰다.
그러나 손문의 기대와는 달리 정권탈취에만 급급한 원세개는 북경사변을 일으켜 북경에서 총통으로 취임한 뒤 帝制를 복구하고자 획책하여 1913년 3월, 반제 세력의 주도급 인사인 송교인을 암살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세력 강화를 위해서 차관을 도입하고 중국혁명파의 힘을 약화시키는 음모를 꾀함으로 1913년 7월부터 도원(倒袁) 운동인 2차 혁명이 각처에서 일어났다. 이처럼 불안정한 내전 상태인 중국 임시정부는 한국국민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줄 수 없는 절박한 상황이었다.
이때 유정은 망명초기에 참여하였던 동제사의 협력단체인 신아동제사를 통해서 중국 인사들과 친분을 맺음으로서 한국독립운동에 협조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1년 이후 임정대표가 광동에서 한중합작의 필요성을 선전하며 국민당의 중견인물들로부터 지원을 구한 결과 광동 각계는 한국독립에 대하여 동정과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 같은 정황 하에서 한중호조사는 한중친선은 물론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에서 상호협조, 또한 진일보하여 경제, 상업, 교육방면에 대해 상호원조를 목적으로 1921년 가을 상해 프랑스조계 포석로 14호에서 조직되었다. 이때 유정은 여운형, 윤현진과 한국 측 대표로 참가하였고, 중국 측에서는 오산, 황종한, 황경원, 주검추 등이 참여하였다. 이는 한중 양국국민의 행복을 도모한다는 주의아래 위치는 상해에 두고 평의부와 집행부의 2부로 구성되었는데, 평의부는 입법, 건설, 결의의 일을 전담하였고, 집행부는 조직 일체의 진행을 집행하며 외부에 대해 모든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경비는 매년 1엔을 춘추 두 번으로 나누어 납부하며 평의부의 의결을 거쳐 각 지사와 사내를 통해 이를 모집하게 되어 있었다.
이후 한중호조사는 1921년 8월 15일자로 태평양회의에 대한 제안과 선언문을 영문으로 번역하여 미국 대통령이자 동 회의장인 제29대 미국대통령 워런 하딩(1921~23)에게 보낸 바 있으며, 세계와 극동의 평화를 애호하는 까닭에 태평양회의에 대해 11개 조건을 제출하고자 하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1905년과 1910년의 소위 합병조약의 전면무효선언인 것이다.
2. 일본의 정치경제 군사상의 시설철거
3. 한국과 극동공화국의 대표파견을 주장할 것
4. 한중 두 나라의 주권과 동아평화를 방해하는 일영동맹의 취소
5. 중일 21개조의 취소
6. 중국은 요주만과 일본이 산동에서 점유하는 이권을 회수할 것
7. 일본의 만몽 복건에서의 특수세력을 취소할 것
8. 중국은 대만을 회수할 것
9. 중국은 영사재판권과 외국우편국의 철폐를 주장할 것
10. 각국은 중국에서의 조계를 환부할 것
11. 각국은 중국에 있는 주둔병을 철퇴할 것
위의 조건은 한중 양국이 일치하여 주장한 것으로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면 한중호조사의 사행(私幸) 만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한중호조사를 주도적으로 조직하고 참여한 유정은 교제과의 간사로서 여운형을 도와 중국인 부주임 황경원과 함께 국제 업무를 담당 처리하였다. 그가 중국어에 능통하고 신문기자로서 경험이 있어 국제적인 감각이 풍부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중연합항일투쟁에는 자금조달이 큰 문제였다. 그리하여 유정은 다각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경비조달을 염출하고자 고심하였다. 이에 참여한 인사는 한국인이 104명, 중국인 52명에 달하였는바 자금모집을 위해 유예(遊藝)대회의 개최를 고려하였다.
당지 한인독립운동자인 고 신규식과 여운형 등은 중국인 등과 서로 제휴하여 독립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중한호조사란 것을 조직하고 이래 상호의사의 소통을 꾀하려면 언어에 있다하여 어학강습소를 설치하였으나 경비출처가 없기 때문에 이래 유지 곤란에 빠져 미미 부진, 금일에 이르고 있는데 이러한 목적의 공연은 성공리에 진행되어 상당액을 모금, 회합의 목적수행에 충당할 수 있었다. 또한 유정은 여운형 등과 같이 효과적인 독립투쟁의 방책을 위해 한중호조사의 중국측 인사인 徐謙, 吳山등과 제휴하여 효과를 거두기도 하였는데,
중국 국민당의 유력자 서겸, 오산 등은 종래 한인독립운동자(조동호)와 연락 제휴하여 이미 중한호조사란 것을 설립하고 목적 실현에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최근 봉직문제가 재연하자 재만 일대의 한인독립운동자들은 평소 장작림의 독립 운동자에 대한 압박이 심하다고 하여 차제 오폐부에 款을 통하려고 하는 형적이 있었다. 이 형세를 규지한 중국남방 국민당의 일파는 깊이 이를 우려하여 자당의 수령 손일선이 장작림과 서로 제휴하고 일을 도모하고 있음을 설명하고 장래 반드시 상당한 원조를 줄 것이므로 차제 재만 한인은 중립의 태도로 나가고 결코 장작림에게 不利를 주지 않도록 중한호조사와 여운형 등 2,3자에 말해왔다고 한다. 여운형 등은 극력 재만 한인독립운동자들을 慰撫하려고 목하 상해에 체제중인 국민대표자의 사이를 奔走하고 또 중국 국민당 측에 있어서도 국민대표회의가 종료하는 대로 각 대표를 초대하여 향연을 베풀 예정이라고 한다.
라는 내용에서 내면의 진실을 알 수 있다. 특히 난징한중호조사의 임무도 컸는바 이는 유정이 난징의 금릉대학을 졸업하였기 때문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활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25년 이후 유정은 귀국한 뒤였으나 한중호조사의 한중연합활동은 부단히 계속되었다.
7. 한국노병회의 목표와 유정
국내도 아닌 해외인 중국 상해에서 민족독립운동을 장기적이고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서는 즉흥적이거나 영웅주의적인 일과성 있는 계획만 가지고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현실적인 경우를 볼 때 매우 지난(至難)한 일이다.
이리하여 원대하고 효과적인 계획과 함께 10년간 1만명의 노병을 양성하고 100만원의 戰費를 축적해 놓아야만 유사시에 무장투쟁을 통해 군국주의 일제를 완전히 타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 같은 생각은 김구, 유정, 이유필 등이 함께함으로 구체화되어 갔다.
즉 유정은 1922년 10월 1일 오후 7시 프랑스조계 하비로 보강리 24호에서 김구, 이유필,조상섭, 최석순, 오영선, 김인전, 여운형 등 선배 동지와 같이 노병회를 조직하는데 참여하였다. 이에 관해 유정은 그의 증인심문조서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1922년 10월경 나는 상해 하비로 보강리 24호 조상섭의 집에서 김구, 이유필, 조상섭, 최석순, 오영선, 여운형과 발기인이 되어 한국노병회를 창립하였다.」
유정 등은 한국노병회를 조직하여 유사시에 군인과 군자금을 유족하게 준비할 것을 결의하고 동년 10월 7일 노병회를 발기하기로 완전히 합의하였다. 발기준비위원회는 첫 번째 회합에서는 취지서, 회헌, 회칙을 전담해서 기초할 기초위원을 선임하였는바 만장일치로 동 회의 발기준비 등 실무책임을 맡았던 유정이 먼저 선임되고 이유필과 김인전이 이어 선정되었다. 유정은 이들과 함께 취지서, 회헌, 회칙 등을 기초해서 의논한 뒤 1922년 10월 21일 노병회발기총회 주비회를 열고 회칙을 수정 첨삭하고 통과시켰다. 그리고 동년 10월 28일 상해에서 유정의 사회 하에 김구, 손정도, 여운형, 양기하, 이유필, 김인전 등이 참석한 가운데 한국노병회발기총회를 개최함으로 한국노병회가 창립되었다.
이의 회원은 특별회원과 통상회원으로 구분하였는데, 특별회원은 연소자로 군사교육을 받는데 적합한 자로 회비는 매년 1원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통상회원은 노인으로서 군인이 될 자격이 없는 자로 회비는 매년 3원으로 정하였다. 그리고 입회금은 10원씩으로 정하였다. 이때 유정은 김구, 조상섭, 김인전, 이유필, 여운형, 손정도 등과 같이 통상회원이었으며, 특별회원은 조동건, 주문원, 백운서, 윤원장 등 21인이었다. 임원은 총재 1인을 비롯하여 이사장 1인, 이사 30인 이내, 회계검사원 3인 이내를 두도록 구성하였다. 이 회는 이사장 중심체제로 운영하여 회의 업무를 관장하며 회를 대표하였다. 이사장 밑에는 경리부, 교육부, 노공부, 군사부의 4부가 각 부에 부장 1인과 부원 약간 명 씩을 두도록 규정해 놓았다.
한국노병회는 정기총회 때 김구를 이사장에 선임하고, 유정은 최석순과 회계검사원으로 실무책임자가 되는 등 다음과 같은 부서가 결정되었다.
이사장; 김구
이사; 이유필, 손정도, 여운형, 나창헌, 조상섭
회계검사원; 조동호 최석순
회계검사원은 매월 3일 이내에 그 前月分의 회계사무에 대하여 회계지출의 正否 및 예선정액에의 초과유무, 장부정리의 適否, 전비저축의 적부, 전비저축에 관한 인장 및 증명서류의 보관 적부, 수지금액과 증빙서류와의 合否 , 公私金 혼동의 유무, 물품의 출납 및 보관의 적부, 기타 필요하다고 인정한 사항을 정기검사 하도록 규정해 놓음으로 유정의 임무는 매우 중차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유정의 임무는 정기이사회마다 검사한 결과를 이사회에 보고하도록 했으며, 회계검사원이 직무집행을 완전히 하지 못함으로 노병회에 손해를 발생케 한 때에는 회계검사원 일동이 이를 배상하는 책임을 지도록 결정하였다. 한국노병회의 전비 및 경비의 모금, 저축, 관리가 매우 엄격하였는바 유정의 책임감의 투철성이 돋보이는 사실의 대목이다.
유정은 1922년 12월 5일 상해에서 개최된 제3회 정기이사회에 참석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의결하였다.
1. 전비 재원에 사용할 인감은 한광복, 노병회, 한노병 등 명의의 인감을 제작하여 각 부장에 각 1개씩 보관할 것
2. 이동건을 한단군사강습소에 백운서를 북경학병단에 파견수업할 것, 주문원, 윤원장 2인을 개봉병공국에 파견 수업시킬 것
그리고 이듬해 1월 5일 상해에서 개최된 제4회 정기이사회에도 참석하여 다음 사항을 의결하였다.
1. 이주선을 북경학병단에 유학시킬 것
2. 정진국을 한단군사강습소에 유학시킬 것
3. 특별회원으로서 공주선, 주부정, 정진국, 김광근, 이동건, 주문원,
백운서, 윤원장, 김원근 등의 입회를 가결시키다
이어 1923년 4월 2일 노병회는 창립후 처음으로 유정 등 24명의 회원들이 출석한 가운데 제1회 정기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정기총회에서는 회헌과 회칙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지회규칙을 제정하였으며 다음과 같이 임원선임을 하였다.
이사장; 김구
이사; 손정도 조상섭 이유필 여운형 윤기섭 최준 김인전 신현창
회계검사; 조동호 최석순
경리부장; 이유필
부원; 김인전 최준
교육부장; 윤기섭
부원; 손정도 조동호
노공부장; 조상섭
부원; 여운형 신창현
이처럼 유정은 회계검사원뿐만 아니라 교육부에서도 활동함으로 균형 있는 광복투쟁을 순조롭게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김구가 이사장직을 물러나자 유정도 사퇴한 뒤 귀국하기 위해 공직을 버렸다. 그리고 한국노병회도 1923년 이후 상해 정계의 혼란, 이탈과 1927년부터 유일당결성문제의 영향을 받아 회원들이 탈퇴하게 되어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채 31회의 이사회와 10회의 총회 개최에도 불구하고 1932년 10월 28일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8. 결론
독립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행동파인 애국지사 유정은 1910년 우리나라가 일제에 의해 강점당하자 국권회복에 부심하다가 보다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항일투쟁의 방략을 모색하기 위해 몽양 여운형과 1914년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는 우선 중국혁명지사들과의 폭넓은 교류 등 중국 내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위해 난징 금릉대학 중문학부(사범과)에 입학하여 1917년 7월까지 3년 동안 수학하였다. 그 뒤 황자오가 경영하는 <구국일보>에 기자로 채용되어 상해지역에서 한인동포들의 반일독립운동을 필설로 고취하였다.
그리고 예관 신규식이 1912년 7월에 조직한 동제사에 참여하여 여운형, 조소앙, 선우혁 등과 이사직을 맡아 활동하였으며, 1918년 8월 이후 여운형, 장덕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미국 및 프랑스에 독립청원서를 작성, 발송하고, 파리강화회의에 특사로 파견된 김규식의 활동을 지원하는 등의 적극적인 항일활동을 전개하였다. 유정은 이러한 신한청년당의 활동을 기반으로 상해지역의 독립지사들과 프랑스조계 하비로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차리고 임시정부수립을 준비하였다.
그리하여 1919년 4월 10일부터 프랑스조계 김 신부로에서 임정수립의 기반이 되는 역사적인 제1차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4월 13일 임시헌법 10개조를 기초로 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이동녕의장에 의해 수립, 선포되었다. 그는 임정에서 동지 조완구, 조소앙, 홍도, 이춘숙 등과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으로 선출되는 등 임정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유정은 임정 내에 설치되었던 임시사료편찬부의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일관계사료집>전4권을 완성하였고, 안창호, 이광수 등과 임정의 기관지로 상해판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독립신문 발행당시 유정은 차이석 등과 기자직을 담당하였는데, 특히 신문제작에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한글 활자였다. 이를 일본에서 들여오면 위험이 따르고 국내에서 가져온다는 것도 불가능하였다.
이에 유정은 고심 끝에 손기술이 뛰어남을 무기로 삼아 한글자모를 만들어냈다. 즉 한글성경의 활자를 한자 한자 떼 내어 중국인 기술자를 시켜 사진동판을 떠서 자모를 만들어 활자를 주조하였고, 이를 확대 축소하여 호수별 활자를 완성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국한문의 활자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으니 독립신문의 발행에 있어 유정의 임무가 매우 컸다고 하겠다. 초창기 우리나라 언론사에 빼놓을 수 없는 최고의 수훈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이 신문을 통해 수십 차례 임시정부의 근현대사에서의 위치를 분명히 자리매김하였으며 정통성의 존재이유를 필설로 주장하고 신문에 게재하였다.
이러한 활동과 함께 유정은 한중친선, 한국독립과 중국혁명에서 상호협조, 또한 일보 전진하여 경제, 상업, 교육, 사회 방면에 대해 상호원조를 목적으로 1921년 조직된 한중호조사에 여운형, 이유필 등과 한국 측 대표로 참가, 교제과 간사 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리고 1922년 10월경에는 조국광복에 공헌키 위하여 향후 10개년 이내에 1만 명 이상의 노병을 양성하고 100만 원 이상의 전비조성을 목적으로 “백범일지”에도 나와 있듯이 김구, 조상섭, 여운형 등과 발기인이 되어 한국노병회를 조직하고 이의 회계검사원과 교육부원으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유정 조동호는 1914년 이래 1920년대 중반에 귀국할 때까지 중국 상해에 체류하면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임시의정원과 그 외곽지원 단체 등을 중심으로 10년 간 상해 등지에 체류하면서 항일광복투쟁을 쉬지 않고 전개하다가 귀국한 항일혁명투쟁가로서 조국 광복의 시기를 그 만큼 앞당기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였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유정은 임정계의 독립운동가로 분류되어 있다. 2005년 (3.1절)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훈하였을 때도 그런 그가 서울 동작동의 국립현충원이 아닌 대전의 현충원에 모셔진 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불합리한 안장의 예우가 아닌가 한다.
臨時政府及 臨時議政院 新年祝賀式 紀念撮影
제2열 왼쪽부터 이규홍李奎洪,김철金澈,신익희申翼熙,신규식申奎植,
道,이동녕李東寧,남형우南亨祐,안창호安昌浩,오영선|
제3열 왼쪽부터 ~,임병직林炳稷,~,김복형金復炯,도인권都寅權,
최근우崔謹愚,김인전金仁全,이원익李元益,정광호鄭光
浩,김태연
羅容均,황진남黃鎭南,김정목金鼎穆,
제4열 왼쪽부터 ~.왕삼덕王三德,차균상車均祥,김여제金與濟,안병찬
安秉瓚,장붕張鵬,김석황金錫璜,김규서金奎瑞,김용철
李裕弼. : 맨윗줄 우측 두번째 <조동호>
1. 서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