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화(墨畫)
김종삼
물 먹는 소 목덜미에
할머니 손이 얹혀졌다.
이 하루도
함께 지났다고
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
서로 적막하다고
(시집 『십이음계』, 1969)
[작품해설]
‘묵화(墨畵)’란 한지(韓紙)에다 물기를 따라 번지는 먹을 이용하거나 먹물을 겹치는 수법을 사용하여 그리는 동양화를, 단순한 색과 선으로 삶과 자연의 여러 모습을 담아내어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이 시 역시 6행의 짧은 형식과 적은 언어만으로 인생의 노고와 적막함을 표현함으로써 그야말로 ‘묵화’ 한 폭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전통적으로 소는 농촌에선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소중하고 가족처럼 친근한 가축이다. 힘든 농사일에 필요한 귀한 노동력 제공과 주인에 대한 깊은 복종심, 그리고 인간을 위한 아낌 없는 보시(布施), 특히 눈물이 그렁그렁한 커다란 눈알을 끔벅이는 모습은 그야말로 영물(靈物)이라 말을 실감하게 한다. 마치 삶에 대해 깊은 깨달음을 얻은 듯한 눈빛과 느릿느릿 옮기는 발걸음은 영락없는 수도승의 모습이다. 그런 까닭으로 불가에선 ‘십우도(十牛圖)[불도를 수행하는 과정을 10단계로 나누어 입문에서 깨달음에 이륵까지를 설명한 그림]’라 하여, 참다운 나를 찾고 깨달음을 얻는 과정을 ‘소’를 찾는 모습으로 형상화하고 있기까지 한다.
이러한 동양적이고 전통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 시에 등장하는 ‘할머니’와 ‘소’는 평생을 동고동락하며 서로의 상처와 외로움을 보듬어 주는 동반자요, 한 몸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단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할머니’는 자신의 노곤함도 잊은 채 ‘소’에게 시원한 물을 먹여 주며, 안쓰러운 마음으로 ‘소’의 목덜미를 어루만져 준다. 할머니의 이 같은 행위는 바로 두 존재간의 정서적 교감이자 일체화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이 하루도 / 함께 지났’음에 대한 감사와 애정의 표현인 것이다.
이제 ‘할머니’는 ‘소’의 ‘부은 발잔등’으로 시선을 옮겨 온종일 고생한 ‘소’의 수고로움을 격려하는 동시에 외로운 노년을 의지하게 해 준 ‘소’의 넉넉함에 대해서도 고마워하기에 이른다. ‘부은 발잔등’은 신산(辛酸)한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할머니’와 ‘소’가 살아온 고달픈 삶의 여정을 보여 준다. 평생을 농사 일을 하며 살아온 ‘할머니’의 간난(艱難)한 삶은 이 순간 그런 할머니를 도와 평새 밭을 갈고 짐을 져온 ‘소’의 운명적인 삶과 하나가 되어 그간의 고초(苦楚)를 모두 망각하게 될 뿐 아니라, 쓸쓸한 노년을 따뜻이 위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할머니’에게 있어 ‘소’는 그냥 소가 아닌 한 가족이요, 분신(分身)인 것이다.
먹물이 조금씩 번져나가며 이루어지는 ‘묵화’의 성질처럼, ‘물 먹는 소 목덜미에 / 할머니 손이 얹혀지’는 순간, ‘할머니’의 사랑이 ‘소’에게 전달되고, ‘할머니’의 외로움이 ‘소’에게 퍼져나감으로써 두 존재은 비로소 하나로 합일하게 되은 것이요, 시를 읽는 독자들의 가슴을 ‘묵화’처럼 촉촉이 적셔 주는 것이다.
결국 1~2행은 화자가 목격한 객관적 사실이거나 어느 묵화에 그려져 있는 내용일 것이며, 3~6행은 화자가 그것을 보고 난 다음의 독백인 셈이다. 이 독백 형식의 시행들은 마치 한 폭의 묵화 같은, 또는 그 같은 묵화의 내용에서 깊은 감동을 얻은 화자가 유추한 내용으로, 말하는 대산 쓰다듬는, 이른바 ‘불립문자(不立文字)’의 행위로써 ‘할머니’는 영물인 ‘소’와 같은 훌륭한 의사소통을 이루어 낸 것이다.
[작가소개]
김종삼(金宗三)
1921년 황해도 은율 출생
일본 코요시마(豊島) 상업학교 졸업
1954년 『현대예술』에 시 「돌각담」 발표하며 등단
1957년 전봉건, 김광림과 함께 3인 공동 시집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 발간
1971년 「민간인」으로 『현대시학』 작품상 수상
1978년 제10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
1984년 사망
시집 :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공저, 1957), 『본적지』(김광림⸱문덕수와 공저, 1968), 『십이음계』(1969), 『시인학교』(1977), 『북치는 소년』(1979),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1982), 『큰 소리로 살아있다 외쳐라』(1984), 『김종삼전집』(1989), 『그리운 안니 로니』(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