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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실종가족을 피해도 되나요?
[뉴스펀딩] 셋째 아들을 기다리는 팔순의 노부부
【베이비뉴스 정은혜 기자】 2015-02-24
“제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그래도 죽는 날까지 아들을 찾으러 다닐 겁니다.”
아들이 실종된 지 27년째. 아버지는 백발이 성성하고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는 노인이 되고 말았다. 지나온 세월의 고단함을 말해주는 듯, 이마와 뺨에 주름살이 깊게 패였다. 핏기 없는 창백한 얼굴의 김홍문(81, 서울 강남구 논현동) 씨가 주섬주섬 꺼내어 보여준 건 아들의 일기장이었다.
“이제 5학년이 됐으니 혼자 학교에 가야겠다.” 삐뚤삐뚤한 글씨로 써내려간 일기장에는 할머니가 자신을 데려다주러 학교까지 가기 힘드니 이제 혼자 학교를 가야겠다는 다짐이 적혀있었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 주인 잃은 일기장의 표지는 누렇게 변하고 말았다. 꾹꾹 눌러쓴 글자는 아버지의 손길이 얼마나 닿았는지 흐릿해 지고 말았다.
김 씨는 실종된 셋째 아들 태희(실종 당시 나이 만 14세, 현재 나이 만 41세)의 일기장을 연신 손으로 매만졌다. 아들의 흔적을 쫓는 듯 글자의 곡선을 따라 손가락을 천천히 움직이는 아버지. 그는 덤덤하게 태희의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다.
“차라리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잊고 살 텐데….”
그때 갑자기 아내 박복순(74) 씨가 일기장을 소리 내어 읽기 시작했다. “엄마를 찾아서 신설동 가려고 21번 버스 내려서!” 속삭이듯 꺼냈던 목소리가 이내 울부짖음이 되고 말았다. “자식을 낳았으면 잘 길러줘야 하는데 다 나 때문이에요.”
아내가 헐떡거리며 가쁜 숨을 내쉬자 김 씨는 익숙한 듯 약통에서 약 한 알을 꺼내 아내에게 먹였다. 현재 아내는 치매 5등급. 아들의 빈자리를 몸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해부터 치매증세를 보이기 시작한 아내는 태희가 실종되던 날의 상황을 단편적으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 실종아동
-이 름 : 김태희
-나 이 : 실종 당시 만 14세, 현재나이 만 41세, 1973년 12월 25일 생
-실종일자 : 1988년 4월 23일
-실종지역 : 서울시 강남구 삼성동
-신체특징 : 지적장애, 눈썹이 짙고 속눈썹이 많음. 시력이 안 좋아 사물을 볼 때 지긋이 봄. 이름, 전화번호는 말할 수 있음
집에서 자다가 사라져버린 14살 소년
1988년 4월 23일 토요일, 강남구 삼성동에서 살 때였다. 당시 보건소 간호사로 일하던 박복순 씨는 퇴근 후 할머니를 모시고 오후 3시께 효자동에 있는 치과에 갔다. 당시 고3이었던 첫째 아들 태정이도 공부를 하러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태희는 방에서 자고 있었다.
약 3시간 후 집에 도착해 방문을 여니 태희는 온데 간데 없고 이불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다. 방에서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이불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다. 놀란 김 씨는 바로 경찰에 전화했다. 그 전에도 아이가 혼자 집을 나가서 경찰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기에 이번에도 쉽게 찾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어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아들이 지적장애가 있었기에 김 씨는 더욱 노심초사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지만 지적장애 3급이었던 아들은 또래 아이들과 행동거지가 조금 달랐다. 밥을 먹고 싶어도 밥 좀 달라는 말도 못했고 혼자서는 제대로 밥도 먹지 못했다. 누군가 늘 옆에서 밥을 떠먹여 줬어야 했다. 때로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바지와 이불에 실수할 때도 있었다. 자신의 이름과 부모의 집 전화번호만이 아들이 기억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저 앉아서 경찰의 소식만을 기다릴 수는 없었다. 정식으로 파출소에 신고를 한 뒤 아이가 평소 가던 오락실과 문방구로 무작정 달려갔다. 평소 다른 사람이 게임하는 걸 구경하길 좋아하던 아들의 모습을 알기에 학교 근처부터 집에 오는 골목까지 샅샅이 뒤졌다. 길을 걷다가도 오락실 기계 앞에 앉아 있는 아이의 뒤통수가 아들과 닮은 것 같다 싶으면 바로 뛰어 들어갔다.
전단을 뿌리는 일은 주말과 출․퇴근 전후 시간을 활용했다. 태희 말고도 딸린 자녀가 셋이라 생업을 포기하고 아들을 찾으러 나설 수는 없었다. 퇴근 후에는 주로 역사 앞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들, 지하철과 버스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다녔다. 혹시 아들의 모습이 보일까 싶어 높은 곳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는 습관도 생겼다.
김 씨는 아들과 관련한 그 어떤 이야기도 흘려듣지 않았다. 태희와 비슷하게 생긴 아이를 봤다는 소식이 들리면 강원도, 대구, 부산 등 지역 가릴 것 없이 어디든 찾아갔다. 장애인시설, 보육원 등 안 가본 곳이 없었다. 하지만 전부 엉터리 제보였다. 아들을 만나지 못하고 되돌아올 때는 힘이 쭉쭉 빠졌지만,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밥 달라 말 못하는 아이 뭐에 쓰려고…”
태희는 태어날 때부터 김 씨에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출산할 당시 병원에서 처치를 제대로 하지 못해 아기가 나올 순간에 나오지 못했고 설상가상 입에 물까지 머금고 나왔다. 그렇게 태희는 장애를 안고 세상 밖으로 나왔다. 특수교육기관인 다니엘학교를 다니며 태희는 세상과 어울리는 법을 배워나갔다. 때로는 혼자서 셔틀버스를 타고 학교에 오고 가기도 했다. 학교에 다니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게 됐고, ‘발전상’이라는 이름의 상을 받기도 했다. 남을 배려할 줄 알아서 더욱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들이었다.
“엄마가 머리 아프다 하면 물수건 머리에 올려주고 옆에 앉아서 밥 먹으라고 했어요. 동네 아이들 예쁘다고 안아주려 하고 울지 말라고 쓰다듬어 주고…. 참 마음씨가 고았어요.”
둥글둥글했던 성격 탓에 태희는 형, 누나로부터도 사랑받았다. 맛있는 과자나 사탕이 생기면 본인들보다 태희를 먼저 챙겼다. 주말에는 막내 남동생까지 넷이서 모여 집에서 딱지를 치고 기차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태희를 배려해 규칙이 없거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놀이를 했고 일부러 져주며 자신감을 세워주기도 했다.
아들은 유독 아빠를 따랐다.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올 때까지 대문 바깥에 쪼그리고 앉아 아빠를 기다리는 모습은 평범한 일상 중 하나였다. 추운 날씨에도 어김없이 아빠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집에 있는 가족들이 추울까봐 문은 꼭 닫고 나갔다. 너무 오랫동안 밖에 나가있어 걱정하는 엄마에게 “아빠 오나, 안 오나 보려고 그래”라고 해맑게 웃어 보이던 아들이었다.
“다른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데 이 아이는 그랬어요. 못난 자식이 효자라고 몸이 불편해서 그런지 몰라도 마음씨가 착했어요. 너무 착해서 더 불쌍합니다. 누가 데리고 있다 하더라도 건강한 아이는 말도 잘 듣고 심부름도 잘할 텐데 태희는 그러지도 못하잖아요. 일 못해서 맞지는 않았을지….”
TV 출연 이후 걸려온 결정적인 제보, 그러나
3개월이 흘렀다. 금방이라도 대문을 박차고 들어올 것만 같았던 아들은 결국 돌아오지 않았다. “4월에 없어졌잖아요. 그 얇은 봄옷을 입고 나간 아들을 생각하면 어디서 추위에 떨고 있지나 않을지…, 가슴이 메여요. 도대체 어디에 있을까요?”
아버지의 정성이 전해졌을까. 태희의 실종 사연은 KBS 아침방송을 타게 됐다. 방송 이후 제보가 쏟아졌다. 그런데 그중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군포에서 수족관을 운영한다는 김아무개 씨의 제보였다. “장사하다 나와서 보니 화물차 밑에 아이가 들어가 있기에 전화번호며 이것저것 물어봤는데 제대로 대답을 못하더라. 아무래도 아드님인 것 같다.”
부리나케 군포로 달려갔다. 전화번호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아이를 어떻게 할 수 없었던 제보자는 마침 지나가던 방범대원에게 아이를 부탁했다. 그 방범대원은 아이를 봉고차에 태우고 군포읍사무소(현재 군포시청)에 가서 당직실 관계자에게 인계했다. 하지만 당직실에서는 인계받은 사실이 없었고, 방범일지에도 그런 기록은 없었다. 무엇이 잘못됐던 것일까?
“방범대원이 아이를 시청으로 데리고 갔지만, 시청에서 인계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면, 아이가 시청 건물 밖으로 나왔겠죠. 그럼 또 누군가가 발견해서 신고할 거 아닙니까. 그런데 거기서 딱 소식이 끊어졌어요. 시청 주변도 뒤졌는데 어디에도 없었어요.”
아들을 찾을 실마리를 방범대원이 쥐고 있다는 생각에 김 씨는 방범대원과 만나려고 군포경찰서에 전화도 하고, 직접 찾아가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방범대원은 끝끝내 김 씨를 만나주지 않았다.
“제가 전화하면 어떻게 알고 동료 경찰들이 먼저 받았어요. 그리곤 회의에 들어갔다거나, 출장 중이라고 말하더군요. 그 사람한테 따지려고 전화한 게 아니라 어떻게 된 건지 속 시원히 듣고 싶어서 전화했는데…, 그것조차 쉽지 않았어요. 경찰서로 직접 찾아갔는데도, 바쁘다는 이유로 만나주지 않았어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김 씨는 당시 경기도경찰국에 진정을 넣었다. 방범대원에 대한 재조사가 진행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졌다. 하지만 경기도경찰국이 보내온 한통의 서류에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었다.
그 서류에는 ‘김아무개 씨가 방범대원이 정신박약아를 차에 태우고 지서 방향으로 가는 것을 목격했고, 차량운행 일지 상에 무거주자 읍사무소 인계’라고 적혀 있었다. 이어 ‘읍사무소 내 근무 경찰관에게 보고하지 않은 채 임의로 당직실에 아이를 인계했고 신병인수증을 받지 않은 점은 근무태만이 인정돼 징계위원회에 회부한다’고 적혀 있었다.
“이게 자기들 체면 깎이는 문제라서 그런지 제대로 조사도 안 하고 ‘무혐의’ 처리했어요. 지금이야 경찰이 국민들과 잘 소통한다고 하지만 그때는 말도 잘 못 걸고 그랬으니 이의제기도 못하고 그대로 지나갔죠. 왜 내가 그때 좀 더 강하게 묻지 않았는지 후회가 됩니다.”
꿈속에서 아빠를 외면한 아들의 모습
‘좋아하던 장난감은 왜 안 사줬을까?’
‘나중에 갖고 싶다던 르망 자동차 이야기할 때 진지하게 들어줄 걸….’
‘왜 내 아이를 보호해주지 못했을까?’
아버지의 27년은 후회와 자책뿐이었다. 모든 것이 후회스러웠고,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 때문이었다. 그 사이 할머니는 손자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에 품은 채 7년 전 숨을 거뒀고, 첫째 아들을 제외한 두 자녀는 모두 독립해서 가정을 꾸렸다.
1년 전 꿈속에 나타난 태희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있는 태희의 옆으로 김 씨가 웃으며 다가갔다. 하지만 태희는 모르는 사람을 보듯 김 씨를 등 돌려 외면했다. 평소 ‘아빠 아빠’ 따랐던 아들이기에 충격이 컸다.
베갯잇을 적신 채 일어난 김 씨는 연이어 두 번째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돌아가신 할머니와 병으로 죽은 남동생이 한 자리에 있었는데 그곳에 태희도 같이 있었다. 꿈에서 깨어난 김 씨는 엉엉 울었다.
“태희가 죽어서 가족들과 모두 같이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팔순 노인의 눈가에 맺혀 있던 이슬이 주름을 따라 흐르기 시작했다. “일평생을 내가 죽는 날까지 못 잊고, 내가 죽어서라도 태희를 만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죽고 싶어요. 정말 죽고 싶어요.”
죽는 날까지 아들을 찾을 겁니다.
84kg까지 나가던 몸무게는 60kg로 줄었고, 당뇨도 찾아왔다. 하지만 김 씨는 전단 돌리기를 멈출 수 없다. 엄동설한에도 얼어붙은 손을 불어가며 낯선 이들에게 전단을 건넨다. 이 일을 김 씨는 ‘아들에 대한 속죄’라고 했다.
“추워도 내가 벌을 받아야 해요. 자식이 어떻게 됐는지도 모르는데 그 책임은 부모에게 있어요. 부모가 관리를 못해서 이렇게 된 거에요.”
김 씨는 틈만 나면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인 듯,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커튼 너머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유심히 살폈다. 장성한 아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걸까. 입가에 한줄기 미소가 스쳤다. 그리고는 옆에 조용히 앉아 있던 아내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쌌다.
“자식 잃어버리고 밥 먹고 잠을 잡니다. 참 부모가 돼서 이러면 안 되는데…. 내가 살면 얼마나 살겠습니까. 아들에게 죗값 갚는다 생각하고 살 겁니다. 내가 사는 날까진 꼭 찾을 겁니다.”
우리는 이번 기사에 김태희 씨의 성인 추정모습 사진을 싣지 못했습니다.
성인 추정 모습의 사진이 있다면 실종아동을 찾는데 더욱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내에서는 성인 추정 모습 사진을 제작해주는 시스템이 없습니다.
앞서 두 차례 나간 기사의 경우, 성인 추정 모습 사진을 실을 수 있었는데요.
이 사진들은 모두 실종아동찾기협회 측이 제공한 것입니다.
실종아동찾기협회가 미국실종아동찾기센터(www.ncmec.org) 측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 사진입니다.
성인 추정사진을 제작할 때에 포토샵 전문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의학전문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실종아동찾기협회에서는 관련 전문가를 양성하기 위해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서, 지난해 1명을 해외에 파견했다고 합니다.
아직 실종아동 성인 추정모습 사진도 스스로 제작할 수 없는 현실, 이게 바로 우리나라의 실종아동 찾기 시스템의 현주소입니다. 실종아동 벽보를 보면, 일부 아동의 경우만 현재 추정모습 사진이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 화에서는 실종아동 문제를 널리 알리기 위해 준비되고 있는 실종아동 연극 <I want go back>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실종아동찾기 ‘집으로’ 프로젝트에 앞으로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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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태희는 당시 실종되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 실종되었습니다.
무책임한 관리소홀로 인하여 실종아동이 되었기 때문에 부모님의 아음이 더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국민여러분들이 실종에 관심을 가져주시면 분명 가정으로 돌아올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