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17일 사순 제 2 주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8ㄴ-36
그때에 28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29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30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다.
31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2 베드로와 그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
33 그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서 떠나려고 할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
34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는데 구름이 일더니 그들을 덮었다.
그들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자 제자들은 그만 겁이 났다.
35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
36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
제자들은 침묵을 지켜, 자기들이 본 것을 그때에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뜻은 날뛰는 말과 같고, 마음은 떠드는 원숭이와 같다.
어려서 하늘의 별을 보면서 별자리를 익히느라고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샛별이나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북극성은 아주 잘 알아봅니다. 그러나 곰이나 전갈, 물고기, 사자성 등은 아직도 잘 모릅니다. 별자리를 가지고 만든 많은 전설이나 신화 이야기들은 지금도 정말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려서 은하수를 보면서 정말 물이 흐르는 큰 강이 하늘나라에 펼쳐져 있는듯해서 견우와 직녀성이 서로 은하수를 두고 울고 있는 것 같은 많은 상상을 하였었습니다.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양쪽에 떨어져 있는 별들이 어느 것이 견우와 직녀성인지 오히려 지금은 더 못 알아보겠습니다. 은하수도, 북두칠성도, 별똥별도 이제는 정말 보기 힘든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별 볼일이 없는 것인지, 별을 볼 수 없는 것인지, 이제 내 맘에 그런 마음이나 감정이 모두 없어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별을 보려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산골이나 섬에 가야 보이니 말입니다.
은하수를 보면서 그 속에 모든 사람들의 얼굴을 그릴 수 있는데 별들을 조합해보면, 엄마의 얼굴도, 할머니의 얼굴도 아버지의 얼굴도 그려집니다. 웃는 모습이나 슬퍼하는 모습도, 안개처럼 모호한 아름다운 얼굴도 모두 그릴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감히 용기를 낼 수 없지만 고등학교 다닐 때 겁도 없이 하얗게 눈이 내린 공동묘지 한 복판에서 벌떡 누워 은하수를 바라보면 별빛과 눈빛에 어우러진 예수님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수건을 쓴 성모님의 모습도 그려졌습니다.
해가 떨어지고, 사방이 캄캄하면 별은 빛을 더욱 발하고 영롱하게 살아납니다. 아름다운 빛은 더욱 영롱하고 또렷해서 그 별 속에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은 왜 그렇게 환하고 아름다웠는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느님의 모습을 아무리 그려봐도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천지창조나 최후의 만찬이나 현성용(顯聖容) 성화에서 볼 수 있는 주님의 모습을 아무리 상상해도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이 하느님을 닮지 않고, 하느님이 마음 안에 계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의마심원’(意馬心猿)이기 때문입니다. <뜻은 날뛰는 말과 같고, 마음은 떠드는 원숭이와 같다.>라는 말입니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며 오매불망(寤寐不忘) 그분께 마음과 뜻이 가 있다면 어찌 그릴 수 없겠습니까? 그러나 내 뜻과 마음이 그 분을 떠나 있기 때문에 주님이 그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에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정말 사랑의 하느님을 그릴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이 다 가 있으니 인자하시고 자상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를 낙원에서 쫓아내시는 무섭고, 어렵고, 찾아뵙기 힘든 분이고, 내가 만난다면 그 즉시 죽음이라는 공식 안으로 내 몰아칠 하느님만 그려지고 생각나는 것이고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벌벌 떨 수밖에 없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다. 두려워 말라.”라고 하셨나 봅니다. 지금은 주님의 그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모습이 거룩히 빛나는 형성용(顯聖容)의 모습은 정말 매일 대하고 싶은 환상의 모습입니다. 한번만이라도 보고 싶은 모습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당신처럼 내가 변하기를 바라시고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둡고 침침하고, 불평불만으로 가득 찬 내 모습을 바꿔주시기 위해서 당신의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내가 변하려고 노력한다면, “주님께서 야, 너 멋지다. 나를 많이 닮았다. 나를 닮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 네 노력이 가상하다. 장하다. 얘야.” 하실 것입니다. 주님, 어떻게 해야 당신을 닮을 수 있겠습니까? 주님, 쉽게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필리피서 말씀입니다. 3,17―4,1
17 형제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다른 이들도 눈여겨보십시오.
18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19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20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21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4,1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형제 여러분,
나의 기쁨이며 화관인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안에 굳건히 서 있으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야고보 아저씨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이배근 가브리엘 형제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