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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설악산, 비와 안개 속이어도.
1. 설악산의 안개 속 풍경
산을 즐겨 찾는 이 치고, 지도를 들여다보는 재미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게다. 여태 가 보지 못한 산마루며 골짜기가
머리카락 오라기 같은 등고선을 따라 얼리고 쓸리어 영마루 쪽으로 겹쳐 치오르는가 하면, 정수리 가마에 이르러
뱅글거리다가는 이내 댓닢처럼 포개어져 총총히 골짜기 아래로 내리 지르기도 하는 추상의 점과 선이 빚어내는
지형을 바라보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내가 그 자리에 서있기라도 하듯이 꿈속에 잠기는 맛은, 사실 산을 오르는
그 자체보다 훨씬 흥미진진한 것이다.
―― 김장호(金長好, 1929~1999), 『나는 아무래도 산으로 가야겠다』의 ‘산지명고’에서
▶ 산행일시 : 2023년 5월 19일(금), 오전에는 부슬비 내리고 안개 자욱, 오후에 갬
▶ 산행인원 : 4명
▶ 산행코스 : 장수대, 대승폭포, 옛길, 대한민국봉 아래 서북주릉, 남교리 갈림길, 1,362m봉, 1,363m봉,
대승령 갈림길, 대승령, 대승폭포, 장수대
▶ 산행거리 : 도상 12.0km
▶ 산행시간 : 11시간 18분
▶ 교 통 편 : 승용차로 가고 옴
▶ 구간별 시간
06 : 40 – 장수대, 산행시작
07 : 13 – 대승폭포
08 : 40 - 대한민국봉 아래 서북주릉
09 : 00 – 대승령(1.0km) 갈림길
09 : 08 – 남교리(7.3km) 갈림길
09 : 15 – 1,362m봉
12 : 15 – 1,363m봉 아래, 점심( ~ 13 : 00)
13 : 50 – 1,363m봉
14 : 40 – 1,362m봉
15 : 58 – 대승령(1.0km) 갈림길
16 : 27 – 대승령(△1,210m)
17 : 13 – 대승폭포
17 : 58 – 장수대, 산행종료
2. 장수대에서 보무도 당당히 입산한다
3. 대승폭포 주변
4. 대승폭포, 물줄기가 가늘어도 소리는 온 산골을 울린다
5. 서북주릉 가는 길
8. 서북주릉의 귀룽나무
9. 연령초
11. 요강나물, 꽃망울이 검고 둥글다
12. 큰앵초, 빗속에서도 의연하다
13. 나도개감채, 가녀린 줄기에도 불구하고 여러 송이 꽃을 피웠다
“그가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할 거야.(I'm gonna make him an offer he can't refuse.)”
미국 영화 ‘대부(The Godfather, 1972)’에서 나오는 명대사의 하나다. 마피아의 대부 돈 꼴레오네(말론 브란도 분)
가 중얼거리듯 내뱉은 말이다. 패밀리가 후원하는 배우가 중요한 영화에 캐스팅이 되지 않자 그가 대부에게 해결해
달라고 사정한다. 그리고 양자이자 변호사인 톰(로버트 듀발 분)이 파견된다. 영화제작자는 대번에 거절한다. 그러
나 그날 저녁, 그의 이불에는 애지중지 아끼던 애마의 잘린 머리가 있다. 이어지는 비명, 그리고 대부의 제안은 받아
들여진다.
수 일전에 설악산을 다녀왔다는 하늘재 님이 누구라도 단박에 현혹될 설악산의 어여쁜(?) 사진을 카톡으로 내게 보
내주고 나서 세 시간 후에 이러한데 설악산을 가지 않으시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나는 다른 일이 있어 대번에 거절
하였으나, 1박 2일 동안 숙고한 끝에 모든 일을 젖혀두기로 하고 하늘재 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야 말았다. 하늘재
님이 내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한 것이다.
평일이고 새벽이라 서울양양고속도로를 시원스레 달리고, 홍천IC를 빠져나와 장수대 가는 44번 국도의 그 많은
신호대기 또한 높으신 분들의 행차를 알기라도 한 듯 멈추지 않도록 착착 비켜준다. 장수대까지 오는 내내 하늘은
맑았다. 그러던 하늘이 장수대에 오자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한다. 어쩌면 산정에서는 운해 위로 솟은 그림 같은
봉봉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 조금도 괘념하지 않는다. 지난 16일부터 설악산 통제가 해제된 터라 보무도
당당하게 입산한다.
등로가 한적하다. 한시 시판 들여다보며 느긋한 걸음한다. 아마 선인들이 대승폭포를 읊은 시만도 두툼한 책 한 권
은 될듯하다. 등로 입구부터 우리를 유혹한다. 팔곡 구사맹(八谷 具思孟, 1531~1604)은 「한계산(寒溪山)」이란 시
에서 “천 길 높게 펼쳐져 있는 푸른 절벽에/물줄기 거꾸로 매달려 날듯이 쏟아진다(千丈展蒼壁/倒掛飛泉射)”라고
했고, 귤산 이유원(橘山 李裕元, 1814~1888)은 「한계폭 367언(寒溪瀑三百六十七言)」에서 “진귀한 구슬을 품은 것
처럼 맑게 흐르는 천겁의 신기함/비단 옷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만 겹의 주름(寶珠通明千劫幻/錦衣璀燦萬疊襞)”이
라 했다.
가파른 데크계단 오르고 또 오른다. 이 길에 데크계단이 놓이기 전에는 어떻게 올랐을까 계단 주변을 아무리 살펴도
그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애 좀 먹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맞은편에서 내려오는 여성 한 분과 마주친다.
박배낭을 메지 않은 단출한 차림이다. 어떻게 이 시간에 벌써 내려오시나요? 물었더니 서북주릉에 비가 내리고 있어
귀때기청봉을 도저히 넘지 못할 것 같아서 그만 내려온다고 한다. 후줄근한 비에 젖은 모습이다. 물론 그렇다고
주저할 우리가 아니다.
대승폭포 얼마 남지 않은 데크계단 오를 때야 키 큰 나무 숲 벗어나 하늘이 트인다. 짙은 먹구름이다. 가리산과 주걱
봉은 정상과 그 주변이 먹구름에 가렸다. 대승폭포 주위의 암릉 암벽은 여전히 험하고 험하다. 대승폭포 관폭대에
다가간다. 대승폭포 물줄기 가늘다. 그래도 그 떨어지며 포말이 날리는 소리는 온 산골을 울린다. “가파른 절벽은
철벽과 비슷하고/퍼붓는 물줄기에 엷은 물안개 흩어진다(峭璧抗積鐵/驚潨散薄霧)”. 모주 김시보(茅洲 金時保,
1658~1734)의 「대승폭(大乘瀑)」의 시구다. 확실히 그러하다.
14. 큰앵초
16. 돌밭에서도 자라는 곰취
17. 백작약
18. 연령초
19. 나도옥잠화, 깊은 산 숲속이나 능선을 따라 자란다
20. 연령초
21. 설악산의 안개 속 풍경
대승폭포는 높이 88m로 금강산의 구룡폭포, 개성 천마산의 박연폭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폭포로 꼽힌다. 다음은
안내판에 쓰인 대승폭포의 유래다.
“먼 옛날 한계리에 대승이라는 총각이 살았는데 하루는 폭포가 있는 돌기둥 절벽에 동아줄을 타고 내려가서 돌버섯
을 캐고 있었는데 절벽 위에서 ‘대승아! 대승아!’ 하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외침이 들려 동아줄을 타고 올라갔으나
어머니는 간 곳 없고 동아줄에는 신짝만한 지네가 매달려 동아줄을 뜯어 막 끊어지려는 참이었다. 대승은 동아줄을
급히 타고 올라 무사히 살아날 수 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죽어서도 아들의 위험을 가르쳐준 어머니의 외침이 메아리친다 하여 이 폭포를 대승폭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대승폭포 위를 오르자 날씨가 급변한다. 어둑해지고 부슬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가파른 오르막은 끝나고 완만하다.
돌길 벗어나 흐릿한 옛길로 간다. 등로에 수북이 쌓인 낙엽은 젖었고 흙길은 비에 젖어 미끄럽다. 안개 속에 든다.
사방 자욱하다. 둘러보는 온 길과 갈 길이 안개에 가렸지만 나무숲 그 풍경이 몽환적으로 아름답다. 혹은 원근 농담
의 수채화다. 슬랩을 살금살금 오르고 엷은 인적 쫓느라 더듬거리기도 한다.
안팎으로 젖는다. 안은 땀으로 젖는다. 서북주릉 가까워서는 더욱 완만하다. 풀숲은 흠뻑 젖었다. 풀숲을 누비기보
다는 좋이 잘난 등로 따른다. 서북주릉. 대한민국봉(1,386m) 아래다. 안산에 털진달래가 피었을까 가 보고 싶은 마
음이 굴뚝같으나 아무런 조망 없이 단지 그것만 보고 오기에는 타산이 맞지 않는다. 털진달래가 지지 않았다는 보장
도 없다. 남교리와 대승령 갈림길로 내린다. 일로 북진한다. 잡목 숲 헤친다.
그리고 박새 무리 풀숲, 이낀 긴 너덜, 발목 거는 덩굴 숲을 차례로 지난다. 부슬비가 차다. 백작약과 홀아비바람꽃
은 움츠렸다. 큰앵초와 연령초(延齡草, ‘연영초’라고도 한다)가 의연하다. 연령초다. 지금까지 큰연령초로 잘못 알았
다. 둘이 워낙 비슷하여 전문가도 이 둘을 자주 혼동한다고 한다. 안개 속 푸른 초원에 세 장의 하얀 꽃잎이 단연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이다. 다음은 연령초에 대한 설명이다. 어렵다. 큰연령초도 이와 비슷하다.
“크기는 높이 20~30cm이다. 잎은 줄기 끝에 3엽 돌려나기하고 넓은 난상 능형으로 길이와 나비가 각 7~17cm이며
끝은 짧게 뾰족하고 밑은 약간 둥글며 가장자리는 밋밋하고 뒷면에 작은 돌기가 있으며 3~5개의 맥이 있고 엽병은
없다. 꽃은 5~6월에 백색으로 피고 화경 끝에 1개가 비스듬히 상향하여 피며 화경은 길이 4~6cm이다. 꽃받침조각
은 3개이며 장 타원형으로 끝이 둔하며 길이 2.5~3.5cm이고 꽃잎도 3개이며 달걀모양 또는 타원형으로 끝이 둔하
거나 둥글고 길이 3~4cm이다. 수술은 6개이고 수술대는 길이 3~5mm, 꽃밥은 9~12mm이며 암술대 끝은 3개로
깊이 갈라지고 열편은 뒤로 말린다.”(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연령초(Trillium camschatcense Ker Gawl.)와 큰연령초(Trillium tschonoskii Maxim.)의 차이점은 씨방의
색깔과 꽃 밥의 길이에 있다고 한다. 연령초의 씨방은 황백색이고 큰연령초의 씨방은 갈색이나 검은색이다. 꽃 밥의
길이도 연령초는 수술대 보다 2배 정도 길지만 큰연령초는 수술대의 길이와 비슷하다. 그리고 큰연령초는 주로 울
릉도에 자생한다고 한다. 연령초와 큰연령초 둘 다 산림청이 지정한 희귀식물이다.
24. 설악산의 안개 속 풍경
27. 땃두릅
28. 홀아비바람꽃, 비가 멎자 기지개 펴고 일어난다.
29. 안개 속 풍경
35. 홀아비바람꽃, 친구들은 다 가고 홀로 남았다
36. 나도옥잠화
38. 큰앵초
산은 설악산이다. 비와 안개 속에서도 그러하다. 가도 가도 자욱한 안개 속이다. 보이지 않게 흩어진 일행을 오룩스
맵 보고 찾아간다. 다행히 바람은 불지 않고 부슬비도 멎었다. 안개를 병풍 삼아 점심자리 편다. 하늘재 님이 비빔면
조리한다. 비빔면 조리의 가장 중요한 과정은 삶은 면을 찬물에 속성으로 식히는 데 있다. 그래서 당초에는 계류로
내려가서 점심을 먹을까 했지만 날이 궂어 산중에서 먹기로 한다. 야전에서는 여러 과정의 생략도 용서가 된다.
배낭에 넣어온 식수를 최대한 동원하여 식힌다.
삶은 면을 담은 망 채로 저 물구덩이인 박새 숲을 마구 휘저으면 면이 좀 잘 식혀지지 않을까 종용했으나, 박새가
독초라는 이유로 그러하기를 꺼려했다. 약간 미지근한 비빔면도 맛있다. 더구나 속옷까지 비에 젖어 온몸이 오돌
오돌 떨리는 마당에 더 뜨뜻해도 좋겠다. 이에 더하여 삼겹살 수육도 있고, 머리고기도 있고, 그 쌈할 곰취는 주변에
널려 있고, 명주인 신흥사 돌배주도 있으니 산상성찬이 아닐 수 없다. 돌배주는 다른 일행이 운전 등의 이유로 삼간
다. 내가 포음한다. 만복이 되어 일어난다. 누비는 안개 속 정취가 그만이다. 이중집(李仲集, 조선 숙종 때 인물,
생몰년 미상)이 읊은 시조가 나의 변명이다.
뉘라서 날 늙다 하던고
늙은이도 이러한가
꽃 보면 반갑고
잔(盞) 잡으면 웃음난다
춘풍(春風)에 흩나는 백발(白髮)이야
난들 어이 하리오
비가 그치니 홀아비바람꽃은 기지개 펴고, 백작약, 나도옥잠화는 비로소 우리를 맞는다. 반갑다. 신발과 배낭이
비에 젖었기도 하여 무겁다. 온 길 뒤돌아간다. 연령초와 큰앵초가 먼 데까지 나와 배웅한다. 남교리 갈림길에서
대승령(1.0km) 쪽으로 간다. 이제는 그저 쭉쭉 내리는 길이라 사뭇 부드럽다. 대승령. 귀때기청봉을 넘어 온다는
일행 네 명의 등산객을 만난다. 그곳의 털진달래 소식을 물었더니 대부분 지고 그래도 3분의 1쯤은 남았더라고 한
다. 올해는 글렀고 내년이나 기약해야겠다. 김일로(1911~1984) 시인의 「꽃씨」처럼.
꽃씨 하나
얻으려고 일 년
그
꽃
보려고
다시 일 년
대승폭포에 다다르자 운무가 걷힌다. 한계천 건너 가리봉과 주걱봉, 삼형제봉이 울근불근한 근육을 자랑한다. 어느
해 주걱봉 저 날카로운 북릉과 저 되똑한 삼형제봉 을 올랐던 일이 두고두고 흐뭇하고 자랑이다. 서북주릉 지능선
장군봉과 상투바위봉도 얼굴을 내민다. 이대로 내리다니 퍽 서운하다. 다시 하늘 가린 숲속에 들고 데크계단 통통
내리고 계류 건너고 돌길 지나 장수대다. 오늘도 무사산행을 자축하는 하이파이브 나눈다.
39. 회리바람꽃
40. 백작약, 산림청 지정 희귀식물이다
41. 큰앵초
43. 연령초
44. 대승령에서
46. 가리봉 연릉
47. 대승폭포 주변 암릉에 자라는 소나무
49. 설악산을 나온다
첫댓글 나도옥잠화 빼고는 다 봤네요~ 비오는데 수확(?)하시느라 고생하셧슴다
비에 속옷은 물론 신발까지 흠뻑 젖고, 달달 떠니 만사가 귀찮아지더군요.
그래도 안개 속 풍경은 멋있고, 풀꽃들은 예뻤습니다.^^
가은이 갖다준 설악산곰취가 어찌나 맛나든지 눈물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백작약은 저기 있는데, 백작은 여기 있네요.
언제나 만날 수 있을런지...
설악산은 언제나 환상적입니다.
가은 님이 무척 애쓰더니만 그 이유를 알겠네요.
아울러 백작약을 보러갔지요.^^
오랫만에 같이 산행해서 좋았습니다. 저는 특히나 인제목욕탕하고 합강막국수가 좋았습니다.ㅋㅋ
1363 지나 전망대에서 황철, 저항,공룡,용아,중청,귀청을 찍어봤습니다
날이 맑으니 다른 모습의 산이네요.
종종 불러주세요.^^
그리운 설악엘 다녀오셨군요. 안산이 궁금해집니다, 두어번 십이탕계곡을 내려다보며 비박했던. 몽환의 산길풍경이 한 편의 시 같이 정겨워 보입니다.ㅎ
설악은 잊고 살아야지, 생각나면 그때마다 가고 싶어집니다.^^
끝청에 케이블카 놓이면 설악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습니다...
설악산만큼은 좀 더 시간을 두고, 국민의 의견을 수렴하고, 각계의 인사들을 모아 원대하고 종합적으로 연구 검토해서 추진해도 부족할 것 같은데, 정치와 이권이 개입되어 졸속 추진은 아닌지 불안합니다.
아마 그런 일은 없겠지요.
봄비내리는 중에 꽃들이 많이 보입니다...비오는 설악은 추워서 걱정스럽지만, 싱그럽게 보이네요^^
빗속이지만 설악이 자랑하는 꽃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