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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1. 묵상글 ( 연중 제5주간 수요일. - 자기도취 하게 하는 사탄, - 다름에 대한 앎!.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4:40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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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1. 연중 제5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2.11 04:30
- 자기도취 하게 하는 사탄
솔로몬에 대해 묵상하다가 저는 느닷없이
무엇이 진정 사탄인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스바의 여왕이 하느님께 올리는 칭송처럼
솔로몬을 칭송하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사람이 원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듣기 좋은 말 하는 자가 원수/사탄이고,
듣기 싫은 말을 하는 사람이 오히려 은인/천사입니다.
그 이유를 우리는 잘 압니다.
듣기 싫은 말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잘못이 뭔지 반성하고 정신 차리게 하지만
듣기 좋은 말은 우리를 교만하게 하고,
자기만족에 빠지게 하고 특히 자기도취 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기도취(陶醉)
앞서 봤듯이 솔로몬도 처음에는 아주 겸손했고,
그래서 하느님께 지혜와 분별력을 얻었고
칭찬이나 칭송을 사람들에게 받을 때 하느님께 영광과 찬미를 돌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거듭되고 특히 해외로까지 명성이 뻗어 나가
스바의 여왕처럼 온 세상 모든 사람으로부터 칭송을 받게 되면서
하느님께 가야 할 칭송을 자기가 가로채고 자기도취 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이렇게 자기 도취하게 하는 것을 육의 영이라고 합니다.
“어떤 때 하느님께서 여러분 안에서 그리고 여러분을 통해 행하시거나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좋은 말과 일에 대해서, 더 나아가 어떤 선에 대해서도 자랑하지 말고,
스스로 기뻐하지 말며, 마음속으로 자기 자신을 높이지 않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한 다음 그런데 육의 영은 이와 반대로 행동하게 한다고 이렇게 경고합니다.
“육의 영은 영의 내적인 신앙심과 성덕을 추구하지 않고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심과 성덕을 원하고 열망합니다.
주님께서 바로 이런 사람들을 두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그리고 이어서 주님의 영이 하는 일에 관해 얘기합니다.
“이와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이 혹독한 단련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천한 것으로 여겨지고, 멸시받고 수치 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겸손과 인내, 순수하고 단순하며 참된 영의 평화를 얻도록 힘씁니다.
사실 무엇이 영적인지 육적인지 가르는 것은 간단하고 단순합니다.
칭송이든 영광이든 사랑이든 세속을 향하게 하는 것
다시 말해서 세속의 칭송과 영광과 사랑을 받으려고 하게 하는 것이 육적입니다.
반대로 주님의 영은 하느님을 향하게 하고,
칭송과 영광과 사랑은 하느님께 돌리고,
또 그렇게 되도록 세속으로부터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기를 원하게 합니다.
프란치스코의 권고대로 이것을 원하는 단계까지 우리가 가진 못하더라도
모욕과 수치를 어쩔 수 없이 당하게 될 때 그것을 사람이 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신 것으로 받아들이기만 해도 좋을 것입니다.
모욕과 수치 당하길 원하는 그런 제가 아닌 것이 안타깝고 부끄러운 오늘
칭송과 영광과 사랑만이라도 내게 돌리지 않고
하느님께 돌리는 제가 되길 기도하는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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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1. 연중 제5주간 수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다름에 대한 앎!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참된 자유란, 타인을 위하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포함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 사진 생략>
인류가 원죄로 인해 에덴을 떠난 그 이후
다름에 대한 앎(A Knowledge of Difference)
2026년 2월 10일 화요일
브라이언 반툼 박사(Dr. Brian Bantum)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인간이 자유와 개별성, 그리고 다름을 배우게 된 시작으로 묵상합니다:
인류의 타락 이야기를 다시 돌아볼 때, 나는 여전히 젊은 시절 신앙 안에서 배웠던 교만과 자만의 흔적을 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고자 하며, 자신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것을 탐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법과 정의를 거슬렀습니다. 그러나 타락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그보다 더 깊은 차원을 봅니다. 우리는 자유를 개별성으로 착각하는 성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몸으로부터 멀어져, 서로 다른 점을 드러내는 바로 그 부분을 감추려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하느님은 우리를 당신과 닮게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하고 또 사랑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선택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큰 일에서도, 작은 일에서도 그를 선택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가 나와 닮은 점과 닮지 않은 점을 모두 바라보는 것이며, 그 다름을 은총의 선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다름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하느님, 그리고 세상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도록 도와줍니다….
동산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숨기거나 뚫을 수 없는 벽 뒤에 두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다른 많은 나무들 사이에서 자라났습니다. 다른 나무들처럼 열매를 맺고 자라났으며, 바로 이 방식으로 아담과 하와 앞에, 곧 우리 앞에 자유의 표징으로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먹지 않기를 선택할 수 있었고, 먹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창조주로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곧, 우리는 그분을 우리가 결코 떠날 수 없는 분임을 고백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자유와 지식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큰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자유로 인해, 하와와 아담은 이 관계 안에서 안식하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나무들을 즐기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알 권리가 있다고 믿으며, 취하고, 베어내고, 찢고, 때리고, 소비하고, 종속시켰습니다. 우리의 "먹음"은 그 아름다운 자유가 아주 조금 기울어진 것이었고, 그 기울어짐은 하느님으로부터, 그리고 서로로부터 멀어지게 했습니다.
우리의 불순종 안에서 새로운 세계가 열렸습니다. 우리는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뱀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은 여전히 숨 쉬고, 생각하며,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달라졌습니다…. 이 새로운 지식으로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몸이 지닌 복된 의미, 함께 살아가는 삶의 성스러운 의미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얻은 지식은 우리를 숨게 만들었습니다. 서로에게서 우리의 몸을 감추고, 하느님 앞에서도 자신을 감추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과 하와는 여전히 하느님의 자녀로 남아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거하시기를 원하신, 사랑하고 사랑받기를 바라신 독특한 피조물이었습니다. 이 순간에도 우리는 하느님의 모상을 잃지 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을 불어넣는 성령과 사랑을 우리에게서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이번 주 ‘초심(初心)’(beginner’s mind)에 대한 묵상들을 감사히 받아들입니다. 나이가 들면, 때로는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우리의 틀이 조금 빗나가 있음을 보여주시며,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름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오래된 생각과 방식을 내려놓고 더 올바른 깨달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계속해서 배우게 됩니다. 저는 이 학습 공동체에 감사드립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저는 계속 배우고 성장하며, 이 세상과 이웃,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Linda O.
References
Brian Bantum, The Death of Race: Building a New Christianity in a Racial World (Fortress Press, 2016), 44–48.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bishek Rana,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동산 안에 있는 뱀이 우리를 멈추어 서게 합니다. 성숙한다는 것은 독과 도전을 식별하는 분별의 길임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순수에서 경험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 머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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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의 죄와 약점조차도 영성의 과정 속에서 변화와 변모를 위해 의미를 지닙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이 본래 선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문제는 외부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잘못된 의도에서 비롯되는 죄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밖에서 들어가는 것은 사람을 더럽히지 못한다. 오히려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15).
하느님을 거스르는 경험은 현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안에서 죄의 흔적을 쉽게 발견하며, 죄에 사로잡힌 세상을 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은총으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며, 인간의 악한 의도가 세상에 퍼뜨린 오염을 정화하는 사명을 우리에게 맡기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모든 인간 활동을 잘 수행하기를 바라십니다. 열정과 질서, 지혜와 능숙함, 완전함을 향한 갈망을 담아, 오직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순수한 의도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호세 마리아 성인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의도의 순수성은 언제나, 모든 일에서 오직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마음에서 나온다."고요.
가경자 베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한 생각은 마귀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마귀는 유혹자가 될 수 있으나 그 근원은 아니다."
일전에 한두 번 인용해 드렸던 토마스 머튼의 기도에서 이와 관련하여 아주 중요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바람은, 우리가 실제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지 못 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하느님을 기쁘시게 한다."고요.
그런데 우리의 의지를 흐리게 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허영심, 자기애, 믿음 부족에서 오는 낙심, 성급함, 완벽주의 등이 그런 것들입니다.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길 위에서 푸른 초원을 보고 목적지를 잊는 여행자는 어리석다."
저는 개인적으로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말씀 중 [푸른 초원]이란 자기 만족, 즉 자기만을 위하는 세속적이고 이기적인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의 기도와 노동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의식을 매 순간 새롭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모든 행위는 그리스도의 행위와 결합되어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있어 동업자로서의 역할을 조금이나마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다음 권고를 오늘의 화두로 삼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인간의 마음은 역사에서 가장 깊고 본질적인 드라마가 펼쳐지는 자리이다."
모든 생명은, 물리적인 생명이든 영적인 생명이든, 끊임없는 변화와 변모를 거듭하며 성장하고 완성을 향해 나아갑니다. 식물과 동물은 땅의 요소들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여 잎과 가지, 혹은 피부와 뼈와 살로 변화시킵니다. 우리의 두뇌조차도 결국 흙에서 비롯된 변형입니다. 그렇다면 영적 삶도 마찬가지로 끊임없는 변모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참된 "삶"이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성은 단순히 집 뒤뜰의 아름다운 정원처럼, 세상의 거칠고 불편한 것들로부터 잠시 벗어나 쉴 수 있는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전 생애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그 안에는 기쁜 것과 힘든 것이 함께 어우러집니다. 따라서 영성은 결코 정체된 상태로 머물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때때로 영성을 모든 변화 위에 고정된 어떤 것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마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전통을 빌미로 오랜 규정과 형식을 고수하며 진정한 변화(회심)와 하느님 사랑을 향한 여정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달리 말해, 흔히 사람들은 영성을 "정원"처럼 고요하고 아름다운 공간으로만 이해하려 하지만, 실제로는 삶 전체의 과정 속에서 기쁨과 고통이 함께 어우러지는 역동적인 여정이라는 점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전통과 규범을 고수하면서도 진정한 변화와 사랑에는 무심했던 모습은, 오늘날에도 우리가 영성을 고정된 틀로 오해할 때와 닮아 있습니다. 영성은 살아 있는 것이기에 늘 움직이고, 성장하며, 때로는 불편함과 마주하는 과정 속에서 더 깊어집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영성은 정체가 아니라 순례"라는 표현이 떠오릅니다. 정원처럼 잠시 쉬는 공간이 아니라, 길 위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변하는 여정이지요. 그렇다면 오히려 불편함과 갈등, 심지어 실패까지도 영성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어찌 보면 실제로 우리의 영성은 이런 실패 등과 같은 상황들을 통해 진정한 발전을 이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리치 율리안나 성녀는 "Sin is Behovely!"(죄는 실제로 불가피한, 혹은 꼭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했나 봅니다. 이 표현은 T. S. 엘리엇의 Four Quartets 중 「East Coker」에서도 인용됩니다.
이 표현은 인간의 죄와 실패조차도 결국은 더 깊은 깨달음과 회심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필요불가결한 요소임을 시적으로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즉, 죄가 단순히 파괴적인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느님 사랑과 은총을 더 절실히 경험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역설적 진술이지요. 이는 앞서 말씀하신 영성의 역동성과도 연결됩니다. 영성은 고정된 정원처럼 평온한 상태가 아니라, 기쁨과 고통, 실패와 회심이 함께 어우러지는 여정입니다. 죄와 약점조차도 그 여정 속에서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런 사고방식이 단순히 문학적 표현을 넘어 신학적 성찰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죄가 '필요하다'는 말은 죄를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불완전함이 은총을 체험하는 길을 열어준다는 역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깨어 우리 삶을 바라본다면 바로 이런 진정한 변화를 이루어 가시는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사랑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부족함과 실수, 그리고 죄와 어둠마저도 우리로 하여금 깨달음의 계기로 만들어 주시는 분은 자비와 용서의 하느님이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 진리를 의식하고 인식하고 겸허하게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관상하며 그 안에 머물고자 마음을 추스르는 일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을 틱낫한 스님이 말하는 mindfulness라고 정의 중 하나라고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선물로 허락하신 이 하루가 우리 모두 이 mindfulness를 살아가는 시간이길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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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1.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시작된 ‘정결례법’에 대한 결론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사람의 전통’으로 ‘하느님의 계명’을 폐기하고 있음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제, 오늘 <복음>에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16)
예수님께서는 부정한 것이 마치 밖에 있는 양, 막상 속은 은폐하면서 겉의 정결례법에만 치중하는 위선적인 정결례법을 부정하십니다. 이는 베드로가 요빠에서 이방인 코르넬리오를 방문했을 때의 환시체험에서도 말해줍니다. 하느님께서는 환시 속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 10,15)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무엇이든지 그 자체로 더러운 것은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더럽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더럽습니다.”(로마 14,14)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레위기 11-15장>이 명하는 ‘부정’과 ‘정결’에 대한 새로운 해석, 곧 ‘영적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더럽히는 것들은 밖에 있는 것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사용하는 ‘인간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곧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존자 베다는 말합니다.
“마귀라 할지라도 우리의 나쁜 생각들에 힘을 보태어 부추길 수는 있지만,
그 생각들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이처럼, ‘정결’이란 가시적인 겉을 깨끗이 닦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과 인격 전체에 걸려 있기에, 우리의 ‘내면의 변혁’, 곧 전 인격적인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안에 ‘악’이 차 있으면 ‘악취’가 되어 터져 나오고, ‘선’이 차 있으면 ‘선의 향기’가 되어 뿜어져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하시니, 박해하는 이에게도, 상처 입히는 이에게도, 오로지 선을 베푸십니다. 곧 예수님의 마음 안에는 ‘사랑’이 가득 찼기에 항상 ‘사랑’이 흘러나오고, 우리들 마음에는 ‘미움’이나 ‘화’가 있기에, 그것들이 흘러나오게 됩니다. 그러니, 타인을 탓하거나 처지나 환경을 탓하기에 앞서, 우리 안의 어둠과 악을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저희 마음이 빛과 선으로 빛나는 ‘예수님 마음’으로 차올랐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5)
주님!
저를 부수소서. 고정관념의 틀을 깨소서.
겉만 아니라 속도 부수고, 당신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제 생각을 바로 세우시고, 당신을 모욕하지 않게 하소서.
위선 부리지 않게 하시고, 선으로 제 안을 가득 채우소서.
당신 모상을 새롭게 하시고, 사랑의 향기 뿜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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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1.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소귀에 경 읽기’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도 상대방이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동창 신부님이 달라스에 왔습니다. 저는 주로 걸어 다니기에 차를 쓰도록 했습니다. 신부님은 한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운전하였습니다. 차에 핸드폰 거치대가 없었습니다. 저는 핸드폰을 차의 내비게이션과 블루투스로 연결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고 어려워했습니다. 차분하게 차를 세우고 블루투스를 연결해 드렸습니다. 그러자 차량의 내비게이션과 핸드폰의 내비게이션이 연동되었고, 신부님은 편하게 운전할 수 있었습니다. 끝까지 말을 듣지 않았으면 여전히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낯선 곳에서 운전할 뻔했습니다. 공항에서도 그랬습니다. 나올 때 북쪽으로 나오면 사제관 오기가 편하다고 했습니다. 신부님은 그냥 내비게이션만 보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공항이 복잡하여서 내비게이션을 보는 것도 좋지만 북쪽을 먼저 보는 것이 좋다는 제 말을 귀담아듣지 않아서 나올 때 조금 힘들었다고 했습니다.
저도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늘 당부하였습니다. “어른들에게는 늘 공손하게 대하세요. 술을 적당히 마시세요. 어디 다녀오면 발을 꼭 씻고 자야 합니다.” 당연한 말인데 잔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이제 어머니는 하느님 품으로 가셔서 더 이상 제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예전 어머니의 말씀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동창 신부님이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 준비에 대해서도 몇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냥 휴가왔으면 조용히 머물다 가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친구의 말이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교우들이 잘 알아서 할 거라면 에둘러서 불편한 마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남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 이유는 몇 가지 있습니다. 내가 다 알아서 할 수 있다는 교만입니다. 상대방이 잘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을 이루려는 욕심입니다.
솔로몬은 다윗 다음으로 훌륭했던 이스라엘의 왕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성전을 건설하였습니다. 다윗이 통일했던 왕국을 굳건하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던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의 뜻대로 잘 다스렸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지혜를 발휘하여 거짓된 엄마와 진짜 엄마를 구별하여 아이가 진짜 엄마의 품으로 갈 수 있게 하였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나온 것처럼 스바의 여왕은 솔로몬의 지혜에 탐복하였습니다. 소문으로 듣던 솔로몬의 지혜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고 감탄하였습니다. 스바의 여왕은 많은 선물을 솔로몬 왕에게 드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솔로몬의 말년을 알고 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걱정이 없었습니다. 근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마음에는 교만과 허영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이방인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망각하고, 자신의 지혜가 최고라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솔로몬의 위기는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교만과 허영이라는 마음에서 솔로몬의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 시기, 질투, 원망, 분노, 탐욕이 나오고,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아 넘어지는 인간의 역사를 반복해서 보여 줍니다. 아담은 하느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을 믿었습니다. 카인은 하느님의 경고를 듣지 않고 질투와 분노를 키워 결국 형제를 죽였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도 수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불평과 원망으로 귀를 닫아 버렸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때, 인간은 언제나 길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겉을 꾸미는 데서 멈추지 말고, 마음에서 나오는 것을 살피라고 하십니다. 참된 지혜는 많은 정보를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기와 질투 대신 감사로, 원망과 분노 대신 인내로, 욕심 대신 절제로, 무례함 대신 친절로, 자기중심 대신 나눔과 겸손으로 우리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드러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입은 지혜를 말하고, 우리의 걸음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이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주님, 제 귀를 열어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소서. 제 마음을 비워 교만이 아니라 겸손을 담게 하소서. 제 삶이 말이 아니라 열매로 복음을 증언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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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1.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08:20 추가
우리 안에 들어간 좋은 것들이 폭력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화되길!
강력한 한파의 후유증을 단단히 앓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보일러며 난방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번 스스로 해결해보겠다고, 몇 날 몇 일을 어두컴컴한 보일러실에 앉아 메뉴얼도 꼼꼼히 탐독하면서, 이런 시도 저런 시도, 백방으로 노력해보았지만, 별 진전이 없더군요.
할 수 없이 전문 기사님을 호출했는데, 정말이지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저기 쓰-윽 한번 훑어보시더니 즉시 문제의 원인을 파악하셨습니다.
초스피드로 분해와 교체, 수리가 완료되었습니다.
한겨울 난방이나 온수 문제로 답답해하고 있는 사람들의 구세주로 맹활약하고 계시는 전문 기사님의 모습이 정말 멋져 보였습니다.
전문가적 포스가 풀풀 풍기는 보일러 기사님을 바라보면서, 저희 같은 사제 수도자도 마찬가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목자가 가장 멋있어 보일 때는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일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제단에서, 말씀의 선포자로서의 전문가, 이웃 사랑 실천의 전문가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수도자가 가장 멋있어 보일 때는 복음삼덕의 실천의 전문가, 균형 잡힌 공동생활의 전문가가 되는 순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가장 멋있어 보일 때는 공동선 실천의 전문가,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세상 안에서의 일의 전문가, 부모로서의 전문가, 교사나 기술자, 정치인과 관료로서 충만하고 기쁘게 살아갈 때가 아니겠습니까?
피정객들을 위해 한 번씩 왕창왕창 시장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참으로 대단합니다.
평생토록 한 사람이 먹어치우는 양이 대단할 것입니다.
주식에 간식, 후식에 특식까지. 어디 그뿐인가요?
어마어마한 양의 술이나 음료, 안주까지...평생 먹은 것을 쌓아 올리면 대형트럭 몇 대 분량이 되겠지요.
우리 뱃속으로 들어가는 음식, 절대로 상한 것이나 부실한 것이 아니겠지요.
고마운 분들의 정성과 손길, 땀과 노고가 깃든 결과물, 정말 좋은 것들, 양질의 육류와 생선, 신선한 야채와 과일이 우리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 좋은 것들을 매일 수시로 섭취하는 우리입니다.
섭생의 결실이 좋은 결실을 맺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안에 들어간 좋은 것들이 폭력적인 에너지가 아니라 생산적이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변화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불행하게도 너무나 초라하고 부실한 것들이 많아 안타깝습니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코 복음 7장 20~23절)
좋은 것을 섭취한 우리에게서 보다 아름답고 고결한 것들, 가치있고 의미있는 것들이 나와
동료 인간과 세상,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면 좋겠습니다.
좋은 생각, 낙관적이고 긍정적인 태도, 순결, 자선, 생명 보호, 나눔, 호의, 정숙, 친교, 일치, 겸손, 지혜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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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1. 연중 제5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미친 판결을 봤습니다.
조금 전에 뉴스를 잠시 보려고 하는데 숏츠 영상에서 나온 뉴스를 보고 기가 막혀 얼척이 없습니다. 지하철에선가 한 요양보호사가 분실된 지갑을 주었는데 차비 명목으로 2000원을 꺼내 갔고 우체통에 반환을 했는데 이게 점유물이탈횡령죄로 처벌받아서 50000원의 벌금형을 받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형법에 점유물이탈횡령죄라는 게 있습니다. 사실 이건 형법에 있지만 현실적으로 형사적으로는 많은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죄책입니다. 이 뉴스를 보고 제일 먼저 제 입에서 나오는 말이 '미친 판사'였습니다.
법대로 한다면 점유물이탈횡령죄라고 억지로 하면 맞긴 맞는데 이 판사는 제대로 법공부를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범죄는 영득의 의사라는 고의가 있어야 하는 범죄인데 실제 영득의 의사는 이 사안에서는 지갑 전체를 보고 판단했다면 그나마 인정이 되겠지만 차비 명목으로 2000원을 물론 그렇게 해서도 안 되지만 이것을 가지고 영득의 의사로 인정을 했다는 건 이 판사는 법 이전에 사회의 일반 상식을 도외시한 판결이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법을 엄격히 해석해서 설령 그 2000원에 불법영득의사가 있어서 형법상 범죄가 성립하기 위한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한다고 해도 이익형량 측면에서도 과도한 처사입니다.
스물다섯배입니다. 법이라는 것은 법을 판단을 할 때에도 판사는 범죄가 되는 사실에 이르게 된 그 경위를 참작해 판결을 해야 합니다. 그냥 단순 법리만 가지고 해석해서 판시를 한다면 굳이 판사가 필요한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냥 법전 그대로 판결하면 됩니다. 재판관이 존재하는 이유는 단순 법리만으로는 해결하면 안 되는 그런 상황을 감안해서 사람의 판단이 개입해야할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재판관이 필요한 것입니다. 법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법에도 눈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법은 있는 사실 그대로 선언하고 판단하는 재판의 기능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세상 법감정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판사는 억울한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눈물을 흘리게 하는 판사로 된 것입니다. 이 사례를 보니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신앙의 길과도 너무나 흡사해 남일 같지 않습니다. 교회를 위해서 선의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다가 그게 이상하게 흘러 나쁜 인간으로 매도돼 8년이라는 세월 동안 남모르는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주교라는 큰 조직 속에 있는 작은 법원과도 같은 기능을 구현하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해서 눈물을 흘리는지 그 원인을 알아보고 그 눈물이 억울한 눈물이라면 닦아줄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되는데 오히려 더 눈물을 흘리게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 법원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지만 교회는 더더욱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교회를 하느님께서 보시면 가슴 아파하실 것입니다. 교회는 아픈 이의 눈물을 닦아주어야할 사명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 알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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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1. 연중 제5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 7,14–23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바깥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음식이 아니라,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말과 욕망과 판단이
사람을 더럽히고 관계를 깨뜨립니다.
나지안조의 성 그레고리오는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길은
겉을 꾸미는 일이 아니라
내면이 하느님과 닮아 가는 변화”라고 가르칩니다.
그에게 회개는
‘이미지 관리’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은 친절/선행 주간에 아주 직접적으로 닿습니다.
겉으로는 친절한 말인데
속에는 경멸이 섞여 있을 때,
그 말은 축복이 아니라 독이 됩니다.
반대로 말이 서툴러도
속에 자비가 있을 때,
그 말은 사람을 살리는 약이 됩니다.
예수님이 열거하시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은
단지 도덕 목록이 아니라,
내면의 흐름이 관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선언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기도는
“나쁜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가 아니라,
“주님, 내 마음의 샘을 깨끗하게 해 주소서”가 됩니다.
주님,
제 안에서 나오는 말과 시선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게 하소서.
친절의 겉모양보다
자비의 마음을 먼저 주시고,
제 안을 새롭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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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1. 연중 제5주간 수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23:55 추가
마르 7,14-23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모든 부정과 불의의 원인을 ‘바깥’, 즉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게 돌리면서, 겉을 깨끗이 씻는 데에만 치중하는 유다인의 전통적인 정결예법을 비판하십니다. 사람을 참으로 더럽히고 병들게 하는 것은 밖에 있는 ‘물질 세계’가 아니라 그것들을 사용하는 인간의 ‘내적 세계’, 즉 마음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세상 만물은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게 만드신 ‘선한’ 것들이니 그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특성만으로 그것들을 비교하여 ‘우열’을 가리는 계산적인 태도가, 개인적 ‘취향’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기준을 가지고 ‘좋고 나쁨’을 따지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하느님께서 참 좋게 만드신 피조물들을 더럽히고 망가뜨리지요. 더 나아가 그것들을 가지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고 들면 그 오염과 파괴의 정도가 더 심해지게 됩니다.
그러니 정결과 부정을 따지기 전에, 세상이 왜 이리 더럽고 불의가 가득하냐고 불평 불만을 늘어놓기 전에, 먼저 자기 마음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는지를 찬찬히 돌아봐야 합니다. 그 안에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실 때 담아주신 좋은 것들, 즉 사랑과 자비, 정직과 온유, 근면과 성실, 이해와 관용, 선의와 호의 같은 덕들을 제대로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그런 덕들이 사라지고 그 안에 육적인 욕망에서 비롯된 나쁜 생각들, 즉 불륜과 도둑질, 살인과 간음, 악의와 사기, 방탕과 시기, 중상과 교만 같은 부덕들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해야 합니다.
정결이란 눈에 보이는 겉부분만 깨끗하게 관리하는게 아니라, 나의 내면과 영혼을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관리하는 방법은 먼저 자기 잘못을 철저히 성찰하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눈과 마음이 하느님을, 그분께서 바라시는 올바른 방향을 향하도록 되돌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좋은 덕들을 내 안에 담도록 그것을 삶 속에서 꾸준히 실천하는 것입니다. 향을 감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나고, 쓰레기를 감싼 종이에서는 썩은 내가 나는 법입니다. 내 마음에 주님 뜻에 맞는 좋은 덕들이 꾸준한 실천을 통해 내면화되어 있으면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뿜어져 나오지요.
마음 속에서 미움과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면 그 이유를 남에게 돌리거나 환경을 탓하기 전에, 먼저 내 마음과 영혼 안에 악한 생각들이 도사리고 있지 않은지 살펴봐야겠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사람은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놓는 법”입니다. 그러니 그저 죄를 짓지 않는 소극적인 모습으로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살면 죄라는 ‘선’만 넘지 않을 뿐 마음으로 계속 악한 것들을 생각하게 되어 그것들이 내 마음에 가득 차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그것들이 마음 밖으로 튀어나와버리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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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1. 연중 제5주간 수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8:00 추가
<거룩하게(깨끗하게) 살아야 거룩한(깨끗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14-23)”
1)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겉으로만 거룩한 사람이 되지 말고, 겉과 속이 똑같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거룩한 옷’을 입는다고 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거룩하게 살아야 거룩한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표현에 초점을 맞춰서 읽으면,
“어떤 물건이나 음식이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2) 그 당시 ‘부정한 음식’ 가운데에서 가장 대표적인 음식은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제물을 먹기만 해도 부정한 사람이 되고, 우상 숭배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문제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나 다 지식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아직까지도 우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정말로 그렇게 알고 먹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약한 양심이 더럽혀집니다.
음식이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데려다 주지 않습니다.
그것을 먹지 않는다고 우리의 형편이 나빠지는 것도 아니고, 그것을 먹는다고 우리의 형편이 나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여러분의 이 자유가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 장애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지식이 있다는 그대가 우상의 신전에 앉아 먹는 것을 누가 본다면, 그의 약한 양심도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을 먹을 수 있게끔 용기를 얻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약한 그 사람은 그대의 지식 때문에 멸망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형제를 위해서도 돌아가셨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형제들에게 죄를 짓고 약한 그들의 양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죄짓게 한다면, 나는 내 형제를 죄짓게 하지 않도록 차라리 고기를
영영 먹지 않겠습니다(1코린 8,7-13).”
바오로 사도의 말을 다시 정리하면, “우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고,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은
그냥 음식일 뿐이다.
그러니 그것을 먹는다고 해서 우상 숭배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직 교리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죄가 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 사람들을 위해 조심해서 행동해야 한다.”입니다.
3) 베드로 사도가 체험한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튿날 길을 가던 그들이 그 도시 가까이 이르렀을 즈음, 베드로는 기도하러 옥상에 올라갔다.
때는 정오쯤이었다.
그는 배가 고파 무엇을 좀 먹고 싶어 하였다. 그런데 사람들이 음식을 장만하는 동안 베드로는 무아경에 빠졌다.
이어서 하늘이 열리고 큰 아마포 같은 그릇이 내려와 네 모퉁이로 땅 위에 내려앉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는 네발 달린 짐승들과 땅의 길짐승들과 하늘의 새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그때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드로는 ‘주님, 절대 안 됩니다.
저는 무엇이든 속된 것이나 더러운 것은 한 번도
먹지 않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베드로에게 다시 두 번째로 소리가 들려왔다.
‘하느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마라.’ 이러한 일이 세 번 거듭되고 나서 그 그릇은 갑자기 하늘로 들려 올라갔다(사도 10,9-16).”
이 체험은,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여라.” 라는 계시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부정한 사람들’로 생각해서 접촉하는 것 자체를 피했습니다.
사도들은 처음에는 그 사고방식에서 자유롭지 않아서 이방인 선교를 망설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 가운데 처음부터 부정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거룩한 성인들’만의 공동체가 아니라, ‘회개하고, 거룩해지려고 노력하는 죄인들’의 공동체입니다.
그 ‘노력’이 교회를 ‘거룩한 교회’로 만듭니다.
4) 예수님의 말씀은, “죄를 짓고 나서 남 핑계를 대지 마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누구 때문에, 또 어떤 물건이나 음식 때문에 내가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됩니다.
이 말을 반대로 생각하면, 아무것도 안 해도 누구 덕분에, 또 어떤 물건이나 음식 덕분에 자동적으로 거룩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남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지만, 나 자신이 먼저 스스로 노력해야 합니다.
노력은 하지 않고 남 탓만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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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1. 연중 제5주간 수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08:05 추가
■ 생활묵상 : 유 작가님의 숏츠 영상을 보고 용서를 생각해봅니다.
세 시간 전쯤에 그러니 새벽 1시에 늦게 귀가를 하면서 유 작가님의 숏츠 영상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전혀 신앙하고도 관련이 없는 이야기인데 뭔가 전율이 흐르는 게 있었습니다. 어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낸 게 있었습니다. 점심 때 전 꾸리아 단장님과 식사를 같이 했습니다. 제가 예전에 올린 글에서 번번이 저한테 신앙에 관한 내용과 지식에서 번번이 깨지면서 우기는 분이 계신다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바로 그분입니다. 본당 성체조배회장을 하셨고 제가 서기를 했기 때문에 매달 마산교구 지속적인 성체조배회 회의 때문에 같이 다니고 한 사이입니다. 저한테 숨기려고 해서 숨긴 건 아닌데 악의적인 소문을 혹시 들었는지 확인을 했는데 역시 알고 있었습니다.
제가 전혀 그 소문은 사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건 누가 이런 거짓을 꾸미고 또 소문을 냈는지 정확하게 밝혀야 할 필요가 있고 그래야 다시는 공동체에서 이런 희생이 발생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한다고 했습니다. 식사 후에 돌아와서 오후에 본당 지휘자님이시고 교구성령봉사회 회장님께도 제가 저의 억울한 사연을 보내드렸습니다. 제 어머니는 후처도 아니고 첩도 아니고 저의 가족 6남매는 모두 어머니 한 배에서 출생한 자식이라 배다른 형제도 없다는 게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사실은 이건 세상 법에 의하면 사자명예훼손죄에 해당됩니다.
그 사실이 사실이면 해당되지 않지만 허위일 경우에 성립하는 범죄입니다. 이건 세상법에 의하면 엄격한 범죄입니다. 사실 누가 그랬는지를 대부께서 밝혀낸다고 해도 제가 어떻게 법적 대응을 하겠습니까? 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어떻게 빨리 밝혀져 제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고 또 이것 외에도 악의적인 소문이 전부 다 거짓이라는 걸 완전히 해소되는 기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랬는데 유작가님의 유튜브를 보고 고민이 되는 게 있었습니다.
8년 전 수녀님 사건, 또 저를 음해한 신자들, 본당 신부님 모두를 용서라고 하면 좀 그렇지만 용서를 하자는 마음을 먹었으면 하는 고민을 한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영상이었길래 그랬을까 궁금하시죠? 내용은 이랬습니다. 이제 유 작가님도 앞으론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 것입니다. 누군가 장례를 어떻게 치르고 싶은지 그걸 질문했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면서 한 이야기가 제 마음에 여운을 남겼습니다. 시간이 한정된 상태에서 시간은 흐르게 되고 그렇다고 붙잡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다 보면 그 시간은 반드시 오게 되고 통계상 대충 어느 정도 평균 수명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살 수 있는 잔여수명을 알 수 있기에 그 시간을 어떻게 쉽게 표현해 남과의 어떤 힘든 일로 에너지를 쏟아붓는다는 건 인생 낭비라는 것입니다.
이렿게 표현을 한 건 아닌데 제가 재해석해 쉽게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런 느낌을 가지면서 예수님을 묵상했습니다. 위에 언급했던 분들을 용서를 할 수 있다면 용서를 하자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처럼은 아니더라도 그래도 흉내는 내는 자식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진노의 잔은 내가 들 게 아니라 예수님께 바톤을 넘기는 게 그래야 그게 예수님을 따르는 자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었던 이유는 그래야 나중에 성모님을 만난다고 했을 때 성모님 품에 안길 수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역시 내 아들 베드로 장하구나 하며 정말 대견하구나 하시면서 어디 내 아들 한번 안아보자 하시지 않을까 하는 묵상을 해봤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예수님처럼 예수님도 모진 박해와 억울함 속에서도 십자가상에서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 그들을 향해서도 그들이 뭔 짓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른다고 하시며 그들의 영혼을 위해서 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도 용서를 하신 것처럼 나도 그렇게 위대한 모습을 예수님처럼은 안 되겠지만 그렇게 해보려고 마음을 먹어야 하지 않을까 하며 묵상을 했습니다.
제 마음속에서는 제가 그동안 당했던 고통을 생각해보면 보복까지는 아니더라도 분을 토해내고 싶지만 예수님이 그렇게 하면 되지 않는다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기에 예수님 말씀을 따라야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서 그래야만 한다고 의지를 다지는 것입니다. 지금 타이핑을 하면서 눈물이 흐릅니다. 슬퍼서 흐르는 게 아니고 인간의 감정을 예수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어야 되는 사정과 제 감정을 억눌러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이 나약한 인간이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버겁기 때문입니다. 8년 전에도 수녀님이 이동하시는 날에도 제가 수녀원 문 입구에서 1시간 이상 기다리며 수녀님이 본당 임원들과 식사를 하시러 가는 장소로 이동하시려고 수녀원에서 나오실 때부터 식당까지 제가 뒤를 따라가며 수녀님께 눈물로 용서를 청했지만 눈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외면하셨습니다.
지금 본당 신부님도 제가 세상적으로만 생각하면 어린 사람인데도 하느님이 세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무릎을 꿇고 용서를 청했지만 거절했습니다. 이분들이 한 행동은 하느님이 다 보셨을 겁니다. 저는 현세에서는 안 된다고 해도 마지막 하느님 대전 앞에서는 하느님의 진노가 쏟아질 것이라고 하며 제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성경에서도 복수는 하느님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날에 수녀님과 신부님께 " 내가 너희를 세상에 내놓은 것은 영적인 엄마로서 영적인 아버지로서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며 맡겨놓았는데 어찌 그렇게 했느냐"고 진노를 하시게 된다면 만약 그렇게 하느님께서 하신다고 해도 제 성격상 하느님께 눈물로 울부짓으며 탄원드릴 것 같습니다. "하느님, 수녀님, 신부님을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잘못해서 그렇게 됐습니다"라고 하며 하느님의 진노를 거두어들여주십사고 간청드릴 것 같습니다. 제 성격상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그날에 인간적인 마음 같아서는 " 내가 세상에서 당신들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지 하면서 이날만을 위해 그 모진 고통도 참아냈다"고 내뱉고 싶지만 그래도 그 순간에도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려 그렇게 하지 싶습니다. 이건 제가 마지막 하느님의 심판대 앞인 최후의 심판 때를 한번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 것입니다. 이런 묵상을 해보니 악의적인 해악을 가하려고 했던 사람들도 그냥 그들의 잘못도 하느님께 봉헌해야 나중에 성모님을 잘 뵐 수 있지 그렇지 않으먼 먼 발치에서 성모님을 바라보기만 할 뿐 품에 안길 용기는 생기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용서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눈에서 눈물이 자꾸 흘러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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