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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익은 열매들에게 문안하라
롬 16:1-6
1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추천하노니
2 너희는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3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4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까지도 내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5 또 저의 집에 있는 교회에도 문안하라 내가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그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맺은 열매니라
6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롬 16:1-6 / [문안] 겐그레아 출신인 우리의 자매 뵈뵈 부인이 곧 여러분을 방문하러 갈 것입니다. 그분은 교회의 열성적인 일꾼입니다. 2) 주님 안에서 일하는 형제 여러분의 자매로서 따뜻이 맞아 주십시오. 여러분이 도울 수 있는 한 힘껏 그분을 도와주십시오. 그분은 나뿐 아니라 어려움을 당한 많은 형제들을 도와주었습니다. 3)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이 부부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일해 온 나의 동역자일 뿐만 아니라 4) 목숨을 걸고 나를 살려 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방인과 믿음의 형제들이 다 감사하고 있습니다. 5) 그들의 집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는 사람들에게도 문안해 주십시오. 나의 좋은 친구인 에배네도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그는 아시아에서 맨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입니다. 6) 우리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도와준 마리아에게도 문안해 주십시오.
바울은 그동안 함께 사역했던 사람들에게 일일이 마무리 인사를 하면서, 먼저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동역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뵈뵈를 천거한 바울(1-2) 겐그리아는 고린도에서 동쪽으로 약 10.5km 떨어진 항구 도시로서 무역과 상업,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기록한 서신을 뵈뵈를 통해 로마 교회에 보냅니다. 뵈뵈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일꾼인지, 아니면 집사로 섬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 여자의 위치는 아이들과 함께 수를 세는데도 제외가 될 정도로 낮은 신분으로 취급되었습니다(마 14:21; 15:38). 그러나 바울은 뵈뵈를 로마 교회에 귀중한 서신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임명하고, 교회에 천거하면서 성도로서 최고의 예의를 갖추어 섬길 수 있도록 권면합니다. 왜냐하면 뵈뵈는 이미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들 뿐 아니라 바울의 보호자가 될 만큼 섬김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3-4) 바울은 성도들의 문안 인사 가운데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에게 가장 먼저 문안 인사를 합니다. 동역자란 함께 일하는 자, 돕는 자, 하나님의 일꾼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부부는 바울과 함께 생사를 같이하며,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던 동역자였습니다. 그래서 이방 교회들도 감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부부는 원래 로마에 살고 있었으나 글라우디오 황제의 박해로 인해 로마에서 고린도로 도피했습니다(41-45년). 그때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를 더욱 열심히 믿고 에베소에까지 동행하였으며(행 18:18, 26; 고전 16:19), 후에 로마로 돌아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그리스도인 부부의 아름다운 전형을 보여줍니다(고전 9:5).
가정교회, 에배네도, 마리아에게 문안(5-6) 초대 기독교는 회당과 같이 일정하게 모이는 장소가 없어서 보통 개인의 가정집에 모였으며, 이것이 자연스럽게 가정교회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가정 교회 안에 있던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성도들에게도 문안할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고전 16:19; 골 4:15; 몬 2). 바울이 사랑으로 제자를 삼은 에배네도는 현재 터키인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맺은 이방인의 열매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마리아를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어떤 수고를 하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로마교회가 다 알 수 있는 섬김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적용: 바울이 위대한 전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와 함께 생명을 바쳐 헌신적으로 동역했던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당신은 어떻게 쓰임을 받고 있습니까?
네트워크는 컴퓨터들이 통신 기술을 이용하여 그물망처럼 연결된 통신 이용 형태를 의미합니다. 이와 같이 교회도 서로서로 연결되어 있어 복음을 힘차게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는 많은 지체들의 동역 위에 세워집니다. 각기 다른 환경과 달란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협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 설 교 >
바울의 문안과 마지막 부탁
로마서 16장 / 민병석 목사
본문 : 로마서 16 : 1 - 27) 서 론 : 로마서는 로마교회에 대한 바울의 문안과 마지막 부탁으로 마쳐집니다. 로마서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읽고 연구해야 할 위대한 기독교 교리서입니다. 로마서는 이처럼 교리적인 면에서 문장을 다루었기 때문에 딱딱한 맛이 나서 흥미를 갖기가 어려우며 좀처럼 소화시키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로마서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종들로부터 부지런히 배워야 하며 그리스도인의 실 생활에 적용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소망 있는 믿음의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1. 뵈뵈의 천거 1절부터 16절까지는 바울의 복음 안에서의 친구 이름이 다정하게 불려지고 있습니다. 그 처음 이름으로 등장하는 사람이 ‘뵈뵈’라고 하는 여자 성도입니다. 바울은 그를 자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뵈뵈 자매는 바울이 쓴 로마서를 고린도에서 로마까지 가서 전달한 일꾼입니다. 그는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했습니다. 뵈뵈는 이곳 교회에서 교회를 섬겨온 일꾼으로 그가 하나님의 교회를 섬겨온 내용이 두 가지로 크게 나뉘어 있습니다.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를 볼 때에 뵈뵈 자매가 바울을 위해 그의 복음사역이나 그의 생활을 섬세하게 돌보아 주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뵈뵈를 로마교회에 보내면서 그를 주안에서 합당한 예절로 영접하라고 권고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다 똑같이 뵈뵈와 같이 주의 일에 전념하거나 힘겨운 일을 감당해 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주안에서 이토록 수고하는 성도들을 위해 주의 이름으로 합당한 대접을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2. 바울의 문안을 받은 로마교회의 성도들 3절부터 16절에 이르도록 21명의 성도들이 바울의 문안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바울에 의해 세워진 교회는 아니었지만 예루살렘교회나 바울이 전도 여행시 세운 교회성도들이 로마교회에 많이 있었습니다. (1) 먼저 바울은 아글라와 브리스가 내외에게 문안했습니다. 이들은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장막장사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던 바울의 복음 동역 자들입니다. 이들 부부는 부부가 합심하여 바울의 복음사역을 도와주었으며 바울을 위하는 일이라면 자기들의 목이라도 내 놓을만한 뜨거운 사랑으로 협력했다고 칭찬해 주고 있습니다. (2) 다음에 바울은 에베네도에게 문안하라고 말하고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고 일렀습니다. 에베네도는 바울에 의하여 회심한 성도로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많이 수고했다고 말하고 있는 마리아는 봉사의 일꾼입니다. (3) 다음에 바울은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바울의 친척일 뿐 아니라 복음을 위해 바울과 함께 옥에 갇혔던 사람이요 사도들에게까지 유명히 여김을 받은 사람이라고 소개했습니다. (4) 바울은 암볼리아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이 암볼리아는 특별히 주안에서 바울의 사랑을 받은 성도라고 했습니다. 주의 종의 사랑을 받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주의 종과 등지고 하나님과 가까이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5)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스다구에게 문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을 받는 아벨레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이 아벨레란 사람은 주안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형제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안에서 인정을 받는 일은 중요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누구에게나 인정을 받는 일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부끄러움이 없는 생활을 하려고 힘쓰는 사람이 끝까지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6) 바울은 또 아리스도볼로의 권속에게와 바울의 친척 헤리디온에게와 나깃수의 권속 중 주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할 것과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베나와 드루보사와 버시에게도 문안을 부탁했습니다. (7) 바울은 13절에서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루포의 존재에 대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골고다에 올라간 구레네 사람 시몬의 아들일 것이라고 말합니다(막15:21). 이 외에도 많은 성도들에게 문안 할 것을 전했습니다. 3. 거스리는 자들에 대한 바울의 경고 바울은 마지막으로 교회를 거스리는 자들에 대한 엄한 경종을 잊지 아니했습니다.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법도를 무시하거나 주의 종의 경종을 경히 여기면 안됩니다. 그리고 바른 교훈을 거스려도 안됩니다. 이들로 인하여 교회에 분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들이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인가? 이에 대하여 18절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이들은 자기 배를 섬기는 일에 열심을 품습니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진리의 복음도 아니고 바른 계명의 가르침도 아닙니다.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미혹한다고 했습니다. 공교란 말은 교묘하게 꾸며낸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 안에서 자라나는 가라지 들입니다. 우리는 이 같은 자들을 잘 살펴서 저희로부터 떠나야 합니다. 떠난다는 말은 격리란 말로 그들에게 가까이 하지 말고 그들과 교제하지 말며 그들의 일에 동참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19절에서 “너희가 선한데 지혜롭고 악한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선한데 지혜로우란 말은 선을 배우라는 말입니다. 악한데 미련 하라는 말은 악을 바라지도 말고 악과 타협하지도 말고 악에 접근하지도 말라는 뜻입니다. 결 론 : 25절로 27절까지는 바울의 송영사입니다. 바울은 25절에서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던 것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감취었던 것이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다고 했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복음의 계시는 놀라운 것입니다. 바울은 ‘나의 복음’이란 말로 담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놀라운 복음으로 소망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로 끝까지 믿음으로 견고히 하실 것입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 지어다.” 아멘.
선교 동역자들의 헌신
로마서 16:1-5 / 이정익 목사
사도바울은 희대의 인물입니다. 20세기가 지났지만 그만한 인물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출신성분이 좋았습니다. 부잣집 아들이었고 다소에서 예루살렘까지 유학했던 사람이었으며 당대의 학문 주류였던 헬라철학에 능통했던 명사집안의 아들이었습니다. 또한 정통 바리새인이었고 철두철미하게 경건으로 율법을 지켰습니다. 거기에 사명감이 출중하여 유대교인으로서 유대교를 위하여 열중하였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예수를 만나 회심하여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를 위해서 그 열정을 불태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1세기 초에 예루살렘과 그리스와 로마를 휘젓고 다녔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났고 회심과 변화가 일어났고 그의 발이 멈추는 곳마다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심지어 옥중에 있으면서도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외쳤던 인물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와 체질이 다릅니다. DNA가 다릅니다. 그래서인지 마침내 사도로서 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성공하게 된 원인이 몇가지가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
사도바울은 전도자로서, 사도로서 열정적으로 역할을 다했습니다. 그는 평생 4번에 걸쳐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1차 여행은 바나바와 함께 기원후 44년, 48세 때에 떠났습니다(행 13:1-14:28). 그들은 수리아 안디옥을 시작으로 구브로의 살라미, 바보, 버가,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더베, 루스드라, 앗달리아, 실루기아를 거쳐 다시 원점인 수리아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거리가 2,000km였습니다. 또한 2차 여행은 기원후 51년, 55세 때에 떠났습니다(행 15:36-18:2). 그 때에는 바나바와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바나바는 생질인 마가를 동행시키자고 했지만 바울은 아직 성숙치 못하다 하여 반대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결별하였고 바울은 바나바 대신 실라와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안디옥 교회에서 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비시디아 안디옥, 드로아, 네압볼리, 마게도냐,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에베소, 가이사랴, 예루살렘, 두로, 시돈, 그리스를 거쳐 다시 수리아 안디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 여행 길이가 자그마치 1만km나 됩니다. 또한 3차 여행은 54년 58세 때에 출발합니다(행 18:23-21:16). 그 때에는 수리아 안디옥을 출발하여 다소, 브루기아, 에베소, 드로아, 네압볼리, 마게도냐, 아덴, 마게도냐, 드로아, 앗소, 미둘레네, 기오, 사모, 밀레도, 바보, 두로, 돌레마이, 가이사랴, 예루살렘을 거쳐 돌아오게 됩니다. 그 여행거리도 1만km였습니다.
그리고 4차 여행은 기원후 62년, 66세 때에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로 압송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종교적인 문제로 상소하였다가 석방되어 전도길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그 전도 여정도 5천km나 되었습니다. 이 네 번의 여행 여정을 합하면 35,000km나 됩니다. 당시 로마 군단이 하루 행군하는 거리가 보통 25km였는데 바울의 전도여행은 거리상 매일 10km씩 이동한 꼴입니다. 그렇게 그는 충실하게 전도여행을 하며 많은 회심자들을 만들었고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말년에 가서 고백하기를 “나는 달려갈 길을 다 가고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믿음을 지켰다”(고후 4:7-8)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을 준비하셨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하였습니다. 수고한 자나 씨를 뿌린 사람은 기대가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한 학생은 그만큼의 기대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그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그의 인생에서 사도로서 여한이 없을 만큼 열정적으로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64년 68세로 순교를 하게 됩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인생이었습니다.
많은 동역자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이웃이, 친구가, 동료가 필요합니다. 사람은 혼자 살아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전도할 때 혼자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도 공생애가 시작되자마자 12제자부터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훈련하셔서 전도사역을 맡기시고 승천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사도바울 곁에는 아주 좋은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오늘 로마서를 끝맺으면서 사도바울은 그 동역자들을 일일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사도바울에게 참 좋은 동역자였습니다. 바울이 처음 회심하고 난후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위장 전향이라고 생각하여 경계심을 풀지 않았습니다. 그때 바나바는 바울 곁에 서서 여전히 경계하는 사도들과 그리스도인들을 이해시켜서 친교하고 신뢰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1차 전도여행 때에는 직접 동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바나바는 잊을 수 없는 동역자였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도 이 바나바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교회에 처음 나온 분들이 얼마나 어색합니까? 그분들을 잘 안내하여 적응시키고 안착시키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나바의 역할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나바는 잊을 수 없는 동역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경에서 여러번 동역자 바나바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뵈뵈입니다. 1절을 보면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겐그레아는 고린도의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로 교통 요충지였습니다. 뵈뵈는 그곳 출신의 여집사였습니다. 뵈뵈는 “빛을 발하다”라는 뜻인데 사도바울은 로마교회에 이 뵈뵈를 천거한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은 속히 로마를 가려고 했지만 여건이 여의치 않아 가지 못하고 먼저 뵈뵈를 보내면서 그 편에 로마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라”(2절)고 당부하였습니다. 로마교회의 성도들은 개종한 유대인들로 이방인에 대해서 배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뵈뵈가 겐그레아 사람이고 이방인이라 하여 소홀히 하지 말고 정중히 영접하라고 당부하고 또 그에게 소용되는 물품을 도와주라고 당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왜 그토록 뵈뵈 집사를 자상하게 배려하였을까요? 그 이유가 2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는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 뵈뵈는 사도바울이 어려울 때 상당한 위안을 준 집사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어려울 때 위로하고 도와준 사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본문에서 “이는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여러 계층의 성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냥 스쳐가는 성도들이 있는가 하면 두 번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성도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떠난 후에도 잊을 수 없는 분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뵈뵈 집사는 그렇게 잊을 수 없는 집사였습니다.
세 번째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입니다. 3절을 보면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동역자라고 표현합니다. 그 말은 이들이 사도바울의 사역에 상당한 역할을 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들을 고린도에서 만났습니다(행 18:2). 이 두 사람은 부부로 원래 로마에 거주하였는데 황제 글라우디오 시대에 유대인 추방령을 내려서 고린도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사도바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언제나 아내인 브리스가를 먼저 부르고 남편인 아굴라를 나중에 부릅니다. 그것은 아내가 더 활동적이었다는 말일 것입니다. 아내 브리스가는 성경공부를 잘 가르쳤다고 합니다. 행 18:23-26을 보면 그들이 아볼로를 만났습니다. 그는 당대에 언변과 웅변에 뛰어났던 사람으로 전도자였는데 요한에 법도만 알고 있었지 성령도 못받았고 성령에 대해서 알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브리스가가 아볼로에게 믿음의 도리를 가르쳤고 성령에 대해서 교육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후 이 부부는 바울과 에베소까지 동행(행 18:18-19)하였고 오랫동안 동역자로 활동하였습니다. 후에 로마황제 글라우디오가 죽자 로마로 가게 되었는데 그때 바울은 로마교회의 성도들에게 이 부부를 잘 도와주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두 부부를 이렇게 챙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4절을 보면 “저희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숨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 “자기의 목이라도 내 놓았나니”라는 표현은 사형집행자의 도끼 밑에 자기 목을 대신 내놓는 상황을 표현한 말입니다. 즉 이는 바울이 전도하다가 극심하게 핍박을 받을 때에 그를 구하고자 이들이 극단적인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온 것 같습니다. 아마 에베소에서 유대인들이 폭동을 일으켜 바울을 죽이려 할때 바울을 구하려고 죽음을 무릅쓰고 개입했던 사건을 회상하며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행 19:28-31, 고전 16:9, 19). 그러니까 이 부부는 일사각오로 사도바울과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두 부부에게 존경을 표하며 감사하고 있고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저를 본 받으라”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에배네도입니다. 5절에서 “나의 사랑하는 에배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에배네도라는 말은 “칭찬받을 만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사도바울이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함께 전도하였는데 그 때 이방인으로서 최초로 회심한 자가 에배네도였습니다. 그는 회심 후 브리스가와 에베소에서 로마까지 동행하였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에배네도를 말하면서 “아시아에서 처음 익은 열매”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에배네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열매였으니 얼마나 사랑스럽겠습니까? 첫사랑이 귀하고 첫 자식이 귀한 법입니다. 전도를 해서 처음 열매를 맺었으니 그 열매가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아시아에 와서 전도해서 첫열매로 에배네도를 얻었다고 말합니다.
다음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입니다. 13절에는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의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의 어머니는 곧 나의 어머니니라”고 하였습니다. 막 15:21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간 사람이 구레네 시몬입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루포인데 사도바울은 그 루포에 대해서 표현하기를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13절)라고 말합니다. 루포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봉사나 헌신이나 충성도가 아주 뛰어났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의 어머니를 가리켜 “그는 곧 나의 어머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바울이 수리아 안디옥에서 전도할 때 구레네 시몬의 집에서 유숙하였는데 그때 바울은 가족들을 떠나 아주 외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루포의 어머니가 그를 자식처럼 모성어린 돌봄과 따뜻한 친절과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루포의 어머니를 나의 어머니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가 지금 로마에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그에게 문안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디모데입니다. 21절에는 “나의 동역자 디모데에게 문안하라”고 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아주 좋은 관계였습니다. 그래서 둘의 만남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만남이라고도 부릅니다. 플라톤은 원래 정치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를 만나 대화하면서 철학자가 되기로 꿈을 바꾸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유명한 철학자였지만 책 한권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유명해진 것은 제자 플라톤이 그의 철학을 이론화하여 발전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플라톤이 없었다면 소크라테스도 없었을 것이고 플라톤도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되어서 유명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둘의 만남을 아주 좋은 만남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디모데는 사도바울에게 있어서 비중있는 동역자였습니다.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헬라에서 크게 성공하기를 기대하였고 어머니는 장차 아들이 좋은 전도자가 되는 것을 바랬습니다. 결국 디모데는 어머니의 기도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전도할 때 디모데가 동행했습니다(행 17-18장). 또한 고린도교회에 문제가 생겼을 때에도 디모데가 나서서 해결하였습니다(고전 4:17, 16:10). 그래서 바울은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디모데를 동역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전 4:17에서는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전도자로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수많은 지역을 다니며 전도하였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능력이 있었고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역은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거기에 좋은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바울에게는 아주 좋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로마서를 끝내면서 그동안 도와주고 힘이 되어준 동역자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전도가 성공한 것이 이같은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우리 곁에 좋은 친구나 이웃, 좋은 동료가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어려움을 준 사람들
사도바울의 전도 여정에는 아픔을 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딤후 4:10을 보면 그 아픔을 준 네 사람 “데마, 그레스게, 디도, 알렉산더”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여기 데마는 초기 사도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세상을 사랑하여”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바울은 그 사건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가장 마음이 아픈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한 여집사가 도중에 절로 돌아간 일입니다. 물론 그분의 성장배경이 절과 밀접해서 그런 것이지만 그 사건은 가장 마음 아픈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사도바울도 그랬을 것입니다. 그래서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나를 버리고”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곤경에 처한 바울을 버리고 돌아간 것도 문제지만 신앙마저 버린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아픈 마음을 안겨준 경우입니다. 딤후 4:14을 보면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조심하라 그가 우리에게 심히 대적하였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알렉산더는 당시 구리세공업자 즉 대장장이였습니다. 그가 예수를 믿고 바울을 따라다니다가 후에 배교하여 이단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이 재판받을 때 불리한 증언을 함으로 바울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건을 생각하면서 “주께서 그가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모든 심판을 주께 맡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디모데에게 그를 조심하라고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할 수 있으면 우리는 생각만 하면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목회하다가 보면 개중에는 두 번 다시 생각하기조차 싫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들 대부분이 심장병을 가지고 있고 사모들의 8-90%가 우울증을 가지고 산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목회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산기도를 갔는데 산에 고목나무 하나가 밑둥이 시커멓게 다 썩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도 목회하니?”하고 말했다고 합니다. 여기 기록된 좋은 동역자들은 하나님 나라 생명책에서도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직장에서든지 일터에서든지 사역지에서든지 살아가는 현장에서 누구에게나 좋은 동역자로 힘이 되고 언덕이 되어주는, 주의 나라의 생명책에 기록될만한 역할을 다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도 주님의 동역자들
로마서 16:1-16 / 조상호 목사
지난주에는 청년들과 함께 오클랜드에서 있었던 2000년도 뉴질랜드 코스타 수련회에 다녀왔습니다. 화요일 오전 일찍 크라이스트처치공항을 출발하여 오클랜드공항에 도착 한 후, 곧 바로 1시간20분 정도 떨어진 캠프로 이동하여 계속 그곳에서 3박4일의 수련회에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금요일 오후에 수련회를 마치고 오클랜드 순복음교회에서 있었던 송정미, 김명식, 이삼열, 등의 조인트 찬양 콘서트에 참석하고 어제 토요일에 돌아왔습니다. 저는 코스타 집회를 마치고 크라이스트처치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번 코스타 수련회를 다시 한번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몇 가지로 정리를 하면 이렇습니다. 첫째로 뉴질랜드 한국교회 역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수련회였습니다. 원래 이번 집회는 늦게 결정이 된 관계로 200명 참석을 목표로 준비했었습니다. 그 숫자도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왜냐하면 작년 호주 코스타 집회도 뉴질랜드에서 참석한 100명을 포함하여 350명 정도밖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주의 거대한 교민사회에 비해 작은 뉴질랜드 교민사회에 200명의 참석은 일견 타당한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집회에는 목표숫자보다 무려 두배 이상인 410명이 등록하였고, 강사, 스텝, 자원봉사자들 까지 합치면 무려 440명을 훨씬 상회하는 인원이 참석한 집회였습니다. 또 참석숫자 뿐 아니라, 퀸스타운, 더니든, 웰링톤, 로토루아, 해밀톤, 오클랜드 등지의 전국각지에서 참석하여 명실상부한 뉴질랜드 한인교회 연합수련회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이번 집회는 뉴질랜드에 새로운 소망과 비전을 제시해 준 수련회였습니다. 솔직히 말한다면, 그 동안 뉴질랜드에 거주하는 이민자 청년들이나, 유학생 청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도 없었습니다. 물론 뉴질랜드 이민역사가 얼마 되지 않은 이유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부모님들이나, 교회의 지도자들, 그리고 우리 어른들이 우리 청년들에게 정확한 비전을 심어주지 못한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번에 오신 강사님들을 통해 뉴질랜드에 새로운 소망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그 강사님들은 청년들 안에 잠재되어 있던 능력들을 발견케 하셨습니다. 완전히 식어버린 청년들을 뜨겁게 달구어 주셨습니다. 내재되어 있던 꿈들을 깨내어 주었습니다. 제가 그 동안 학창시절과 청년시절에 피교육자 입장에서 수많은 수련회에 참석하였고, 그리고 지도자가 되어 교육자 입장에서 수많은 수련회를 준비하고 인도했지만, 이번 코스타 집회는 과거의 수련회와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수련회는 매일 아침 7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침 7시부터 저녁12시, 저녁1시까지 단 1분도 휴식시간이 없었습니다. 하루에 정말 16시간 18시간 계속된 집회였습니다. 밥 먹고 강의, 밥 먹고 찬양, 밥 먹고 기도, 아무튼지 하루 종일 쉴 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놀라운 것은 참석한 청년들의 대부분이 젊은 아이들이 표현대로 땡땡히 치는 청년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보통 수련회를 하면 '몇 시까지 오라', '빨리 일어나라', '밥 먹어라', '잠자라', '졸지 마라' 등의 이러한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데, 이번 코스타 집회는 그러한 말들이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든 진행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오히려 시간 시간마다 제일 앞자리 앉으려고 거룩한 의자 쟁탈전이 벌어져서 조금만 늦게 가면 자리가 없어 뒷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강의나 집회 시간에는 강사님들의 말씀 한마디라도 더 들으려고 옆 사람과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다 받아 적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조는 사람도 거의 없었습니다. 또 찬양시간에는 정말 열정적으로 껑충껑충 뛰며 찬양하고, 기도 시간에는 강사님들이 절제를 시켜야 청년들이 기도를 멈출 정도로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셋째로 이번 집회는 뉴질랜드 한인교회들과 청년들이 하나되는, 연합하는 귀한 집회였습니다. 호주 코스타는 그 동안 4년에 걸쳐서 연합을 하지 못했는데, 뉴질랜드는 첫 번째 수련회에서 많은 교회들이 연합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작년에 저희 교회에서도 호주 코스타 수련회에 8명을 보내었지만, 시드니에 있는 한인교회들은 호주 코스타수련회에 거의 참석을 하지 않았습니다. 시드니에 있는 청년들은 아예 코스타 집회에 대해서 알지도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한 교회의 독주 때문이었습니다. 코스타 본부에서는 한인교회들의 연합을 조건으로 96년에 1회를 시작하도록 허락을 했는데, 한 교회가 너무 주도적으로 나서다 보니, 2회, 3회, 4회가 되어서도 한인교회들이 연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개교회의 자체 수련회처럼 썰렁한 수련회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뉴질랜드는 1회부터 연합이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 준비 때부터 연합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약간의 고비가 있었습니다. 원래 뉴질랜드 코스타집회를 처음에 준비할 때는 오클랜드에 있는 한인기독청년모임인 KYCF를 중심으로 한 코스타로 준비되었었습니다. 그러자 오클랜드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호주처럼 냉담한 반응이었습니다. 호주와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었습니다. 솔직히 저도 KYCF라는 한 단체만이 준비하는 코스타 수련회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었습니다. 오히려 분열이 될 까, 걱정을 많이 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에 있는 코스타 본부에서 한인교회들이 연합하여 준비하지 않으면 집회를 허락할 수 없다는 정식 요청이 있은 후, KYCF라는 한인기독청년회를 인도하는 목사님께서 기득권을 포기하면서 많은 교회들이 준비에 적극적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많은 교회들이 코스타 수련회를 위해서 몇천불씩 헌금을 하고, 복음성가 가수들을 수행하는 연주자들의 항공료를 부담하고, 수련회 기간 동안 식당봉사로 청년들을 섬기고, 다른 지역에서 온 청년들을 위해 차량으로 봉사하고, 음향 등의 값비싼 시설들을 빌려주고, 행사 기간 내내 설거지로 봉사하고, 강의나 설교 테잎을 복사하는 등, 많은 교회들이 함께 힘을 모았습니다. 결국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힘이었지만, 작은 힘들이 모이자 엄청난 힘으로 커졌습니다. 할렐루야! 저는 믿기로 이번 코스타 집회에 엄청난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진 것은 다름 아닌, 연합을 기뻐하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합을 기뻐하셔서 우리 청년들을 깨워주신 줄로 믿습니다. 뉴질랜드의 한인 교회들이 한인 그리스도인들이 연합하여 동역하는 것을 주님께서 기뻐하셔서 우리 청년들을 뒤집어 놓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동역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결코 독불장군이 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나 홀로'를 외치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보십시오.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았던 거의 모든 인물은 동역의 원리에 따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삼손과 같이 나 홀로'를 외치다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도 있지만, 모세와 같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지도자는 여호수아와 아론과 훌 이라는 걸출한 동역자가 사역 내내 곁에 있었습니다. 다윗에게도 그가 자신의 정적인 사울왕을 피해 아둘람 굴로 도망갈 때, 동역자 400명이 다윗의 곁에 있었습니다. 또 다윗이 그일라로 나아갈 때에는 그의 곁에 600명이 있었습니다. 또 기드온 사사를 보십시오. 그의 곁에 누가 있었습니까? 그의 곁에 용맹스러운 300명 용사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의 곁에 누가 있었습니까? 12명의 제자들이 예수님 곁에서 함께 동역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로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 등을 보면, 사도 바울은 항상 누군가와 함께 동역을 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러한 사실을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제가 대충 한번 세어보았는데, 실명이 37명, 무명이 최소한 3명으로 도합 40여명이나 됩니다. 그 사람들이 다 바울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동역자들의 특징을 한 번 보겠습니다.
1) 성별을 초월한 동역자들
사도 바울 곁에는 남녀를 구분하지 아니하고 많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파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여자도 사람인가?"하며 아예 여성들을 짐승 취급하는 여성차별이 있었는데, 그러한 가운데 바울에게 여성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바울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다고 해서 바울을 성차별주의자라고 합니다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성경에서 고린도교회 내에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고 하며 교회 내에서 어지럽히는 여자 성도들을 보고 그들을 꾸짖기 위해서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고린도교회에만 해당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 분명히 사도 바울은 여자 동역자들과 함께 사역을 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40여명의 인물들 중에서 가장 먼저 여자 동역자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누구입니까? 뵈뵈입니다. 본문의 '일꾼'이라는 헬라어는 '디아코논'이라는 단어로 오늘날로 말하면 섬기는 사람을 뜻하는 집사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뵈뵈라는 여집사와 동역했습니다. 또 2절을 보겠습니다. " 너희가 주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뵈뵈 여집사님은 사도 바울의 신실한 후원자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은 남녀 유별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동역자로 남녀 차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본문에 의하면 수많은 남자 동역자들도 있었지만, 뵈뵈, 브리스길라, 마리아, 유니아, 드루보사, 버시, 드루배나, 루포와 그 어머니, 그리고 율리아와 자매 등으로 11명이나 되는 여자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주의 일에서, 교회 안에서는 남녀 차별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EX) 이번 코스타집회에서 한가지 재미난 일을 목격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여자 복음성가 가수이신 송정미 사모님이 오셨습니다. 바로 코스타 국제총무로서 전세계의 모든 코스타 수련회를 기획하고 조정하는 업무를 하고 계시는 곽수광목사님의 사모님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첫날 집회를 마치고 지역교회 목사님들과 강사님들의 모임에서 송정미 사모님이 자신을 '사모'라고 부르는 것보다 '자매'라고 불러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곽수광 목사님의 사모로서 자신이 온 것이 아니라 찬양 강사로 왔고, 또 자신을 청년들이 '사모님'으로 부르면 너무 고상해서 청년들이 어려워하지만, 자신을 '자매'라고 부르면 청년들과 격이 없어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하면서, 이왕이면 자신을 '자매'라고 불러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전적으로 그 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의 요청이고 해서 공식적으로는 행사 기간 중에는 '자매님'으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이야기를 옆에서 가만히 듣고 계시던 남편이신 곽수광목사님께서 "저는 요, 항상 역 차별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사람들이 자신을 곽수광목사라고 부르기보다는 가수 송정미의 남편이라고만 부른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남자로서 역 차별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목사님들이 박장대소하고 웃었지만, 하나님의 일은 남녀가 따로 차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나는 남자라는 이유로 앉아서 대접만 받으려고 하고, 연약한 여자라는 이유로 앉아서 대접만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성경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반대되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경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작은 예수, 예수를 따르는 거룩한 무리들입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들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예수님이 행하신 것처럼, 섬기는 일, 봉사하는 일에 힘쓰시기를 축원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여러분들이 남자 성도이든, 여자 성도이든 열심히 주의 일에 힘쓰시기를 축원합니다.
2) 목숨을 건 동역자들
사도 바울에게는 목숨을 건 훌륭한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브리스가는 사도행전18장에 의하면 브리스길라라고 불려졌습니다. 브리스길라라는 이름은 앗시리아족의 여성을 나타내는 브리스가의 애칭입니다. 브리스가나 브리스길라나 같은 이름입니다. 아내 브리스길라와 남편 아굴라 부부는 참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았습니다. 보통 남편이 믿음이 좋으면 아내가 믿음이 좋지 않든지, 아내가 믿음이 좋으면 남편이 좋지 않든지 부부가 다같이 믿음이 좋은 부부가 드문데, 브리스길라, 아굴라 부부는 믿음이 좋은 부부였습니다. 그 부부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이익만 추구하는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EX) 지난 10월26일 자 신문에 <배은망덕한 제자>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던 적이 있습니다. 지방의 모 대학 자동차공학과 이모 교수는 대학 및 대학원생 제자들의 등록금까지 대신 지불해 줄만큼 제자들을 극진히 돌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치다가, 제자들과 같이 작년 5월에 벤쳐 기업을 설립했습니다. 그런데 회사를 설립한 지 1년만에, 지난 6월 갑자기 제자들이 집단 사직한 뒤 다른 회사를 설립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스승의 회사에서 사직한 것 뿐 아니라, 자신들의 스승이 총2억원을 들여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개발한 신기술의 연구자료와 프로그램 등을 훔쳐 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설립한 회사에서 똑같은 제품을 생산하려다가, 발각이 되어 구속되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이 요지경이 되다보니, 하루아침에 배반하고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이 일어납니다. 의리라는 말은 박물관에 가야 찾을 수 있을 만큼 의리도 예의도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목숨걸고 헌신했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놀라운 말씀입니다. 그 부부는 목을 내어놓았다고 했습니다. 목을 내어놓았다는 원어는 사형집행자의 도끼 날에 자기 목을 내놓았다는 뜻입니다. 순교의 각오로 사도 바울을 위해서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동역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는 사도 바울이 목베이려고 하는데, 바울 대신 "바울 선생님! 저리 가세요, 저희들이 대신 죽겠습니다. 저희들의 목을 치세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저는 본문 4절을 읽고 사도 바울이 어떻게 해서 그토록 열정적으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울에게 믿음의 동역자, 목숨걸고 함께 나아가는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필요한 때입니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아굴라부부와 같은 믿음의 부부를 찾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가정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같은 믿음의 가정이 되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헌신하며 목숨걸고 헌신한 아굴라 부부와 같은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3) 헌신한 동역자들
바울 선생 곁에는 주님께 전적으로 헌신했던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6절을 보겠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또 12절을 보겠습니다. "주안에서 수고한 드루배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사도 바울의 사역 현장에는 많은 헌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물질로 바울선생의 사역에 동역했습니다. 열정으로 바울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가정을 내놓으면서까지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5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저희 교회에게도 문안하라'는 것은 그들의 가정 교회를 말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집을 성도들을 위해서 개방했습니다. 성도들을 위해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배우고 교제를 나누는 장소로 허락했습니다. EX) 제가 더니든에서 사역할 때, 유학생들이 1주일에 최소 한번, 평균 두 번씩 저희 사택에 왔습니다. 물론 제가 초청한 때도 있었지만, 반대로 불시에 찾아 온 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요, 저희 집의 냉장고에 음식이라도 많으면 그래도 괜찮은데 냉장고에 먹을 것이 없을 때는 아내가 대단히 난처해했습니다. 집안에 뭐라도 있으면 그것을 해서 먹이고 또 싸서 보냅니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을 때는 미역국을 끓여서 학생들을 대접하곤 했습니다. 미역 줄기를 조금만 물에 불려도 몇 솥단지의 국을 끓일 수 있잖습니까? 그래서 저희 집에서 식사한 학생들이나 손님들은 대개가 한번씩은 미역국을 드셔본 적이 있습니다. 한번은 김모라는 학생에게 밥을 해서 주는데, 그 학생이 "전도사님!(그 때는 전도사 시절이었습니다) 전도사님댁은 미역국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고 질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갑자기 받은 질문이라 저는 할 말이 언뜻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집사람은 미역국을 정말 좋아합니다만, 저는 하도 먹어서 질려버렸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싫어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집에서 미역국만 끓이면 저는 물 말아먹든지, 비빔밥 해서 먹든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전도사님댁은 미역국을 좋아하시나 봐요? 미역국을 잘 드시는 것 같아요"라고 질문을 해서 얼떨결에 "응, 우리 집은 미역국을 제일 좋아해"라고 거짓말을 해 버렸습니다. 저는 솔직히 미역국을 싫어하는데 말입니다. 아무튼지 손님들이 저희 집에 오면 아내가 대단히 난처해했습니다. 먹이고 싶고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먹을 것이 없어서 미역국을 끓이면서도 "또 미역국!"이라는 말이 나올까봐 노심초사하며 학생들을 섬긴 적이 있습니다. 그 때 경험을 했는데, 가정을 개방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주, 두주도 아니고 아예 permanently하게 아굴라 부부가 가정을 성도에게 개방했다는 것은 대단한 헌신이었습니다. 이러한 일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오늘 아굴라 부부는 우리들의 모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접만 받으려고 하는 오늘의 시대 가운데에서 헌신된 아굴라와 같은 부부를 찾으십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아굴라와 같이 헌신된 부부들이 많아지기를 소원합니다. 여러분들이 마리아처럼 드루배나와 두루보사처럼 기쁨으로 섬기는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4) 인정받은 동역자들
바울 곁에는 인정받은 동역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아굴라 부부는 그들의 신실함을 인정을 받았던 부부였습니다. 다시 한번 4절 하반절을 보겠습니다.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그들은 사도 바울에게 뿐 아니라, 다른 많은 성도들에게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10절 상반절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바로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열심히 교사로, 찬양팀으로, 예배안내로 봉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열정적으로 헌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항상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열정적인 헌신과 봉사가 잘못되어 공동체에 심한 누를 끼치는 수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우에 인정은 커녕, 책망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과 함께 동역했던 동역자들은 인정받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사람과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40여명의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인정을 받을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인정을 받지 못하면 아무리 큰소리로 고함을 쳐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때, 영향력을 끼칩니다. 가정에서 인정을 받을 때, 가정에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인정받는 것은 능력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꼭 필요한 사람,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 때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저는 자와 여러분들이 교회에서 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게도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뿐 아니라, 하나님에도 인정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5) 우리도 하나님의 동역자들
여러분! 사도 바울이 능력있게 사역을 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은 바로 그에게 동역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른 사람과 동역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능력을 부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훌륭한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참모 없이 온전하게 나라를 통치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장군이라 할지라도 혼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습니다.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같은 목적을 가진, 같은 비전을 가진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사도 바울은 복음전파의 과업을 이루기 위한 동역의 원리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나 홀로 사역을 하지 않고, 수많은 동역자들을 키웠습니다. 그리고 그 동역자들과 더불어 로마제국을 다니면서 힘있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사도 바울 선생에게는 성별을 초월한 남녀의 동역자들, 목숨을 건 동역자들, 헌신한 동역자들, 인정받은 동역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고전3:9)에 의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제가,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믿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원대한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에 동참한다는 것은 정말 영광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일에 동역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또한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십니다. 내가 하나님과 동역자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동역자가 되어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1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와 예배만 드리지 말고, 이제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동역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의 일에 동역할 때 기뻐하십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목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전도사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귀한 동역자임을 믿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선한 역사를 감당하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한축을 담당하는 하나님의 귀한 동역자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선교 동역자
로마서 16:1-16 / 이필재 목사
일주일동안 한반도에 세계의 관심을 집중시킨 두 가지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불행한 사건으로는 한반도에서 핵이 터졌다는 것이고, 반가운 일은 세계 평화의 가장 중요한 자리인 유엔 사무총장에 우리 한국 사람이 선출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우리 신앙인들이 가져야할 생각은 이 세상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불안 요소가 항상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일을 전력을 다해 하다보면 맨 마지막에는 허망한 좌절에 빠질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온 세계가 북한을 그토록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유엔 기구에서 도와준 것은 고사하고 한국 정부가 10년 동안에 6조5천8백억 원이나 지원했고 민간단체, 온 세계 교회가 북한을 향해서 한 것이 이루 말도 못하게 많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도와준 이유 중에 하나가 핵 실험 같은 것은 하지 말고 평화스럽게 함께 살자고 열심히 했는데 이런 결과가 나오니까 지금까지 북한을 도와주었던 사람들이 모두 허탈감에 빠졌습니다. 이것을 계속 해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유엔 안보리에서는 하지 말자고 지금 결정을 하지 않았습니까? “해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 이렇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일이 너무나 바빠서 협조하지 못하겠다고 반항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그런 것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냉수 한 그릇이라도 헛된 것이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모두 다 우리들이 해야 될 일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우선적으로 해야 되는 마음을 이번을 계기로 또 한 번 가져야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 가지로 온 세상이 뒤숭숭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북한을 더 이상 원조할 필요가 없다는 유엔의 결의를 보니까 더 큰일 났습니다. 북한의 민중들이 더 굶어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정치 지도자 몇 사람들의 생각이 온 세상을 이렇게 어렵게 만드는 것을 우리가 또 한 번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두 가지입니다. ‘동역자’라는 말과 ‘문안하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마지막 장을 쓰면서 자신의 선교 사역 일대기에 도움을 주었던 많은 동역자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문안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아마 예수님 이후 지금까지 2000년의 기독교 역사 가운데 세계 선교에 가장 큰 공로자가 있다면 바울 사도인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가 가끔 성지순례를 하는데 여러 가지 성지순례 코스 중에서 ‘사도 바울 선교지 순례’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1, 2, 3차 전도 여행을 했고, 마지막에는 4차로 로마에 갔는데, 선교하면서 지나갔던 그 길을 답사하는 코스로 저도 한번 여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편리한 문명의 혜택에서 잘 되어있는지 모릅니다. 첨단 과학적인 공법으로 잘 정리된 아스팔트 도로가 어디를 가나 잘 되어있어서 다니는데 조금도 불편하지 않습니다. 또, 타고 다니는 버스는 그 나라에서 제일 수준급의 버스를 타고 다닙니다. 의자가 편안해서 피곤하면 뒤로 젖히고 침대같이 잠을 자도 될 정도입니다. 추우면 히터가 나와서 적당한 온도를 유지해 주고 더우면 에어컨이 나와서 시원하게 만들어줍니다. 목이 마르면 시원한 콜라나 다른 음료수가 언제나 버스 안에 준비가 되어 있고, 식사 때가 되면 어디를 가나 좋은 음식을 먹고 저녁이면 수준급의 관광호텔에서 잠을 잡니다. 그런데도 다니는 사람들 모두가 똑같이 하는 말은 피곤해서 못 다니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를 생각해 봅시다. 바로 그 사막 길을 걸어서 굶주리며 매 맞으며 감옥에 갇히고 심각한 감시와 핍박을 받으며 기다리는 사람 없는 곳을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평생을 살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오늘 우리들은 부끄럽고 창피스럽습니다. 바울을 보고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라고 했는데, 사실 바울의 선교 행적을 가보면 그는 사람 같지 않습니다.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해낼 수 없는 일을 해냈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바울 사도가 어떻게 그렇게 큰 선교 업적을 남길 수 있었는가? 오늘 성경말씀에서 전해주는 바를 우리가 기억하고자 합니다.
바울이 그렇게 선교 사역을 훌륭하게 잘 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하나님께서 훌륭한 동역자들을 그에게 수없이 보내주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 로마서에 나타난 동역자의 이름만도 29명이나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바울의 13서신의 모든 동역자를 다 합치면 훨씬 더 많은 숫자가 됩니다. 바울 서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마지막 부분이 축도인 것과 그동안 자신의 선교를 도왔던 동역자들에게 문안하라는 기록이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 1~16절까지에만 해도 “문안하라”는 단어가 18번이나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 기억에 지울 수 없는 고마운 추억이요 잊지 못하는 선교 동역자들에게 글을 통해서 감사장을 전달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겠습니다. 바울 사도가 아니어도 평생을 복음 전파에 몸 바친 주의 종들은 은퇴 후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회고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90퍼센트 이상의 목회자들이 다 합니다. 한 달 전에도 제가 신학교에 다닐 때 은사이셨던 목사님께서 80회 생일을 맞이하셔서 출판기념을 하신다고 초대하셔서 제가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인생 80년을 돌아보며」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과거사를 모두 기록해서 그날 참석한 1000명도 넘는 축하객들에게 다 나누어 주셔서 저도 한 권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읽어보니까 거기에 제 이름도 하나 기록이 되어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거기 내용은 바울 사도와 같은 흐름의 기록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기억나는 고마웠던 사람들은 모두 기록하였습니다. 아마 저 같은 사람도 은퇴 후에는 틀림없이 그런 회고록 하나는 남기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록으로 남는 것은 영원성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부탁하신 가장 절실한 기록이 두 군데 나옵니다. 그런데 그 두 기록이 모두 승천 직전 기록으로 나타나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언적 교훈이라고 설교자들이 말합니다. 하나는 마태복음 마지막 부문입니다. 28장 19~20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는 말씀이고, 또 하나는 사도행전 1장 기록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최대의 관심사는 그 말씀대로 라고 믿는 것이 가장 정확한 판단이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바울 사도는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크게 쓰셨던 세계 선교사라고 평가하게 됩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바울 사도 자신이 고백한 선교 동역자의 역할을 세밀하게 살펴보는 것이 우리 사역에 도움을 줄 것이라고 봅니다. 오늘 말씀에 첫 번째와 두 번째 바울 사도가 강한 강조를 두어서 말한 것이 나타납니다. 첫 번째 기록된 문안자로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나타납니다. 이들은 부부로 아굴라가 남편이고 브리스가는 아내인데 아굴라는 유대인이고 부인은 로마인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 선교하러 갔을 때 돈이 없어서 취직을 하러 다녔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술이 천막 만드는 기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곳을 찾아서 가보니까 아굴라와 브리스가 부부가 바로 그런 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취직을 해서 함께 일하면서 선교비를 조달받는 관계로 만났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일종의 이 집의 종업원이 된 것입니다. 이로 인해서 그들은 일 가운데서 피차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이 부부는 새로운 사명감이 하나 생겼습니다. 바울 사도의 동역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열심히 협조합니다. 나중에 바울 사도는 에베소로 선교지를 옮겼는데 이들 부부는 고린도의 생업 터전을 정리하고 바울을 따라서 에베소로 가서 계속하여 바울 사도의 훌륭한 선교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선교 동역 사역은 우리들에게 오늘 큰 교훈을 남기고 있습니다.
선교 동역은 뜻이 같아야 능력으로 성취된다는 교훈을 우리들에게 주고 있습니다. 우리 선교사님들이 선교 현장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 있습니다. 핍박인가? 그 나라 기후인가? 아니면 돈인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견딜 수 있도록 하나님이 인도하시는데 제일 큰 일이 뭐냐 하면 선교지에 가서 배우자인 남편이나 아내 둘 중의 하나는 하고 싶어 하는데 하나는 그만 두자고 할 때가 제일 큰 위기입니다. 이 문제는 아예 기초부터 흔들려 버리니까 도저히 해결이 안 되는 그런 어려움입니다. 여기에서 선교 동역자 역할을 했던 남편인 아굴라가 반대했든지 아내인 브리스가가 반대했다면 절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교사도 아니요 목회자도 아니니까 선교사나 목회자들의 고충 같은 것들을 아마 체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같이 이렇게 목회하는 목사도 가장 위기가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사모가 된 사람이 목회를 그만 두자고 제안을 했을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없는 것 같지만 그런 일이 많이 있습니다. 선교사들도 “도저히 여기서 선교 못하겠다. 돌아가자.” 부인들이 이러는 경우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면 선교사나 목회자의 부인이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나섰을 때 어떻게 하죠? “그럽시다. 하나님이 나에게 소명을 주셔서 일을 맡기셨지만 당신이 싫어하니까 나는 그만 두겠습니다.” 그래야 되겠습니까? 아니면 “아니다. 너 이혼하려면 이혼해라. 나는 끝까지 하겠다.” 이래야 됩니까? 이 문제는 보통 힘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나 저같이 목회자들은 나만 빼놓고 부인들에게 꼼짝도 못합니다. 그런 말이 나올까봐 아주 벌벌 떱니다. 버리지만 않으면 감사하게 살아갑니다.
지난번에 갔던 아프리카 선교사 부부가 지금 한국에 나와 있어서 만났습니다. 우리 일행이 한 열 명 정도가 갔었는데 그 선교사님이 우리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시느냐 하면 “간증을 하겠습니다. 내가 간증하는 것보다 아내가 간증하는 것이 훨씬 더 실감 날 것입니다.” 그러시는 겁니다. 우리들이 “좋습니다. 들어보겠습니다.” 그랬더니 간증을 해주셨는데 무슨 간증이냐 하면 선교사역이 너무 어려워서 그동안 얼마나 심각하게 부부싸움을 했는지 남편이 있는 자리에서 적나라하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나 심각하게 싸웠는지 마지막에 이 선교사는 자기 아내를 앉혀놓고 마지막 기도를 드리겠다고, 이 기도를 하고 이대로 들어주시면 하고 그렇지 않으면 끝내겠다고 하고는 자기 아내를 앉혀놓고 “하나님 아버지! 이 기도는 마지막입니다. 내 아내를 빨리 데려가시던가 아니면 변화시켜 주시던가 하십시오.” 그랬더니 그 말을 듣고 옆의 사모가 또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도요! 둘 중에 하나 해주세요. 못하겠습니다.” 그랬습니다. 선교에는 절대적으로 동역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12제자를 선택하셨고 그들에게 그렇게 많은 시간을 들여 훈련시키셨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유언적 부탁을 하신 것입니다. 아프리카 선교사님을 제가 한번 모시고 오려고 하는데 눈이 작으십니다. 떴는지 감았는지 잘 분간이 안 되는 분이십니다. 실눈이라서 잘 보이지 않은 것 같이 늘 눈을 껌벅거리고 그러십니다. 그런데 이게 괜히 그러시는 게 아니고 선교하다가 하도 아내가 보기 싫어서 안 보려고 눈을 항상 감고 살다가 그렇게 되셨다고 말씀하시고, 사모님도 마찬가지십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보기 싫은 얼굴이 이 선교사 얼굴이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서로 안보고 몇 년을 살 정도로 그렇게 어려움을 겪으셨는데 지금은 사모님이 훨씬 더 열심히 하십니다. 아프리카 국적을 갖고 한국 국적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래서 아프리카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두개골을 여기에 묻자.”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선교의 역사 성취가 열매 맺히는데 이 선교 사역에는, 하나님의 사역에는 동역자가 이렇게 필요합니다.
그러면 이들이 어느 정도의 선교 동역을 했는가? 오늘 말씀에 나타난 말씀을 그대로 옮기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희생도 지불할 각오로 동역자로 나섰습니다. 여기 4절에 나옵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바울 사도의 선교 동역자들은 만약 바울 사도가 죽을 일이 생겼다면 “내가 대신 죽을 수 있습니다.”하는 정도의 선교 동역자 역할을 했다고 바울이 고백합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대신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지 그 외에는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목회 경험에서 여러 번 있었습니다. 건강이 약해졌는데 진단 결과가 건강한 사람의 장기를 하나 떼어다가 붙이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누가 누구에게 줄 수 있는가? 이것은 절대 쉽지 않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자기 생명의 위험 부담을 안고 장기를 떼어 줄 수 있는가? 멀쩡하게 건강한 사람의 배를 째고 내 장기를 뚝 잘라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되는데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지금 양심으로 한번 판단해 보세요. 내가 누구를 위해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쉽지가 않습니다. 요즘에는 아내나 남편이 죽으면 관 들고 가는 사람들에게 조심해서 들고 가라고 부탁한답니다. 떨어뜨리면 깨어날지 모르니까! 오다가다 나그네로 만난 바울을 위해서 어떻게 목이라도 내어놓을 수 있었는가? 그러면 성경은 거짓말을 했나? 이들은 바울 사역의 주님의 거룩성을 확신했기 때문에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바울 사도의 모든 삶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성취다. 그분이 살아있다는 것은 주님이 살아계신 것이요 그분이 죽는다는 것은 주님이 죽는 것이다. 순교자적 동역자가 되자! 내가 대신 죽을 수도 있다.” 지금 이렇게 강조해서 바울이 발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일본 선교사들을 위한 세미나 일 년에 1~2번 해마다 갑니다. 일본 선교사들도 저와 생각이 똑같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이 만약에 예수를 믿게 되면 세계 선교 사역은 달라질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일본 선교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인가는 일본이 세계 선교에 큰 공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의 특징, 가치관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문화에는 어떤 확실한 것을 위해서 몸을 바치는 특성이 있는 특이한 민족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전 세계 전쟁 역사에 누구도 하지 못하는 전술법! 가미가제 특공대! 일본 밖에 못했습니다. 20대의 젊은이들이 “천황폐하 만세!”를 부르면서 천황 폐하가 내려주는 술 한 잔을 마시고 자기 몸을 박살내서 죽어버리는 전술법으로 유명했습니다. 어느 나라 국민들이 이렇게 자기의 생명을 바치겠습니까? 이것은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에서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제가 오사카 세미나 도중에 한국 재벌 총수가 사무실에서 투신자살했다고 일본 신문에 크게 났습니다. 그날 아침 일본 목사님이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일본에도 이런 일은 많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런 문화는 모든 책임을 내가 진다는 뜻입니다. 일본 같으면 그 사람을 따라서 한 사람 내지 두 사람이 또 자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이 분을 위해서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분이 하는 일은 옳은 일이요 이분을 위해서 충성을 다하는 것이 내 삶의 가치다. 이렇게 판단하고 열심히 도와드렸던 사람들은 나는 이제 살 필요가 없다! 그러면서 목숨을 끊는 것이 일본의 문화입니다.” 그렇게 저에게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진리와 최고의 가치관을 발견했으면 그것을 위해서 몸을 바쳐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만약 그러한 일본 사람들에게 복음이 들어간다면 주님을 위해서 몸을 던지는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거야 말로 내가 찾는 진리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일본 선교사님들은 거기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열심히 선교를 하시는 겁니다. 실제로 일본 초기 기독교 역사를 보면 우리나라보다 순교자가 훨씬 많았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자고 나선 사람이 그렇게 많습니다. 무덤들이 지금 다 있습니다. 내 인생의 최고 가치 있는 일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위해 한번 모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인생에서 한번 살다 죽고 마는 것을 가지고 구질구질하게 해봤자 뭐가 좋은 게 있습니까? 사실 바울 사도는 육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삶을 살았지만 영적으로 평가하면 너무나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자기를 위해 죽어줄 수도 있는 동역자를 그렇게 많이 가지고 있었으니 그게 얼마나 행복합니까? 그러면 바울만 행복했는가? 바울의 동역자들도 똑같이 행복했습니다. “나는 옳은 일을 위해 이렇게 동역자가 된 기쁨을 가지고 목이라도 내놓았습니다.” 사실 세상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헛된 것에 인생을 맡깁니다. 왜 그런가? 그들은 거룩한 명분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텍사스에 부흥회를 하러 갔는데 다 끝나는 날 저녁에 교회 중진들이 너무 기쁘다고 늦었지만 좀 모이자고 하시며 한 30명 정도가 어느 집사님 댁에 모여서 여러 가지 대화를 하는데 그 집 주인의 삼촌이 되는 사람이 한국에서 오셨습니다. 모 대학 정치학 교수이십니다. 자기소개를 했는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평생에 교회를 가본 것은 이번에 3박 4일 부흥회를 처음 갔습니다.” “그러십니까?” “그런데 나는 이 부흥회를 통해 목사들이 설교하는 것은 처음 들어보고 내 인생이 얼마나 헛살았는지 후회가 막심합니다.” 구체적으로 자기는 정치학 교수라서 언젠가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을 해서 줄을 섰는데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틀림없이 자기가 대한민국의 훌륭한 정치인이 되는 자리를 얻을 것이라고 대학 교수 생활 하면서 모은 수십억 원의 돈을 줄 서는데 갖다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대통령이 되셨답니다. 이때나 저때나 나한테 무슨 연락이 오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무 연락이 없고 그래서 화병이 생겼답니다. 이제는 다 시간이 지나갔단 말입니다. ‘내 인생은 도대체 이게 뭔가?’ 그래서 화가 나서 미국 조카네 집에 지금 쉬러 왔다고 하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만약 그동안의 내 정력과 재물 이런 것을 당신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의 나라 위해 거룩하게 사용했다면 지금쯤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그 진리 안에서 자신의 삶의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진리로 사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살았고 동역자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가 아굴라와 브리스가를 보고 ‘저런 어리석은 사람들! 아니, 돈 한 푼 없는 바울에게 충성해서 무엇을 얻으려고?’ 사실 얻을 게 없이 오히려 소비요, 희생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왜 그가 하는 일을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놓았는가? 아마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그 시대에 사업 잘해서 잘 먹고 잘 살고 끝났다면 그것과 지금 이들의 이름이 이렇게 거룩하게 지구상에 나면서 주님 오실 때까지 많은 설교자들의 예화 거리로 설교의 주제 인물로 등장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느 편이 되시겠습니까?
그 다음에 바울 동역자 또 한 사람이 13절에 나타납니다. “주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많은 문안자 가운데 이 두 군데에 강조를 두었습니다. 이것도 생명과 관계가 있습니다. 어머니라고 하는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인간관계보다 가장 진한 사랑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얼마 전 TV 방송 뉴스에서 두 어머니의 희생을 보았습니다. 한 어머니는 비탈진 길에서 아들이 탄 자동차가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을 보고 자기 몸을 던져 막으려고 했다가 아들이 탄 차에 치여 죽었습니다. 또 하나는 불타는 집 안에 아이가 있는 것을 구하러 불 속으로 뛰어들어 불에 타서 숨진 어머니, 이것이 어머니입니다. 어머니라는 표현은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나를 낳아 길러주신 육신의 어머니 외에 내가 진정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관계의 사람이 있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저는 40년이 넘도록 목회하면서 수만 명의 교인들과 접촉을 하고 관계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나름대로 협조한 사람이 있고 나름대로 좋은 관계의 사람들이 그렇게 많이 있지만 실제로 내 마음 속에 사도 바울과 같이 어머니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편의상 “주 안에서 부모, 형제, 자매된 자들이여!” 이렇게는 말할 수 있지만, 개인적인 관계로 그렇게 부를 수 있을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실없는 소리를 지껄인 것인가? 이 어머니는 루포라는 아들과 알렉산더라는 아들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남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실 때 잠시나마 예수님을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고 갔던 구레네 시몬입니다. 그의 아내를 보고 지금 바울이 하는 말입니다. 이 집은 잠시나마 예수님을 대신해서 지고 갔던 십자가 그것 때문에 온 집안이 그때부터 예수를 믿고, 그의 아내는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 바울에게 진정 어머니 역할을 해준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머니와 똑같은 동역자 역할을 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독신으로 살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기록에는 아들이 많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여!” 혹은 “디도여!” 이런 말을 합니다.
기독교 역사는 지금까지 이러한 거룩한 명분의 희생적인 동역자 관계로 세계를 복음화시킨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이 성경을 써서 후대에 남기지는 못합니다. 또 그 당시 바울 사도의 동역자가 되었던 그 사람들과 같이 목을 내놓고 어머니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회고록이 가르치는 가장 거룩한 신자의 사명에는 피차 거룩한 문안도 있어야 하고 거룩한 입맞춤도 이루어져야 됨을 오늘 말씀이 우리들에게 영적 교훈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와 같이 인생의 마지막이 가까워 올 때 내 믿음의 인생 여정에 문안하고 싶은 사람이 생각나고, 바울과 같이 넉넉한 그런 회고록은 남기지 못해도 내 인생 회고록도 바울의 회고록과 같이 남길 수 있는, 또한 다른 사람의 회고록에 내 이름이 아름답게 들어가 기록되는 거룩한 명분의 동역자 관계, 이것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남기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피차 문안하고 피차 아름다운 관계로 주님의 구원의 성취를 위해서 이 땅에서 쓰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 말씀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가? 내가 살 길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크리스챤으로서 훌륭한 것인가? 말씀 가운데서 갈 길의 방향을 정하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훌륭한 하나님 나라 확장의 동역자들이 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사도 바울의 리더쉽
로마서 16:1-2 / 김남수 목사
사도 바울의 리더십을 계속 공부하면서, 여러분들이 듣고 공부하는 말씀을 날마다 생활에 적용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매주 성경을 통하여 배우는 리더십을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사회에서 활용하실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좋아하고 여러분과 함께 일하기를 좋아하는 훌륭한 리더십이 생겨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바울의 리더십의 특성 중 하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리더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 로마서 16장에는 놀랍게도 26명이나 되는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떤 이름은 알만한 이름이고, 어떤 이름은 전혀 들어도 보지 못한 생소한 이름들도 있습니다. 로마에 가보지도 않은 사도 바울이 어떻게 그 수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느냐 하는 것도 의문이고, 또 그 많은 사람들의 다양성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 저기 다니면서 전도할 때에 만난 사람 그리고 거기서 감동을 받고 서로 교제하던 사람, 이런 사람들이 당시에 다 로마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알고, 또 그 사람들하고 좋은 교제를 갖게 된 것으로 봅니다.
여기에 나오는 26명의 이름 중에 10명이 여성입니다. 그 당시에는 여성의 권위와 인격이 요즘처럼 신장되어 있지 않았을 텐데, 여성들을 잘 칭찬하고 격려를 한 것을 보면 바울은 여성의 역할을 존중하고 중요시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나오는 사람도 뵈뵈도 여성이고, 그 다음에 등장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같은 사람도 여자의 이름이 남자의 이름보다 항상 앞에 나온 것을 보면 여자가 남자보다 더 활동적이고 중요한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에 대해서는 자기를 통해서 예수를 믿게 된 열매라고 초신자를 칭찬하고, 어떤 사람들은 나보다 먼저 주 안에 있는 사람이고 사도들 중에 유명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웁니다. 이 말은 유명한 사람도 무명의 사람도 가리지 않고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말이고, 갓 믿은 사람도 좋아하고 오래 믿은 사람도 좋아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명한 사람이나 무명한 사람이나,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유색인이나 무색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든 사람을 좋아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이런 모습이 사도 바울의 위대한 리더십 중에 하나였습니다.
여러분들도 사람을 좋아하는 리더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사람이 붙는 것이고, 사람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지도자는 반드시 사람을 좋아해야 헙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을 거부하기도 하고 사람을 피하기도 하고 사람이 오면 숨어버리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이 성장 과정에서 자존감이 상하면, 사람들을 기피하는 증세와 열등의식이나 우울증이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을 기를 때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세대는 어렵고 가난하고 고통받고 복잡한 혼란기를 살았기 때문에 좋은 칭찬과 격려와 사랑으로 양육을 받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대부분 욕을 먹고 책망을 듣고 야단을 맞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러다가 우리 자녀들 만큼은 잘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과 완벽주의에 사로잡혀서 그렇지 못한 것을 보면 절망감에 빠집니다. 그래서 부모가 강하면 아이들의 상처는 그만큼 깊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다룰 때에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거친 어부들, 시골사람들, 교육을 받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을 모으셨습니다. 이들은 모이면 싸우고 다투는 기고만장한 사람들이었지만 주님께서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5가지 단어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넌 틀렸다’하는 말입니다. 또 하나는 ‘(내가 너를 부른 것을) 후회한다’는 말입니다. 만일 ‘너 같은 사람을 불러가지고 내가 속이 상한다’ 하고 말씀하셨다면, 주님은 말씀하고 잊어버리셨을른지 모르지만 제자들은 일생 동안 주님이 승천하신 다음에도 ‘나는 주님이 실수로 부르신 사람이다, 나는 제자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이렇게 자신을 포기하고 늘 우울증에 걸려서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처음 저를 부르신 그 사랑으로 끝까지 가지고 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 5:1). 우리는 자라면서 이런 저런 상처와 아픔 때문에 우리 스스로 안된다. 못 한다 하는 철저한 열등의식과 자격지심으로 묶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여기에서부터 해방을 받고 자유를 얻으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여기 백불짜리 돈이 있습니다. 이 돈은 미국 은행국에서 찍어낸 돈이기 때문에 땀이 조금 뭍어도 괜찮습니다. 꾸겨져도, 조금 찢어져도 받습니다. 왜냐하면 이 돈의 가치가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님이 여러분을 당신의 목숨을 걸고 건져낸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로 부르셨으면 여러분의 스타일이 좀 구겨져도 아직 여러분의 가치가 그대로 동일합니다. 여러분의 가치가 그만큼 소중한데, 사람들이 말한 환경과 어려움. 이런 것들 때문에 끊임없이 열등의식과 좌절감에 사로잡히게 된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마귀의 치명적인 공격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분 한분을 사랑하십니다. 여러분이 스타일을 구겼어도 다시 펴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찢어졌어도 다시 궤매서 사용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십자가에서 용서하시고 사랑하셔서 은혜를 주셨을 때에 여러분이 새로워진 것입니다. 자격도 없고 아무 가치도 없는데 그냥 주시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분의 자녀가 되는 위대한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왜 그것을 다 사용하지 못합니까? 열등의식은 우리의 꿈, 거룩한 비전을 파괴시킵니다. 이 꿈을 상실하게 되면 우리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오순절 교인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꿈입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으면 권능을 받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성령을 받으면 꿈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열등의식은 끝임없이 그 꿈을 파괴하고 상실하게 만듭니다. 사람이 성형수술로 외모를 바꾸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에 받았던 지난날의 상처나 아픔들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 다 못박았습니다. 장사되었습니다.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새로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제 옛사람을 떨처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강하고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지도력을 발휘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건강한 신앙부부의 모델
로마서 16:3-4 / 이정익 목사
오늘은 성년주일입니다. 젊은이의 주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교회에 젊은이들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저는 언제나 이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젊은이들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누려야 할 삶과 가정과 일과 결혼의 삶에 대해서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젊은이들에게 가장 이상적인 신앙인으로 추천할만한 사람으로 저는 본문에 나와 있는 브리스가와 아굴라를 생각했습니다. 본문에 보면 브리스가(브리스길라)와 아굴라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두 사람은 부부입니다. 이 부부는 참 건강한 부부로 나타납니다. 여기 브리스가는 로마 귀족 출신입니다. 당시 로마귀족들의 삶은 너무 타락했었습니다. 그래서 뜻있는 로마인들은 타락한 로마를 떠나서 조용한 곳을 택하여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브리스가도 당시 사람들이 너무 타락해서 유대인들의 청결한 삶을 동경했습니다. 그래서 브리스가는 자주 유대인들이 모이는 회당에 출입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서 유대인 청년 아굴라를 만나서 결혼하게 됩니다.
이 부부가 결혼해서 로마에서 살고 있는데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부부는 할 수 없이 고린도로 이주하게 됩니다. 그리고 거기서 사도바울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부터 이 부부는 바울과 함께 동역을 하게 됩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 에베소로 갈 때 이 부부도 함께 따라가서 자신의 집에서 교회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평생 동안 바울과 함께 동사하면서 충성스럽게 일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인생을 회고하고 사역을 정리할 때 이 아굴라 부부를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들의 목 까지도 내 놓았나니 나 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그들에게 감사하느니라”.
사람이 이렇게 살면 행복한 인생입니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인정받았다면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입니다. 여기 나오는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보면서 우리들이 모두 이 부부처럼 살았으면 참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특히 오늘 결혼을 앞두거나 결혼해서 살고 있는 젊은 부부들은 이 부부처럼 향기로운 삶이 주어졌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그리고 아굴라 부부의 삶을 보면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몇 가지 이상적인 모습을 한번 되새겨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는 “결혼을 위해서 깊은 기도를 하는 일”입니다.
브리스가는 로마 귀족출신입니다. 그런데 로마인들이 혐오하는 유대 청년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겠습니까. 결혼은 참 중요한 일입니다. 경솔히 할 일이 아닙니다. 나의 미래와 운명과 평생이 좌우되는 순간입니다. 당연히 기도할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렇게 중요한 일을 앞에 두고도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너무 순간적인 감정에 좌우되어 결혼하는 일이 많습니다. 마지막 결정단계에 이르면 둘이 진지하게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순서입니다.
두 번째는 “부모와 상의하는 일”입니다.
결혼은 내가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좀 깊이 생각해 보면 결코 나 혼자하는 일이 아닙니다. 가족 중 한사람의 결혼은 곧 가족 모두의 일입니다. 한사람이 우리 집에 들어오는 일은 전 가족과 호흡이 맞아야 합니다. 그만큼 모두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결혼할 사람을 처음 만날 때 참 생각을 많이 하여야 합니다. 일평생 함께 살아갈 사람인데 너무 쉽게 감정에 이끌려서 결혼해 버리면 후에 후회할 수 있습니다. 가끔 자녀들의 결혼문제 때문에 부모와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녀는 이 사람과 결혼하겠다고 우기고 부모는 안 된다고 우깁니다. 그러다 보면 마침내는 자녀가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때 생각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부모는 자기 이상에 맞지 않는다고 무조건 반대하면 안 됩니다. 부모는 어지간하면 자녀의 선택을 축복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혼할 때는 마음껏 축복해주는 가운데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가 할 일입니다. 부모가 오랫동안 반대하면 정작 결혼해서 장래를 설계해야 할 시간을 모두 갈등으로 보내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막상 결혼하게 되면 그 마음 깊숙이 아픈 마음을 간직하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녀들은 결혼 상대자를 선택하는 일에 부모의 조언을 반드시 먼저 들어야 합니다. 부모는 이 세상을 오래 산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경험이 아주 풍부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녀에게 진정으로 충분한 배려와 충고와 미래에 대해서 조언해 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결혼하는 일은 내가 하는 일이지만 한 가족이 되면 가족 전체와 연결되는 문제입니다. 나 혼자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가족 전체가 불화할 수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보다 더 생각이 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어느 날 결혼할 대상자라고 데리고 옵니다. 부모입장에서 보니까 이 사람은 아닙니다. 상대가 한 50점만 되어도 괜찮겠는데 이것은 절대 아닙니다. 이 두 사람은 절대 안 맞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하겠다고 우깁니다. 부모들이 반대하면 할수록 더 강하게 나옵니다. 그래서 결국 부모들이 반대하다가 포기해버립니다. “네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하고 포기합니다. 그러면 그 결혼생활이 행복하겠습니까. 이 아들이 우겨서 결혼하더니 몇 달 살더니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 문제를 인생의 경험이 많은 부모들은 첫 번 만남에서 이미 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와 상의하라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부모만한 노련한 후원자, 상담자, 후견인이 없습니다. 마땅히 그 의견을 존중하고 수렴해야 합니다. 여기 브리스가가 결혼하기 까지 부모님과 얼마나 심각하고 심도 있게 생각하고 상의했겠습니까. 이것이 순서입니다.
세 번째는 “우리 부부는 하나님이 짝을 지어주셨다”는 의식입니다.
일단 결혼을 하게 되면 부부가 함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생각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짝을 지어주셨다”하는 의식입니다. 그래야 그 삶이 엄숙하고 서로 존경할 수 있고 사랑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 의식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건듯하면 성격차이 때문에 못살겠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성격이 딱 맞습니까. 한 태에서 나온 쌍둥이 형제도 마음이 안 맞고 부모 자식간에도 마음이 안 맞는데 남남끼리 만났는데 마음이 맞을 리가 있습니까. 자꾸 그렇게 불평하기 시작하면 부부 사이에 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이 틈이 문제입니다. 축대가 무너지는 것을 보면 이 작은 틈 때문에 마침내 큰 축대가 무너집니다. 이렇게 부부사이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하면 사탄이 그냥 놔두지 않습니다. 자꾸만 작용하고 시험들게 해서 틈을 더 벌려 놓습니다. 그러면 부부가 자꾸 밖으로 돌게 됩니다. 집이 싫어지고 둘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집니다. 그래서 가정이 병드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자신을 한번 점검해 보십시오. 우리부부는 요즘 틈이 벌어져 있는가 문제가 없는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생각해 보니까 조금 틈이 벌어져 있다 생각되면 빨리 봉합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는 마음이 딱 맞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바꾸어 보아도 또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나와 마음이 가장 잘 맞는 사람은 지금 살고 있는 부부입니다. 그 부부가 하나님이 나와 짝 지워주신 내 짝입니다. 여기 나와 있는 아굴라 부부는 오랫동안 기도하면서 만나 결혼한 부부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성스럽게 살았겠습니까. 그래서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부부에게는 이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네 번째는 “서로의 노력”입니다.
이 세상에는 모든 것이 저절로 되는 것이 없습니다. 저절로 되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관계일수록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간관계도 그냥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특히 아내는 남편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오늘은 아내가 남편보다 능력이 더 월등한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월급이 더 많은 경우가 많습니다. 아내가 남편보다 직장에서 더 잘 나갈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아내가 노력하지 않으면 남편을 우습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곧 문제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때 남편들은 참 왜소해지는 모습을 하게 됩니다.
여기 아굴라 부부가 그렇습니다. 여기 브리스가는 남편인 아굴라보다 능력이 더 있었습니다. 브리스가는 로마귀족 출신으로 로마문화와 헬라 문화에 익숙한 여인이었습니다. 남편인 아굴라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깨어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거기다 브리스가는 남편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고 활동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부부를 말씀할 때는 언제나 부인 이름을 먼저 씁니다. 그것은 부인이 더 적극적이고 행동적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이 부부를 보면 아주 잘 조화가 이루어집니다. 그것은 더 적극적인 부인이 남편에 대해서 잔잔한 감각으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부부의 삶에는 이것 조화가 참 중요합니다.
부부사이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과정을 보면 대부분 말 한마디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나 서로 말 한마디에 상처를 입지 않고 살아가려면 서로 노력을 많이 해야 합니다.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은 아내의 감정에 배려를 하고 아내는 남편의 자존심에 배려를 해야 합니다. 오늘은 아내는 감정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고 남편은 자존심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결혼 3개월 된 부부가 TV를 보고 있었습니다. 마침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내가 참 황당한 질문을 했습니다. “자기야, 자기는 내가 저 10번처럼 섹시해서 결혼했어 아니면 5번처럼 예뻐서 결혼했어?“. 이 남편이 하마터면 웃을 뻔했습니다. 그 질문을 받고 순간 대책이 안 섰습니다. 그래서 한참 망설였습니다. 그때 말 한마디에 따라서 얼마든지 심각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사숙고 끝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난 당신이 그런 유머 감각이 있는 여자라서 결혼했어”. 이 유머가 얼마나 좋습니까. 서로 존중하고 서로에게 말 한마디에 상처가 안 되도록 배려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다섯 번째는 “신뢰감”입니다.
일단 결혼하게 되면 서로를 위해서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신뢰감을 가져야 합니다. 부부는 처음에는 사랑으로 맺어졌지만 그 기초에는 신뢰감이 수반되어야 합니다. 이 신뢰감이 상실되면 모든 삶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브리스가는 로마귀족 출신입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인이 혐오스럽게 생각하던 유대청년 아굴라와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고국인 로마와 부모 곁을 떠나 고린도를 거쳐 지금 에베소에 와 살고 있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남편인 아굴라를 신뢰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만일 그런 신뢰감이 없었다면 그런 모험의 삶이 가능했겠습니까. 부부 사이에는 이 신뢰감이 참 중요합니다. 브리스가는 이 신뢰감을 바탕으로 당신 로마인들이 그렇게 경멸하던 유대청년과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인생을 맡깁니다. 모두 신뢰감이 바탕이 된 삶이니까 가능한 것입니다.
여섯 번째는 “뜻이 맞아야” 합니다.
부부는 평생 살아가야 할 사람이기 때문에 무엇 보다 뜻과 생각과 철학이 맞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아굴라부부를 가장 이상적인 부부로 추천하고 싶습니다. 이 부부에게는 몇 가지 이상적인 면이 있습니다. 하나는 신앙적인 뜻이 잘 맞았습니다. 아굴라 부부는 신앙적으로 서로 뜻이 잘 맞아서 언제나 주저함 없이 바울을 따라서 돌아다녔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굴라 부부를 말할 때는 항상 부부의 이름을 함께 불렀습니다. 그것은 부부가 서로 신앙적인 뜻이 잘 맞았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 봉사할 때 남편은 집에 있고 나 혼자 교회에서 봉사하면 하루 종일 마음이 불편하고 불안합니다. 조금만 늦어도 불안하고 식사 때가 되면 더 불안합니다. 그러면 무슨 일을 기쁘고 만족하게 할 수 있습니까. 함께 부부가 성가대를 하고 교사를 하고 끝나면 함께 식사하고 함께 집에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하고 즐겁고 그 삶이 재미가 있겠습니까. 아굴라 부부가 그랬습니다. 그 부부는 언제나 함께 다니며 일했습니다. 뜻이 잘 맞는 참 행복한 부부였습니다.
두 번째는 “신앙의 질이 잘 맞는 일”입니다. 아내는 열심이고 뜨거운데 남편은 신앙이 미지근해서 서로 잘 맞지 않습니다. 그러면 남편 입에서 “꼭 그렇게 믿어야 하느냐”는 말이 나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참 뜻이 잘 맞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질도 잘 맞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바울은 “이 부부는 나를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 놓았다”고 강조했습니다. 말하자면 브리스가는 소극적인 남편 아굴라를 사랑했고 배려했고 존경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인 아굴라는 자신보다 더 활동적인 아내가 하는 일을 전폭적으로 도와주었습니다. 얼마나 마음이 잘 맞는 부부입니까. 아내는 더 적극적이었고 활동적이었는데 아내는 남편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서로 보조를 같이 하며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대부분 활동적인 아내는 소극적인 남편을 무시하고 강하게 잡아놓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아이들이 보고 자랍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좋지 않은 편견을 가지게 됩니다. 오늘 그런 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어머니가 너무 똑똑했습니다. 그래서 자기주장이 너무 강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늘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별로 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그 품에서 벗어나고 싶어 안달을 했습니다. 어느 날 20살 된 아들이 부모에 “이제 내 인생을 찾아 집을 떠나겠습니다“하고 선언했습니다. 그때 아버지 얼굴이 굳어지면서 물었습니다. “네 인생이 뭔데“. 아들이 대답합니다. “자유롭고 간섭받지 않고 세상을 훨훨 날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들이 일어나 집을 나가려 하자 아버지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 왜 이러세요, 제발 내가 가는 길을 막지 마세요”하고 길을 막았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이렇게 말합니다. “막긴 누가 막는다고 그러냐, 어서 앞장서라, 같이 떠나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곳은 가정입니다. 그곳에 부모가 계십니다. 내 자녀들이 있습니다. 형제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부가 있습니다.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입니까. 이 소중한 사람들을 소중한 줄 알고 살아가는 것이 행복한 삶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곳은 가정입니다. 그런데 부모는 늙으시면 돌아가십니다. 형제들은 나뉘어서 살아가게 됩니다. 내 자식들도 크면 내 곁을 떠납니다. 그런데 끝까지 남는 것은 부부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누구보다도 이 부부의 관계가 건강해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부부 삶에도, 가정에도, 세상에도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