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식 이냐시오 신부
연중 제24주일
이사야 50,5-9ㄴ 야고보 2,14-18 마르코 8,27-35
현재 진행형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의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첫 고백은 최고조였는데,
뒤에 펼쳐지는 그분의 이야기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자들의 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사랑받으려고 노력하면 무얼 하나 싶을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또다시 무거운 짐이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나름 열심히 해왔고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돌아오는 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그렇게 긴장은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쉼의 시간이 있다고 믿었는데,
다시금 일은 진행됩니다. 결국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 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이 시대를 보아도 과거와 지금의 모습은 너무도 다릅니다. 변화를 이루었습니다.
그만큼 우리의 노력이 빛을 발하는 순간임이 드러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노력의 빛은
멈추어 있지 않고 계속해서 현재 진행형입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적 삶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과거의 자태에서 변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근본적인 것은 변화되지 않지만,
현실의 시대적 상황에서 변화될 것은 변화되어야 합니다. 과거의 도태된 모습에서 늘 변화를
이루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지요. 그러하기에 정말 열심히 했다고 하여 그게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적 삶도 현재 진행형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기도 안에서 얻은
참 가르침에 머물러 감추고 안주하는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이에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감추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내야지요! 정말 기도를 열심히 했다면 그 기도 안에서
얻어진 은총을 삭힐 수는 없습니다. 가르침에 대한 실천은 반드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와 행동이 다르다. 이는 오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한 충고 한마디와 너무 잘 어울린다
생각합니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내 주관적 시야의 범위에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결과물에만 눈독을
들인 채 살아가는 것도 주님 보시기에는 안쓰럽겠지요.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인간적 보상도 바라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 바쳐야 하는 처지가 되어도 다 받아들이셨습니다.
괜한 것에 마음 팔려 주님의 참사랑이 담긴 신앙적 삶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내 것만 생각하고 모두 챙기면 짐이 너무나 무겁겠지요. 괜한 생각하지 말고,
조금만 더 시야를 넓혀 주님을 따르는 모든 이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조금이라도
더 내어놓을 수 있는 베풂의 마음도 챙겨갑시다.
그래야 더 가볍게 주님을 따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자신이 가진 바를 내어놓을 수 있는 바보가 되어 보시면 어떠하겠습니까!
춘천교구 김효식 이냐시오 신부
2024년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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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시영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4주일
이사야 50,5-9ㄴ 야고보 2,14-18 마르코 8,27-35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코 8,29)
복음의 배경인 카이사리아 필리피는 가나안 시대에는 자연을 상징화해 숭배했던 곳이었고,
헬레니즘 시대에는 판(Pan)신을 숭배했던 곳이었습니다. 로마 시대에는 제우스 신전과 함께
황제의 신전까지 있던 곳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그 길에서 묻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리고 베드로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대답을 내어놓습니다.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솔직하게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말씀을 듣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했다고 복음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도 베드로의 모습과
다르지 않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수난당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십자가를 지는 것을 거부합니다. 반면 그리스도 덕분에 더 부유해지기를 바라며,
그리스도 덕분에 인정받고, 그리스도 덕분에 권력과 명예의 높은 자리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나 스스로가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그렇게 되기를 바라며 그리스도께 청할 때가
종종 있지요. 성찰해 보면 우리는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으로 가난하기를 원하고 그분의 이름으로
멸시를 받아들이고 그분의 이름으로 낮아지기를 완강히 거부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어느 길에 서 있는지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분께
청하는 바람들이 이방인들이 우상에게 청하는 그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부끄러운 마음도 들게 됩니다.
세상의 욕망을 청하면서 희망하는 부활은 어떤 모습일까요? 그리스도의 부활과는 분명 다른
목적지에 있는 부활일 것입니다. 세상 것만을 추구하면서 하늘나라를 희망하는 우리의 믿음은
언젠가 부질없고 헛된 믿음이 될지도 모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음이 부끄러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지요. 그리스도 그분의 이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우리의 지향에 오늘도 부끄러운
욕망만 가득하다면, 그 욕망이 아닌 그리스도께서 원하시는 것을 청할 때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가 걷고 있는 그 신앙의 길에서 우리를 바라보며 묻고 계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우리 욕망을 채워주시는 분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는 없습니다.
우상이 되어있을지 모르는 욕망의 자리만 바라보지 말고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며
진실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기를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마르 8,29 참조).
광주대교구 최시영 사도 요한 신부
2024년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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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레오 신부
연중 제24주일
이사야 50,5-9ㄴ 야고보 2,14-18 마르코 8,27-3
십자가를 진다는 것
예전 가톨릭신문사에서 소임을 맡던 중 쓰게 된 글 때문에 타교구 신자로부터 다소 불편한
말마디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찝찝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더군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만나고 접하는 사람의 수가 적고 자신의 말과 글이 가닿는
범위가 측근을 넘지 않는다면 덕담이 주로 들린다고 합니다.
하지만 단위 수가 측근 범위를 넘어서게 되면 들려오는 말의 톤이 슬며시 달라진다고 합니다.
비공식적인 통계이지만 호(好)보단 오(惡)가 더욱 적극적이고 참여적이라고 하네요.
문득 오늘 복음을 읽어가며 예수님에 대한 당시 세간의 평가에 주목해 봅니다.
정작 예수님의 중요한 메시지(message)보단 당신 즉, 메신저(messenger)가 더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모양새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그 평가에 관심을 보이십니다.
최근 이어지는 복음을 예수님에 대한 세간의 관심과 이에 대한 당신의 대응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더 흥미로울 것 같습니다. 실제로 당신이 널리 알려질수록 호응만큼이나 무시, 오해,
왜곡 등과 같은 세평이 따릅니다. 이에 대해 때론 적극적으로 반론을 펼치시고 때론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쯤 되니 종종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말씀은
마치 당시 상황에 대한 적절한 대응처럼 느껴집니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당신이 메시지 자체가 되는 장면을 밝힙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예고입니다. 특히 이어지는 베드로의 반박에서 예수님의 답답함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어쩌면 “스승님은 그리스도”라는 베드로의 고백은 그의 반박이라는 맥락에서
마치 “스승님은 그리스도여야만 한다.”라는 식으로 들립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는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보여준 일련의 행보는
예수님에 대한 연민, 미래에 대한 두려움만큼이나 자신의 사회적 입지 또한 염두에 두는
듯합니다. 예수님은 “사탄”이라며 단호하게 대응합니다.
사람들과의 교류와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과거 사형 도구이자 조롱거리였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속의 이목 안에서 결단을 요구합니다. 박해시대 때 이 대목은 신앙고백에 앞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는 구절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일까요?
신앙을 드러내기에 세간의 평가가 무척 신경 쓰이는 시대입니다. 낙태 반대를 표현하기에 여론이
의식되고, 정의를 언급하기엔 이념논쟁이 버겁고,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하는 것은 진부하고,
생태환경 운동이 비효율적이라 여겨지지는 않는지요.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코 8,33)
◾하느님의 것과 사람의 것
(τὰ τοῦ θεοῦ ἀλλὰ τὰ τῶν ἀνθρώπων)
33절의 그리스말 본문을 다시 번역하면, ‘사탄아, 하느님의 것들이 아닌 사람의 것들에 마음을
두는구나.’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것들’은 어떤 업적이나 행동이 아닌,
열린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제 신념에 매몰되어 낯설고 불편한 소리들에 완고한 마음을
갖는 것이 ‘사람의 것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의 처음은 먼저 들을 귀를 가지는 것입니다
대구대교구 이대로 레오 신부
2024년 9월 15일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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