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1코린토 15,1-11 루카 7,36-50
예수님께서는 지금 바리사이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십니다. 죄인이 얼씬거리지 못하는
바리사이의 집, 죄인을 극도로 꺼리는 바리사이의 식탁에 예수님께서 앉아 계십니다.
향유를 들고 예수님의 발을 닦는 여인의 눈물은 바리사이와 죄인을 갈라놓는
단단한 벽을 허물어뜨립니다.
루카 복음의 이 이야기는 마태오 복음을 비롯한 다른 복음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루카 복음의 다른 점은 예수님의 장례가 아닌 죄의 용서에 대한 응답으로서 여인의 모습을
그려 나가는 데 있습니다. 극도로 자신을 낮추어 예수님께 다가서는 여인은 겸손이나 자기 비하
또는 속죄의 눈물이 아니라 감사와 찬양과 기쁨에 휩싸여 있습니다.
죄는 불안을 가져옵니다. 죄는 고유한 삶을 망가뜨리고 주위의 눈치를 보게 하며,
끝내 자기 삶의 가치를 스스로 짓밟아,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제 삶의 경험이자 고백입니다.
여러분의 죄는 어떠한지요? 어찌하면 용서받고 살아갈까요?
여인의 모습을 다시 한번 묵상합니다.
복음은 여인이 어떤 행동으로 용서받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미 용서받은 모습으로 여인을 등장시킵니다.
오늘 복음은 죄를 짊어지고 사느라 반성과 참회로 주눅 든 수동적 자세를 질타합니다.
반성과 참회가 이미 용서받은 것일 수 있음을, 그 반성과 참회가 감사와 찬미가 될 수 있음을
고백하라고 다그치는 듯합니다. 반성은 주눅 든 자기 비하가 아니라
새로운 삶을 설계하려는 희망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저는 죄를 극복하기보다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일에서 하느님이신 예수님을 만나고자 합니다.
다만 그분의 자비하심만을 바라고 바라고 또 바라는 일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음을 고백할 뿐입니다.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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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열 프란치스코하비에르 신부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1코린토 15,1-11 루카 7,36-50
참회와 용서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루카7.3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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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인인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로 죄인이라 불렸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 마을에서 죄인이라고 불린 여인임은 분명합니다.
그 여인이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서 가장 불편한 장소로 찾아왔습니다. 누구보다도 자신을
죄인 취급을 하면서 멸시하는 바리사이의 집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바리사이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저 여인의 마음을 헤아려보고 싶습니다.
여인의 마음이 어떠했길래, 그 따가운 눈총을 아랑곳하지 않고 찾아가,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시며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그 값비싼 향유를 발라드렸을까요?
예수님의 발을 적실 정도로 많은 눈물을 흘린 이유는 무엇일까요?
분명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 삶의 모든 것이 바뀔 정도의 영향을 받은 여인이었을 것이고,
그분을 간절하게 만나고자 했던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진정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았던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고,
용서를 청하는 것조차 죄송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을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자신 안에서의 변화를 체험하게 한 예수님께 모든 것이 집중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주변의 그 어떤 부정적 시선도 신경 쓸 여력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녀의 눈에는 오직 예수님만 들어 왔을 테니까요.
그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으로부터 나온 말씀은 짧고 강렬했습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루카7.48)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체험이 허락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여인이 보여주었던 참된 회개와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그 간절한 마음이 우리에게도 생겨나기를 희망합니다.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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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루카 복음이 전하는 죄 많은 여인이 막달래나 마리아일 것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리 개연적이지 않다고 봅니다. 요한 복음에서는 마르타의 자매이자, 라자로의 여동생인
마리아가 300데나리온이 넘는 나르드 향유를 부어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렸다고 전합니다.
(요한12.1-8)
마태오 복음은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서 어떤 여인이 예수님의 발이 아닌 머리에 향유를 부었다고
전합니다. (마태오26.6-13) 이야기의 중복성을 볼 때, 한 여인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 편집 과정에서
복음에 따라 달라진 것일 수도 있고, 각기 다른 사건일 수도 있지만
이는 성서학자들이 밝혀야 할 일입니다.
한 가지 참고로 나르드 향유의 가격이 300데나리온 정도였다 하는데, 당시 노동자의 하루 평균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던 것을 감안한다면, 그 금액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 봅니다.
글라렛 선교 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하비에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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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연중 제24주간 목요일
1코린토 15,1-11 루카 7,36-50
세 사람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여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계십니다. 의로운 바리사이
시몬이 있습니다.
죄를 지은 여인이 있습니다. 비록 죄에 자신을 더럽혔지만 더 이상 죄의 나락에 뒹굴고 싶지 않은
다시금 선하게 거듭나고픈 거룩하고 아름다운 죄인입니다. 자신을 억누르는 죄의 무게에 고개를
숙이고 가장 낮은 자세로 사람의 가장 밑바닥 가장 더러운 부분인 발에 입을 맞춥니다.
참회의 눈물로 사람의 발을 적시고 고운 머리카락으로 적신 발을 닦으며, 귀한 향유를 발라
곱게 문지릅니다. 이처럼 인간적으로 쉽지 않은 행위를 통해서 죄를 지은 여인은 죄로 물든 자신의
더러움을 솔직히 고백하고 다시 깨끗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지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예수님이 계십니다.
낯선 여인의 기이한 행동에 모든 것을 내맡기십니다. 흙투성이 발에 입을 맞추지 말라고,
가녀린 머리카락을 함부로 거칠게 다루지 말라고, 비싼 향유를 더러운 발을 적시는데 낭비하지
말라고 만류하지 않으십니다. 복음 선포의 험난한 여정으로 지친 당신의 발을 따뜻이 적시는
속죄의 간절한 마음이 가득 배인 여인의 눈물을 온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십니다.
그리고 죄인의 단 한 가지 바람을 온전히 이루어주시는 말씀을 건네십니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편안히 가거라.”
의로운 바리사이, 시몬이 있습니다.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아니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니 자신의 죄를 고백할 수
없습니다. 그저 나름 의로울 따름입니다. 스스로 의로우니 용서받을 일도, 용서를 청할 일도
없다고 내심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스스로 의로운 사람으로서 죄인은 가차 없이 단죄 받아야
한다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이 정의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정의에 반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그러기에 용서하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세 사람이 있습니다.
진심으로 참회함으로써 죄의 굴레를 벗어나 선하고 온전한 사람으로 거듭 태어난 여인이 있습니다.
참회하는 죄인을 조건 없이 용서하심으로써 새 삶을 선물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참회하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않음으로써, 여전히 스스로 의로움에 도취되어 ‘함께’라는 참 삶을
거부하고, ‘홀로’ 서서히 거대한 무덤을 향해 걸어가는 바리사이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여러분 주위에 누가 있습니까? 참회하는 죄인, 스스로 의로운 바리사이, 용서하시는 예수님,
여러분 주위에 누가 있습니까? 사랑하는 믿음의 벗님들, 그렇다면 과연 여러분은 누구입니까?
참회하는 죄인, 스스로 의로운 바리사이, 용서하시는 예수님 가운데 여러분은 어디에 서 있습니까?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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