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도가 추락하면서 압박을 받았던 노무현이 이해찬의원 등에 밀려 단일화를 전격 제의한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그러면 왜 노무현은 단일화 하루 전까지 단일화를 부정하면서 머뭇거렸을까?
이에 대한 답은 신계륜 의원의 말이 설득력을 갖는다.
“노 후보는 집권 민주당의 정식 대통령후보인데 후보로 선출된 뒤 계속 지지율이 하락해 3위로까지 떨어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일화로가야 할지 또 다른 요인은 없는지 상황 분석이 제대로 안 돼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개혁을 요구하는 국민들의 목소리는 분명히 높은데 민주당이 그 역할을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굳이 단일화가 아니더라도 좀 더 개혁적이 되라는 국민들의 요구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분석이 안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몽준 후보와 노 후보가 단일화할 가치가 과연 있는가에 대한 의문도 있었습니다. 왜? 서로 출신 성분도 다르고 이념도 다르고 가치관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단일화 된다고 해서 실제로 힘이 극대화시킬 수 있는지도 의문이 들었습니다. 혹시 정몽준 때문에 개혁을 바라는 국민들의 요구가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던 차에 단일화가 극대화 된다는 최종 분석 보고서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점이 이해찬 의원의 ‘조선일보를 뒤엎자’는 시기와 비슷하면서, 이해찬의 말처럼 조선일보의 보도에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사실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노무현 후보가 보고 결심했다는 최종 분석 보고서의 결론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해진다.
이 부분에 대한 신계륜 의원의 증언이다.
“단일화를 주장하는 최종 분석에는 더 많은 국민들이 이회창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정서가 큰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이 정서에 대답을 해야 한다. 이화창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지지율이 36% 이상을 넘을 수 없다. 그렇다면 나머지 64%의 유권자들에게 뭔가 확실한 답을 주어야만 했다. 라는 것이 최종 분석의 결론이었습니다.”
노무현 후보는 이 보고서를 보고, 11월 3일 서울 발대식에 참가 한 뒤 단일화 제의를 결정했다고 신계륜은 증언한다.
그러나 당시 민주당 내 사정을 보면, 노 후보가 단일화 제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극히 쫓기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다. 11월 1일 김명섭, 강성구 두 의원이 탈당했고 이어서 후단협 소속 11명이 탈당한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다. 실제로 11월 4일 이들 후단협 소속 의원들이 민주당을 탈당을 선언한다.
트로이 목마
노무현 후보가 단일화를 전격 제의하자, 정몽준 진영의 반응은 어떻했을까?
동아일보 논설위원 실장 출신으로 당시 후보의 정치특보를 했던 정종문은 이렇게 전했다.
“한 마디로 갑론을박이었습니다. MJ(정몽준)는 서구식 교육을 받았고 국제적인 경험도 많아 합리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념이 다른 노 후보와 단일화한다는 것이 합리적이지도 않고 또 모양도 좋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캠프 내에서 단일화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언론이 단일화를 몰고 가는데 어쩌겠느냐면서 물러서는 건 비겁하게 보일 수 있다고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념이 다른 두 후보가 단지 이회창을 꺾기 위해 단일화한다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한 점에서는 정몽준과 노무현이 같다.
다시 정종문의 증언이다.
“MJ도 처음에는 단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강신옥, 이철, 신낙균, 서종화, 정상윤, 박범진 등이 협상을 해야 한다고 계속 밀어붙였습니다. 모두 당 쪽에서 온 사람들이지요. 저는 12월 들어 막바지까지 가서 최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고 약한 편이 강자를 밀어 주든지 아니면 국민이 선택하게 하자고 건의했습니다.”
그러면서 정종문은 의미 있는 말을 했다.
“그 때 당(국민통합21) 안팎에서는 농담조로 이러다가 ‘트로이의 목마’가 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트로이의 목마’가 되고 말았습니다.”
트로이 목마는 그리스 신이 무력으로는 도저히 트로이를 공략할 수 없음을 알고 지혜와 모략으로 트로이를 전복시킨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얘기다.
그리스 군은 트로이의 성문보다 더 높고 크게 목마를 만들어 몰래 군사를 숨겨 놓고 점술사를 시켜 이 목마를 트로이 성안에 들여놓으면 그리스 군에 재앙이 오고 그대로 성 밖에 놓아두면 트로이에 재앙이 임한다는 말을 퍼뜨린 뒤 전군을 철수하는 위장 전술을 벌인다. 당시 트로이에는 이것이 그리스의 책략이라는 경고도 이었지만 점성술사의 말을 들은 트로이 사람들은 성안에 목마를 들여놓은 뒤 정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술판을 벌였고 술에 취해 잠든 사이 목마 안에 숨어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튀어나와 마침내 트로이를 함락시킨다는 얘기다. 역사는 인간의 부주의로 실수가 되풀이된다는 것을 설명할 때 흔히 인용하는 대목이다.
정종문의 증언은 이 부분에서 주의를 끈다.
“당시 모든 여론 조사들이 정몽준과 노무현이 합치면 무조건 승리한다고 나왔고, 정몽준으로 단일화되면 더 많이 이긴다고 나왔습니다. 노무현이 돼도 조금은 이긴다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후단협(민주당내 이인제를 지지했던 의원들이 주류를 이루었던 모임. 이들은 나중에 MJ에게 호의적인 성향을 보인다.)에서 ‘노무현을 조심하라. 이인제가 어떻게 당한 중 아느냐. MJ는 단기필마다. 노무현 쪽은 거대한 지하 조직이 있다. 그 조직은 탈레반들이다. 이인제와 싸울 때 보니 무섭더라’라고 충고해 주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죽 써서 개주려고 하느냐’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민주당에서 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한 협상파들이 조선호텔에서 세 번인가 모여 회의를 한 뒤 MJ를 찾아가 단일화 제의를 받아들이라고 촉구했다. 그렇지 않으면 언론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고 몰아세웠습니다. 그런데 순간 MJ가 그러면 합시다, 라고 결정을 했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단일화할 것인가를 놓고 옥신각신했습니다. 이 때 민주당 김근태 쪽에서 경선은 어려우니 여론조사 방법으로 하자고 제의해 왔습니다. 물론 정몽준 후보 쪽에서도 여론조사를 제의했습니다. 그래서 협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1차 협상이 깨진 이유
노 후보의 단일화 제의에 대해 정몽준 캠프와 노무현 캠프가 협상에 나선 것은 모두 4차례다. 두 번은 여론 조사를 놓고 단일화를 이루어 낸 협상이고, 나머지 두 번은 선거 공조를 놓고 한 협상이다.
11월 5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1만여 명의 당원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당 창당 대회를 갖고 정몽준 의원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한 국민통합21은 같은 날 노무현 팀과 함께 단일화 경선을 위한 협상에 참석했다. 1차 협상의 대표는 노무현 캠프에서 이해찬 의원이, 정몽준 캠프에서는 이 철 전 의원이 맡았다. 노 캠프측 협상단원은 이호웅, 유선호(전의원)였고, 정 캠프측 협상 단원은 오철호, 박진원(대선 기획단장)이었다.
1차 협상은 처음 TV 토론을 통한 검증 방식 법칙에 합의했으나, 이호웅 의원이 ‘국민이 참여하는 경쟁적 방식에 합의했다.’고 말해 국민 경선에 합의한 것처럼 보도했다며 결렬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 후보측에서 전화 여론 조사를 하자고 제의하게 되고 이에 따른 TV 토론과 여론 조사의 일자, 기관 등에 대한 합의를 하게 되는데, 여론 조사에 대한 세부내용이 새나가는 바람에 11월 21일 깨지고 만다.
정종문 보좌관의 증언이다.
“민주당 쪽에서 흘린 것이지요. 그래서 1차 협상은 깨졌습니다. 우리나라의 여론 조사는 문제가 많습니다. 우선 감청 기능이 없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조사 요원이 조사 결과를 속여도 이를 체크할 방법이 없습니다. 한국 갤럽이 일부 이런 기능이 있을 뿐입니다. 갤럽은 이런 잘못이 발견되면 전체를 무효화하고 다시 하는데, 다른 여론 조사 기관은 이런 감청 기능이 없습니다. 두 번째는 여론 조사 전문 요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여론 조사원을 모집한다고 인터넷에 띄우거나 학교를 통해 모집을 하는데 일단 사람들이 모이면 간단한 교육만 시키고 조사에 들어갑니다. 그러니 인터넷이나 학교를 통해 여론 조사를 한다고 공개하면 노사모에게 모여라, 라고 얘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노사모는 다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감청 기능이 없고 그렇다면 결과는 뻔하지 않습니까? 조사 대상도 어디라는 걸 저쪽(노사모)에서는 다 안다. 훈련된 조직원도 없다. 그래서 이런 것이 밝혀지니 협상은 깨진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인제와의 싸움에서 노사모가 한 역할을 MJ 캠프에서는 알았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극도의 불신이었다. 1차 협상이 깨진데 대한 책임을 노 캠프에 돌리는 데 대해 노 캠프에서 별말이 없었던 걸 보면 언론에 흘린 것이 사실로 보여진다.
다시 정종문의 증언이다.
“1차 회담이 결렬된 뒤 며칠이 지났습니다. 워낙 술수가 많은 사람이라 못 믿겠다고 하고 지나쳤는데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이냐, 경선을 하든지 하자, 반은 민주당원으로 하고 나머지 반은 국민으로 하자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실제로 국민통합21은 전국에 있는 지구당에 대해 스텐바이(대기)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다시 협상하자는 얘기가 나와 2차 협상이 시작된 것입니다.”
노무현, 정몽준의 러브 샷과 국민들의 열광
2차 협상은 노무현 캠프에서 신계륜 비서실장이, 정몽준 캠프에서는 방송인 민창기 씨가 대표가 된다. 이때부터 노무현 캠프에서는 신계륜이 마지막 4차 협상까지 대표를 맡아 중요한 역할 을 하게 되어 노무현 후보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게 된다. 처음에는 정동채가 거론되기도 했으나 노 후보가 신계륜을 직접 지목했다는 것이다.
정몽준 캠프에서는 민창기가 대표였지만 민주당에서 합류한 김민석과 여론 조사 전문가라는 김 행이 주축을 이루어 협상을 진행하게 된다. 1차 협상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큰 문제는 없었다고 한다.
신계륜 의원은 특별히 김민석의 역할이 컸다고 증언한다.
“김민석은 후보 단일화 협상에서 정직하게 임한 사람입니다. 실질적인 면에서 합리적으로 기여했지요. 물론 김민석은 정몽준이 당선되게 할 목적으로 임했지만 정직하게 협상을 한 사람입니다. 협상에 위기가 닥칠 때는 그런 파트너가 없이는 해결이 안 됩니다. 다시 말하지만 김민석은 진실한 사람입니다. 다만 성급하게 탈당해 노무현을 비판한 것은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드디어 협상은 성공했고 노무현과 정몽준의 극적이고 역사적인 러브 샷이 전국에 생생히 중계된다. 국민들이 열광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2차 협상도 1차 협상을 토대로 한 것이어서 큰 문제는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TV 토론과 여론 조사의 구체적인 방법을 놓고 양측은 치열한 공방을 벌이게 된다.. 우선 16일 9시부터 17일 오전 7시 30분까지의 철야협상을 통해 TV 토론과 여론 조사 방법에 합의하고 합의문 까지 교환했고 일체의 사항은 비밀로 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가 더 쉬운 상대를 고른다는 역 선택 방지 안을 두고 이것 역시 언론에 노출돼 양측은 다시 20일 저녁 7시부터 무려 27시간 동안 협상을 벌였다. 또 다시 실패하는가 싶다가 22일 극적으로 합의한다. 여론 조사는 한군데로 하고 공개하지 않으며 다 자 구도에서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예비 설문과 이회창 후보와의 경쟁력을 묻는 본 설문으로 한다는 것이었다.
마침내 진통 끝에 합의는 이루어졌고, 23일에는 노 후보와 정후보가 TV 토론을 하게 된다. 그리고 25일 R&R과 월드리서칙 등 2개 언론조사기관을 택해 여론 조사한 결과 46.8% 대 52.2%로 노무현 후보가 승리한다.
정몽준 여론 조사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다.
정몽준 캠프가 여론 조사에서 노무현을 이길 것이라는 생각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그들은 정치꾼(?)이 못 되었다.
이달희 실장의 증언이다.
“단일화 여론 조사가 있었던 11월 24일 저녁 9시 광주와 전주 방문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던 버스 안에서 대전 부근을 통과 할 때 TV의 9시 뉴스는 각 언론사의 조사 결과를 전하면서 MJ가 우위로 나타났다고 보도했습니다. 버스 안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왔고 몇몇 참모들은 다음날 MJ 일정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습니다. 밤 11시께는 한 라디오의 시사프로 진행자가 전화를 걸어와 정대표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자정을 갓 넘긴 시각의 결과는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MJ와 당직자들은 발표 직전 당사 회의실에 모여 초조하게 결과를 기다렸죠. 공식발표 5분 전 쯤 MJ는 협상 대표단의 전화를 받고 어두운 표정으로 ‘안 좋은 소식을 전 하겠다’면서 잠시 굳은 표정을 지었던 MJ는 TV를 통해 발표 과정을 지켜본 뒤 곧바로 기자실로 내려갔습니다. 의외의 결과에 충격을 받았지만 MJ는 깨끗이 승복했습니다. 어떠한 정치적 복선이나 계산도 없이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는 평소의 소신대로 즉시 마음을 정했습니다.”
이달희 실장의 증언말고도 MJ가 약속을 지킨다는 평소의 언행에 대해서는 동의하는 정치인들이 많다.
여론 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노무현 캠프가 환호 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상대적으로 정몽준 캠프는 충격에 휩싸였다. 그런데 노 후보가 이겼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회창 캠프에서도 환호가 터졌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쉽게 얘기해서 이회창 진영은 그때까지 노무현 후보를 쉬운 상대로 보았다는 말이다.
노무현을 편한 상대로 생각한 한나라당
한나라당이 노무현과 정몽준이 단일화에 합의한다는 말을 듣고 이왕이면 노무현 쪽으로 단일화되기를 바랬다는 것은 사실이다.
먼저 이부영 의원의 증언이다.
“저는 노무현과 정몽준의 단일화가 안 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정몽준의 지지도가 노무현 보다 높아 단일화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노무현이 이념이 다른 정몽준과 단일화한다는 것은 평소의 언행으로 보아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일화 협상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와 단일화될 바에야 정몽준 보다는 노무현으로 되는 게 났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단일화 약속 후 여론 조사 결과 노무현이 높게 나오자 이회창 캠프에서는 환호성이 터졌던 것입니다. 이제는 이겼다 라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나 이회창 후보의 측근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원창 의원은 단일화를 예측했다고 말했다.
이원창 의원의 증언을 들어 보자.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는 단연히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민주당에선 노무현을 천신만고 끝에 후보로 당선시켰는데 인기가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계속 인기가 뜨지 않으니까 DJ가 박지원을 통해 단일화시키려 한 것입니다. 정몽준은 DJ의 단일화 요구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DJ는 이회창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카드가 단일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단일화를 성사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정몽준은 설문조사로 김 행은 잔꾀로 당했습니다. 그 당시 DJ는 단일화 밖에 선택의 길이 없었습니다. 오직 이회창을 떨어뜨리는 데 만 골머리를 썼던 사람입니다. 물론 노무현으로 단일화되자 한나라당에선 노무현을 편한 상대로 생각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가 단일화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김문수 의원도 마찬가지였다.
“저는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가 가능성은 있지만 높다고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우선 두 후보가 너무 달랐기 때문입니다. 또한 설사 단일화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효과가 클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인기가 수직 상승했습니다. 사실 단시 한나라당은 삼각구도가 가장 이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한 족으로 치우치지 않는 이등변삼각형 구도(이회창, 노무현, 정몽준)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한 쪽으로 치우치는 현상을 막기 위해 정몽준의 인기가 올라가면 정몽준을 견제하고, 노무현이 올라가면 노무현을 견제하는 자세였습니다. 그런데 한 달을 남겨놓고 여론 조사라는 방법으로 단일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지금은 열린우리당으로 당적을 바꾸었지만 같은 한나라당 소속이었던 이부영과 김문수가 단일화를 의심했던 반면, 이원창이 단일화를 당연시했다는 것은 재미있는 대목이다. 당시 이부영은 아웃사이더였고, 이원창은 이너써클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회창 쪽에서 노무현을 편한 상대로 생각했다는 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한다. 한나라당은 이때부터 상황판단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뒤에서 얘기하겠지만 노. 정 단일화 여론 조사를 놓고 대구와 경북에서 노무현이 정몽준 보다 지지율이 높게 나온 것에 대해 한나라당이 개입하지 않았느냐는 얘기도 떠돌았다.
이에 대한 이원창의 증언이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회창 조직은 거대한 곰이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바뀌는 흐름에 쉽게 대처할 수 있는 역동성이 부족한 조직이었습니다. 앞서도 당에서는 노무현을 편한 상대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노무현을 공격할 많은 자료를 입수하고도 폭로하지 않은 건 사실입니다. 노무현을 너무 죽여도 문제라고 보고 전략적으로 후퇴시킨 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붉은 악마와 월드컵의 열기가 너무 뜨거워 붉은 색의 열기가 온통 휩쓸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국민들에게 어떻게 연결될 것이냐가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리고 정몽준은 정치권에서도 새로운 인물로 비교적 이미지를 손상시키지 않고 잘 관리해 인기가 치솟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구와 경북에 노무현을 지원하라고 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이원창은 이보다 이회창의 몸을 던지는 자세 부족을 더 걱정했다고 지적한다.
"사실 당에서는 한 달 전부터 경고가 있었습니다. 여론 조사는 과학이다. 절대로 태만히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러면 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당원도 배수진을 쳐야 한다고 말입니다. 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위기감도 있었습니다. 어떤 의원은 이회창 후보가 산으로 들어가 텐트를 치고 그 속에서 2~3일 간 기도를 해라. 그리고 국민들에게 모든 것을 던져버리는 모습을 보여라. 라고 건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말 없는 다수가 한나라당을 지지한다는 이야기로 당이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야기입니다만 촛불 시위로 노무현의 인기가 떠오를지 몰라도 여론조사는 걱정할 것이 없다. 라고 자위하는 분위기였습니다."
거대 여당 공룡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당시 정가주변에서는 한나라당이 단일화를 방해하기 위해 뒤고 있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이부영의 증언을 들어보자.
"단일화를 막기 위해 당에서는 여러 번 전략 회의를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단일화 소식이 들려 오자 정몽준 켐프를 집중적으로 접촉해 단일화를 못 하도록 노력한 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정 씨 가문을 이회창 후보가 직접 접촉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후보 자신이 뛰니까 다른 사람들은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지요. 이회창 후보는 지방에 가야하는데도 밤늦게 현대가의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다녔습니다. 결국은 실패했는데 이 때 후보가 나서지 말고 딴 사람이 나섰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이회창 켐프의 한 측근은 이 후보가 직접 뛰었다는 말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발언이라고 반박한다.
"이부영이 아웃 사이더였으나 당의 중진이어서 가끔 중진을 모아놓고 논의하는 자리가 있었는데, 그 때 이 후보가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라고 말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회창 후보가 직접 뛰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닙니다. 이회창 후보는 더 이상 말 하지 말라는 뜻을 그런 식으로 말을 합니다.
예를 들면 단일화된 뒤 노후보의 인기가 높아지자 당 일부에서 마지막 희망은 김종필을 잡는 것이다 라고 건의하는 의원들이 있엇습니다. 그 때 이회창 후보는 '알겠습니다. 그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이제 끝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회창 후보는 평소DJ가 JP와 야합한 것에 대해 후세의 역사가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면서 이를 매우 부정적으로 보았던 분입니다. 한 마디로 야합은 절대 안 된다. 라고 늘 말한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후보는 그런 뜻을 가지고 그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단 내의 한두 사람이 단일화하면 이 후보에게 이롭지 않다는 생각에서 정몽준측 사람들에게 '반 듯이 정몽준 대표에게 단일화된다는 보장도 없으니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라고 얘기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작업 차원은 아니고 어디까지나 정몽준측 인사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말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최근 중요한 증언이 나왔다.
MJ 켐프에서 뛰었던 이철 전 의원의 말이다.
"대선을 얼마 앞두고 서청원 한나라당 대표가 만나자고 해서 63빌딩 지하1층 커피솝에서 단 둘이 만났습니다. 이 때 서 대표가 하는 말이 MJ가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면 이회창 후보가 대통령이 된 뒤 각료 구성의 절반을 할애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제의 자체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 한 마디로 거절했습니다."
이에 대해 서청원 대표는 기억이 나지도 않을뿐더러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부인하고 있다.
이에 대해 이원창 의원은 다른 증언을 한다.
"이회창 후보가 단일화를 방해하기 위해 직접 뛰었다는 얘기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직자들이 많이 뛴 것은 사실입니다. 즉 노무현 후보는 좌파 성향으로 신을 부정하는 세력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천주교와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성직자들이 뭉쳤습니다. 특히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를 비롯한 수도권의 유명한 교회 목회자들이 중심이 돼서 정몽준 후보로 하여금 단일화를 하지 못하도록 그럴 때마다 정몽준은 좌고우면 했습니다. 주변으로부터 많은 압력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흐름이었습니다."
한나라당의 이런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 이원창 의원이 지적했듯이 공룡으로서 변화의 흐름을 제 때 읽는데 한 발 늦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한라당이 정권을 잡을 것으로 믿고 훗날 어떤 혜택을 얻기 위해 달려드는 사람들에 대한 처리에도 제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