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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이해하는 새로운 프레임:소동파의 삶과 글
인간의 삶에 조건 지워진 고통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고해(苦海) 일체개고(一切皆苦)
*고통을 ‘극복한다’ : 불굴의 의지와 끝없는 인내
-‘노력’의 차원
-‘동의’의 차원
소식(蘇軾, 1036-1101, 66세) 자(字) 자첨(子瞻), 호 동파(東坡).
1036년 12월 19일 사천성(四川省) 미산현(眉山縣)에서 태어남.
1057년 22세 인종(仁宗) 가우(嘉祐)2년 예부시(禮部試) 급제
구양수(歐陽脩) 「매성유에게(與梅聖兪)」: “나도 모르는 사이에 땀이 흘렀다. 즐겁다. 늙은이가 마땅히 길을 비켜 그가 나아갈 길을 내주어야겠다. 기쁘다(不覺汗出, 快哉, 快哉. 老夫當避路, 放他出一頭地也. 可喜. 可喜.)”
“30년 후에는 사람들이 다시 나를 일컫지 않을 것이다”
모친 별세
1061년 26세 大理評事鳳翔府簽判 봉상(鳳翔)에서 3년 근무.
1065년 30세 귀경. 아내 왕불(王弗) 사망.
1066년 31세 부친 소순(蘇洵) 별세. 복상.
1068년 33세 왕윤지(王閏之)와 재혼.
1069년 34세 왕안석의 신법 시행. 과거시험 개혁에 반대의견 표명
1071년 36세 왕안석의 미움을 삼. 항주통판(杭州通判)으로 외임됨.
이후 밀주지주(密州知州), 서주지주(徐州知州)를 지냄.
1079년 44세 4월에 호주지주(湖州知州)로 부임. 8월 오대시안(烏臺詩案)으로 어사대(御史臺)에 투옥됨.
130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12월에 황주안치(黃州安置)의 유배령을 받음.
1080년45세 2월에 황주(黃州)에 도착. 제1차 유배시기.
자호 동파거사(東坡居士). <적벽부(赤壁賦)>
1085년 50세 신종(神宗)이 죽고 철종(哲宗) 즉위, 고태후(高太后) 섭정.
복직. 조정으로 소환. 元祐硬化 -- 신법 전면 폐지
재상 사마광(司馬光)과 정견 대립, 낙촉당쟁(洛蜀黨爭)으로 인해 외임.
1089년 54세 항주지주(杭州知州)
이후 여러 차례에 걸쳐 외임과 내직을 전전하고 여러 차례 사임을 청원했으나 윤허되지 않음.
1093년 58세 철종이 정사를 주재함.
(1094년 紹聖) 8월 후처 왕윤지 사망.
1094년 59세 장돈(章惇)이 재상이 되어 반대파 숙청. 혜주안치(惠州安置) 유배.
1096년 60세 애첩 조운(朝雲) 사망.
1097년 62세 해남도(海南島) 담주(儋州)로 유배. 소철(蘇轍)은 광동성(廣東省) 뇌주(雷州)로 유배
1100년 65세 휘종(徽宗) 즉위 구법파 대거 사면. 6월에 담주(儋州)를 떠남.
1101년 66세 관직 사퇴. 7월 28일 상주(常州)에서 세상을 떠남.
1) 황주(黃州) 유배시기:1080년~1085년
임어당(林語堂) 『소동파평전(蘇東坡評傳)』 : 이 시기 동파의 글에 대해 “그의 쓰디쓴 풍자와 날카롭던 필봉, 격정과 분노는 사라지고 그 대신에 찬란함과 따뜻함, 친밀함, 그리고 너그러운 해학 등이 스며들어 있어, 그의 문학작품도 더욱 원만하고 성숙해졌다”
初到黃州 처음 황주에 도착하여
自笑平生爲口忙, 평생토록 입 때문에 바쁘더니
老來事業轉荒唐. 나이 들며 일이 더욱 황당함을 스스로 비웃는다
長江繞郭知魚美, 장강이 성을 감도니 물고기가 맛나겠고
好竹連山覺筍香. 좋은 대나무가 산을 덮었으니 죽순이 향기롭겠네
逐客不妨員外置, 쫓겨난 몸이니 원외랑이라도 무방하고
詩人例作水曹郎. 시인이 수부랑 지냈던 것 늘 있는 일이었지
只慚無補絲毫事, 다만 털끝 같은 일에도 보탬이 못되면서
尙費官家壓酒囊. 관가의 봉급만 축냄이 부끄럽네.
卜算子·黃州定惠院寓居作 복산자: 황주 정혜원에서 기거하며.
缺月挂疏桐,이지러진 달 성긴 오동나무에 걸리니
漏斷人初靜.물시계 소리 그치고 사람들도 고요해지네
誰見幽人獨往來,누가 볼거나? 홀로 왕래하는 유인(幽人)
縹渺孤鴻影.아스라이 외로운 기러기 그림자
驚起却回頭,깜짝 놀라 일어나 고개 돌려보아도
有恨無人省.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한스럽네
揀盡寒枝不肯棲, 찬 가지 다 가려보고도 깃들지 않네
寂寞沙洲冷적막한 모래톱 싸늘한데
-〈황주 안국사기(黄州安國寺記)〉
황주에 도착해 대충 거처를 정하고 먹고 입는 것이 조금 해결되자 문을 닫아걸고 사람들과의 왕래를 끊고 내 놀란 혼백을 가다듬으며 스스로를 새롭게 할 방도를 생각했다. 지난날의 생각과 행동을 뒤돌아보니 모두 도(道)에 맞지 않았다. 그것은 다만 이번에 죄를 얻은 일만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한 가지를 고쳐 새롭게 하려다가 또 다른 잘못을 할까 봐 두려웠다. 비슷한 일들을 따라 더듬어가다 보니 후회스러움을 이루다 말할 수 없었다. 나는 탄식했다. “나의 도는 기(氣)를 제어할 만하지 못하고, 나의 성(性)은 습(習)을 이길 만하지 못하니, 근본을 다스리지 않고 말단을 고치는 것은 비록 지금 새로 고친다 하더라도 나중에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다. 불도에 귀의하여 깨끗이 씻어야겠다.” 성 남쪽에 대나무 숲과 못과 정자가 있는 안국사를 발견하고는 하루 이틀 걸러 그곳에 가서 향을 피우고 고요히 앉아 자신을 깊이 성찰했다.
경제적 고통. 「진관(秦觀)에게 보내는 답장-네 번째(答秦太虛七首 其四)」
황주에 막 도착했을 때, 봉록이 이미 떨어졌는데 식구는 적지 않아 속으로 몹시 걱정하였습니다. 다만 대폭 절약하여 하루에 150전을 넘게 쓰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매달 초에 4500전을 30 더미로 나누어 대들보에 걸어놓고, 매일 아침에 갈고리 달린 장대로 한 덩이를 내린 뒤 장대를 숨겨버립니다. 커다란 대나무통에 그날 쓰고 남은 것을 따로 모아두어 손님 접대에 대비합니다. 이것은 사실 賈收가 쓴 방법이랍니다. 주머니 속에 아직 1년 남짓 버틸 만한 돈은 남았으나 그 때가 오면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지요. 물이 흘러들면 도랑이 된다는 말이 있으니 미리 걱정하지 않으렵니다. 이러니 마음속에는 근심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답니다.
1년 후 元豊4년(1081)에 지은 <東坡八首> 서문.
내가 황주에 온지 2년이 되자 하루하루가 궁핍하였다. 친구 마정경(馬正卿)이 내가 먹을 것이 부족한 것을 슬퍼하여 군에 청하여 옛날 군영지 수십 마지기를 얻어 몸소 경작하도록 하였다. 그 땅은 이미 황폐하여 가시나무와 기와조각들이 널려 있었다. 게다가 큰 가뭄이 들어 땅을 개간하는데 근력을 거의 다 소모하였다. 쟁기를 놓고 탄식하며 이 시를 지어 이 수고로움을 스스로 위로하고 내년에 수확이 있어 이 노고를 잊기를 바란다.
원풍6년(1083) 4월에 지은 詞. 힘겨운 삶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
臨江仙-夜歸臨皐 임강선: 밤에 임고정으로 돌아가며
夜飮東坡醒復醉,밤에 東坡에서 술 마시고 깨었다간 다시 취하고
歸來髣髴三更.돌아오니 아마 삼경쯤
家童鼻息已雷鳴.집안 아이는 이미 우뢰같이 코를 골며
敲門都不應,문 두드려도 도무지 대답이 없어
倚杖聽江聲.지팡이에 의지해서 강물소리 듣네.
長恨此身非我有,이 몸이 내 소유 아닌 것을 늘 한스러워 하니
何時忘却營營.언제쯤 아등바등 사는 삶 잊을까?
夜闌風靜縠紋平.깊은 밤 바람 자니 물결무늬 잔잔한데
小舟從此逝,여기서 작은 배 띄워가서
江海寄餘生.강과 바다에 여생을 맡길까
원풍5년(1082) 3월에 黃州 근처에 있는 沙湖로 가던 도중에 비를 만나 지은 시
「定風波」정풍파
莫聽穿林打葉聲,숲을 뚫고 잎새 때리는 빗소리 들을 것 없다.
何妨吟嘯且徐行. 읊조리며 천천히 거닐어도 무방하지.
竹杖芒鞋輕勝馬, 죽장에 짚신이 말보다 가벼우니
誰怕, 무엇이 두려우랴,
一蓑烟雨任平生.이슬비 속에 도롱이 쓰고 한 평생을 맡긴들.
* 인생이란 폭풍우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어떻게 춤을 출지를 배우는 것
題西林壁 서림사 벽에 쓰다
橫看成嶺側成峰 가로로 보면 산줄기 되고 옆으로 보면 봉우리라
遠近高低各不同 원근고저에 따라 각기 그 모습이 다르네
不識廬山眞面目 여산의 참모습을 알지 못하는 것은
只緣身在此山中 단지 내 몸이 이 산속에 있기 때문이지.
황주(黃州) 유배생활이 끝나고 지은 시.
-〈달밤 승천사를 거닐다(記承天寺夜遊)〉
원풍(元豊) 6년 10월 12일 밤, 옷을 벗고 잠자리에 들려는데 문으로 들어오는 달빛이 너무 좋아서 일어나 거닐었다. 달빛을 함께 즐길 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승천사(承天寺)에 가서 장회민(張懷民)을 찾았다. 회민도 아직 잠들지 않아 함께 뜰 안을 산책했다. 뜰아래는 마치 달빛이 비치는 연못처럼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고, 그 속에 마름과 노랑어리연이 어지러이 섞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모두 대나무와 잣나무의 그림자였다. 어느 밤에 달이 없으며, 어느 곳에 대나무와 잣나무가 없으랴! 단지 나와 회민처럼 한가한 사람이 적을 뿐이지.
2) 혜주(惠州)와 담주(儋州) 시기(1094~1100)
혜주(惠州) 가우사(嘉祐寺)에 우거할 때 「송풍정에서 노닐다(記遊松風亭)」
내가 혜주 가우사에서 살 때, 송풍정 아래를 발길 닿는 대로 거닐다가 다리에 힘이 빠지고 피곤하여 침상에서 쉬고 싶었다. 정자가 있는 곳을 바라보니 아직도 나무 끝에 있길래 ‘어떻게 저기까지 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지나서 갑자기 “여기라고 왜 쉴만한 곳이 없겠는가?”라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음이 마치 낚시 바늘에 걸렸던 고기가 거기서 빠져나온 것과 같았다. 만약 사람들이 이러한 이치를 깨닫는다면 비록 두 군대가 서로 대치하여 북소리가 우레처럼 울리고 앞으로 나아가면 적에게 죽고, 뒤로 물러나면 군법에 의해 죽는 상황에 당면하더라도 충분히 휴식할 수 있을 것이다.
紹聖2년(1095) 대사면령. 구법당 인사들만 사면을 받지 못함. 다시 북쪽으로 돌아갈 희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백학봉(白鶴奉) 산기슭에 집을 지음.
사촌 정지재(程之才)에게 보낸 편지
“요즘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이미 제가 북쪽으로 돌아갈 희망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의 마음은 오히려 편안합니다. 원래 혜주의 수재(秀才)였는데 과거에 번번이 낙방하여 평생을 고향에서 살기로 작정한 것과 같다고 여기면 되지요. 이렇게 생각하면 아무 걱정이 없답니다.”
食荔枝二首여지를 먹고
其二 제2수
羅浮山下四時春 나부산 아래는 사계절이 봄이라
盧橘楊梅次第新 금귤과 양매가 차례대로 열린다
日啖荔枝三百顆 하루에 여지 삼백 알을 먹으니
不辭長作嶺南人 오래도록 영남인이 된 들 싫지 않겠네
「참료스님에게 보내는 편지 중 열일곱번째(與參寥子二十一首 其十七)」
(전략)...제가 귀양지에 온 지 반년, 모든 것이 대충 지낼만하며 자세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대략을 말하자면 마치 영은사(靈隠寺)와 천축사(天竺寺)의 스님이 절에서 나와 작은 마을에 있는 절에 살면서 다리가 부러진 솥에 현미밥을 끓여 먹으면서 일생을 보내도 그럭저럭 괜찮은 것과 같습니다. 그밖에는 장기(瘴氣)가 사람을 병들게 하는 것인데, 북방이라고 어디 병에 걸리지 않습니까? 병은 다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것이니 하필 장기만 그렇겠습니까? 다만 의사와 약이 없는 것이 괴롭기는 하지만 서울에 이름난 명의의 손에서도 죽어간 사람은 더욱 많지요. 그대는 이 말을 듣고 한 번 웃으시고 다시 제 걱정일랑 마십시오. ...후략...
1098년 담주(儋州) 「붓 가는대로 적다(試筆自書)」 (「담이에서 쓰다(在儋耳書)」)
내가 처음 해남도에 왔을 때, 사방을 둘러보니 하늘과 바다가 끝이 없었다. 그것이 서글퍼서 “언제 이 섬을 나갈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잠시 후에 생각해보니 천지는 물 가운데에 있고 九州는 큰 바다 가운데 있으며, 중국은 작은 바다 가운데 있으니 생명이 있는 것 중에 어느 누가 섬에 있지 않은가? 대야의 물을 땅에 쏟으면 지푸라기가 물에 뜨는데 그 지푸라기에 붙은 개미는 어디로 건너가야할지 망연해진다. 잠시 후에 물이 마르면 개미가 곧장 그곳을 떠나 자기 동료를 만나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가 다시는 자네를 보지 못할 뻔 했지 뭔가?” 한다. 그 잠깐 사이에 사통팔달의 대로가 생길 줄 어찌 알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우습구나......
*임어당(林語堂) “철학의 가치는 바로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에 대해 웃게 만드는 데에 있다.”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1101) 5월. 자기 인생에 대한 총평
自題金山畵像금산사 초상화에 적다
心似已灰之木 마음은 이미 재가 된 나무
身如不繫之舟 몸은 매어놓지 않은 배
問汝平生功業 네 평생 공적이 무엇이냐?
黃州惠州儋州 황주, 혜주, 담주더라.
임어당(林語堂) 『소동파평전』 :
“소동파는 벌써 오래전에 사망하여 이 세상에 없고, 다만 기억될 뿐이다. 그러나 그는 소멸되지 않는 그의 영혼의 기쁨과 심령의 즐거움을 우리 모두에게 남겨준다.”
※
月夜與客飮杏花下 달밤 살구꽃 아래서 손님과 술 마시며
山城酒薄不堪飮, 산성의 거친 술 마실 만하지 못해
勸君且吸杯中月. 그대에게 잔속의 달이나 마시라 권한다.
< 다음 주 강의 예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