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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昌德宮,사적)
창덕궁은 동아시아 궁궐 건축사에 있어 비정형적인 조형미를
간직한 대표적인 궁으로 주변자연환경과 완벽한 조화와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암튼 근래들어 이렇게 좋은 구경거리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좋은 창덕궁....외국친구들이 오게되면 같아 가서
자랑하고픈 그런 날이었다.
송내에서 전철을 타고 종로3가역에서 내려 10여분 걸어 올라가면서
옛스런 서울거리를 만난다.
10분쯤 걸어가니 표지판이 나온다.
신호등이나 전깃줄은 영 아니다...
신호등을 하나 지나기전
좌로 현대사옥..
담벼락이 참 정겹다.
막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외국인들....영어 가이드 시간이 별도로 있다 한다.
표를 사고..
자유관람이 아닌지라 시간을 좀 기다려서..
주차장도 있지만 거의 대중교통으로 온다. 대기시간을 보내는 곳
지붕끝자락 제일 앞에 있는것이 "삼장법사 "그 앞으로 여섯가지 동물들이 줄서있다.
돈화문....입구로 쓰인다
서울투어 버스가 정차한다.
입장시간을 미리 알아두고
드디어 입장...
돈화문을 들어서서 관람 안내를 듣고
약 1시간 20분이 걸린단다
창덕궁-여름편 #1
진선문을 들어서기전 현존하는 최고의 돌다리 금천교에서..
안내자를 바라보는 해태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금천교를 넘어서면 진선문으로 궁궐의 관문이다
그전에는 청계천으로 흘렀다는데
지금은 아니란다
해태상의 얼굴표정이 제각각이다
남쪽으로는 해태상이 받치고 있고
북쪽에는 장수를 기원하는 거북상이 받치고 있다.
조선시대 궁궐은 대부분 이런 돌다리를 건너도록 했다고 한다.
진선문을 들어서면 좌측으로 인정문이보이고 정면으로 숙장문이 보인다.
우측으로 쭉 늘어선곳에 왕의 옥쇄를 보관했던 장소도 있었다고 한다.
인정문을 들어선다
품계석이 나란히 줄지어 있다.
그전날 이곳에서 무슨일이 일어났는지 짐작이 간다
왕이 오르내리던 돌계단...봉황인가 독수리인가
인정전 단청
전혀 어울이지 않을듯한 색감들이 절묘하게 어울러 장엄한 느낌을 준다
왕이 정사를 보던 옥좌
그뒤로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해와 달이 그려져 있다
천정에는 왕을 상징하는 용이 두마리 그려져 있지만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
실제로 천정이 어두워 겨우 보일락 말락 했다
문을 열어 걸러두는 걸고리도 참 맘에든다
인정전을 뒤로하고 선정전으로 넘어 간다
인정전 앞 느므가 멋스럽다.
느므의 또다른 각도로
인정전 풀샷
인정전을 뒤로 하고 선정전으로
창덕궁 -
창덕궁-여름편 #3
창덕궁은 태종5년(1405년)에 경복궁에 이어 두 번째로 지어진 조선의 궁궐이다.
임진왜란(1592~1598)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탄 후, 경복궁은 불길하다는 이유로
고종 2년(1865년)까지 폐허로 방치되었으나, 창덕궁은 광혜군(1608-1623) 때 곧바로
제건되어 가장 오랫동안 실질적인 조선의 으뜸 궁궐로 사용되었다.
평지에 지어진 경복궁의 주요 건물들이 남북을 축으로 하는 일직선을 따라
엄격하게 배치된 데 비해, 산자락에 자리잡은 창덕궁의 건물들과 정자들이
산의 지형지세에 따라 자연스럽게 배치되어 있다.
창덕궁은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많이 남아 있고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뛰어난 점이 인정되어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선정전(宣政殿, 보물)
선정전은 임금의 집무실이다 선정이란 정치를 베푼다는 뜻이다.
선정전이 처음 지어진 것은 세조 7년 (1461)이다. 임진왜란을 포함한
여러 차례의 화재로 불타 인조(1647)에 재건되었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유일한 청기와 건물이다.
선정전을 지나 희정당의 단청
사진에는 잘 나타나지 않으나 지붕이 앞으로 튀어 나와 있다.
소실된후 새로 지을때 일부 서양식으로 하여 자동차에 오르내릴때 쓰인 곳이란다.
희정당 내부
처음에는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임금의 집무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지금의 희정당은 원래의 모습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의 강년전을 옮겨 지었다. 이때 내부는 일부 서양식으로 지어 졌다.
희정당을 뒤로 하고 대조전으로 향한다.
대조전의 뒤뜰
대조전은 왕비의 침전이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되어 1920년 경복궁의 왕비 침전인 교태전을 옮겨 지은 것으로
내부는 일부 서양식으로 꾸며 졌다.
자세히 보면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왕이 머무는 곳에 두개의 용이 있을 수 없다 하여 용마루를 두지 않았다는 설이 있다.
대조전 앞에 어김없이 해시계가 있다.
왕이 주로 머무는 곳에는 반드시 해시계가 비치 되어 있다.
이날은 구름이 짙어 시각을 알 수 없으나
과거 왕실의 생활을 조금 엿볼 수 있다.
굴뚝이 다른 건물보다 크다 하여 안을 들여다 보니 주방이다. 수랏간이라고 하였던가.
주방내부는 입식 부엌으로 되어 있다.
빗물받이도 참 멋스럽다
침전으로 사용하던곳의 굴뚝이라 멀찌기 떨어져 있다.
장작을 쓰지 않고 숯을 사용하여 난방을 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연기가 집안으로 베어들지 않도록 굴뚝을 멀리 내놓았다.
굴뚝 아래는 조선의 대표적인 계단식 화단이다.
대조전 뒷마당
이제 후원으로 향하는 문이다.
평지에 지어진 경복궁과 달리 창덕궁은 지형에 어우러져 아기자기한 맛이 우러 난다.
부용지 지역
우측으로 영화당
멀리 뒤쪽으로주합루
앞으로는 부용지
부용지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동양의 전통적 우주론에 의해 조성된 연못이다.
사각형의 연못은 땅을 의미하며, 가운데 둥근 섬은 하늘을 상징하고 있다.
두 다리를 연못에 담그고 있는 부용정은 사방으로 지붕이 돌출된 열 십자 형태의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다.
부용정의 맞은편 언덕 위에 자리잡은 이 층 건물은 주합루로 정조 즉위년(1776)에 지어 졌다.
원래 일 층에는 규장각이 있었다. 주합루와 규장각은 학문연구 기관인 동시에 임금이
지은 글이나 글씨 및 임금의 초상화 등을 보관하던 곳이다.
현재 걸려 있는 주합루의 현판은 정조가 친히 쓴 글이다.
부용정과 주합루 사이 연못 앞에 있는 건물은 영화당으로 그 앞뜰인
춘장대에서 열리는 문무의 과거를 임금이 직접 주관 하기도 했던 곳이다.
지금 걸려 있는 현판은 영조가 직접 쓴것이다.
저기 걸터 앉아 임금이 낚시를 하였다고 한다.
고기를 잡아 올리면 풍악을 울리고 기뻐하였고 고기는 놔주었다고 한다.
지금도 누군가...낚시(?)
임금이 자주 머무르던 곳에는 어김 없이 해시계가 놓여 있다.
영조가 직접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잠시 쉬어 가는곳이다
임금이 드나들며 불로장생을 기원했다는 불로문
큰돌 한덩어리를 이렇게 쪼아 만들었는데
최근에 살짝 금이 가기 시작 했단다.
후원을 돌아 낙선재로 향한다
용마루의 모양이 참으로 다양하다.
담벼락에도 용마루가 있나 ?
내려가는 담장이 참으로 정겹다.
가을이면 온갖 단풍이 참으로 멋질것 같다.
담장 기와에 무늬도 참 다양하다.
좌측으로 임금이 차에 오르내리던 곳이다. 최근에 새로 지어 지면서 서양식으로 일부 꾸며 졌다고 한다.
낙선재 지역
낙선재 담벼락..거북등 모양으로 장수를 기원하는 뜻이다
최근까지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본래 세자의 거쳐인 동궁이 있던 자리이다.
현종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며 책을 볼 수 있게 지어진 지극히 개인적인 공간이다.
대궐에 있는 집이면서 사치스러움을 경계하여 단청을 하지 않았다.
또한 낙선재는 창덕궁에서 가장 최근까지 사용되었던 건물로 영왕의 비인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이 곳에서 생활 하였다.
가을편에는 여름편에 못가본 나머지 옥류천을 비롯한
구석구석을 둘러볼 계획이다.
창경궁
하늘 빛이 너무 고왔다.
아름다운 궁궐과 구름꽃 핀 하늘의 조화에 넋 놓고 다녔다.
때마침 만난 문화해설사를 졸졸 따라다니며 전각들의 역사를 소상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그 때뿐, 연대나 왕들의 이름은 금방 헷갈려 버렸다. 설명에 열중하다보니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연못까지의 해설코스를 마치고, 식물원까지 갔다가 되돌아오며 못다한 풍경을 카메라에 담았다.
경복궁이나 창덕궁과는 달리 동쪽으로 앉은 청경궁.
주로 여성들의 공간이었기에 아기자기하고, 그나마 조선 전각들이 가장 많이 남아있어
고풍스러운 곳이라고 해설사는 말했다.
간악한 일제에 의해 동물원으로 훼손되고 많은 전각들이 사라졌지만,
나름대로 복원에 힘쓰고 있어 아름다운 궁궐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일제가 창경궁과 종묘사이를 갈라놓은 율곡로는 지금 터널공사를 하면서 흙으로 덮고 있다.
금년말에 완공이라는데, 공사진척이 빠르지 않아 시간은 더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훼손된 조선의 궁궐들이 제모습을 찾아가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오백년 사직을 포기하고,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나라 전체를 일제에 헌납한 구한말의 위정자들이 한심스럽다.
통채로 나라를 일제에 헌납한 덕에 그들은 작위를 받고 권세를 누리며 살았지만,
백성들은 짓밟히며 목숨을 잃기도 했다.
해방 후 아직까지도 조선의 반쪽 국가를 경영하면서도 친일잔재세력들은
일본을 비호하며 친일파임음 서슴지 않고 주장하기도 하며,
일부 뇌물 정치가들은 뒷돈을 받고 부정을 저지르는데 양심의 뉘우침도 별로 없는 듯하다.
지난 날의 과오를 반면교사로 삼아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터인데...
아름다운 궁궐의 모습을 느끼면서도, 사진을 담는 동안, 머리 속이 그리 맑고 상쾌하지 못했다.
명정전으로 들어가는 중문인 명정문
명정전- 일제가 없애버린 품계석과 바닥의 돌들을 80년대 복원했다. 조선시대에는 마당의 규모가 작아
대부분의 행사는 경복궁이나 창덕궁에서 이루어 졌다고 한다.
임금께서 집무하시던, 편전인 문정전(남향)
문정전(좌측 후면 전각) 옆에 있는 궁궐의 공부방격인 숭문당(동향)
명정전에서 숭문당 까지는 복도로 이어진 하나의 건축공간으로 그 배치가 아기자기했다.
명정전 뒷문으로 나오면, 각종 궁궐 연회를 열었다는 함인정이 있다. 좌측면 담장 너머는 창덕궁 낙선재로 생각된다.
함인정에서 바라본 명정전 후측면
함인정 마루에 걸터앉아 잠시 쉬었다. 뜨거운 한낮임에도 바람의 통로처럼 서늘한 바람이 끊이지 않았다.
함인정 마루에서 바라본 환경전과 경춘전. 경춘전은 주로 대왕대비 처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정조대왕이 태어나기도 한 곳이다. 환경전과 경춘전 사이를 지나면 중전의 처소인 통명전이 있다.
전측면에서 본 경춘전, 좌측은 환경전과 함인정.
경춘전 뒤의 통명전, 중전의 처소라 경복궁의 교태전처럼 용마루가 없다.
통명전은 창경궁 내전 가운데 으뜸 건물로 꼽힌다. 1834년에 다시 세운 침전의 중심 건물로,
현존하는 중궁전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곳에서는 희빈 장씨의 인현왕후 저주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씨는 희빈으로 내려앉은 희빈 장씨는 인현왕후를 저주하며
자신의 처소인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통명전 일대에 흉물을 파묻었다고 한다.
저주사건이 발각되자, 결국 희빈은 취선당에서 사사되었다.
통명전은 개방중이었다.
신발을 벗고 통명전 대청마루에 올랐다. 대청에 걸린 편액은 순조의 어필로 금믈로 쓴 진품이란다.
좌우의 작은 방들에서는 직원들이 침구작업을 하고 있어서 생략했다.
통명정 뒤뜰, 경복궁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소탈한 여인네의 성품처럼 단아하다.
통명전 우측의 연못, 통명전과 창덕궁 후원 담장 사이의 공간에 맑은 물로 직사각형의 연못을 만들고 석교를 놓았다.
물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한 듯, 물이끼가 잔뜩 끼었다. 가끔씩 청소라도 해주면 좋을 것을...
본디 창덕궁과 창경궁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공간인데, 창덕궁 후원을 세계 유산으로 지정받기 위해 분리했다고 한다.
통명전 좌측면에서 본 전경. 그 옆에는 양화당
양화당 뒤, 언덕에서 바라본 남쪽 풍경
양화당 뒤 언덕에서 연못으로 가는 숲 속에 있는 성종대왕 태실과 비석. 본디 궁궐에 태실을 두지 않으나
일제가 경기도 광주에서 이곳으로 이전했다고 한다. 이 주변은 창경원 당시 맹수우리가 있었던 자리이다.
본디 임금이 농사짓던 곳이라는데,
일제가 파놓은 호수, 옛날 창경원 밤벚꽃놀이의 백미를 이루던 보트장이 있던 곳인데 복원하며 가운데 인공섬을 만들었다. 백성들의 무지가 잘 드러난다. 일제가 궁궐을 훼손하고 백성들로하여금 철저히 짓밟도록 했고,
망국의 백성들은 별 의식도 없이 일제의 뜻대로 벚꽃을 즐겼으니, 참으로 얼굴이 뜨거워진다.
이를 복원한 것은 총칼로 백성들을 짓밟던 5공화국 시절이니 참으로 역사는 아이러니하다.
식물원 주변
창경궁은 주로 여인네들의 궁궐이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따르면, 장희빈의 경우 후궁으로 살 때는 창경궁에서 지내다가
중전이 되어서는 창덕궁으로 처소를 옮겼다.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장옥정은 창경궁으로 쫓겨왔고
인현왕후를 저주하다가 이곳에서 사사되었다.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숨을 거둔 곳도 이곳이며, 많은 조선의 왕자들이 이곳의 전각에서 태어났다.
창덕궁 후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특별대우를 받는데,
본디 한 곳이었던 창경원 뒤뜰도 대우는 받지 못하나, 정취는 창덕궁에 못지 않다
. 본디 한 영역이기에 좋고 나쁨이 있을 리 없다.
창경궁 숲도 녹음이 그윽하여
그늘이 깊고 휴식 공간도 많아서 매우 시원하고 상쾌했다.
저렴한 입장료로 한여름철 피서지로 이용해도 최고의 선택일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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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세한 설명과 함께 사진까지
감사합니다
지기님 감사합니다 미리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셔서 훨씬 고궁 산책을 편안하게 할수있게네요 꼼꼼하고 세세하게 정보를 알려주시고
지기님 ~^^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