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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 10.4. 12:56 / 월간 현대경영 9월호 CEO, Featured, 리더&피플)
현대경영 창간 54주년(1966-2020) 기획으로 ‘한국경제를 만든 기업가’ 6인의 창업자 정신을 특집판으로 펴냅니다. 2020년 코로나19 사태 이후 우리 기업이 맞닥뜨릴 새로운 시대적 변화와 관련하여, 선구적 창업자들의 정신을 벤치마킹할 수 있는 본 자료를 귀사 임직원의 교육교재로 많은 활용 바랍니다. 현대경영 ‘창업자’ 특집판은 오는 10월 1일부터 네이버(NAVER) 기사검색을 통해서도 실시간으로 산업계에 서비스되오니 많은 활용 바랍니다.
김형남 일신방직 창업자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자 정세영 HDC그룹 창업자 정인영 한라그룹 창업자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자 | 조용하면서도 굳세게 유한의 축복 상지상 경영(上之上 經營) 올바른 산행 이봐, 뭐 하고 있어 회장님, 성공했습니다 – 회사명 가나다 순 |
조용하면서도 굳세게 김형남 일신방직 창업자
나는 하나님이 만든 것엔 대체품(代替品)이 없다고 보지요.
면(綿)이면 면, 견(絹)이면 견이지, 다른 대체품은 없지요.
화섬보다 원면이 비싸다는 점은 있겠으나 그만큼 좋고
실용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모든 사원들이 한 가족처럼 화평하게 지내자’
주요한 한국능률협회 회장 한국의 경영자로선 이례적인 경력의 소유자이신 일신방직의 김형남 회장을 모시고 말씀을 나누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1920년대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화학을 전공하신 경력, 그리고 사업가로 활약하시다가 대학교 총장직을 맡으신 것 등은 매우 특이한 사례라고 봅니다. 숭실학교를 졸업하시고 미국 켄터키 웨슬레안(Wesleyan)대학에서 공부하시면서 학자가 되고 싶으셨는지요, 아니면 사업가가 되고 싶으셨는지요?
김형남 일신방직 창업자 학자가 될 생각은 없었지요. 숭실학교 다닐 때부터 나는 이상하게도 기계창(機械廠: 기계공장)에서 일하며(아르바이트하며) 공부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유회사에서 일하며 공부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겐 35달러(주당)를 주는데 나에겐 25달러밖에 안주더군요. 그래서 “나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는 사람”이라고 상기시킨 후 “대학 실험실에서 스페어타임(spare time)이라도 일할 수 없겠느냐”고 교섭을 벌여, 마침내 실험실에서 우유샘플을 검사하게 돼 주당 45달러를 벌게 되었지요.
그렇게 여러 일을 하니 1년 후에 1천500달러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 돈으로 뉴욕으로 건너가 저 유명한 프래트(Pratt Institute)에서 공예화학을 공부했지요.
그 후 1929년 미국에서 귀국하게 되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1929년이라면 불황 때문에 세계경제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처음엔 피혁공장을 운영하다가 문을 닫고, 다시 목포에서 12년간(1934-45) 삼일서원(三一書院)이란 책방을 운영했습니다. 서점은 순탄하게 운영됐지만 일본 경찰이 ‘삼일(3.1)’이라는 상호를 문제 삼아 후에는 ‘삼광(三光)’으로 바꾸기도 했습니다.
주요한 회장 피혁공장, 서점을 경영하시다가 드디어 평생의 본업인 일신방직을 만드시게 됐는데요.
김형남 회장 1945년 해방이 되자 일본인이 경영하다가 남긴 가네보(鐘紡: 종방) 전남공장을 내가 맡아 처음엔 전남방직공사라는 상호로 운영하다가 그 후 지금의 전남방직(전방)과 갈라지게 되었지요. 나는 새로운 회사명을 짓기 위해 백낙준 박사(참의원교육부장관)에게 상호를 지어달라고 했죠. 백 박사는,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의 자(字)가 ‘일신(日新)’인데 “목화를 우리나라에 처음 가져온 사람의 개척정신이 포함돼 있다”며 ‘일신’으로 지어주었습니다.
주요한 회장 언젠간 일신방직공장엘 내려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느낀 점으론 공원(기능사원)의 대우와 환경, 시설 등이 아주 이상적이란 인상을 받았는데요. 김 회장의 평소 신조랄까 하는 것이 그대로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요.
김형남 회장 저희 공장 자랑 같지만 10여명 모집공고문을 내면 수백명이 몰려옵니다. 직원의 대우는 물론 시설도 일류호텔에 버금간다고 자부합니다. 음식도 최고의 영양식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화장실도 전부 수세식이었고요. 무엇보다도 보람으로 생각하는 것은 공장 안에 세운 교회였지요. 이는 당시 국내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주요한 회장 본론으로 들어가 방직공장을 성공적으로 경영한 이야기를 하지요.
김형남 회장 내가 방직공장을 맡은 것은 1945년부터입니다. 해방이 되고나서 “일본인 기술자들이 모두 철수하면 우리가 기술을 익힐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당시 이 문제를 미군정 당국과 교섭해서, 일본인 기술자 6명을 6개월간 우리 공장에 잡아두기로 양해가 되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공장은 1950년 6.25 사변 전까지는 생산에 있어 제일 좋은 실적을 올렸었지요. 그 후 6.25 전란 중 공장이 완전히 파괴되었지요. 다시 공장 재건에 착수해, 파괴되지 않은 식당에 6천추를 시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공장이 재건된 것을 유엔 사람들이 와보고 나서 운크라(UNKRA)의 지원으로 1만8천추를 증설하게 되었지요.
주요한 회장 처음 화학을 공부하셨는데, 기술경영자로서의 성과를 말씀해주시면.
김형남 회장 기계가 망가지고 공장은 돌아가야 하니 직접 나섰지요. 1947년 이북에서 전기를 끊었을 때는 나 혼자의 힘으로 발전기를 재생해 보았습니다.
일제 때 우리 공장에서 쓰다 남은 발전기(2,500kw)가 하나 있었는데, 내가 군정 당국에 교섭해서, 1948년 10월 이 발전기를 복구시켰지요.
주요한 회장 평소 공장경영에 대한 방침(方針)과 주의(主義)을 말씀해주시지요.
김형남 회장 한 가지 사업에 꾸준히 일하게 되면 커다란 성공은 못하더라도 최소한 밥은 먹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근 31년간 해오고 있습니다. 인사원칙으로는 모든 사원들이 “한 가족처럼 화평(和平)하게 지내자”는 것이지요.
주요한 회장 나는 김 회장이 실업가로서 대성하시고 또한 대학교 총장으로도 활약하셨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김 회장님 한분뿐이 아닙니까?
김형남 회장 내가 ‘숭실’과 인연을 맺은 것은 어릴 때 이 학교에서 공부하며 많은 것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기계창에서 일하며 많은 신세를 졌다고 생각합니다. 6.25 후 공장을 재개할 때 숭실대학 이사, 그리고 1957년엔 숭실대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습니다. 요새는 대학에 주로 있고 한 달에 두어 번 정도 회사로 나가서 ‘뒷방영감’으로 지내고 있지요.(웃음) 지금 사장에는 장남(김영호)이 맡고 있는데, 모두들 잘 해나가고 있지요.
주요한 회장 앞으로 면(綿)과 화섬(化纖) 중 어느 것이 세계적으로 대종 의류(大宗 衣類)가 되겠습니까?
김형남 회장 나는 하나님이 만든 것엔 대체품(代替品)이 없다고 보지요. 면(綿)이면 면, 견(絹)이면 견이지, 그 이상 다른 대체품은 없지요. 여름옷이나 속옷은 면으로 입어야지 혼방으로 하면 아무래도 공기가 안통해서 끈끈하고요. 물론 화섬보다 원면이 비싸다는 점은 있겠으나 그만큼 좋고 실용성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요.
주요한 회장 오늘 좋은 말씀 감사드립니다.
자료: 김형남 일신방직 회장 ‘나의 경영반세기’, 현대경영 1976년 4월호
유한의 축복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는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라고 단언했다.
다만 그 관리를 개인이 한 뿐이라고 역설했다.
유일한 박사는 또한 정직(正直)이 유한의 전통이 되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직한 기업이야말로 영원히 성공한다는 가르침을 남겼다.
1968년 3월 모범납세인으로 산업훈장 수훈
유한양행의 ‘FOUNDER’, 유일한 정신이란
“76세(1895~1971)라는 짧다면 짧은 생애에서 이분의 가장 큰 업적은 역시 기업가로서의 사회에 대한 공헌에서 찾고 싶습니다. 이 땅을 짓눌렀던 반만년 가난을 떨쳐내고 병마와 고통을 물리쳐준 의약기업인으로서의 이분의 삶은 오늘날의 후세 경제인들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습니다.
– 최종현 전경련 회장, ‘나라사랑의 참 기업인’ 발간 축사에서, 1995
‘한국 최고의 경영자’로 이름난 유일한 박사가 1926년 최초로 유한양행을 창업한 이후 45년간 최고경영자로 지내는 동안, 유한에 몸담은 임원은 모두 40명이었다고 한다. 유한의 창업, 성장, 시련, 부흥, 약진기 등 45년이라는 장구한 세월동안 유한의 임원진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 40명으로 유지되었다는 사실은, 지속가능 기업으로서의 유한양행의 실체를 잘 말해준다고 하겠다.
이는 유일한 박사의 용인술(用人術)이 사람을 신뢰하고 동지적 결의로서 그들의 신분을 특별히 보장해 주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말을 바꾸면 유한에 몸을 담은 임원들은 오너이면서도 최고경영자인 유일한 박사의 용인술에 깊이 매료되었다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1995년 발간된 ‘나라사랑의 참 기업인’이라는 유일한 박사의 일대기에는 애국자로서, 의약기업인으로서 그의 매니지먼트 사상과 실천기법이 소개되어 있다. 현대경영은 그 중 오늘의 기업인들이 새겨보아야 할 25가지 어록을 선정해 보았다.
① 만물을 창조하시고 전지전능하신 주님! 삶에 있어서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가를 인식할 수 있고, 오늘날 저희들에게 주어진 좋은 것들을 충분히 즐기며, 명랑하고 참을성 있고, 친절하고 우해할 수 있는 능력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무엇보다도 온 인류 모두가 참된 목적을 위하여 일하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저희들 마음을 겸손함과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채워 주시옵서소. 아멘! – 유일한 박사의 기도문에서
② 눈으로 남을 볼 줄 아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러나 귀로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 알고, 머리로는 남의 행복에 대해서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더욱 훌륭한 사람이다.
③ 하나의 인간은 체구(體軀)를 가지게 되며 그 몸에는 귀, 눈, 코, 입 등의 여러 기관(器官)이 부수되어 있다. 그중 하나의 기관만 없어도 완전한 인간일 수는 없다. 사회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여러 사람이 각기 사회를 위해서 기관의 구실을 다할 때 비로소 그 사회는 완전할 수가 있는 것이다.
④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이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
⑤ 기업의 생명은 신용이다.
⑥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기업은 사회의 이익증진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구이다.
⑦ 기업은 한두 사람의 손에 의해서 발전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두뇌가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발전되는 것이다.
⑧ 기업의 제1목표는 이윤의 추구이다. 그러나 그것은 성실한 기업활동의 대가로 얻어야 하는 것이다.
⑨ 이윤의 추구는 기업성장을 위한 필수선행 조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
⑩ 기업의 기능이 단순히 돈을 버는 데에만 머문다면 수전노(守錢奴)와 다를 바가 없다. ※수전노(守錢奴): 돈만 모으는 노예
⑪ 기업의 기능에는 유능하고 유익한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까지도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⑫ 좋은 품질과 싼 가격(양질염가)의 제품생산, 이것은 기업성취의 ABC이다. 그러나 이것은 기업의 사회에 대한 책임인 것이다.
⑬ 연마된 기술자와 훈련된 사원은 기업의 최대자본이다.
⑭ 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기업활동을 통한 하나의 공동운명체이다.
⑮ 기업은 물건으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디어, 이것이 기업에 성장을 가져오는 것이다.
⑯사색하고 관찰하는 습관은 인간의 지적 성장을 위한 촉진제이다.
⑰ 실패, 그것으로 해서 스스로 나의 존재가치를 깨닫는다면, 실패 그것은 이미 나의 재산인 것이다.
⑱어느 정도를 아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아는 것을 어떻게 이용하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⑲사람이 살아가는 동안에는 줏대 있게 살아야 한다.
⑳약한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대하고 강한 사람에게는 강하게 대하라. 특히 외국인에게는 강하게 대하라.
건강한 국민, 병들지 아니한 국민만이 주권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이 모든 것은 순위를 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명제들이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바로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위가 된다.
사람은 죽으면서 돈을 남기고 또 명성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
죽음을 눈앞에 둔 연령이 되면 누구나 결국은 자기 자신이 평범한 한국인이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너무나도 부족한 점이 많은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정직(正直)-이것이 유한의 영원한 전통이 되어야 한다.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그의 숭고한 경영철학은 이제 ‘유한양행’의 것만이 아닌, KOREA의 모든 대중소기업, 벤처기업, 나아가서 전 세계 모든 보편적 기업의 ‘경영자교육’과 건강한 ‘시민교육’의 바이블(bible)로 널리 알려야 하지 않을까? 유일한 박사를 창업자로 둔 것은 유한양행의 축복이 아닐까?
자료: 유일한 박사의 기업가정신, 현대경영 2018년 10월호
나라사랑의 참 기업인 유일한, 1995
上之上 經營상지상 경영 이원만 코오롱그룹 창업자
수평선의 상(上)에는 상지상(上之上)과 상지하(上之下 )가 있다.
그 아래는 또한 하지상, 하지하가 있다.
코오롱의 나일론 사업은 국가에도 기여하고 국민생활에도 기여한다는
‘상지상’ 경영 철학은 코오롱그룹의 기업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상지상 상지하 하지상 하지하
(上之上 上之下 下之上 下之下)
나는 사업을 하는 데는 결국 어떤 사업을 선택하느냐에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업을 하려거든 수평선(水平線)을 늘 생각하라”고 강조합니다. 수평선은 다시 상지상(上之上)과 상지하(上之下), 그리고 하지상(下之上)과 하지하(下之上)로 나눌 수 있습니다. 이렇게 구분해보면 나일론 사업은 부녀자의 일이 줄어들고, 질겨서 경제적이며, 수출로 나라가 부강해지니,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상지상(上之上)의 사업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습니다. 언젠가 정부 고위층과 이야기를 하던 중 어떤 분이 나에게 인간문화재(人間文化財)로 지정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이 돌아버려서 내가 어디를 가면 사람들이 “인간문화재 온다”고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나의 말은 ‘신라 전성시대’의 표준어 그대로라고 자부합니다. 내가 출생한 곳은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우각동(慶北 迎日郡 神光面 牛角洞)입니다. 우리 선조가 오현(五賢)으로 유명한, 퇴계(退溪) 선생의 스승이신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선생이지요.
회재 선생은 조선시대 중종, 인조, 명종 대에 ‘왕의 선생’으로 영의정을 지내셨지요. 저의 가친(家親: 아버지)되시는 분은 농업경영을 하셨는데 약 500석 정도였습니다. 내가 여섯 살 때 가친은 시골 선비이지만 그래도 나를 공부시키겠다고 독선생(獨先生)을 모셔서 저를 가르치게 했습니다.
그때 사서삼경(四書三經)과 통감(通鑑) 등의 한문공부를 했고, 그 덕분에 지금도 국내외 정치와 역사에 대하여 많은 흥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후 우리 일족(一族)들이 돈을 모아 세운 사립학교에 다니다가, 다시 흥해(興海)에 소재한 6년제 보통학교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 때가 내 나이 19세였지요.
당시 도평의원(道評議員: 이원기)으로 있는 우리 형님이 도지사에게 부탁해서, 도지사 특명에 따라 발령 난 곳이 경북삼림조합 기수보(技手補)라는 직책이었습니다. 경상북도 각 군, 면에서 10년간 근무하다가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판단해서 사표를 내고 공부를 더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지요. 당시 내가 29세였는데 일본으로 건너가서 처음 정착한 곳이 오사카(大阪)였습니다. 당초 공부를 하러 갔는데 여의치 못해 우선 급한 대로 신문배달을 하게 되었지요. 나로서는 귀하게 자란 몸으로써 팔과 어깨도 아프고 또한 일본어도 서툴러서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그 후 다시 새 직장에 취직해서 처음 배운 것이 이른바 ‘엑센바(기계명)’라는 일인데, 하루종일 주전자 꼭지를 깎는 일이었습니다. 그 일을 매일매일 하다보니 시력이 나빠져서, 시력을 보호하기 위해선 ‘모자(帽子)’가 필요하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보통 모자에 회사의 상호, 전화번호 등을 새겨 넣는 ‘선전용 모자’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오사카 역에서 붉은 모자(赤帽)에 PR문자를 써넣은 것을 보고 이에 힌트를 얻어, 모자인쇄의 특허권을 갖고 있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도쿄(東京)까지 찾아갔습니다.
“나는 돈이 없는 사람인데 특허권을 조금 빌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즉석에서 허락을 했습니다. 나는 그때 성공불(成功弗: 성공하면 돈을 더 준다)을 약속했고요.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사람이 열의를 갖고 정성을 다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배웠지요. 확고하게 결심을 하고 굳은 마음으로 일에 임하면 어떤 일도 잘 풀려나갈 수 있지요.”
처음 모자에 인쇄를 해보니 참으로 신기했습니다. 이 조그만 아이디어 사업이 계기가 되어 나는 오사카에서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모자 인쇄사업은 하루에 4만개도 모자랄 정도로 비약적인 발전을 하고 기능사원만도 3천명이나 고용할 만큼 주문이 쇄도했지요. 그러자 나도 “한국에서 일등 가는 갑부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돈이라는 것이 벌기는 힘들지만 자산이 축적되면 무엇인가 보람 있는 일을 하고 싶은 열망이 생기더군요.
당시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다가 문득 ‘신생 대한민국’에서 정치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구상을 들은 우리 형님(이원기)이 이활(李活:정치인) 씨의 매부인데, 인촌 김성수(정치인, 부통령) 씨와는 사돈 간이어서 이런 연줄로 ‘한민당’에 가입했습니다. 정치를 한답시고 나선 것이 돈을 많이 써버리게 되었지만 그 나름대로 보람은 있었지요.
그 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서 두고 온 자산들을 정리하고 새 사업을 모색하면서 한편으론 재일교포 경제단체로 ‘경제동호회’를 만들었고, 또한 동화신용조합 및 무역협회 등을 만들었지요. 또한 뒤늦게나마 공부를 더하고자 일본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기도 했지요. 이처럼 사업을 하며 일하며 공부하는 바쁜 생활이 계속되는 가운데 코오롱의 모체인 삼경물산(三慶物産)을 세웠습니다. 현재(1974년) 코오롱 계열에는 나일론 계열인 한국나이롱과 삼경물산 등을 비롯한 16개 기업체에 관광, 부동산, 건설업까지 경영다각화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주력인 한국나이롱은 현재 이동찬 사장(후에 코오롱 회장)이 맡고 있습니다.
일본과 한국에서의 오랜 사업경험을 통하여 후학들에게 한 말씀 드린다면 첫째로, 서로 밀고 당기지 말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당부하고 싶습니다. 포도나무가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모든 사람들이 한꺼번에 달려들면 모든 이들이 이를 따먹지 못하고 맙니다. 이를 한사람이 엎드려 그 위로 다른 사람이 올라가서 딴 것을 함께 나누면 모든 사람이 골고루 먹을 수 있지요.
둘째로, 우리의 살길은 공업화(工業化)입니다. 60년대 초 한국경제 발전의 문제를 당시 정부 최고위층과 재계 실업인들이 모여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모든 이들이 우리는 자원이 없으니 농업국가로 가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나는 그때 책상을 걷어차며 “그게 무슨 소리냐”고 일갈하고 “우리는 공업화로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다만 슬로건으로서는 농공병진(農工竝進)으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요. 그 후 구로공단, 구미공단, 울산 및 경주 등에 많은 공단이 세워짐으로써 우리나라가 산업화로 가게 된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료: 이원만 코오롱그룹 회장 ‘나의 경영반세기’, 현대경영 1976년 2월호
올바른 산행(山行) 정세영 HDC그룹 창업자
포니 디자이너 조르제토 쥬지아로, 부인 박영자 여사, 정몽규 회장
지금까지 원칙과 소신으로 일관해왔듯이 앞으로도 어느 곳,
어느 자리에 있건 바른 길을 택해 산에 오른다면 그 자체가 올바른 산행(山行)이요,
또한 정도(正道)를 지켜 산에 올랐다면 하산(下山) 또한 당당할 일이다.
원칙과 소신
제1부 현대자동차 이야기: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을 개척한 정세영 현대자동차 초대 사장은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의 계씨(季氏)다.
이 글을 쓰다 보니 정주영 회장의 가문에는 ‘낙관적 인생론’이 지배하는 것만 같다. 정세영 회장이 한국형 최초로 고유모델 ‘포니’를 만들 때의 이야기다.
당시 GM코리아 수석부사장인 벤지(H.W. Venge) 씨가 점심식사에 그를 모시겠다고 해서 나갔더니 능글능글한 표정으로 이렇게 비웃었다고 한다.
If you can make unique model car, burn my finger!
당신이 고유모델을 만들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지리라!
그 후 현대자동차가 고유모델 제작에 착수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번에도 벤지 수석부사장이 또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당신이 만든다는 고유모델을 외국에 수출하면
내 다른 손가락(My another finger)에 장을 지지리라.
정세영 회장은 당시 약이 올랐다.
한 손가락을 지지겠다더니, 이번엔 다른 손가락을 지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두 번째 코멘트를 곰곰이 분석해보면 ‘현대의 고유모델’을 만들 수 있는 가능성 자체는 이제 부인하지 못하되, 수출만은 못할 것이라는 ‘전진된’ 뜻으로 읽힌다. 정 회장은 한편으로는 흐뭇해하면서도 “두고 보자!”고 이를 악물고 더욱 강력하게 일을 추진했다.
훗날 현대자동차가 정말로 수출까지 하게 됐을 때, “다른 손도 지지겠다(Burn my another finger)”는 벤지의 말을 기억하고 있던 주위 사람들이 정 회장에게 승리의 기쁨을 나누면서 “벤지의 손가락 두 개는 이제 정세영 소유가 됐다”고 조크를 던졌다고 한다.
정 회장도 “벤지 씨, 어디에 있소. 당신의 두 손가락에 장을 지졌는지 보고 싶단 말이야!”라고 환호했다고 한다.
그때 누군가가 벤지 씨가 프랑스로 전출되었다고 그의 근황을 전했다.
“그렇다면 왕복 1등석 비행기표와 특급 호텔비를 줄 테니까 누구(?) 파리에 가서 벤지 씨의 손가락을 지지고 올 사람 없는가?”
이렇듯 정세영 회장은 ‘낙관적 인생관’을 가진 자동차 경영자였다. 만약 한국의 자동차산업이 정 회장과 달리 철두철미 계산만 하는 재무경영자가 추진했다면 오늘의 세계 7위 자동차왕국은 건설되지 못했으리라!
제2부 현대산업개발 이야기: 20세기를 눈앞에 둔 1999년 3월 5일, 정세영 회장은 돌연 큰형님(정주영 회장)으로부터 “떠나라”는 말을 들었다. 32년간 몸담았던 현대자동차의 계동 사옥을 떠나기까지 불과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몇 차례 의견차이가 있었지만 큰형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내 마음은 변함이 없었으며, 특히 이치에 어긋난 일을 두고 큰형님의 의사에 반대한 일은 한 번도 없다. 큰형님은 언제나 내 뒤에 서서 지켜보다가 방향을 잃고 잠시 머뭇거릴 때 나아갈 바를 지시해주는 등대와 같았고, 어떠한 난관에도 흔들리지 않는 거목으로 나의 버팀목이 되어주셨다.”
자동차를 떠난 다음날인 3월 6일, 그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현대산업개발 15층 사무실로 첫 출근을 했다. 새로운 직장이 된 현대산업개발(현 HDC그룹)은 주택부문이 전체 매출의 70%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주택건설업체다. 정 회장으로선 1957년 현대건설에 첫 입사한 이후 건설회사와는 40여년 만에 다시 인연을 맺은 것이다. 함께 현대자동차를 떠난 정몽규(현 HDC그룹 회장) 현 회장이 경영 책임을 맡고, 그는 명예회장으로 2선에서 자문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따라서 정세영 회장으로서는 모처럼 ‘파노라마’와도 같았던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지난 32년간 자동차회사를 경영해오면서 정 회장은 가급적 원칙을 지키고자 노력해왔으며, 공정하고 곧은 길을 가는 정도(正道經營)을 노선으로 삼아왔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원칙’을 지키는 경영을 지향한다면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 지난 세월 거의 10년 주기로 다가왔던 시련들을 이겨냈던 가장 큰 힘은 또한 ‘원칙’을 지향코자 했던 소신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원칙과 소신으로 일관해왔듯이 앞으로도 어느 곳, 어느 자리에 있건 바른 길을 걷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비록 정상에 서지 못해도 바른 길을 택해 산에 오른다면 그 자체가 올바른 산행(山行)이요, 또한 정도(正道)를 지켜 산에 올랐다면 하산(下山) 또한 당당할 일이다.
PS(Post Script) 현대경영 편집위원회는 정세영 회장의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의 마지막 글인 ‘내가 탄 차는 멈추지 않는다’는 글이 한편의 훌륭한 시와 같아서 이를 시(詩) 형식으로 구성하여 끝맺음코자 한다.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 정세영 회장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가리라
매년 현대자동차 신입사원 수련회에 참석해서
직원들과 함께 올랐던 그 정상에
내년에도 도전할 것이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꾸준히 오를 것이다.
산 정상에서 지나온 길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재정비할 생각이다.
돌아보건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던 길
그 길이 곧았다면
앞으로도 나는 곧은 길을 걸을 것이요
그 길을 달리는 내 차 또한 멈추지 않으리라!
자료: 정세영 회장 ‘최고경영자 7인의 길’, 현대경영 2015년 9월호
정세영 지음 ‘미래는 만드는 것이다’
‘이봐, 뭐 하고 있어’ 정인영 한라그룹 창업자
정인영 회장이 걸었던 부도옹의 자취는
신(神)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성자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도 맥을 같이 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는
불굴의 정신을 한라의 유산으로 남기셨다.
‘강원도 송전 땅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넓은 벌 동쪽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 정지용 ‘향수’에서
이제는 갈 수 없는 땅이 되어버린 고향. 50년이 지나도록 꿈에서조차 허허롭게 되뇌며 살아온 실향민보다 이 시 구절을 더 절절하게 받아들이는 이가 또 있을까. 나(정인영 회장)는 이 시가 노래로 불려지기 시작한 뒤로, 내 고향 송전(松田)이 바로 그 시의 배경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한다. 이 땅에서 태어나 ‘식어가는 질화로 옆에서 짚베개를 돋아 고이고’ 고단한 몸을 쉬던 가난한 풍경을 살아온 이들에겐 누구나 가슴 절절하게 와 닿는 정경이지만, 한 구절 한 구절의 묘사가 바로 내 고향 마을과 유독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일까? 나는 그처럼 풍광 수려한 마을에서 1920년 5월 6일 아버지 정봉식과 어머니 한성실의 6남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 ‘재계의 부도옹 운곡(雲谷) 정인영 회장’에서
‘넓은 벌 동쪽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는’ 강원도 통천에서 태어난 운곡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과, 그의 가형(家兄)인 아산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가 강원도 통천의 같은 집에서 태어난 것을 한국 현대경영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앞산이 뒷산을 가리어”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에 가리어 다소 덜 알려지고 있기는 하지만 정인영 회장은 한국의 중화학공업 발전을 일으킨 ‘산업영웅’이라고 불러 마땅할 것이다. 한라그룹 소사(小史)를 보면 한라그룹의 태동은 한국의 경제개발과 그 궤(軌)를 같이하고 있다. 1962년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서 점화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1962-66)의 출범과 같은 연도인 1962년, 한라그룹의 전신인 현대양행이 설립되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중장비를 생산하고 조선, 중공업, 건설, 자동차 분야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중공업 발전을 선제적으로 이끌어온 한라그룹의 창업자 정인영 회장은 오직 기술보국(技術報國)의 신념으로 불모지나 다름없던 대한민국의 중공업을 개척한 선구자였다.
오늘도 한라그룹은 재계의 부도옹(不倒翁)이라고 불리는 정인영 회장의 프론티어 정신과 정도경영을 계승하고 협력의 정신으로 하나되어 변화와 혁신의 힘찬 전진을 이어가고 있다. 한라그룹은 이제 미국, 중국은 물론 아시아, 유럽, 남미 등에 이르기까지 그 성장의 지평을 전 세계로 넓혀 지구인이 사랑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고 있다.
정인영 회장은 원래 신문기자로 인생을 출발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앞으로의 진로를 고심하다가 정 회장은 스스로 언론인의 길을 선택했다고 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뚜렷한 직업 없이 2년여를 보내며 고심하던 나는 ‘역사의 기록자’로서 신문사를 염두에 두었다. 해방 직후의 언론인들은 일제 치하 때와 마찬가지로 지사적(志士的) 풍모를 간직하고 있었으므로, 신문기자는 지식인들에게 여전히 동경의 대상이었다.”
여기서 정인영 기자의 특종을 잠시 보자.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전면남침이 개시된 긴박한 비상사태에, 동아일보는 ‘괴뢰군 돌연 남침 기도’, ‘정예 국군, 적을 요격 중’이란 제목의 호외를 6월 26일 뿌렸다. 6월 27일 아침에, 정인영 기자는 인쇄 문선공들도 모두 철수한 비상상황에서 정 기자는 동료들과 함께 윤전기를 돌리며 “인쇄는 나 스스로도 할 수 있다”며 홀연히 선두에 나서서 ‘적(敵), 서울 근교에 접근, 우리 국군 고전 혈투 중’이란 제목의 호외 300부를 배포했다.
이는 당시 전쟁 발발 직후 서울의 전황을 알린 최후의 호외였다. 정인영 회장은 ‘형님’인 정주영 회장의 부름을 받아 1953년 현대건설 부사장, 그리고 1962년 ‘운명처럼’ 현대양행 사장, 1980년 만도기계 사장 등을 거쳐 1988년 한라그룹 회장에 취임, 한국 중공업 발전의 기수가 됐다.
1991년 3월 20일 ‘상공의 날’에는 한국의 중공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이는 80년대 초 ‘중공업입국(重工業立國)’의 꿈을 안고 세운 창원공장을 빼앗긴 지 10년 만에 획득한 ‘상처 뒤의 영광’이었다.
정인영 회장은 만년에 뇌졸중에 걸린 이후에도 휠체어를 타고 끊임없이 해외출장을 다녔다. 그의 형님인 아산 정주영 회장이 “시련은 있으나 실패는 없다”고 외친 것과 똑같이 운곡 정인영 회장은 “시련은 있어도 쓰러지지 않는다”면서 결국 시련을 이겨내고 구조조정을 통해 재기에 성공한 것이다.
올해 7월 20일, 한라그룹은 경기도 양평군 선영에서 운곡 정인영 한라그룹 명예회장 14주기 추모식을 가졌다. 당면 코로나 사태로 인한 언택트(untact) 시대에 부응해, 최소 규모로 운영된 이번 추모식엔 정몽원 현 한라그룹 회장과 가족 및 친인척 및 한라그룹 원로 등 약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진행되었다고 한다. 이번 추모식에선 특히 종교교회 최이우 담임목사가 “운곡이 걸었던 부도옹의 자취는 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성자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도 맥을 같이 한다”며 “운곡 회장은 불굴의 정신을 한라의 유산으로 남기셨다”고 애도했다.
한라그룹은 운곡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웹툰 ‘이봐, 뭐 하고 있어’라는 단행본을 전 직원들에게 제작·배포한다. 웹툰으로 제작된 ‘이봐, 뭐 하고 있어’는 운곡 회장의 프런티어 정신과 긍정의 메시지를 담아냈다고 한라그룹은 밝히고 있다. 창업자는 떠났지만 창업정신은 살아있다.
자료: 정인영 회장의 기업가정신, 현대경영 2018년 10월호
재계의 부도옹 운곡(雲谷) 정인영 회장
‘회장님, 성공했습니다’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자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자 (중앙)
만우 회장은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은
최고경영자가 담당할 몫이고, 어떤 위기 상황에 처하더라도
조직원들에게 평상심(平常心)을 잃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되는 것이
경영자의 리더십이요 또한 미덕이라고 보았다.
창업자의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
1966년 11월 만우 조홍제 효성 창업회장은 오랫동안 준비해온 나일론 사업에 한발을 내딛는다. 자본금 1억원으로 동양나이론(현 효성그룹)을 설립하고 울산공단 내의 우람한 12만평 땅에 공장건설의 첫 삽을 뜬 것이다.
공장건설의 실무진은 나일론 사업의 전 과정을 초기부터 착실하게 준비해온 기획팀이 중심이 되었다. 기획팀 구성원들은 새파란 젊은이들이라 실제 경험이 충분하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그들에겐 맡은 일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도전정신이 있었고, 명석한 두뇌와 끈질긴 탐구정신이 있었다. 만우 회장은 그들을 신뢰했고 그 젊음이 이룩해나갈 무한한 가능성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1967년 2월 마침내 나일론 원사공장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타이어코드 역시 여러 번의 보완을 거쳐 타이어 메이커에 납품할 수도 있게 되었다.
만우 회장은 다가오는 공장 가동에 대비해 본사와 울산공장의 기구를 재편성하고, 해당인원을 속속 재배치하고 생산과 판매를 위한 시스템을 재정비하고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출발선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만우 회장에게는 한 가지 남에게 말하지 못할 고민이 있었다.
나일론 원사 생산에 과연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
만일 성공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일론 생산공정이라는 것이 워낙 까다로워 처음부터 ‘하얀 실’을 보기가 매우 어렵다고 한다. 기존 나일론 회사들도 시운전 단계에서 빛깔이 검거나 누런 실이 나와 그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 꼬박 1년 남짓이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더욱이 동양나이론은 공장내 설비 전체를 한 군데에 턴키(Turn key) 방식으로 맡기지 않고, 각 설비를 메이커별로 선택적으로 발주한 상태였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나일론 생산의 핵심기술만 도입하고, 부수적인 부문에 있어서는 자체 기술진이 개발한 것이 적지 않았다. 말하자면 공장건설의 모든 책임을 본사에서 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당시까지는 이런 방식으로 공장을 건설한 경우가 일찍이 없었던 만큼 동양나이론의 공장가동은 그 어떤 공장의 가동보다도 모험적인 프로젝트였다.
하자(瑕疵)가 생기면 어떻게 할까…. 시운전에서 불량품이 나오면 물건은 팔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자금이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자금이 고갈되면 사채를 쓰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사채는 안 쓴다는 입장이다. 가만히 있다간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 만약 잘못된다 해도 불량품은 길어야 6개월 정도 나올 것이니 지금부터 자금을 미리 준비하자….
만우 회장이 머릿속에서 나온 위기관리 시나리오였다.
일이 벌어진 다음에 부랴부랴 사채를 내서 쓸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만우 회장은 또한 처음부터 자신의 독자적인 사업에 은행돈을 쓰지 않기로 했다. 만우 회장은 결국 서울 명동 앞의 알토란 땅인, 후에 ‘KAL’ 빌딩이 들어선 자리의 대지를 전격 매각하여 당시 돈으로 현금 2억4천만원을 미리 마련해두었다.
은행돈을 마치 제 주머니 속의 공돈으로 여기는 기업가들이 들으면 ‘바보’라고 비웃을지 모르나 만우 회장은 천성적으로 빚을 싫어하는 기업가였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모름지기 빚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칫하면 빚에 몰려 사업 자체가 파멸로 치닫게 되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1968년 4월 20일. 드디어 나일론 공장이 시운전하는 날, 만우 회장은 울산 현장에 내려가지 않기로 했다. 그 대신 동양나이론 사업에 참여하고 있던 조석래 상무(현 효성 명예회장)를 불러 이같이 지시했다.
“시운전에 나는 입회하지 않을 작정이네. 만약 무슨 결함이라도 나오게 된다면, 현장 사람들이 자신들의 책임으로 생각해서 쩔쩔매는 극단의 상황을 차마 내 눈으로 볼 수 없을 것 같네. 내가 내려가면 현장 사람들이 더욱 부담스럽게 생각할 것이니 조 상무가 나를 대신해 가보게나.”
“네, 잘 알겠습니다.”
조석래 상무는 선친의 심정을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만우 회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만일에 무슨 문제가 생기더라도 건설 총책임자인 자네가 혹시라도 언짢은 내색을 비치면 절대로 안되네. 그들로서는 모두 최선을 다한 것이니까….”
주사위는 던져졌다. 운명의 시운전 날, 만우 회장은 서울 헤드쿼터 사무실에서 전화기를 앞에 놓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만감이 교차되고 있었다.
만우 회장에겐 그날 그 시간이 너무나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전화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회장님! 성공입니다. 성공했습니다.”
감격에 들뜬 목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울려 퍼졌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랴! 동양나이론 공장 가동은 완전히 성공한 것이다. 나일론 원사는 노즐을 통하여 계속 명주실보다 더 하얗게 빛을 뿜으며, 마치 회장님께 살아서 인사라도 올리듯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브이, 아이, 씨, 티, 오, 알, 와이(VICTORY)’라는 승리의 나팔소리가 동양나이론 전 공장에서 나오고 있었다.
만우 회장이 실무진들도 모르게 미리 준비한 자금은 이제 사용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만약 그렇더라도 만우 회장의 유비무환(有備無患) 정신은 우리나라 모든 기업가들이 가져야 할 리스크 매니지먼트가 아닐까.
최악의 사태에 대비하는 정신이야말로 창업경영자가 담당할 몫이고,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조직원들에게 평상심을 잃은 모습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만우 회장의 경영철학이다. 만우 회장의 유비무환 정신은 효성 성장, 발전의 기업문화로 자리 잡고 있다.
자료: 조홍제 효성그룹 창업자 기업가정신, 현대경영 2018년 10월호
만우 조홍제 일화집(逸話集)
* 자세한 내용은 월간현대경영에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2020.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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