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새벽에 농사일을 하고 하루 종일 두북 특위 회의를 한 후 저녁에는 금요 수행법회 생방송을 했습니다.
새벽 기도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울력을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대나무 숲으로 갔습니다.
“어제 비가 왔으니 대나무 숲에 한번 가보자.”
죽순은 어느새 사람 키보다 훨씬 높이 자라 짙고 단단한 대나무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로 새로 올라온 죽순이 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스님은 대나무 사이로 사라지더니 곧 죽순을 한 가방 캐왔습니다.
“내일이 되어야 죽순이 많이 자라 있겠어요.”
대나무 잎마다 어제 내린 빗방울이 맺혀 있었습니다. 대나무 숲에서 나온 스님의 옷에도 빗물이 묻어 있었습니다.
죽순을 내려놓고 스님은 밭과 논, 저수지와 비닐하우스를 차례로 살펴보았습니다. 어제 비가 오기도 했고, 오랜만에 전체 점검을 해보았습니다. 먼저 산 윗 밭으로 가보았습니다.
밭을 한 바퀴 돌며 도라지, 생강, 가지, 옥수수가 잘 자라고 있는지 살폈습니다. 비가 안 와서 갈라져있던 땅이 촉촉해져 있었습니다.
울타리 주변을 타고 오르는 덩굴도 정리했습니다.
밭 주변에 칡덩굴이 나무를 감으면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자연은 참 대단해요. 덩굴을 다 치웠는데 어느새 또 저렇게 타고 오르네요.”
이번에는 산 아랫 밭으로 갔습니다.
산 아랫 밭으로 가는 길에 스님은 울타리 밖으로 삐져나온 가시나무를 잘라주었습니다.
산 아랫 밭에는 행자들이 오이를 심고 있었습니다.
스님도 함께 오이를 심었습니다. 비가 온 후라 따로 물을 주지 않아도 땅이 촉촉했습니다. 오후에 또 비 소식이 있어서 심고 나서도 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밭을 한 바퀴 돌아보며 감자, 고구마, 콩, 가지가 잘 자라는지 둘러보았습니다. 산 그늘 때문에 햇빛을 많이 받지 못한 곳은 감자의 잎과 줄기가 확실히 크기도 작고 힘도 없어 보였습니다.
지난번에 설치한 물통에는 물을 가득 받아놓았는데 무거워서 탁자의 한쪽이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물통에 담긴 물을 다 사용한 다음에 탁자를 치우기로 했습니다.
산 아랫 밭을 둘러보고 풀숲을 가로질러 저수지로 올라가 보았습니다. 스님은 허벅지까지 높이 자란 풀 사이로 성큼성큼 걸어갔습니다. 풀잎에 맺힌 빗방울이 바지로 스며들었습니다.
저 멀리 논에서 뜬 모를 심어주는 행자들이 보였습니다.
어제 비가 왔지만 저수지의 수위는 아직도 많이 낮았습니다.
비닐하우스 앞 물통으로 연결된 호스는 물 위로 드러나 있었습니다. 스님은 호스를 힘껏 아래로 당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저수지 주변을 돌며 정비를 했습니다. 물에 빠진 나무를 건져내고 풀을 벴습니다.
“날을 잡아서 주변을 정비하는 울력을 해야겠어요.”
스님이 저주지 주변을 정비하는 사이 행자들이 오디를 주우러 왔습니다.
스님은 뽕나무 위로 올라가 나무를 몇 번 흔들어 주었습니다.
“제가 나무를 흔들 테니까 밑에서 천으로 받으세요.”
크고 실한 오디가 우수수 떨어졌습니다. 가뭄 속에서 짙은 보랏빛으로 익은 오디는 무척 달았습니다.
저수지를 내려와 논을 지나고 비닐하우스로 내려왔습니다.
바닥 작업을 하고 있는 창고를 둘러본 후 물통에 물이 차고 있는지 확인했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는 법사님들이 참깨밭, 들깨밭에 난 풀을 뽑아주고 있었습니다.
논과 밭, 저수지와 비닐하우스를 다 돌아보고 난 후 스님은 죽순을 삶기 위해 화덕으로 갔습니다. 화덕에 불이 피워져 있었습니다.
솥에는 스님이 따온 죽순이 담겨 있었습니다. 행자들이 알아서 죽순을 삶아놓았습니다.
“불을 잘 피웠네요. 그럼 저는 씻겠습니다.”
해가 구름에 가려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지 않았지만, 온도는 높고 습해서 땀을 많이 흘렸습니다. 찬물 한 바가지를 덮어쓴 후 발우공양에 참석했습니다.
발우공양에는 죽순이 반찬으로 나오고 오디가 후식으로 나왔습니다.
공양을 마치고 스님은 법사님들과 행자님들에게 공동체 생활을 하는 자세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공동체 법사님들은 지난달에 두북특별위원회가 설치된 후부터는 이곳이 임시 거주지가 아니고 중심 거주지입니다. 자신이 근무했던 서울이든 문경이든 봉화든 어디든 잠시 다녀오는 것은 출장을 가는 겁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출발할 때는 예불을 하고 나서 출발하고, 이곳으로 들어올 때는 발우공양 전에 도착하도록 해서 발우공양에 참석하고 나서 회의에 참석한다는 관점을 갖고 생활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예불을 하고 출발해도 되는데 예불을 안 하고 출발한다든지, 발우공양 전에 도착할 수 있는데 발우공양에 후에 도착한다든지 해서는 안 됩니다. 출장을 가실 때 이 점에 대해 유의를 해주시면 좋겠어요. 공동체 생활을 할 때는 중심 거주지에 대해 이런 자세를 항상 가져야 합니다.”
발우공양을 마치고 10시 30분부터는 강당에서 두북특별위원회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먼저 정토대전분과에서 진행사항을 발표했습니다. 정토대전 구성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해왔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발표를 다 듣고 나서 한마디씩 의견을 보태었습니다. 매일 새벽 2-3시까지 경전을 보고 연구를 하는 정토대전분과 법사님들의 노고에 대한 격려와 함께 예리한 지적이 나왔습니다.
토론을 마무리하며 스님은 불교 역사 속에서 일어났던 새로운 불교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다시 한번 설명한 후 개선, 혁신, 혁명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혁신을 할 거냐, 혁명을 할 거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그리는 그림이 대승불교와 선불교가 행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라면 역사적으로 평가할 때 혁명에 속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고, 그냥 대승불교와 선불교를 계승해서 올바르게 재해석하는 정도라면 혁신에 속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지금 여러분이 하고 있는 경전을 편집하고, 교리를 재해석하고, 그에 기초해서 사회사상을 정립하고 있는 것은 혁신에 해당합니다.
혁신은 누구를 위해 필요할까요? 혁신은 기존 불교를 위해서 필요한 겁니다. 기존 불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혁신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 혁명은 누구를 위해서 필요한 걸까요? 혁명은 대중을 위해서 필요한 겁니다. 기존 불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예를 들어 조선 왕조를 유지시키면서 입헌군주제를 도입하는 것이 혁신이라면, 조선왕조가 망하든지 말든지 아무 상관없이 백성이 주인 되는 민국을 건설하는 것이 혁명입니다.
저는 혁명을 하자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역사란 이런 것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불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라고 성장했기 때문에 혁신하는 사고방식을 가질 수는 있어도 혁명하는 사고방식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정토회도 조계종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불교 전통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불이라는 짐을 짊어진 상태에서 어떻게든 좀 가볍게 바꿀 것인가, 천도재를 지낸다는 전제 하에서 어떻게 대중이 쉽게 참여하도록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늘 하는 겁니다. 우리 자신조차도 이걸 안 하면 불교가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사실은 ‘혁신’이지 ‘혁명’은 아닙니다. 지나 놓고 보면 혁신 수준도 안 되는 혁신도 있어요. 우리는 혁신한다고 했지만 긴 역사에서 보면 구태의연했다고 평가될 수도 있습니다.
만약 미국에서 제자들이 나와서 이 법을 배우고 불교를 새롭게 일으킨다면 아마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뭣 때문에 금강경을 이렇게 공부해야 하느냐’ ‘뭣 때문에 예불을 꼭 이런 방식으로 해야 하느냐’
왜냐하면 그들은 전통이라는 아무런 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혁명을 할 가능성이 있어요. 문화적인 것을 유지해야 할 의무가 없거든요. 우리는 문화적인 것을 유지해야 할 사명이 무의식 세계에 남아 있습니다. 마치 ‘출가를 하면 불효가 아닌가’ 하는 짐이 무의식 속에 늘 남아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공연히 혁명을 하겠다고 도전을 해봤자 혼란만 야기시키고 실제로 혁명이 되기는 어려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니 혁명은 후대에 맡기고 혁신을 해보는 쪽으로 방향을 잡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해보면 혁신도 어렵습니다. 그저 조그마한 개선안 정도 내어서 가는 수준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혁명을 하려면 아무것도 몰라야 하고, 아무런 짐도 없어야 합니다. 저는 중학생 때 한글날 백일장에 나가서 한문을 사용하는 문화를 없애려면 한문을 안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우리가 한문을 안 배워버리면 30년만 지나면 저절로 해결이 된다는 거죠. 우리가 한문을 배우는 한은 한문을 사용하는 문화를 없앨 수 없다는 주장이었어요. 그 뒤로 저는 한문을 일절 안 배웠습니다. 그 덕분에 결과적으로는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불교를 하게 되었지만, 저로서는 나중에 한문으로 된 불경을 읽을 때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웃음)
불교 역사에서는 ‘삼보’의 중요성이 계속 전해져 내려왔는데, 대승불교에서는 혁명을 하면서 ‘동체삼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습니다. 부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내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주장을 한 겁니다.
‘내 마음이 깨달으면 불이다, 내 마음이 고요하면 법이다, 내 마음이 청정하면 승이다’
대승불교는 삼보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완전히 달리함으로 해서 자기들의 주장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한 겁니다. 기존의 삼보 개념으로는 자신들이 ‘승보’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 육조 혜능에 와서는 ‘자성삼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만큼 파격적일 때 혁명이 가능하지 그게 아니라면 혁명은 꿈도 꾸지 말라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낸 초안은 혁신이라고도 볼 수 없고, 개선안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니 너무 욕심내지 말고 혁신안 정도까지만 도전을 해보세요. 자기 처지를 잘 알아야 돼요. (웃음)
즉문즉설의 경우도 역사적 평가는 후대에 얼마나 호응을 얻느냐에 달려있지, 지금 세상의 평가로는 알 수 없어요.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기존 불교의 1%도 안 됩니다. 그러나 코로나 사태가 10년 지속되는 것과 같은 큰 사회 변화가 오면 비로소 재평가를 받게 될 겁니다. 보통 신구의 판세가 바뀌려면 100년 정도 걸립니다. 그냥 100년이 흐른다고 바뀌는 게 아니고, 우리의 노력과 역사적 변화라는 상황이 만나야 그게 가능합니다. 정토회는 이제 고작 30년 노력해온 것에 불과해요.
앞으로 이 법이 미국과 유럽으로 넘어가서 그들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려면 30년 정도로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온라인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와는 상황이 좀 다르긴 합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직접 대면하는 방식으로 전파했기 때문에 속도에 한계가 있었는데, 문자가 발명되면서 간접 대면이 가능해지니까 이웃 나라까지 확산되기 시작한 겁니다. 직접 대면 방식으로는 인도 밖으로 나가기 어려웠는데 문자로 기록이 가능해지면서 중국과 한국으로 전해진 거예요. 결국 불교가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간접 대면 방식에 의해서 가능했습니다. 물론 소수의 사람들이 스승이 제자에게 직접 대면으로 사람이 사람에게 전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간접 대면으로 전승되어 온 겁니다. 그러나 지금 온라인 기술은 그 정보의 양도 많을 뿐만 아니라 전파 속도도 훨씬 더 빠른 겁니다.
어느 것이 옳다는 얘기가 아니고 이것이 바로 인간 삶의 역사라는 겁니다. 정토회도 대중불교를 한다는 명목으로 대중과 함께하다 보면 대중의 요구를 점점 받아들이는 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긴 세월이 지나고 난 뒤에 다시 돌아보면 출가적 관점을 놓치고 세속화되기가 쉽습니다. 대승불교가 범했던 오류를 정토회도 앞으로 범하게 될 위험이 굉장히 많습니다.
정회원이 가져야 할 자세를 자꾸 강조하면 대중성이 떨어지게 되고, 대중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게 되면 시간이 흐를수록 법은 점점 없어지고 기존 불교보다 오히려 더 법의 근본을 놓치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가 잘못해서 그렇게 되는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도 대중이 자꾸 힘들다고 아우성을 치면 우선 위로를 해주는 쪽으로 가게 되잖아요. 현실에서는 자꾸 ‘나를 안아주어라’, ‘나를 다독거려 주어라’ 이렇게 말해주게 되는 겁니다. ‘꿈을 깨라’ 이렇게 말하기가 어렵잖아요. 내가 나빠서가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수준에서 해나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십중팔구는 그렇게 흘러가는 겁니다.
선불교는 오직 화두를 들고 깨쳐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밀고 나가기 때문에 대중성이 없는 반면에 근본을 유지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즉문즉설을 할 때 절대 타협을 안 하는 겁니다.”
“십중팔구가 그렇게 안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난존자는 부처님을 25년 간 시봉 하면서 가장 많은 법문을 들었지만, 정작 자신은 깨닫지 못해서 경전 결집에 못 들어갈 뻔했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지식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하고 연구하고 조치를 해놓아도 당대에 안 무너지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에요. 또 50년만 가도 굉장한 겁니다. 3대까지만 내려가도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어요. 엄격하게 말해 3대까지 내려가는 동안에는 규모가 커지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근본이 유지되느냐가 사실은 훨씬 더 중요합니다.
그러나 현실적에서는 확산을 해야 한다는 것과 근본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 두 가지가 모순된 과제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를 생각하면 확산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얼마나 근본을 잘 만들어놓느냐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여기에 딱 집중하면 되는데, 사회운동이라는 필요성 때문에 확산을 해야 하니까 근본을 놓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다가 한 마리 토끼도 못 잡는 우를 범할 수도 있어요.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만 할 수 있어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계획을 잘 세워도 못하는 겁니다. 그래도 현재 정토회 인력 상황에서 이 일을 할 사람은 여러분들밖에 없잖아요. 여러분이 할 수 있는 만큼만 이 일은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준비를 좀 더 해주면 저도 할 이야기가 더 생길 것이고, 준비가 여기까지 밖에 안 되면 제 얘기도 여기서 멈추는 겁니다. 제가 더 이야기를 안 하겠다는 문제가 아닙니다. 준비가 되면 저절로 이야기가 나올 것이고, 준비가 안 되면 얘기할 게 없는 문제입니다.
정토대전은 조금 더 연구를 해보세요. 아직 고무풍선에 바람이 꽉 차지 않은 것 같아요. 바람이 꽉 차면 순식간에 상호 연결이 됩니다. 지금은 이 부분과 저 부분이 서로 연결이 안 되어 있어요. 가슴속에 의심이 꽉 차서 앞도 안 보이고 뒤도 안 보여야 백척간두 진일보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깨달음의장 진행할 때 남들한테는 앞도 안 보이고 뒤도 안 보이게 밀어붙이면서, 정작 자기들의 과제는 그렇게 안 하고 잔머리를 굴려서 해결하려고 하니까 어려운 거예요.”
중간에 저녁식사를 한 후 개원 기념법회, 온라인 정토회를 주제로 저녁 7시까지 회의를 계속했습니다.
저녁 7시 30분부터는 금요 수행법회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오늘 처음 시작하는 법회입니다. 2000여 명이 동시 접속을 한가운데 스님이 법회를 신설한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잘 지내시죠? 오늘은 6월 12일 금요일입니다. 날씨가 아주 무덥네요. 낮부터 비가 온다 했는데 비는 오지 않고 계속 덥다가 조금 전부터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정토회에서는 오늘부터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정기 법회를 열기로 했습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열리는 법회는 정회원을 위한 수행법회입니다. 수행법회는 정회원들을 위한 법회이다 보니 일반 회원들이 듣기가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정회원이 아니더라도 정토회 회원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는 일반 회원들을 위한 법회를 신설했습니다. 모두 박수 한 번 쳐주세요.” (모두 박수)
실시간 채팅창에는 박수 대신 ‘축하합니다’, ‘기쁩니다’. ‘고맙습니다’ 하는 댓글이 올라왔습니다.
이어서 스님은 즉문즉설을 하기 전에 수행이란 무엇이고, 수행자란 누구를 말하는지 다시 한번 강조했습니다.
“정토회는 수행자들의 모임입니다. 수행을 해서 해탈과 열반을 증득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불교는 하나의 종교로 변했고, 기독교, 무슬림과 더불어 세계 3대 종교 가운데 하나가 됐습니다. 부처님은 가난한 자를 부자로 만들어주고, 지위 낮은 사람을 높게 만들어주는 일을 하신 게 아니에요. 부처님은 괴로운 사람이 괴로움이 없어질 수 있도록 삶의 변화를 일으키는 데 도움을 주셨습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
부처님이 대신 살아준 것도 아닌데 어떻게 그런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지하면 됩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인지하면, 눈으로 보고 인지하든, 귀로 듣고 인지하든, 코로 냄새 맡고 인지하든, 맛을 보고 인지하든, 생각으로 인지하든, 감촉으로 인지하든, 마음이 부정적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반면 뭔가 잘못 인지하거나, 사실을 모를 때 부정적인 마음이 일어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낯익은 사람과 낯선 사람 중 누구를 만났을 때 마음이 불안합니까?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불안합니다. 상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약간 겁이 나는 겁니다. 맨날 가던 곳이 아닌 낯선 곳에 갔을 때, 맨날 하는 일이 아닌 처음 하는 일을 할 때도 그렇습니다. 모를 때 심리가 불안해지고 두려움이 생깁니다. 반면에 상대를 잘 알고 있으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모를 때는 ‘왜 저렇지’ 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지만, 알게 되면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고 답답함이 사라져 버립니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무지(無知)입니다. 이 무지(無知)를 딱 깨우치면, 어두운 밤에 불을 켜면 어둠이 싹 사라지는 것처럼 괴로움도 사라지게 됩니다. 부처님은 이런 관점을 갖고 법을 설하셨습니다. 그 법을 바르게 이해한 사람들은 삶이 행복해지는 변화를 가져왔어요. 이것은 복을 비는 종교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이것을 ‘수행(修行)’이라고 부릅니다.
수행의 목표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건강해지고, 다음 생에 극락과 천당에 가는 것이 종교의 목표라면, 수행의 목표는 지금 여기 불안하고 화나는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나는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한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즐거웠다가 괴로웠다가 기뻤다가 슬펐다가 이렇게 윤회를 하고 있는가’
이렇게 살면서 고요함과 잔잔함이 지속적으로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흔들흔들했다가도 오뚝이처럼 딱 제자리로 돌아와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상태를 괴로움과 속박이 없는 자유라고 합니다. 이것을 불교 용어로는 해탈과 열반이라고 해요. 이것이 불교의 목표입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장사 잘되게 해 주세요’, ‘우리 아들 시험에 붙게 해 주세요’, ‘아픈 몸 낫게 해 주세요’ 이런 바람을 갖고 있다면, 정토회가 아닌 다른 절을 찾아가시면 됩니다. 그건 종교로서의 불교입니다. 그게 아니라 지속 가능한 자유와 행복을 추구한다면 여러분이 교회에 다니든, 종교가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누구나 다 이 법문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공이 무슨 뜻이고, 연기가 무슨 뜻인지 잘 설명하는 걸 보고 ‘저 사람은 불교에 대해서 많이 안다’라고 하는데, 그건 불교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아는 거예요. 지식을 많이 아는 것은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지식이 많은 사람도 괴로울 수 있고, 지식이 적은 사람도 괴로울 수 있어요. 반대로 지식이 많은 사람도 괴롭지 않을 수 있고, 지식이 없어도 괴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지식이 많고 적고는 생각의 문제라면, 괴롭고 안 괴롭고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괴롭지 않으려면 생각의 차원을 떠나야 해요. 수행은 생각을 갖고 논하는 게 아닙니다. 불교에 대한 지식을 많이 가지려면 불교 책을 많이 읽으면 되지만, 괴로움이 없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지금, 여기, 내가 괴롭지 않은 것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서 돈을 벌고 지식을 쌓고 지위가 높아지려고 애쓰지만, 그 돈과 지위, 지식이 도리어 괴로움이 될 때도 있어요. 그래서 수행의 목표는 돈, 지위,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유와 행복을 얻는 것이 수행의 목표입니다. 수행은 지금, 여기, 내가 괴롭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지금 잘 안되더라도 그렇게 되는 것을 목표로 해서 살아가는 자를 수행자라고 합니다. 제가 하는 법문은 다 수행자를 위한 법문이에요. 괴로운 사람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 이 법회를 하는 겁니다.
오늘은 첫 번째 정기 법회이기 때문에 늘 강조하는 얘기를 다시 한번 했습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무엇 때문에 괴로운지 그 얘기들을 들어보겠습니다.”
정기 법회를 듣겠다고 신청한 사람들이 사전에 많은 질문을 미리 올렸습니다. 그중 10개의 질문이 스님의 책상 앞에 놓였습니다.
오늘은 뒷담화와 이간질, 거짓말을 일삼는 회사 상사 때문에 괴롭다는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뒷담화와 이간질, 거짓말을 일삼는 회사 상사 때문에 괴로워요
“그분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한은 아무리 마음을 숙이려고 해도 안 숙여집니다. 숙였다가 쳐들고, 숙였다가 쳐들고, 숙였다가 쳐들고, 그렇게 돼요.
‘저 사람은 틀렸고, 내가 옳다’
이렇게 생각하는 한 아무리 짜증을 안 내려고 해도 또 올라옵니다. 그러다가 화가 터져버리는 겁니다. 싫은 마음을 내려놓는 방법은 이렇게 보는 겁니다.
‘저 사람은 나하고 다를 뿐이다.’
그분은 나와 말하는 방법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믿음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고, 생활 습관이 다를 뿐이에요. 그냥 다를 뿐이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 꽃이 있습니다. 노란 꽃이 예쁘고 빨간 꽃은 덜 예쁘다든지, 꽃송이가 큰 건 예쁘고 작은 것은 덜 예쁘다든지, 이런 종류는 예쁘고 저런 종류는 덜 예쁘다든지, 이렇게 말할 수 없어요. 그냥 다를 뿐입니다. 색깔이 다르고, 모양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어떤 게 더 예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에요.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취향인 겁니다.
나와 그 사람은 달라요. 단지 그 사람은 나의 취향에 안 맞는 것일 뿐이에요. 말투도 나와 안 맞고, 생각도 나와 안 맞고, 가치관도 나와 안 맞고, 행동도 나와 안 맞고, 그냥 나와 안 맞는 것입니다. 나와 그 사람은 그냥 안 맞는 것일 뿐인데 ‘그 사람이 문제가 있어서 나와 안 맞다’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겁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는 것을 전제로 해결책을 찾아보면,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처럼 그냥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사는 겁니다. 다른 하나는 헤어지는 방법이 있어요.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면 그 사람과 헤어지면 돼요. 헤어지는 방법도 두 가지예요. 첫째, 그를 회사에서 내보내는 겁니다. 둘째, 내가 회사를 나가는 겁니다. 만약 그 사람이 질문자보다 아랫사람이면 내보내면 되겠죠. 안 나가려고 한다면 돈을 더 주든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내보내면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질문자보다 윗사람이라면 내가 그 사람을 내보내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도 방법이 있습니다. 비리를 고발하든지 고소를 하든지 하면 됩니다. 그게 어려우면 내가 회사를 나가면 돼요.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을 내보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나갈 형편도 안 된다면, 지금처럼 스트레스를 받고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면 괴롭잖아요. 괴로움 없이 살려면 진실에 기초해야 합니다.
‘그는 나와 다릅니다.’
이것이 진실입니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지 말고, 그냥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면 돼요. 나는 한국말을 하고 저 사람은 영어를 하고, 나는 중국어를 하고 저 사람은 일본말을 하듯이, 나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는 겁니다. 나는 ’님‘자를 붙이고 얘기하는데 저 사람은 ’놈‘자를 붙이고 얘기하는 거예요. 이렇게 말이 서로 다를 뿐입니다. 이렇게 딱 관점을 잡고 있어야 이런 일에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 있어요. 그러지 않고 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말은 지금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겁니다.
그 사람을 회사에서 내보내려고 한다든지, 내가 회사를 나가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계속 스트레스받고 산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진실에 기초하지 않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길을 선택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진실에 기초하면 지금 상황을 이대로 놔두고도 아무런 괴로움이 없습니다.
‘사실은 어떠냐?’ ‘다를 뿐이다’
이렇게 사실에 기초하면 같이 있어도 스트레스가 안 일어납니다. 스트레스가 자꾸 쌓인다면 그것은 스님의 법문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과거로부터 형성된 내 까르마가 거부 반응을 하기 때문입니다. 거부 반응이 일어나더라도 바로 알아차려서 ‘내가 또 사로잡혔구나’, ‘아, 다를 뿐이지’ 이렇게 계속 제자리로 돌아오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참아야지’, ‘용서해줘야지’, ‘숙여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접근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 안 되면 자꾸 되뇌어 보세요.
‘다를 뿐이다, 다를 뿐이다, 다를 뿐이다’
다를 뿐인데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오류를 지금 범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진실에 기초한다는 관점으로 돌아가는 연습을 계속해야 합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질문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열등감이 인식의 오류라는 것을 알았지만 때때로 열등감이 올라옵니다. 계속 마음을 알아차리다 보면 열등감이 없어질까요?
북한은 대북전단 살포를 빌미로 남북관계를 끊었고, 미국은 자기 이익을 위해 으름장을 놓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하셨는데 왜 아침마다 참회를 해야 합니까? 모순으로 느껴집니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온라인 세계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온라인 수업만 받게 되면 인성이 제대로 형성될지 걱정됩니다. 엄마로서 어떻게 인성교육을 채워 주어야 할까요?
오십 중반인데 살아온 날들이 다 후회되고, 죽고 싶습니다. 남편이 술을 먹고 저를 때리고 집안을 뒤집어 놓습니다. 더 이상 이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여기까지 답을 하자 벌써 마칠 시간이 되었습니다. 질문이 더 남았지만 스님은 내일모레 있을 입재식에 모두 참여할 것을 당부하면서 정기 법회를 마쳤습니다.
“벌써 약속한 방송 시간이 다 지났네요. 매주 금요일마다 이렇게 방송이 나갈 것이니까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일요일에 온라인으로 10-2차 백일기도 입재식 하는 거 아시죠? 매일 아침 눈 뜨자마자 세상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위해서 정진을 한 시간 하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아직 입재를 안 하셨다면, 모두 입재를 하셔서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이 길에 합류를 하시기 바랍니다.”
생방송 내내 창밖으로 빗소리가 세차게 들리더니, 생방송이 끝날 때쯤에는 더 많은 비가 쏟아졌습니다. 빗소리를 들으며 스님이 한 마디 했습니다.
“가뭄이 해갈될 기미가 보이네요.”
농사를 짓다 보니 빗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내일은 새벽에 천일결사 기도를 생방송으로 한 후 오후에는 두북 특별위원회 회의에 참석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