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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묵한 곳을 터뜨리소서!
참고말씀: 출17:6; 32:11,12; 시42:1; 사55:1; 렘17:13; 눅18:11,12; 요4:13,14; 고전10:4
읽을말씀: 삿15:14~19
주제말씀: 삿15:19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
첫째,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목말라 있습니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삿15:18 상)
삼손은 지금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종일 블레셋 군대와 싸우느라 심히 목말라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혼자서 하루 종일 중무장한 블레셋 군대와 전투를 벌였으니, 얼마나 지치고 몹시도 목이 말라 있었겠습니까? 정신이 혼미하여 거의 죽을 지경이었을 것입니다.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 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턱뼈를 자기 손에서 내던지고 그 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 하였더라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15~18절)
우리는 어떤 이유들로 목말라 있으며, 갈증을 느끼고 있습니까? 사실 우리는 개인적인 일, 가정과 자녀의 일, 대인관계 문제,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다양한 갈증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영적인 문제들로 심한 갈증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시42:1)
하나님은 이런 우리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입니다.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사55:1 상)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러 가지 일들로 심히 목이 말라 있습니까? 영혼의 생수를 돈 없이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둘째, 목이 마르면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삿15:18 하)
영적으로 심히 갈급한 상태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삼손의 경우처럼, 누구에게 부르짖어야 합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18절 중)
어째서입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생수의 근원이시며, “이스라엘의 소망이신 여호와여 무릇 주를 버리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무릇 여호와를 떠나는 자는 흙에 기록이 되오리니 이는 생수의 근원이신 여호와를 버림이니이다.”(렘17:13) 예수님만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4:13,14)
지금 우리도 영적인 갈급함을 해소하기 위해 오늘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부르짖고 있습니까?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18절 하)
한편, 삼손은 어떤 자세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습니까?
① 하나님께서 이 같은 일들을 이루셨음을 상기하면서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18절 중)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혹 우리도 눈앞에 펼쳐진 문제에만 급급한 나머지 너무도 많은 것들을 잊어버린 채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원컨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우리를 위해 행하셨으며, 또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그 사랑과 은혜들을 떠올리면서 그리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다 차려주신 밥상에 저는 그저 숟가락만 얹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다 하셨으므로 앞으로도 계속 이루어가 주십시오.’
②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면서
“...내가 이제 목말라...떨어지겠나이다.”(18절)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한 바리새인의 경우처럼, 자신의 무능함을 고백하는 대신 오히려 자신의 자랑들만 늘어놓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원컨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마다 우리의 무능함을 고백하면서 그리하기를 원합니다.
③ 자신을 주의 종으로 고백하면서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18절 중)
혹 우리도 자신을 하나님의 종으로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심을 고백하고, 이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종 된 우리와 종의 가정, 종의 사업장을 책임져주시도록 간구하고 있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종이요 하나님은 제 주인이십니다. 그러니 이 종의 형편과 처지를 살펴주시고 책임져주십시오.’
④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하면서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 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18절 하)
그는 자신의 죽음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을 더욱 두려워했습니다. 즉 하나님과 동사한 자신이 만일 갈증으로 죽게 된다면, 대적들의 눈에 하나님이 얼마나 조롱거리가 되겠느냐며 호소했던 것입니다.
혹 우리는 어떻습니까? 삼손이 그러했고 또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그리 했던 것처럼, 우리도 부르짖을 때마다 자신의 안위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더욱 우선시 하고, 우리의 실패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을 더욱 두렵게 여기고 있습니까?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출32:11,12)
셋째,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십니다.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삿15:19 상)
하나님은 이와 같이 부르짖는 삼손에게 어떻게 응답하셨습니까?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심으로써 입니다.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19절 상) 터뜨리시자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그곳으로부터 생수가 솟아져 나왔습니다.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19절 중) 삼손은 이 샘물을 마시고 회복과 소생을 경험할 수 있었고요.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19절 중)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하필 우묵한 곳을 터뜨리셨을까요? 솟아오르는 물을 담으시기 위함이요, 또 ‘꺼져버린 곳, 패인 곳’일지라도 은혜의 도구로 사용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혹 우리 자신이 ‘패인 곳, 꺼진 곳’이라고 생각됩니까? 그렇더라도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패인만큼 더 많이 담을 수 있고, 꺼진 만큼 더 채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누구를 위해 우묵한 곳들을 터뜨리십니까? 부르짖는 자들입니다. 즉 부르짖는 개인의 심령 가운데서 터뜨리시고, 부르짖는 가정들 가운데서 터뜨리시며, 부르짖는 교회 가운데에서 터뜨리십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광야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반석에서 샘물을 터뜨리셨듯이 말입니다.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17:6) / “모세가 그의 손을 들어 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 물이 많아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민20:11)
지금 우리의 심령은 어떠하고, 우리의 가정은 어떠하며, 우리의 교회는 또 어떠합니까? 가뭄에 논바닥이 갈라지듯이 심히 메말라 있으며, 오랫동안 우로가 내리지 않아 먼지만 풀풀 날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럴 때 일수록 개인의 심령과 가정, 교회 가운데에서 펑펑 터뜨려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레히에서 한 우묵한 곳을 터뜨리시니 거기서 물이 솟아나오는지라 삼손이 그것을 마시고 정신이 회복되어 소생하니...”(19절 상)
넷째, 부르짖는 자의 샘은 지금도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삿15:19 하)
본문은 그 샘의 이름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엔학고레’입니다. 그 뜻은 무엇입니까? ‘부르짖는 자의 샘’입니다. “...그러므로 그 샘 이름을 엔학고레라 불렀으며...”(19절 중) 그런데 그 샘이 언제까지 레히에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습니까? 사사기를 기록할 당시입니다. “...그 샘이 오늘까지 레히에 있더라.”(19절 하) 어째서입니까? 하나님께서 그 때에만 잠깐 터뜨렸다가 닫아버리신 게 아니라, 지금도 당신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자들을 위해 계속 베푸신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 샘물이 (라맛)레히에 있었다는 증언은 우리에게 또 무엇을 시사해 줍니까? 사실 그곳은 샘물 하나 없던 광야지대로써,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수를 주시되, 도무지 물 한 모금 나오질 않을 것 같은 곳, 오아시스는커녕 작은 물웅덩이조차도 보이지 않는 그런 곳에서도 우묵한 곳을 터뜨리심으로써(삿15:19) 그리 할 수 있는 분이라는 점입니다.
혹 우리도 심히 목말라서 곤고할 대로 곤고해져 있으며, 심한 갈증으로 말미암아 거의 다 죽게 되었습니까? 도무지 일어날 힘조차 없을 정도로 바닥이 나 있습니까? 원컨대 ‘회복의 샘물’되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바랍니다.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10:4)
명심하십시오. ‘엔학고레’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습니다! 늘 가까이에 있습니다! 부르짖는 개인의 심령, 부르짖는 가정, 부르짖는 교회 가운데 말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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