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경판은 무르나 단단했다 나무를 바닷물과
뻘밭에 묻어 결을 달랜다고 했다 나무의 습성을 내려놓는 치목(治木)
의 시간이라 했다
겨울 천수만의 새들도 부드러우나 단단했다 뻘밭에 고개를 박는
새에게서도 산벚나무 냄새가 났다 주둥이부터 꼬리까지 옹이가
없는 둥근 선을 지녔다
새가 새를 끌고 날아오르는 것은 몸 안의 팔만 사천 자를 지상에
탁본하는 순간이다 새는 뒤틀리거나 썩지 않고 벌레가 먹지 않는다
경판과 경판 틈새 바람이 잘 통하였다 서둘러 날아올라도
부딪치거나 새의 모퉁이가 상하지 않았다
팔만대장경을 읽는 데 30년이 걸린다고 했다 당신도 그러하다
물속의 젖은 부처가 손을 내밀어 내 몸의 비린 경판을 읽는
것이 한 생이라면 사랑은 여기까지다 내 것도 당신 것도
아닌 기억이 시베리아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천수만
겨울 오후 뻘밭 가득 쓰인 육필 경전 부드러우나 단단했다
첫댓글 아- 조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