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조선사"는 무엇인가? 우리나라의 선조들이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대륙
중심을 활보하고 다녔다는 요지의 주장을 토대로 펼쳐지는 역사이다.
이 무슨 황당한 주장인가?
한번 재미삼아 쭉 읽어보세요...
신비의 대륙조선사 78가지
<현중국인의 증언>
1. 현중국의 한 학자가 한글재단 이사장에게 말하였다.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를 감추고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읍니다”
2. 현중국의 어떤 학자가 대한민국 초대문교부장관에게 말하였다.
“한자는 동이족의 조상(=고조선)이 만든 문자입니다.”
3. 장개석은 임시정부 이시영 부통령에게 말했다.
“중국전체가 조선인들의 역사무대 입니다.”
4. 주은래가 말했다.
“중국의 역사는 조선인들에게 귀속됩니다.”
5. 청나라는 조선의 한양, 경기도지역을 중국이라 칭했다.
<조선의 영토>
6. 조선의 서쪽은 압록강이 한계이다.
7. 조선의 북쪽은 말갈, 동남쪽은 모두 바다에 닿아있다.
8. 조선의 북쪽은 대황(=큰사막)에 접해있고, 서쪽은 몽골에 닿아있다.
9. 조선의 서남쪽은 한토(명,지나족)에 가까워 험준한 고개가 끝이 없다.
10. 조선에는 강폭이 16km나 되는 큰강이 있고, 그 강으로 명과 경계를 삼았다.
11. 강남(=대륙 양자강이남)도 조선의 황제가 다스리는 땅이다.
<조선의 크기>
12. 독립신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조선은 세계 가운데서 큰나라이고, 토지는 동양에서 제일이다.”
13. 조선은 요수의 동쪽 장백산남쪽으로부터 지역의 넓이가 만리가 된다.
14. 조선 세조때 상소문에 조선의 토지의 넓이는 만리가 되었다고 한다.
15. 조선의 지방은 고구려보다 2배 더 크고 산천이 험준하다고 한다.
16. 1800년대 러시아가 제작한 조선의 지도에는 중국,한반도, 만주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17. 조선 태종때 만든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거의 조선영역을 나타낸다.
18. 일본이 만든 유전자지도를 보면 조선인의 유전자가 한반도,몽골,중국중부,만주,일본지역
주민의 것과 비슷하다.
19. 독립신문(1896)에 이런 글이 있다.
“미국이외에 조선만큼 인구가 많은 나라는 없다. 조선의 인구는 1600만명이다.”
<조선8도>
20. 조선의 경기도 정서쪽에 황해도가 있다.
21. 조선의 황해도에는 총령(=파미르고원)이 있다고 한다.
22. 조선의 평안도와 영안도(함경도)는 사막지대와 가까이 있었다.
23. 조선의 함흥부에는 만리장성이 지나간다.
24.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침략한 조선의 함경도는 현 만주지방을 나타내고 있다.
25. 1905년 한 스웨덴인의 조선여행기에 나온, 부산에서 한성까지의 거리를 추적해 보았더
니, 960km가 나왔다.
<자연,지형>
26. 조선의 압록강을 건너기전, 중앙에 큰사막이 있다. 조선의 사막은 몇날, 며칠을 가도
끝이 없다고 한다.
27. 대동여지도 서문에는 조선을 나타내는 지명중에 큰사막이 나온다.
28. 독립신문의 독립문이 나온 사진을 보면 뒷산의 모습이 초원이나 준사막지대처럼 나무가
별로 없다.
29. 조선을 방문한 하멜은 경기도의 남한산성의 높이를 2메일(3218m)라고 하였다.
30. 조선 한성의 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31. 조선의 강은 모두 동쪽으로 흐른다.
32. 조선의 지형을 보면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33. 조선 한라산의 남쪽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
34. 1905년 한 스웨덴인의 조선여행기에 “서울로 향하는 철로(=경부선)는 강(=양자강)을
따라 달리다가 북쪽으로 꺽인다”고 한다.
35. 세종실록지리지에 삼각산은 화산(華山)으로 나온다.
77. 조선의 백두산은 수만봉의 민족의 영산으로 그 크기는 한반도보다 더 컸다.
<궁성,황제>
36. 조선의 수도 한성의 남대문(숭례문)은 정남쪽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37. 조선의 창경궁성,경희궁성이 한성의 4대문밖에 있다고 한다.
66. 반도서울의 경복궁, 덕수궁, 종묘의 도시계획축이 남산일왕신사를 정확히 바라보고 있다.
이는 조선의 황궁을 신사를 만든해에 급히 새로 만든 명백한 증거이다.
76. 1902년도 반도서울의 경복궁의 사진을 보면, 잡초가 무성하고 사람이 산 흔적이 없다.
38. 서울의 심장부는 대리석으로 장식하였는데, 그 대리석은 형산에서 이송해 온 것이다.
39. 대륙 섬서성 빈주는 조선황제가 있던 곳이다.
40. 세조때 조선황제에게 “황은이 망극하여이다“라고 하였다.
<군사,외교>
67. 조선시대의 군대는 100만대군이었다.
69. 명나라황제의 제위기간은 조선의 황제 제위기간과 거의 같다.
70. 청나라황제의 제위기간은 조선의 황제 제위기간과 거의 같다.
71. 중앙아시아의 티무르제국의 황제의 초기 제위기간은 조선의 황제 제위기간과 거의 같다.
72. 북경의 자금성이 명나라, 청나라 의 황궁이라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북경은 조선의 일개의 도성에 불과하다.
<임진왜란>
41. 조선의 거제도등 남해안과 칠천량 전투가 있었던 바다밑에서는 임진왜란때 침몰한 배들
의 흔적이 나오지 않는다.
42. 조선의 선조가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하며.“양자강과 회수를 방비하는 것을 이순신에게
만 의지하였다”고 말하였다.
43. 선조실록에 이렇게 나온다.
" 복건성,절강성에서 왜적을 잘 막았기 때문에 요양,천진지역이 안전했습니다".
44. 임진왜란때 동래에 침투한 왜군은 서쪽으로 진격하였고, 한성의 선조도 서쪽으로 피신
하였다.
45. 일본의 실력자 풍신수길은 조선의 제후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46. 선조실록의 상소문에는 " 왜군이 조선을 침입시 낙양,산동,절강,양광(=광동,광서)의 경비를
미리 단단히 해야 한다" 는 내용이 있다.
47. 조선에는 강이나 하천에서 싸우는 수군은 있었으나, 해군은 없었다.
48. 이순신의 수군은 주로 양자강내부,산동성,요녕성근해에서 왜군과 싸웠다.
<동식물,특산물>
49. 조선에는 야자나무와 파인애풀이 즐비했다.
50. 조선의 충청도에는 열대식물이 다양했다.
51. 조선에는 악어가 많고 물소가 있었다.
68. 신사임당은 그당시 농촌의 물소를 그렸다.
52. 조선에는 원숭이가 있었다.
53. 초원지대로 보이는 조선의 수도 한성에는 키우고 있는 양들이 너무 많아 규제가 심했다.
54. 조선의 황해도에는 암염(=소금바위) 이 풍부했다.
55. 조선시대 주된 도자기 생산지는 숭산, 낙수가 있는 낙양이었다.
<문학>
56. 조선의 민요 성주풀이에는 조선의 도시로 “낙양”이 나온다.
57. 조선의 민요 심청가의 배경은 대륙의 양자강, 호남성 동정호주변이다.
58. 조선의 시 양사언의 태산가에는 조선의 명산 “태산”이 나온다.
<종교,역사서>
59. 조선 천주교 전파 및 서학서의 출판은 한일합방이전까지 모두 중국대륙에서 행해졌다.
60. 일제때 일본이 천인공노하게 조선의 역사서 20만권을 불태웠는데도, 다행히 서울대규장
각에는 역사서 20여만권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런데 거의 연구를 하지 않고 그냥 잠들어 있다.
<만주>
61. 김좌진장군이 승리했던 청산리는 내몽골자치구 호화호특서쪽 대청산이다.
75. 대륙 내몽골자치구 오해시를 지나면 개마고원이 있고, 만주리란 지명이 나오는데, 이곳이 만
주의 원조이다.
<흔적 >
62. 태극문양은 조선을 뜻하는데, 몽골의 국기에 태극문양이 있다.
63. 아사달문양은 조선을 뜻하는데, 러시아 브리야트공화국의 국기, 몽골의 국기에는 아사달문양
이 있다.
64. 솟대는 조선의 문화를 뜻하는데, 시베리아에서 일본까지 솟대문화가 살아있다.
65. 삽살개는 조선의 고유품종의 토종개인데, 에스키모인들이 사용하는 개와 흡사하다.
73. 조선의 멧돌문화는 서남아시아국가, 유럽, 콜럼부스 신대륙발견전의 인디언들 사이에서 통용
되었었다.
74. 조선의 여인네들의 외출시 머리를 덮고 다니는 의상은 서남아시아 아랍국가들의 히잡과 매우
흡사하다.
78. 대륙 내몽골자치구박물관 4층에는 몽골인 의상중 한복이 있다.
신비에 쌓인 조선사 61가지(해설첨부)
1. 현중국의 한 학자가 한글재단 이사장에게 말하였다.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를 감추고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주)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 박사가 미국 공군지휘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당시 같은 입학생인
중국 학자 서량지가 한박사를 찾아와 말하기를 "귀국 한민족은 우리 중국 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
를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읍니다. 본인(서량지) 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의미로 절을 하겠으니 받아달라며 큰 절을 올렸다."
한편,1930년대 현중국인 장려화와 그 문하생들의 노력으로 중국고금지명대사전이 편찬되면서,
중국에서의 우리 조선의 영토와 역사가 완전히 현중국인의 의해 조작되게 되었다.
2. 현중국의 어떤 학자가 대한민국 초대문교부장관에게 말하였다.
“한자는 동이족의 조상(=고조선)이 만든 문자입니다.”
(주)초대 문교부장관인 안호상박사가 중국의 문학자이며 평론가인 임어당 선생에게 "중국이
한자를 만들어 우리 나라까지 문제가 많다"고 하자 임어당 선생은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한자는
당신네들 동이족조상(고조선)이 만든 문자인데 그것도 모르고 있소?"라고 말하여 안호상박사에
게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3. 장개석은 임시정부 이시영 부통령에게 말했다.
“중국전체가 조선인들의 역사무대 입니다.”
(주)현중국위 장계석 총통이 (대한독립군)임시정부의 이시영 전 부통령에게 중국 전체가 당신들
(조선인의) 역사무대(옛영토)인데 이런 역사도 모르고 독립운동을 하고 있읍니까? 하고 핀잔을
주었다고 한다. 이는 대륙에서 일본에게 멸망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대륙에서 싸우고 있는 대한독립군
임시정부에게 조선의 선조때부터 역사가 중국대륙에서 있었다는 것을 중국의 최고원수가 스스로
밝히는 중요한 대목이다.
4. 주은래가 말했다. “중국의 역사는 조선인들에게 귀속됩니다.”
(주) 현중국의 주은래수상은 “(중국)동북 지역의 역사가 조선인에게 귀속된다”고 하여 중국이
조선의 영토이자, 조선의 역사가 대대로 내려온 지역임을 인정한 것이다.
5. 청나라는 조선의 한양, 경기도지역을 중국이라 칭했다.
(주) 청나라와 조선의 무역관련 공물거래협정서인 <중강통상장정> 의 원안 및 수정 (1883, 보관:
서울대 규장각)의 제1조에서 청나라는 조선의 황제가 있는 한양(=한성), 경기도지역을 “중국”이라
칭했다가 후에 “봉성(奉省)”으로 수정하였다. 봉성은 조선의 중앙,즉 수도권을 뜻한다. 따라서,
대륙의 중앙에 조선이 있었고, 청나라는 주변 제후국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청나라는
황제국 조선조정을 “중국” 이라 칭하고 있었다.
6. 조선의 서쪽은 압록강이 한계이다.
(주)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 상 을 보면,"명나라 동월의〈조선부〉에, “살펴보건대, 저 동국
(조선)은 조가(朝家)의 바깥 울타리로, 서쪽은 압록강<=조선의 서쪽이 대륙 황하의 상류인 청해성,
사천성을 말함> 이 한계가 되고, 동쪽은 상돈에 닿았으며, 천지는 거의 그 남쪽문이 되었다.”고 하여
조선의 서쪽은 압록강(=황하,요하) 상류로서, 높은산들로 둘러쌓인 대륙을 뜻하고 있다. 즉 서쪽이
황해바다인 한반도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행(李荇)·윤은보(尹殷輔)·등이
중종의 명에 따라 1530년(중종 25)에 〈동국여지승람〉을 새로 증보하여 만든 조선 전기의 전국
지리지이다.
7. 조선의 북쪽은 말갈, 동남쪽은 모두바다에 닿아있다.
(주)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권 경도 상에, 이런말이 이어서 나온다. " 말갈(靺鞨,내몽골지역)은
그(조선의) 북쪽 문이 되었고, ~ 그나라(조선)는 동남쪽<경상도(절강),전라도(복건성,광동성)>이
모두 바다에 닿아있고, 서북쪽은 건주이고, 정북쪽은 모련 해서이다." 그런데, 한반도는 동남쪽뿐
만이 아니라, 삼면이 바다에 접해있다. 따라서 조선의 위치는 대륙과 정확히 일치한다.
8. 조선의 북쪽은 대황(=큰사막)에 접해있고, 서쪽은 몽골에 닿아있다.
(주) 규원사화 만설에서 숙종때. 상소하길 "조선 땅은 북쪽으로 대황(고비사막,섬서성북쪽)에
접해 찬하늘과 언땅이 우리의 퇴로를 끓고 서쪽은 몽골(중앙아시아,감숙성북부)에 닿아 만리벌판이
우리의 왼쪽으로 펴는 팔을 끊으며~ ” 라고 하여 조선의 위치가 대륙 한복판이며, 영토의 크기가
만리인 만리대국임을 나타낸다.
9. 조선의 서남쪽은 한토(명,지나족)에 가까워 험준한 고개가 끝이 없다.
(주) 규원사화 만설에서 숙종때, 상소하길 “ ~조선의 서남쪽은 한토(漢土;명나라)에 가까워
높은 산과 험준한 고개와 큰 강이 끝이 없으므로~”.라고 하며 조선의 서남쪽이 바다가 아니라,
험준한 산인데, 명나라와 경계를 이룬다고 함은 그 위치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한국인에게 역사는 있는가> (김종윤,2004, 책이 있는 마을) 168쪽에는 “명은 고려의 서쪽을
초생달과 같은 형국으로 만들었다.” 라고 나온다. 규원사화는 1675년(숙종1)에 북애노인(北崖老人)
이라는 호를 가진 사람이 쓴 역사책으로, 단기고사 환단고기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0. 조선에는 강폭이 16km나 되는 큰강이 있고, 그 강으로 명과 경계를 삼았다.
(주) 임진왜란때 일본장수 소서행장의 군종 카톨릭신부였던 세스페데스가 쓴 “조선여행기(1593)”
에서 “강하류의 폭이 10레구아(1레구아 1.6킬로-->16km)나되는 수량이 풍부한 강을 중심으로
꼬라이(조선)와 명이 나뉘어져있다” 고 하였는데, 한반도의 한강은 폭이 2km,압록강의 폭은
1~2km로서 한반도는 이에 해당되는 강이 없는반면, 대륙은 수량이 풍부하고 강폭도 10km이상
되는 강이 많다. 조선의 서쪽에 명나라가 위치한 것으로 보아 세스페데스가 의미하는 강이 황하
(=압록강)나 양자강의 상류가 있는 서토가 분명하다.
11. 강남도 조선의 황제가 다스리는 땅이다.
(주) 훈민정음 해례본에 “강남은 황제가 계신 나라 ”라고 나오는데, 강남이란 대륙의 양자강이남,
또는 황하(패수지역=위수~대동강~황하하류) 이남지역인 섬서성중남부,하남성 이었던 중앙정부
경기도을 뜻하며, 이땅이 바로 조선황제가 계시어 다스리는 땅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또한 조선황
제는 동서남북 사방의 제후국들을 다스리는 중앙정부국(=중국)의 황제를 뜻하는 것이다. 조선의
최고원수는 왕이 아니라 황제였던 것이다.
12. 독립신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조선은 세계 가운데서 큰나라이고, 토지는 동양에서 제일이다.”
(주1)독립신문(1896.4.7 창간 이십사호: 1896년 5월 13일 논설)에서 "조선의 호수는 348만911호
가량이다. 지면은 영국 리수로 12만 방리요, 조선 리수로는 60만 방리 가량이다 ~ 아메리카합중국
외에는 조선같이 인구 많은 나라는 없고~~조선이 세계 가운데서 큰 나라요, 토지는 동양에서
제일이다." 12만방리를 환산하면 1만리정도 나온다. 이 정도면 만리장성이 있는 대륙이 조선의
지면이요 크기라고 볼수있다.
13. 조선은 요수의 동쪽 장백산남쪽으로부터 지역의 넓이가 만리가 된다.
(주) 성종실록 134권 12년 10월 17일 에서 남원군 양성지가 상언하기를, “우리 나라는 요수의
동쪽 장백산(=백두산, 지금의 음산)의 남쪽에 있어서 3면이 바다와 접하고 한쪽만이 육지에
연달아 있으며 지역의 넓이가 만리나 됩니다.” 바로 대륙을 의미한다.
14. 조선 세조때 상소문에 조선의 토지의 넓이는 만리가 되었다고 한다.
(주) 세조실록1권 1년에서 "우리 동방(조선) 사람들은 대대로 요수 동쪽에 살았으며, 만리지국
이라 불렀습니다. ." 그리고 조선이전의 고려도 만리지국이었는데, 북역고려사 제5책 지(志) 56권
지제10 지리1편 첫줄에 보면, “우리나라는 ~ 강토의 너비가 거의 만리가 된다.” 고, 분명히
명시되어있다.
15. 조선의 지방은 고구려보다 2배 더 크고 산천이 험준하다고 한다.
(주) 숙종실록 38권 29년 그 기록을 보면, " 고구려 안시성에 이르렀을 때 황제가 한탄하기를,
“고구려는 작은 나라인데도 성을 잘지키는 것으로 이름이 나서, 수·당의 백만 군대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나라(조선)는 지방이 고구려에 비하여 배(倍)나 크고 산천이 험준한 것은
고금이 같은데도..."라고 하였다. 삼국시대에 가장 큰영토를 확보했던 나라가 고구려인데, 그
고구려 영토의 2배가 조선의 영토라고 하니 과연 그 크기가 상상을 초월한다. 수서 81권 열전46
동이고려에 ‘안시성은 산서성 남쪽을 흘러가는 패수근처에 있다’ 고 나오는데, 안시성에 이른
황제의 위치가 바로 대륙조선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16. 1800년대 러시아가 제작한 조선의 지도에는 중국,한반도, 만주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주) 조선의 영토(1800년대) 지도는 러시아에서 제작되었고, 제목이 " 조선의 엄청난 지도!" 이다.
17. 조선 태종때 만든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거의 조선영역을 나타낸다.
(주) 조선 태종때 조선은 동양에서 최고로 오래된 세계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었다.
이는 1402년(태종 2)에 좌정승 김사형, 우정승 이무와 이회가 간행한 세계지도로서 세로 148cm,
가로 164cm에 아시아와 아프리카, 유럽을 모두 포함하는 대형 지도이다. 여기서 조선의 영토는
한반도를 포함한 아시아전체였다.
18. 일본이 만든 유전자지도를 보면 조선인의 유전자가 한반도,몽골,중국중부,만주,일본지역
주민의 것과 비슷하다.
(주) 일본에서 만든 아시아 유전자 지도참조
19. 독립신문(1896)에 이런 글이 있다.
“미국이외에 조선만큼 인구가 많은 나라는 없다. 조선의 인구는 1600만명이다.”
(주1) 독립신문 』(1896.4.7 창간)(이십사호: 1896년 5월 13일 논셜) "조선의 인구 수효는
1600만명인데, 남자는 900만 명, 여자는 700만 명이다.
(주2)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사회경제생활 이야기) 한국역사연구회지음.
정성현펴냄. 조선시대의 호구통계에 기초하여 실제 인구를 추정한 연구에 의하면
조선시대의 인구는 1910년대에 1750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연구에서 제시된
조선시대의 호구통계와 추정인구치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인구변동(호구자료통계와 인구 추정치)>
1393년(태조 2) 에 호구통계는 301,300명, 인구 추정치는 5,572,000명이다.
1440년(세종 22)에 호구통계는 692,475명, 인구 추정치는 6,724,000명이다.
1551년(중종 6) 에 호구통계가 없었고 인구 추정치는 10,010,000명이다.
1543년(중종 38)에 호구통계는 4,162,021명, 인구 추정치는 11,643,000명이다.
1642년(인조 20)에 호구통계는 11,649,012명, 인구 추정치는 10,764,000명이다.
1744년(영조 20)에 호구통계는 7,209,213명, 인구 추정치는 18,275,000명이다.
1843년(헌종 9) 에 호구통계는 6,703,684명, 인구 추정치는 16,632,000명이다.
1910년(융희 4)에는 호구자료 통계가 없었고 인구 추정치는 17,427,000명이다.
이것을 보면 조선초기-중종(1400-1590)까지의 인구증가율과 병자호란 이후 현종초
(1639 ~1666)까지의 인구 증가율이 상대적으로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인구가 1천만명을 돌파한 시기는 대체로 1500년 전후의 시기, 즉 16세기 전후임도 알 수있다.
20. 조선의 경기도 정서쪽에 황해도가 있다.
(주)《신증 동국여지승람》 서문에 서거정(1420~1488년)의 글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사방(四方)의 한복판에 자리한 것이 경기도이며, 그 서남쪽을 충청, 동남쪽을 경상, 남쪽으로
치우쳐 있는 곳을 전라, 정동쪽을 강원, 정서쪽을 황해, 동북쪽을 영안(함경), 서북쪽을 평안도
라고 한다.”고 했다. 이글에서 정서쪽이 황해바다가 아니라 내륙지방인 황해도라 했고, 경기를
중심으로 방패연모양으로 7도가 사방으로 연결된 것이 반도의 조선팔도와는 전연 틀리다..
21. 조선의 황해도에는 총령(=파미르고원)이 있다고 한다.
(주) <숙종실록 43권 32년 3월 25일>에서 황해도 수안의 유학 김처균등 9인이 상소하여 아뢰기를,
“본군에 신설한 문산·총령·위라·선적 4진이 관방하는 데에 이익됨이 없고 손해만 1군에 널리 퍼진
형편이니~” 라 했는데, 여기서 "총령"이란 중앙아시아의 파미르 고원으로서 서역으로 통하는 길인데
전한 때부터 유명한곳이었다. 결코 반도의 황해도를 나타낸 것이 아니었다.
22. 조선의 평안도와 영안도(함경도)는 사막지대와 가까이 있었다.
(주) <중종실록 59권 중종22년(1527) 6월 3일(무신)>에 생원 이종익이 상소하였는데, “신이
또 보면 평안도와 영안도[=함경도]는 사막지대와 가까이 있어 인물들이 쇠잔합니다.” 즉
평안도와 함경도는 대륙 만리장성 북쪽의 섬서성, 감숙성등지에 있는 고비사막에 접해있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23. 조선의 함흥부에는 만리장성이 지나간다.
(주) 또다른 조선의 역사 (정용석 지음. 동신출판사. 2003)에서 세종실록지리지를 참고하여
“조선의 함흥(부)에는 만리장성이 지나가고 있읍니다. ”라고 나온다. 함흥이 있는 함경도에
만리장성이 있다고 함은 대륙북동부를 나타낸 것이지, 결코 반도의 북동부가 아니다. 반도에는
만리장성이 없다.
24. 임진왜란때 일본군이 침략한 조선의 함경도는 동북삼성(현만주)지방을 나타내고 있다.
(주) 최근 부활한 KBS 역사스페셜 “100년 만에 귀환한 북관대첩비” 에 방영된 함경도 지도가
랴오뚱반도 내륙을 가리키고 있다. 임진왜란때 일본이 침략한 함경도는 한반도가 아니라
요녕성,길림성,흑륭강성인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를 침공한 대표적인 다이묘(大名),
가등청정 (가토 기요마사)의 공격지도는 현만주를 나타낸 것이다.
25. 1905년 한 스웨덴인의 조선여행기에 나온, 부산에서 한성까지의 거리를 추적해 보았더니,
960km가 나왔다.
(주) 스웨덴인 아손 그랩스트가 1904년 12월 24일에서 1905년 1월말까지 조선을 여행한 후
1912년 스웨덴 Elanders Boktryckeri Aktiebolag 출판사에서 <을사조약 전야 대한제국 여행기>
라는 부제목을 붙인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라는 책(도서출판 책과함께,
2005. 김상열번역)을 펴냈다. 이책에서 “전체적 여행길은, 나가사키 - 대마도 - 부산 - 대구 - 공주
- 평택 - 수원 - 경도부- 서울이다. 부산에서 서울까지는 경부선이었으며, 빠르면 16시간(일->
시간으로 정정)이 걸리고 혹은 30시간도 걸린다“ 고 했으니, 그 거리는, 기차의 평균속도 60km/h로
보면, 960km이상이 된다. 그런 현재 반도에서의 부산-서울거리는 450km이다.
26. 조선의 압록강을 건너기전, 중앙에 큰사막이 있다. 조선의 사막은 몇날, 며칠을 가도 끝이
없다고 한다.
(주) 선교사들의 기록에서 조선의 압록강(황하,요수=)을 건너기 전에 중앙에 엄청난 큰
사막(=고비사막)이 있는데 몇날 몇일을 가도 끝이 없다고 나온다.
27. 대동여지도 서문에는 조선을 나타내는 지명중에 큰사막이 나온다.
(주) “(조선은) 곤륜산의 한갈래가 큰 사막(고비사막)의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의무려산으로
보여진다. 이 의무려산에서 멀리 떨어져서 요동벌판이 펼쳐진다. 요동벌판을 지나면 백두산(음산)이
나오는데, 이 산은 조선산맥의 뿌리가 된다. 이 산마루는 3층이고, 높이는 200리이고, 가로뻗친
길이가 1000리이고 ~” 에서 조선의 북쪽이 대륙 내몽골을 뜻하며, 한다. 큰사막은 감숙성,섬서성의
고비사막을 말한다.
28. 독립신문의 독립문이 나온 사진을 보면 뒷산의 모습이 초원이나 준사막지대처럼
나무가 별로 없다.
(주) 사방에 산들이 모두 초원지대,준사막지대처럼 나무가 거의 보이질 않는다. 서안일대는
양들을 키우기에 적당한 초원지대가 펼쳐진 지역이다. 바로 독립신문에 찍힌 독립문사진은 반도
서울의 서대문구의 독립문이아니고 대륙 서안(한성)근처의 독립문을 찍은 것이다.
29. 조선을 방문한 하멜은 경기도의 남한산성의 높이를 2메일(3218m)라고 하였다.
(주) 새롭게 고쳐쓴 신 하멜표류기(최두환 역주, 2003. 우석출판사)에서 보면,남한산성의 높이가
2메일(3218m)였다고 한다. 현재 한반도 남한산성은 400~500m의 산으로 맞지 않음. 중국의
한성(서안)의 남쪽산들은 모두높이가 2000~3000m이고 서남쪽은 유명한 태백산(3767m, 배달국의
시조산임), 남쪽엔 종남산(2604m, 목멱산,남산) 이 있다. 서쪽 끝 태백산에서 남한산, 종남산(남산),
화산(삼각산)의 동쪽끝까지 연결된 산맥이 섬서성 남부의 진령산맥이다. 한편, 대륙의 산들을
반도에 억지로 맞추다 보니까 서로 안맞게 배치되었고, 높이도 소규모화되었다.
30. 조선 한성의 강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른다.
(주) 러시아장교 조사여행기(내가 본 조선, 조선인) - 카르네프지음(김정환 옮김) 가야넷
출판사 2003 -에서 “조선의 서울의 강은 서에서 동으로 흐른다.” 라고 나온다. 바로 대륙의
섬서성의 위하를 뜻한다. 그런데 반도서울의 한강은 동에서 서로 흐른다.
31. 조선의 강은 모두 동쪽으로 흐른다.
(주) 또 다른 조선의 역사(정용석저) 51쪽에서 세종실록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참고
하면서, “조선의 모든강은 동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쓰여져 한반도 지형지세와는 근본을
달리하고 있다.” 고 하였다.
32. 조선의 지형을 보면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주) 또 다른조선의 역사(정용석저) 51쪽에서 또한 “조선지명의 지형지세연혁들은 대부분의
고을의 북과 서쪽에 험준한 산과 산맥들이 있었던 것으로 서술되었다” 고 한다. 조선실록,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조선의 지형이 서고동저로 나와 조선의 지형은 대륙의 형상과 다름이
없다. 반도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다.
33. 조선 한라산의 남쪽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
(주1) 인물로 본 조선사의 허구 상편 (김종윤저) 241쪽에 “한라산은 산동성 제주의 동쪽
청주부내의 기산과 조산을 합쳐 불렀던 조선사의 산명”이라 한다. 한반도의 한라산은 일제에
의해서 20세기초에 붙여진 명칭이다.
(주2) 최익현의 유한라산기(면암집 ,1931)에서 보면, “한라산 서쪽은 서양에 접했으며, 남쪽은
소주, 항주가 있다. 5월에도 눈이 녹지 않습니다. 그 정상에 있는 백록담은 선녀들이....” 란
내용이 있다. 반도에는 소주나 항주가 없다. 따라서 조선은 대륙에 있었고, 한라산도 섬이 아닌,
대륙의 안쪽에 있었던 것이다.
34. 1905년 한 스웨덴인의 조선여행기에 “서울로 향하는 철로(=경부선)는 강(=양자강)을 따라 달리다가 북쪽으로
꺽인다”고 한다.
(주)《스웨덴 기자 아손저서, 100년전 한국을 걷다》에서도도한 강(양자강)을 따라 몇 시간
동안 달리자, 철로는 북쪽으로 꺾였다.”고(p. 51) 나온다. 반도에서 경부선을 타고 북쪽으로
줄곧 가게 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이 철로는 호북성한구, 즉 무한에서 하남성 낙양으로 연결된
것을 말하며,강소성 상해지역을 거쳐 양자강을 끼고 서쪽으로 항해 했으며, 무한 근처에서
북쪽으로 항해하여 간 것으로 보인다.
35. 세종실록지리지에 삼각산은 화산(華山)으로 나온다.
(주)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삼각산의 또다른 이름으로 화산이나 화악이라고했고, 동국여지승람
에는 “삼각산은 양주 경계에 있는데 화산(華山)이라고도 하며, 신라때에는 부아악(負兒岳)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인물로 본 한반도 조선사의 허구 상편 (김종윤) 16쪽에는 “조선시대에 쓰였다는
소설<화산선계록>은 (대륙의) 이산을 무대로 쓴것이며 다른이름인 삼각산의 별칭 을 가지고있다.”
라고 나온다. 대륙의 화산(2437m)은 한반도로 넘어와 서울의 북한산 자락의 삼각산등으로 이전
되었다. 화산은 섬서성 동부 진령산맥의 동단에 있으며, 조선의 5악중의 하나이다.
36. 조선의 수도 한성의 남대문(숭례문)은 정남쪽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주) 동국여지비고에 조선의 황도 한성의 4대문중 정남쪽 문을 숭례문이라 하고, 4대문의 위치는
4각성냥각처럼 각각 정남,정북,정동, 정서방향이라 했다. 그런데, 현 반도 서울의 숭례문은 서남쪽
문이고, 한성의 외성모양을 보면 들쭉날쭉 비정형으로 문방향도 정북,정동이라 볼수 없다. 조선의
한성은 바로 대륙에 있으며, 섬서성 서안이 한성이요, 한양이다. 그곳 옛 배치도를 보면 반듯한
4각형 성곽에 모든 4대문이 정남, 정북, 정동, 정서방향으로 설립되어 있다.
37. 조선의 창경궁성,경희궁성이 한성의 4대문밖에 있다고 한다.
(주) 동국여지비고에서 “ 한성(외성)의 둘레는 18km이고, 한성 4대문밖에는 창경궁성, 경희
궁성이 있었다”고 했는데, 반도서울에는 창경궁,경희궁이 모두 4대문 안에 있고, 궁들은 있는데
궁성들은 없다. 그리고 반도 서울의 조선 황궁들이 남산의 일본신사 (신궁)을 바라보면서 일제 때
만들어 진 것으로 드러나, 창경궁,경희궁은 허구인 것이 명백해졌다. (채윤기님의 조선신궁과
조선궁궐중에서 누가주인이냐? 참조)
38. 서울의 심장부는 대리석으로 장식하였는데, 그 대리석은 형산에서 이송해 온 것이다.
(주) 스웨덴인 아손, 100년전 한국을 걷다에서 서울(장안)의 심장부에 장식용으로 쓰인 대리석은
대륙 호남성에 있는 형산에서 생산하여 이송해온 것이라 한다. 형산은 대륙호남성 형양(조선사의
남원)에 있는 1265m의 명산이다. 형산은 조선작가 김만중의 구운몽의 작품배경이 되며, 조선의
지리산이다.
39. 대륙 섬서성 빈주는 조선황제가 있던 곳이다.
(주) 선조실록 26권, 25년(1592) 4월 28일에서 “이때 대신 이하 모두가 입시할 적마다
(황제에게) 서울 빈주를 떠나서는 안된다고 아뢰었으나” 라로 나온다. 빈주는 섬서성
장안보다도 서북쪽 110km(=291리)에 있는 곳이다. 임금과 그 일행이 이 섬서성 빈주에서
의주로 간다고 하여 <서천> 이란 말이 나왔다.
40. 세조때 조선황제에게 “황은이 망극하여이다“라고 하였다.
(주) 이시애의 난의 평정을 기리는 양성지의 " 평삭방송 " 이란 글 중에 " 사방 만리 땅에 우리와
함께 태평하네 ", "황은이 망극하여 " 란 말이 나온다. 여기서 조선의 세조는 왕이 아니라 황제였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도 “江南은 황제가 계신 나라” 라고 하여 조선의 왕은 황제였음을 오늘날 몽매한
우리들에게 알리고 있는 것이다. 강남이란 황하(패수)의 이남지역, 서안, 화산,낙양 주변을 뜻한다.
41. 조선의 거제도등 남해안과 칠천량 전투가 있었던 바다밑에서는 임진왜란때 침몰한 배들의
흔적이 나오지 않는다.
(주) 조선은 대륙에 있었고, 임진왜란도 상해(부산)로부터 내륙의 양자강등 대강이나 육지로
이어졌으므로 침몰한 배들은 대륙의 강바닥이나 대륙근해에 있을지언정 반도의 남해안에는
있을 수가 없다. 그리고 이순신이 반도 앞바다에서 왜적과 전쟁을 하면서 수군절도사와 수군
통제사를 역임했다는 것은 거짓일 수 밖에 없다.
42. 조선의 선조가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하며. “ 양자강과 회수를 방비하는 것을 이순신에게만
의지하였다 ” 고 말하였다.
(주) 선조가 이순신의 죽음을 애도하며 쓴 제문 “ (나는) 양자강과 회수를 가로막는 것을 오직
그대(이순신)에게만 의지하였다. " 고 하여 양자강이 있는 절강성입구, 회수가 있는 강소성일대를
이순신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음을 알수 있다.
43. 선조실록에 이렇게 나온다.
" 복건성,절강성에서 왜적을 잘 막았기 때문에 요양,천진지역이 안전했습니다".
(주) <선조수정실록>권26 선조25년 9월 1일(정사)의 내용-"200년 동안 복건성과 절강성이
항상 왜적의 화를 당하면서도 요양과 천진에까지 이르지 않았던 것은 어찌 조선이 울타리처럼
막아주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압록강(황하중류) 에 길이 셋이 있습니다만, 서쪽에 가까운
두 곳의 길은 물이 얕고 강이 좁아서 말이 뛰어 건널만하고 또 한 길은 동서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으니 어떻게 그곳을 거점으로 하여 방수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왜놈들이 조선을 점거한다면
요양의 주민들은 하루도 편안하게 잠을 잘수가 없을 것입니다."
44. 임진왜란때 동래에 침투한 왜군은 서쪽으로 진격하였고, 한성의 선조도 서쪽으로 피신하였다.
(주) 이충무공전서 2권~4권 (임진장초)에 “임금(황제)이 서쪽으로 난리를 피했다는 기별이 있었다.”
상식적으로는 조선이 한반도라면 북쪽으로 피신해야 옳다. (어제신도비명)에는 “왜적들이 거병하
였는데 먼저 부산 동래를 함락하고 여러길로 나뉘어 서쪽으로 올라갔다.”라고 나온다.(한국인에게
는 역사는 있는가,김종윤저,227쪽)
45. 일본의 실력자 풍신수길은 조선의 제후로 인정받기를 원했다.
(주) 선조실록<宣宗昭敬大王實錄>권26에 선조 25년 4월 13일의 기록에 보면 “ 왜구가 침범해왔다.
이보다 먼저, 일본도둑 추장 풍신수길은 관백이 항상 (조선의)중앙조정 (=중국)이 조공을 허락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서, 일찍이 중 현소 등을 내보내어 요동을 치러갈 테니 길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대의로 거절했다.” 즉 일본이 제후가 되기 위하여 조공을 바치려면, 중앙
조정(=중국)인 조선에서 일본을 책봉하여 지방국가로 인정받아야 한다. 이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
기 때문에 임진왜란을 풍신수길 이 일으킨 것이다.
46. 선조실록의 상소문에는 " 왜군이 조선을 침입시 낙양,산동,절강,양광(=광동,광서)의 경비를
미리 단단히 해야 한다" 는 내용이 있다.
(주) 선조실록 52권 27년 6월 2일 (기유)“ 각성의 순무를 맡은 신하가 마땅히 관중과 낙양을 한
집안처럼 형세가 서로 연결되게 하여, 적이 산동에 들어오면 회주,서주가 지원하고, 적이 회주·
서주에 들어오면 절강·직례가 지원하고, 적이 절강 직례에 들어오면 민중·양광(광동성과 광서성)
이 지원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한다면 군대의 사기가 진작될 것입니다. 척계광과 유대유는 다
왜적을 무찌른 공신으로서 강남에서는 시축으로 모시고 있습니다. 왜군이 쳐들어 오는 길목을
미리 예상하고 대비책을 보고한 것으로 완전히 한반도가 아닌 중국지역이다.
47. 조선에서 수군은 주로 강이나 하천에서 싸웠다.
(주) <또다른 조선의 역사(동신출판사)>에서 정용석님은 세종실록지리지를 참고로 “바다에
접해있다는 근해, 환해, 대해에 있는 고을이 선군(船軍, 강,하천,호수를 무대로 싸우는 군대)을
갖고 있었는데 해군(바다를 무대로 싸우는 군대)으로 보기가 어려운 이유가 선군으로 표현된
수군이 산악지방의 강,하천에서 많이들 활동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48. 이순신의 수군은 주로 양자강내부,산동성,요녕성근해에서 왜군과 싸웠다.
(주) 난중일기에서는 대륙 절강성에서 강소성까지 바다를 지켰다고 나온다. 이는 전혀 반도의
남해안과는 거리가 멀다. 왜군의 출발점도 열도가 아닌 복건성부근의 대륙의 남해안이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근해를 우회하여 대륙내부로 침투했던 것이다.
49. 조선에는 야자나무와 파인애플이 즐비했다.
(주) <새롭게 쓴 하멜표류기(최두환 역저)>에서 조선에는 야자,파인애플,감귤을 비롯해서
코르크나무등 열대나무들이 즐비했다고 나온다. 한편, 반도 하단 제주도는 1990년대부터
실내등지에서 특수재배로 파인애플을 키워왔으며, 산과 들에 원래 없었다. 제주의 감귤도
예전에는 없었으나 1911년부터 일본인에 의해 재배되기 시작했고, 1960년도초에 박정희
대통령의 유실수재배정책에 의해 대단위로 심어졌다. 이는 대륙조선을 뜻하며, 그곳은
야자나무,파인애플이 모두 자연산이다.
50. 조선의 충청도에는 열대식물이 다양했다.
(주) 그리피스(William E. Griffis) <은자의 나라 조선> 서울 집문당출판 1999년 번역.p. 259에,
“충청도는 대체로 북위 36도-37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참나리, 그밖의 여러 가지 유럽종자들이
"열대적 다양성(tropical varieties)"을 가졌다고 했다. 반도는 온대지역이므로 이에 적합하지가 않고,
대륙의 사천성, 운남성, 귀주성 (북위 26도~ 32도)등지로 추정된다. 이런 곳은 지금이나 옛날이나
"열대적"이란 말로 살아간다.
51. 조선에는 악어가 많고 물소가 있었다.
(주) 이것은 조선대륙의 양자강이남지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찰스에덴은 and descriptive,1880>에서 조선대륙에 다양한 동물이 많이 있다고 해서 "조선은 동물의 왕국"이라
는 표현을 했다. <새롭게 쓴 하멜표류기(최두환 역저)> 70쪽에는 " 그(조선)강에는 악어들이 종종
사람들에게 못살게 굴었고 크기는 다르지만 어떤악어는 길이가 18엘레 (12.34m) 또는 20엘레
(13.72m)가 되었으며..."라고 나온다. 그리고 청이 병자호란때 조선에 일곱번째 조건으로 요구한
조공물품 중에는 물소뿔,녹용,차,남대륙의 희귀한 식물 등 한반도에선 찾아볼수 없는 것들이 많다.
물소는 대륙에서 황소처럼 이용되고 있으나 한반도엔 없는 동물이다.
52. 조선에는 원숭이가 있었다.
(주) 러시아장교 조사여행기(내가 본 조선, 조선인) -카르네프지음(김정환 옮김) 가야넷 출판사
2003 에서 “조선엔 원숭이와 악어도 있었다.” 고 나온다. 원숭이는 대륙 양자강이남에서 야생으로
많이 산다. 반도에는 동물원외에는 야생으로 사는 원숭이는 없다.
53. 초원지대로 보이는 조선의 수도 한성에는 키우고 있는 양들이 너무 많아 규제가 심했다.
(주) 오늘날 전세계에는 10억 마리 이상의 양이 있는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들을 사육하는
주요국가는 오스트레일리아, 러시아, 중앙 아시아 지역 국가들, 뉴질랜드, 중국(=조선), 인도,
미국 등 넓은 초원을 가진 나라들이 주요생산국이다.
1) 조선왕조 실록중 태종 24권, 12년( 1412 임진 / 명 영락10年) 8月 14日 연향에 양을 쓰지
말라는 내용이다..
2) 세조 33권, 10년(1464) 7월 5일에는 “양의 번식이 많다”는 내용이 있다.
3) 중종 25권, 11년(1516) 5월 11일에 경성에서 양을 기르는 자가 많아 더 이상을 양을
기르지 못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4) 숙종 17권, 12년(1686) 11월 29일 흉년이 들어 양을 가지고 지내던 제사를 한 단계식 강등해
한다는 내용이 있다.
지금 한반도에 양을 대량으로 키울만한 목초 지대를 볼수가 없다. 양은 넓은 목초지대가 있어야 하고
옮겨 다니며 키워야 합니다. 결국 조선은 넓은 목초지를 그것도 옮겨 다닐 정도로 광활한 곳에 강역이
있었습니다. 결코 한반도에 조선이 있을 수 없습니다. 바로 중국대륙 섬서성서안이 맞다. 이 곳은
넓고 목초지역이 많다.
54. 조선의 황해도에는 암염(=소금바위) 이 풍부했다.
(주) 그리피스(Griffis)의 <은자의 나라 조선> 서울 집문당에서 1999년 번역 황해도 편에 보면 p.252에,
"암염(巖鹽,소금바위)이 풍부하다."고 했다.(원문, p.186, Rocks, or fossil salt is plentiful) 한반도에는
어림도 없는 표현이다. 한반도에는 천일염 뿐이며, 암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대륙의 암염
생산지로는 양자강 유역, 운남성 북쪽 으로 청해성지역 이다. 조선의 황해도는 경기도의 서쪽,
청해성지역이다.
55. 조선시대 주된 도자기 생산지는 숭산, 낙수가 있는 낙양이었다.
(주) 또다른 조선의 역사 (정용석 지음. 동신출판사. 2003) 259쪽에서 세종실록지리지를 참고하여
경기도 광주일대가 도자기 생산과 더불어 백토(고령토)가 많이 생산된 것으로 보아 한반도 광주가
아닌 대륙의 황화유역의 하동,하남(신안,여주,낙양(광주)일대) 지역임을 밝혀냈다. 대륙의 낙양은
조선의 광주지역으로 현재에도 많은백토(고령토)가 나고, 질좋은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하다
56. 조선의 민요 성주풀이에는 조선의 도시로 “낙양”이 나온다.
(주) 1) (성주풀이)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누구냐
우리네 인생 한번가면 저기 저 모양 될 터이니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저 건너 잔솔밭에 설설기는
저 포수야 저 산비둘기 잡지마라
저 비둘기는 나와 같이
임을 잃고 밤새도록임을 찾아 헤매노라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한 송정 솔을베어 조그많게 배를지어
술렁술렁 배뛰워놓고 술이나 안주 가득싣고
강릉 경포대 달구경 가세
두리둥실 달구경 가세
에라 만수 에라 대신이야 ”
2) 만가
"고관대작 다 버리고 북망산(낙양에 위치)을 찾아갈 제”
낙양은 고려의 수도(고려도경:서긍)라 나오고 그 곳 북망산에는 백제인 흑치상지,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륭, 고구려 연개소문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 남생과 남산, 남생의
둘째 아들 헌성, 연개소문의 고손자 비 등이 묻힌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3) 낙양은 신라의 수도였었고, 고려의 개경이 있었던 곳이다.
57. 조선의 민요 심청가의 배경은 대륙의 양자강, 호남성 동정호주변이다.
(주) 넘버원 대한민국의 용화산글에서 <참과 거짓의 역사2(정용석저)>를 인용하며, 심청가의
배경에 나오는 “대륙의 한수(漢水), 황주, 적벽강, 진회수, 구강(九江), 소수, 상수, 원수(沅水),
동정호, 장사, 황학산, 한양, 남경, 백로주, 오산, 초수, 무산, 회계산의 지명들은 양자강 상류의
무산현에서부터 양자강하구와 절강성 앞바다까지 양자강 양쪽에 있었던 호수, 강이름, 산이름
들이라” 하였고, “따라서, 심청이는 상인들과 같이 배를 타고 (조선)대륙의 한강과 양자강 일대를
순회하고, 마지막 으로 바다로의 순탄한 항해를 기원하며 물에 뛰어 들어 임당수가 있는 소홍으로
오는 것이다.” 라 하였다.
58. 조선의 시 양사언의 태산가에는 조선의 명산 “태산”이 나온다.
(주) 양사언{1517-1584(중종12-선조17), 문인,서예가}의 태산가는 다음과 같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은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동악 태산은 산동성 태안현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청주이며, 양사헌의 고향이다.
이곳은 조선의 5대명산의 하나이다.” (인물로 본 한반도 조선사의 허구 상편, 김종윤저. 18쪽)
“티끌모아 태산.....갈수록 태산이다.또는 걱정이 태산이다.” 조선인들은 태산이 흔하고 누구나
잘알고, 흔하게 올랐던 산이다.
59. 조선 한국천주교전파 및 서학서의 출판은 한일합방이전까지 모두 중국대륙에서 행해졌다
(주) "19세기 이후 전래된 한역서학서" 출판사가 조선의 중국영토에 있으며 그 지명이 홍콩(12),
상해(39),중경(1), 하간(1), 북기(1), 북경(7), 금릉(1)로 7곳 62종이며, 출판사명만 나온 것이
呂修靈堂(1), 共樂堂(1), 眞原堂(1), 奇善堂(1)이 4곳 4종이며, 년도 만 밝혀진 출처불명이12종이다.
이렇게 모두 78종이 중국대륙에서 발간되고 조선의 천주교회도 중국에 세워졌으나 한반도 조선의
천주교는 1911년 이후에 전래되었다. 천주교 전파 및 서학서의 출판은 한일합방이전까지 모두
중국대륙에서 행해졌다.
60. 일제때 일본이 천인공노하게 조선의 역사서 20만권을 불태웠는데도, 다행히 서울대 규장에는
역사서 20여만권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런데 거의 연구를 하지 않고 그냥 잠들어 있다.
(주) 불태워진 20만권의 사서내에는 조선의 상고사를 포함한 고대사 문헌들이 대다수 포함 되어
있었다. 남아있는 고대사 문헌은 현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2권만 있다. 이와별도 외규장각이 있는데,
외규장각은 1781년 조선시대 정조 때, 창덕궁에 있던 규장각도서 가운데서도 특별히 보존할 필요가
있는 중요한 서적과 왕실의 족보등을 강화도로 이송 보관한것인데, 외규장각 도서의 수는 점차
증가하여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에는 1,042종 6,130책이 있었다. 이도서중 345권을
프랑스군대에 의하여 프랑스로 가져가게 되고, 철수 과정에서 외규장각에 불을 질러 외규장각
안에 보관되어 있던 나머지 수천 권의 중요 도서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이외규장각 도서는
1975년 프랑스국립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된다. 그 후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은 외규장각 도서 1권을 가지고 와서 도서를 반환할 수도 있다는 했는데 지금까지 반환할지는
미지수이다. 대륙에서 가져간 도서를 다시 반도로 반납할 수 있을런지...
첫댓글 제 주옥같은 글은 안 퍼 갔나 보군여...명작을 몰라보다니...ㅡ. .ㅡ
윗글만도 그 사람들에겐 벼락치는 듯한 소리일진대 홍진영님 글 읽으면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도.,...ㅋㅋㅋ
홍진영님 글도 누군가 가져 갔을 겁니다 가져 간 후 골머리 좀 아팠을 겁니다.../
거기까지 가려면 많은 시일이 걸릴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