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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2. 묵상글 ( 연중 제5주간 목요일. - 겸손한 믿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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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2. 연중 제5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2.12 04:01
- 겸손한 믿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오늘 주님께서 이교도인 시리아 페니키아 여자의 요청을
아주 모욕적으로 거절하시는데 그런 것이 아님을 압니다.
아니, 그것은 모욕도 거절도 아니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복음 어디에서도 주님께서 인종주의적으로 청을 거절하신 적이 없을뿐더러
-실제로 백인대장의 종과, 이스라엘 나환자와 함께 이방인 나환자를 고쳐주셨음-
오늘도 주님께서는 부러 티로 지역으로 들어가셨지요.
주님께서 인종주의자시라면 이교 지역인 티로에 들어가실 리 없잖습니까?
사실 우리의 믿음이란 주님께서 인종주의자가 아닐뿐더러
민족적인 차별이 전혀 없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시리아 여인은 대단한 겸손의 소유자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믿음의 소유자였고 우리보다 더 큰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강아지 취급하며 청을 거절하실 때도
주님께서 그런 분이 결코 아니시라는 것을 굳게 믿었으며,
청을 들어주시리라는 것도 굳게 믿었기에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믿지 않았다면 애초에 주님께 나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주님 보시기에 이런 믿음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없습니다.
그래서 백인대장의 종을 고쳐주실 때나 나환자들을 고쳐주실 때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런 믿음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한탄하셨으며
코라진과 벳사이다에서 했던 기적을 똑같이 티로와 시돈에서 행하셨으면
그들은 더 회개했을 것이라고 한탄하신 바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지요.
왜 이런 믿음이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없었을까요?
반대로 이교도들에게 왜 이런 믿음이 있었을까요?
오늘 여인이 주님을 부른 호칭에 힌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이렇게 백인대장도 그렇고 여인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며 믿음을 고백할 때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고향 사람들도 주님을
‘이자는’ ‘저자는’ 하고 불렀으며 기껏해야 스승이나 예언자 정도로 알고 있었지요.
그러니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치유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모욕적인 언사를 쓰신 이유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모욕적인 언사를 쓰면서 거절해도 여인은 믿음을 보이고,
그래서 치유가 일어나는데 너희 이스라엘 족속의 믿음은 어떠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고,
연인의 겸손과 믿음을 보고,
자신의 교만과 불신을 보라는 것인데
잘 믿고 있다는 우리도 여인을 보며 자신을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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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2. 연중 제5주간 목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에덴 동산에 대한 그리움!~~~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은 큰 사랑과 깊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사진 생략>
인류가 원죄로 인해 에덴을 떠난 그 이후
에덴 동산에 대한 그리움
2026년 2월 11일 수요일
루스 패터슨 박사(Rev. Dr. Ruth Patterson)는 북아일랜드에서 평화와 화해를 위해 헌신해 온 사람입니다. CAC의 저널 ONEING(하나 됨)에서 그녀는 우리의 삶의 여정을 하느님의 사랑과 받아들임을 다시 깨닫는 귀환으로 묘사합니다:
고대의 신화적 지혜는 시간의 시작, 모든 것이 순수하고 상처 입지 않았던 때의 경이로움을 우리에게 상기시킵니다. 여인과 남자는 동산을 돌보며 서로와 피조물과 조화롭게 살았습니다. 매일 저녁 서늘한 시간, 친밀한 일치의 순간에 하느님과 함께 걸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기 뜻대로 하기로 결정했을 때 무엇을 잃게 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여정이기도 하지요. 우리는 하느님에게서 와서 다시 하느님께 돌아간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다시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기 위해서는 마음의 부드러움, 곧 굳은 마음이 녹아내리는 은총이 필요합니다. 저는 사랑과 고통의 결합 외에는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길을 알지 못합니다. 삶의 경험 속에서 우리는 금이 가거나 부서지는 체험을 합니다. 길을 잃기도 하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의 신비 안에서 바로 그 갈라진 금이 우리의 구원이 되고, 우리가 한때 "알았으나 잊어버린" 것을 다시 발견하는 길이 됩니다.
우리는 에덴을 향한 그리움, 곧 본향을 향한 향수를 느낍니다. 돌아가는 길은 오직 상실과 비움, 환희 없는 길, 무지의 길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마치 밭에 숨겨진 보물이나 값진 진주와도 같습니다. 이 그리움은 결국 거짓된 에덴에서의 추방으로 이어지고, 비움의 길을 따라가는 순례가 됩니다.
이 길은 마음이 약한 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레너드 코헨의 말처럼 "완전한 제물을 잊을" 용기를 가진 이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금이 간 자리가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여정의 상처는 빛이 스며드는 틈이 됩니다. 마음의 부드러움은 창조주께서 선하시다고 선언하신 다양성을 환영합니다. 알 수 없음과 취약함, 열린 마음 속에서 그들은 자비를 베푸는 이들, 평화를 이루는 이들, 빛을 전하는 이들이 됩니다.
에덴으로 돌아가는 길, 곧 "잃어버린 낙원"과 "되찾은 낙원" 사이의 공간,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에는 큰 사랑과 깊은 고통, 새롭게 얻은 겸손과 경외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금 경이로움으로 돌아가는 길, 곧 소속과 성숙의 춤으로 이어집니다. 웃고 울며 노래하는 자리, 신발을 벗고 서기를 감히 시도하는 자리, 끊임없이 의식이 넓어지는 자리입니다. 이 길 위에서 우리는 기쁨으로 춤추며,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를 살아갑니다. 아멘.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이번 주 ‘초심(初心)’(beginner’s mind)에 대한 묵상들을 감사히 받아들입니다. 나이가 들면, 때로는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다시금 우리의 틀이 조금 빗나가 있음을 보여주시며,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름을 깨닫게 하십니다. 우리가 오래된 생각과 방식을 내려놓고 더 올바른 깨달음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계속해서 배우게 됩니다. 저는 이 학습 공동체에 감사드립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저는 계속 배우고 성장하며, 이 세상과 이웃, 그리고 하느님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고 있습니다.
—Linda O.
References
Ruth Patterson, “Pink Rabbits and Dispossession,” ONEING: Innocence 3, no. 2 (2015), 25, 26, 27. Available in print and PDF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bishek Rana,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동산 안에 있는 뱀이 우리를 멈추어 서게 합니다. 성숙한다는 것은 독과 도전을 식별하는 분별의 길임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순수에서 경험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 머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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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우리 삶의 모든 상황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믿음과 지혜를 성장시켜 주시는 재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나라와 문화권을 떠나 페니키아 땅으로 가셨습니다. 페니키아인은 글쓰기와 별을 통한 항해로 문명에 큰 기여를 했던 재능 있는 민족이었고, 직물·염료·금속·유리 제작 등으로 고대 세계에서는 상당히 널리 알려져 있던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지중해와 대서양까지 항해할 만큼 조선 기술과 항해 기술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들이 그들의 선원과 배를 얻기 위해 경쟁할 정도로, 매우 개방적이고 외향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당시 유다인들은 바다를 건너는 민족이 아니었고, 외부 세계와의 교류에도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작은 배로 해안을 따라 다니며 호수를 "바다"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을 "이방의 개"라 부르며 다른 민족들에게 문을 열지 않을 정도로 배타적이 민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이방 땅에 오셨을 때, 은둔하듯이 "어느 집에 들어가 아무도 자기 계신 것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시로-페니키아 여인이 병든 딸의 치유를 청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자녀들의 빵을 빼앗아 개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개'라는 표현이 "강아지"라는 완곡한 말로 쓰였는데, 어쩌면 유머가 담긴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이 여인의 재치 있는 대답은 분위기가 가볍고 친근했음을 보여줍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그 딸을 치유하시며 "가거라, 네 딸이 나았다." 하셨습니다. 이 치유는 직접 가지 않고 멀리서 이루어졌는데, 다른 이방인의 치유 이야기(마태 8:5-13)에서도 이런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사명을 집중하신 듯 보이지만, 이방 여인의 믿음을 통해 구원의 은총이 모든 민족에게 열려 있음을 드러내십니다. 이는 교회가 선포하는 보편적 구원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직접 아픈 이에게 가지 않으시고 멀리서 그 아픈 이를 치유하신 것은, 그분의 말씀과 권능이 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성사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방식과도 연결해 볼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항상 "가장 고귀하고 사랑스러운 모습"으로만 기대하지만, 복음은 때로 그분의 인성, 그리고 사명의 점진적 확장을 보여줍니다. 복음서가 전하듯이 그분도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이상 당신의 비전을 확장시켜 가는 삶의 과정을 겪어야 하셨다는 말입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루카 2,40).
"예수님은 지혜와 키가 자랐고 하느님과 사람들의 총애도 더하여 갔다."(루카 2,52).
덧붙여 말하면,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이야기는 교회가 선포하는 보편적 구원과 선교적 사명을 예고합니다. 또한, 이방 여인의 믿음은 우리에게 끈기 있는 기도와 겸손한 신뢰의 모범을 제시하는 것이고요.
예수님은 우리의 기대를 넘어서는 방식으로 구원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이 장면을 통해, 구원의 은총이 모든 인류에게 열려 있음을 묵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믿음의 시험과 교육적 순간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처음 거절은 실제로는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였다고 해석했던 것이지요.
그는 여인의 끈기와 겸손을 칭찬하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방인도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크리소스토모는 또한 예수님의 태도가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대화 속에서 믿음을 성장시키는 과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이 여인은 우리 신앙의 여정에 있어 좋은 모범이 됩니다.
고통과 사랑은 그녀로 하여금 주님의 사랑을 더더욱 확신하게 만들었고, 이 확신이 자기가 받는 멸시나 지연, 모욕을 개의치 않고 끈질기게 청하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그녀는 원하는 것을 얻었고, 집에 돌아가 보니 딸은 침대에 누워 있고 악령은 떠나갔습니다(마르 7,30).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람들이 청하는 것을 받지 못하는 이유를 "aut mali, aut male, aut mala"라고 설명했습니다. 곧, 청하는 이가 악하기 때문에 먼저 선해져야 하고, 혹은 잘못된 방식으로 청하기 때문에 인내·겸손·믿음·사랑으로 청해야 하며, 혹은 청하는 것이 나쁘기 때문에 그것을 받으면 영혼이나 몸, 다른 이들에게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올바르게 청해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오늘 복음에 나오는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고 아픈 딸의 치유를 위해 겸허하게 청할 줄 아는 좋은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사랑의 하느님께로 가는 신앙의 여정에 있는 우리 모두에게 올바른 방식으로(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좋은 것을(딸의 치유) 청하는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는 복음의 영웅인 것입니다.
예수님도 낯선 환경 속에서 새로운 것을 배워 가시며 지혜를 넓혀 가셨고, 또 이 이 여인도 자기 딸의 고통을 통해 자신의 사랑을 더 깊이 심화해 갈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매일 새롭게 주어지는 삶의 현장이 사랑과 지혜를 아버지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이를 성장시켜 가는 삶의 장이 될 수 있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상황을 이용하여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사랑 안으로 이끌어 들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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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2.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정결법’에 대한 시비와 논쟁이 있은 뒤에, 겐네사렛을 떠나 티로라는 이방인 지역으로 가셨습니다. 그곳에서 이방인 시리아페니키아의 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이방인 어머니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려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고 박절하게 거절하십니다. 자녀를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매달리는 어머니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으로 매정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는 단순한 거절이 아니라, ‘개’로 취급되는 모욕과 경멸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참으로 당혹스럽고 난감한 순간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이 믿음이 흔들리고 좌절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신뢰와 믿음을 깊은 곳으로 이끌어가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순간, 이 어머니는 더 간절한 마음으로 간청합니다.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박절한 냉대와 무시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간절하게 청하는 이 어머니의 ‘겸손’과 ‘끈기’와 ‘믿음’은 참으로 속이 저미어 옵니다. 이 어머니는 자신을 “개”로 취급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진정으로 자격 없음을 고백합니다. 자신이 “개” 취급을 받는 이방인이지만, 그래서 메시아가 베푸는 구원과 생명의 식탁에 참여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님의 무한한 자비의 부스러기를 입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한층 더 간절한 마음으로 자비를 간청합니다. 마치 백인대장이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라고 고백했던 것처럼, 믿음으로 겸손하게 자비를 청합니다. 그것은 마땅한 권리로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비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구원의 손길이 이방인에게로 번져갑니다.
사실, 이는 어마어마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유대인들이 자신들만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은 구원받을 수 없는 ‘개’로 여기던 선민사상을 파괴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가히 혁명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두고, 20세기를 빛낸 신학자인 칼 바르트는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드러난 계시사건”이라 말합니다. 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감히 하느님의 백성을 죄인과 의인으로 나눈 것에 대한 일침을 가한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마르 7,28)
주님!
거절당할 때, 꼬인 문제가 더 꼬여갈 때,
원망하지 않게 하소서.
무시당했다고 여겨질 때, 배신감이 들 때, 실
망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바로 그 순간,
냉대와 무시에도 겸손과 끈기와 믿음으로 오히려 간절하게 하소서.
희망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시고,
당신의 자비를 믿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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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2.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욥기 8, 7)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주로 새로 개업하는 사업을 축하하며 액자로 선물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욥기의 이 말씀은 물질적인 부를 축복하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전체 문맥은 그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우리가 흔히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말씀을 성공과 번영의 약속처럼 받아들이지만, 이 말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고난받는 욥을 바라보던 인간의 해석에서 나온 말입니다. 욥기는 착하면 반드시 복을 받고, 실패하면 벌을 받는다는 단순한 계산을 조용히 무너뜨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성공의 언어로 설명하지 않으시고, 인생을 성과표처럼 채점하지도 않으십니다. 욥의 마지막이 ‘창대해진 것’은 재산이 늘어난 데 있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붙들며 마침내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데에 있습니다. 욥기의 끝에서 남는 것은 번영의 약속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그래서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제 눈으로 당신을 뵙습니다.”(욥기 42, 5)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습니다. 다윗이 어느 날 궁궐의 대장장이에게 ‘반지’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대장장이는 반지를 아주 잘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대장장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반지를 보면서 승리했을 때는 교만하지 않고, 패배했을 때라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글을 적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대장장이는 반지는 잘 만들었지만, 그런 말을 넣을 만큼 지혜롭지는 않습니다. 그런 대장장이의 고민을 들었던 솔로몬 왕자는 대장장이에게 멋진 말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말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였습니다. 승리의 기쁨도 지나갈 것이고, 패배의 아픔도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반지에 새겨진 글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는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약했습니다. 솔로몬은 이방의 신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만으로는 솔로몬을 하느님께로 인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오 11, 25)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은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식과 지혜로 무장했지만 교만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지식과 지혜는 부족할지라도 ‘믿음’을 보여준 사람,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한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
지혜를 가졌고, 재물을 가졌고, 한 나라의 왕이었던 솔로몬은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왕은 자신이 자유롭게 날 수 있었던 ‘연줄’을 끊어버렸습니다. 지혜와 재물과 권력은 드러나는 표상일 뿐입니다. 마음과 정신의 건강을 잃어버린 솔로몬왕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이방인의 여인은 아픈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지혜와 재물과 권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이라는 ‘연줄’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까요? 오늘 성서는 이야기합니다. “행복하여라, 공정하게 사는 이들,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시고, 저를 찾아오시어 구원을 베푸소서.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리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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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2.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상당히 귀에 거슬리고 마음이 불편한 성경 구절!
악령에 들려 쌩고생하고 있는 딸의 어머니를 대하는 예수님의 태도가 평소와는 사뭇 다릅니다. 본문을 읽는 동안 예수님께서 여인에게 던지는 말씀이 상당히 귀에 거슬리고 마음이 불편해졌습니다. 마귀의 횡포에 하루하루가 지옥인 딸 때문에 잔뜩 기대를 안고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이었습니다. 절박하고 딱한 처지에 놓인 여인에게 위로와 기쁨, 희망과 구원을 선사해야 마땅한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인의 청을 강경하게 거부하시며 이방인인 여인에게 ‘강아지’라는 표현까지 쓰십니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마르 7,27) 예수님의 말씀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이면 오해의 소지가 꽤 큽니다. 그래서 이 사건에 대해서는 전후 맥락과 역사적 배경과 시대적 맥락을 잘 헤아려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전통에 뿌리를 둔 ‘성경의 구원사적 기본 원칙’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구원에도 순서와 절차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먼저 구원에 도달해야 하며, 그래야 이방인들도 하느님 구원을 희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의 구원에 모든 역량을 기울여야 할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에게는 지금 현재 이스라엘의 구원이 최우선 관건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은 이스라엘 사람 예수님의 머릿속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있었습니다. 공생활 기간동안 예수님의 행동반경을 보면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신 경로 주변에는 수많은 이방인의 도시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던 도시들을 대체로 비켜 가십니다. 대신 갈릴래야 호숫가 이스라엘의 여러 도시들, 특히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온 신경을 집중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머릿속에 이방인들의 구원은 전혀 없었을까요? 결코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의 청을 거절하신 것을 통해 이방인들이 그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 이방인들 때문에 그분께서는 지금 이스라엘에 집중하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하느님의 새 세상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새 세상은 다른 민족들에게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 때문에 이스라엘이 우선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 높은 장벽에도 불구하고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결론은 ‘해피 엔딩’입니다. 여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큰 겸손과 강한 믿음 그리고 절실함은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게 합니다. 아직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치유와 구원을 선물로 받습니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마르 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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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2. 연중 제5주간 목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제가 지금까지 동정을 지킨 이유
이제 구정이 다가옵니다. 전통적으로 한국은 구정을 기준으로 나이 한 살을 더 먹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했을 때 저는 일주일 지나면 한국 나이로 55세가 됩니다. 제목에서 언급을 했듯이 저는 지금까지 동정을 떼지 못했습니다. 쇼킹한 일일 겁니다. 설마.... 그럴리가..... 보통 이런 걸 빗대어 천연기념물이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 인간으로서는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얼마나 못났으면 아직 여자 경험이 없단 말인가 하고 말입니다. 이 이야기에 앞서 또 하나 고백을 하겠습니다. 전 우리가 아는 푸른옷을 한 번도 보지 않았습니다. 이건 더 더 믿기지 않을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딱 아마 1초 정도는 봤다고 고백하겠습니다. 우연히 아는 선배 자취방에서 자다가 비디오가 하나 있어서 무심코 어떤 비디오인지 보려고 넣었다가 화면이 순간 이상한 여자의 모습이 나와 바로 뺏습니다. 그게 어쩌면 제가 지금까지 본 푸른옷 영상입니다.
보지를 못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그저 상상으로만 알 뿐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럼 성불구냐면 그건 아닙니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성욕이 없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개신교 때 결혼을 약속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 여자에게 약속한 게 있었습니다. 나의 작은 소원이 하나 있는데 들어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믿어줄지는 모르지만 난 아직 동정을 지키고 있는데 이 동정을 첫여자에게 바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정식으로 합법적으로 결혼을 한 후에 말입니다. 그걸 지킬 수 있게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제가 동정을 지켰다는 사실은 제가 증명을 할 수는 없지만 여친은 제 말이 진실임을 믿어줬습니다. 제가 뭐 생각이 고상해서 혼전순결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생각을 가진 건 아닙니다.
저한테는 조금 아픈 가정사가 있습니다. 조금 우회해서 표현하겠습니다. 두 형이 일찍 여자를 알았습니다. 셋째 형은 지금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조카는 둘입니다. 원래 형은 배우급의 미남이었습니다. 바로 위에 형은 홍콩배우 유덕화와 많이 닮았습니다. 두 형이 다 여자로 인해서 인생이 아주 힘들었습니다. 그렇다고 난잡한 건 아니고 성실하게 살았고 책임을 졌지만 원래 셋째형은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는데 사랑하는 여자랑 결혼을 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지도 않는 여자에게 그만 넘어가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입니다. 바로 위 형은 실수로 조카가 생겼던 것입니다. 조카를 책임졌습니다. 이로 인해 형의 인생에 많은 힘든 고난이 있었습니다. 형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결심한 게 바로 난 확실하게 어떤 일이 있어도 결혼을 약속하고 또 합법적으로 결혼을 한 후에 그 여자에게 동정을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푸른옷 같은 걸 보지 않으려고 한 이유는 개신교 다닐 때 이런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런 걸 보게 되면 영혼이 병들고 파괴된다고 했습니다. 보게 되면 중독이 될 수 있고 정신도 함께 병든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된 영혼은 예수님을 온전히 영접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처음부터 완전 차단을 해야지 영혼을 깨끗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해서 목사님의 말이라 저는 그 말씀을 철떡같이 믿었던 것입니다. 호기심 같은 건 있었지만 영혼이 병들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하니 어떤 유혹이 있어도 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저는 이런 걸 보지 않았다고 해서 제 영혼이 깨끗하다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런 걸 봤다고 해서 영혼이 더럽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왕이면 가급적이면 안 보면 봤을 때보다는 조금은 아주 조금은 깨끗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 않을까 그 정도입니다. 그 한 번을 보지 안았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 유혹을 이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저는 제가 지금까지 동정을 떼지 못했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진짜 이야기하고 싶은 건 바로 이것입니다. 첫 유혹에 넘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까지 그런 것을 보고 싶은 유혹이 있다면 이길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도 그 유혹을 이겨왔는데 지금 넘어간다면 개신교 목사님의 설교를 전제를 했을 때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유혹을 이긴 게 아무런 가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도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걸 보지 않았다고 해서 결코 제 영혼이 깨끗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안 봐도 어떤 내용이라는 건 상상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생각으로도 죄를 짓는다고 하는 죄 고백도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해도 죄가 되는 건 똑같습니다. 그래도 같은 죄를 짓는 효과는 같을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게 좀 더 낫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단순히 의도적으로 상상을 해서 상상하는 게 아니라 건강한 육체를 가지고 있다면 인간으로서 가지는 욕망 그 선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생각과 마음은 실제 그런 영상을 보고서 드는 마음과는 죄의 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후자가 더 영혼에 악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이건 정신의학적인 측면에서 학문적으로 증명된 사실입니다. 사실 이 이야기를 공유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조금 있으면 사순입니다. 사순 때 잘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죄의 유혹에 넘어지지 말자고 할 때 그때 유혹, 이 유혹에 대해 조금 그 실체를 알려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 저의 이런 사정을 공개하게 된 것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모든 유혹이 대부분 그럴 겁니다.
처음에 그 유혹에 잘 넘어가지 않으면 그 다음은 경우에 따라서 좀 더 잘 이길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한 번의 유혹을 잘 이기게 되면 어느 시점에서는 그 어떤 유혹이 온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생기고 또 그 힘 때문에 이길 수 있다고 보는 것보다 그 유혹이 만약 파도로 비유한다면 파도의 물결에 따라 이렇게 저렇게 변화는 게 아니고 오히려 파도의 리듬에 맞게 같이 리듬을 탈 수 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유혹은 그저 불장난 수준밖에 안 되는 유혹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부연해서 말씀드리면 푸른옷을 보지 않았다는 것이지 극장에서 본의 아니게 성인영화를 본 적은 있습니다. 예전에 명절 때 형수님들이랑 김혜수가 나온 어떤 영화인데 조금 약간 이상한 장면이 있긴 했습니다. 이 정도의 수준은 솔직히 몇 편 봤습니다. 동정을 지켰다고 해서 자랑할 것도 아닙니다. 요즘 시대로 말하면 어리석은 바보 같은 놈일 수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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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2. 연중 제5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 7,24–30
예수님께 한 여인이 다가옵니다.
그는 유다인도, “안에 있는 사람”도 아닙니다.
경계 밖의 사람, 이방인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 어머니의 기도는 단순합니다.
“제 딸을 살려 주십시오.”
예수님의 말씀은 처음엔 차갑게 들립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여인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논리로 맞서 싸우지 않고,
자기 자리를 인정하면서도
자비의 문을 두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하지만 강아지들도
식탁 밑에서 아이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런 대목에서
기도의 깊이를 이렇게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 지연하시는 것은 거절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을 더 빛나게 하시려는 훈련이다.”
겉으로는 문이 닫힌 것 같아도,
그 지연은 마음을 꺾는 시간이 아니라
믿음이 단단해지는 시간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예수님이 결국 여인을 칭찬하시고 응답하신다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 자비는 경계를 넓힌다.
• 친절은 안쪽 사람끼리만 도는 예의가 아니라,
밖에 있는 사람을 향해 문을 여는 용기다.
• 그리고 진짜 믿음은
“내가 맞다”를 증명하는 힘이 아니라
사랑 때문에 끝까지 두드리는 힘입니다.
친절/선행 주간의 목요일,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누구를 “식탁 밖”에 두고 있는가?
그리고 주님은 오늘 내 마음의 경계를
얼마나 넓히고 싶어 하시는가?
주님,
제가 사람을 분류하는 마음을 내려놓게 하소서.
자비의 식탁을 넓히는 친절,
끝까지 사랑을 두드리는 선행을
제 안에 심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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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2. 연중 제5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8:05 추가
“자녀들의 빵을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티로 지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떤 집으로 들어가셨는데,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더러운 영이 들린 딸을 둔 어떤 부인이 곧바로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와서, 그분 발 앞에 엎드렸다.
그 부인은 이교도로서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이었는데, 자기 딸에게서 마귀를 쫓아내
주십사고 그분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그 여자가,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하고 응답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그 여자가 집에 가서 보니, 아이는 침상에 누워 있고 마귀는 나가고 없었다(마르 7,24-30).”
1) 이 이야기는 우상을 섬기면서 살던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다는 증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상 숭배자를 하느님의 자녀로
변화시켜 주셨다는 증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예수님)께 은총을 청하려면 먼저 우상 숭배를 버려야 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참 신앙’과 우상 숭배는 양립할 수도 없고,
공존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탈출 20,2-5ㄴ).”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미신을 믿는 것은, 십계명 제1계명을 위반하는 ‘큰 죄’입니다.>
2)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는 “은총을 청하려면 먼저 자녀가 되어라.”입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는,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성경에서는 우상 숭배자들을 ‘개들’이라고 표현하는데, 그 개는 ‘들개’를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로 표현하셨습니다.
그 여자가 악의적으로 하느님을 거부해서 우상 숭배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몰랐기 때문이라는 것을 감안해서 좀 더 부드러운 표현으로 바꾸신 것 같습니다.
어떻든 이 말씀은, “강아지로 살지 말고 자녀가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3)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라는 말은, 자신이 강아지라는 것을 인정하는 말이고,
이제부터는 자녀로서 살겠다고 약속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부스러기’ 라는 말은, 여자의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실제 상황에서는 예수님과 여자 사이에 많은 대화가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께서는 우상 숭배가 정말로 헛된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을 것이고, 여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충분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4) 24절의 “아무에게도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으셨으나 결국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으로 가신 것은,
복음을 선포하려고 가신 것이 아니었음을 나타냅니다.
아마도 휴식을 취하려고 가셨을 것입니다.
숨어 계실 수가 없었다는 말에서 다음 말씀이 연상됩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마태 10,26).”
‘예수님의 소문’을 여자만 들은 것은 아닐 텐데,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여자 하나뿐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8).”
5) 과학이 발달하면 할수록 미신이 점점 더 사라지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미신이 과학의 탈을 쓰고 사람들 가운데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이 인간 세상의 모습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과학 자체가 미신이 되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
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콜로 2,6-8).”
<미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으면서도
재미 삼아서(재미로) 점을 보거나 운세를 알아보는 경우, 그것도 분명히 죄입니다.
재미로 하는 것이니 괜찮다는 말은 사탄의 유혹입니다.
죄가 아닌 것처럼 속여서 죄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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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2. 연중 제5주간 목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3:30 추가
마르 7,24-30 “주님,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강아지들도 자식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는 먹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는 서로 너무나도 다른 두 사람이 보여준 놀라운 ‘반전’이 극적으로 대비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번째 반전은 솔로몬에게서 일어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잘 다스리기 위해 ‘듣는 마음’을 청했던 그에게 지혜를 주셨고, 거기에 더해 재물과 건강까지 주셨습니다. 그것들을 바탕으로 세상의 온갖 영광과 번영을 누리게 되었지요. 그러나 그 영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솔로몬이 나이가 들고 판단력이 흐려지면서 이방인 아내들의 꼬임에 빠져 하느님과 그분 뜻으로부터 멀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들을 저지르게 되었지요. 유다인이라는 출신이,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지위가 그에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지는 못한 겁니다. 한 때는 하느님의 총애와 사랑을 듬뿍 받던 지혜로운 왕이었을지라도, 교만과 탐욕에 빠져 하느님을 멀리한 결과, 구원의 길에서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두번째 반전은 시리아 페니키아 출신의 이교도 여인에게서 일어납니다. 그녀는 솔로몬처럼 하느님 말씀을 귀기울여 듣고 그분을 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방민족들의 우상을 믿는 ‘이교도’였습니다. 그러나 딸을 향한 사랑으로, 그 아이를 살리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예수님 앞에 겸허하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자기 딸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너희 이방인들의 차례가 되지 않았다’며 차갑게 밀어내시는데도, 심지어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강아지에 비유하시는데도, 분노나 원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그분께로 나아갑니다. 그녀의 믿음이 예수님의 능력에 기대는 수준에서, 그분을 자기 삶의 주님으로 모시는 수준으로 올라간 겁니다. 단시간에 이루어낸 놀라운 반전이지요. 그녀는 자신이 ‘강아지’ 취급 받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기분 나빠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강아지만큼이나 비천한 존재임을, 자격으로 따지면 주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을 받기에 천부당만부당함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당신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총의 부스러기만이라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자기 딸이 구원받기에 충분하다고 믿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녀의 믿음이 이미 구원받기에 충분할 정도로 깊고 단단해졌음을 보시고 그녀가 믿는대로 이루어 주시지요.
우리는 믿음을 너무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납득할만한 이유나 증거가 있어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믿음은 수동적인 ‘납득’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선택’입니다. 이교도 여인은 주님의 차가운 태도에 실망하고 상처받기 보다, 오히려 그분께 더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쪽을, 그분 자비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이 그녀와 딸에게 주님께서 준비하신 ‘더 좋은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우리도 그녀의 선택을 본받아야겠습니다. 세상의 부귀영화보다, 눈 앞의 이익보다, 주님과 일치되는 참된 행복을, 그렇게 그분과 함께 누리는 영원한 생명을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추구해야겠습니다. 그러면 비로소 내가 걸어야 할 구원의 길이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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