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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한국문학의 대중화를 이끈
[시인의 집] 동인과 [ 창조문예 ] 동인에 관한 소고
- 고산지(본명:고영표, 시인 및 칼럼니스트)
1] ‘시인의 집’ 동인에 관하여
필자는 군대에서 ‘시인의 집’ 동인에 가입했다. ‘시인의 집’은 1974년 1월 1일 발족하였다. 이후 조선일보사의 후원을 받아 105명의 문학지망생들이 참여한 제1회 시화전을, 1974년 8월 25일부터 31일까지 국립공보관(세종문화회관) 제4전시실에서 개최하고, 시화전 사화집 <멍석 74>를 발간하였다. 전시기간 중 많은 선배 문인들이 찾아와 격려를 하였고, 주간한국, 매일경제, 크리스챤신문, 문화방송, 기독교방송, 한국문학(10월호)에 ‘시인의 집’의 활동이 소개되었다. 아래는 당시 필자가 사화집 <멍석 74>에 발표한 작품이다
<밤 이야기>
밤 이야기는
밀려오는 그리움
사랑을
풀무질하고
깔깔 거리며 스러지는
선 계집애의 웃음이
가슴속에 쌓여
붉게 피어나는
나의 꽃 이파리
유리알처럼 투명한 욕정이
데구르 구르는
관능의 뜨락엔
밤 바람이 매끄럽고
떨리는 시간이
화사하게 장식된 어느 풍경
- 만족할 줄 모르는 침묵이
소용돌이 치는 바다를
갈매기가 난다 - 고 영표 -
광화문 우체국 사서함 765호가 주소인 시인의 집은 그해 ‘시인의 집 기별’ 1호(9월 15일)를 발행하였다. 시인의 집은 기별 1호의 발간사에서 “<시란 마음을 가꾸는 작업>임을 내걸고 생활속에서의 문학을 통하여 건전한 인생관을 적립하고자, 전국 각지로부터 200여명의 뜻있는 회원들이 모여서 모임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며, 이미 제1회 시화전을 통하여 (1) 시인의 집이 배움의 실천장임을 선양하였으며 (2) 많은 회우들을 더 얻었고 (3) 기성문인선배들과 문예잡지의 호의어린 격려와 장차 회원들의 진로를 약속하게 되었음을 회원 여려분과 감사히 생각하는 바입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창립 당시 시인의 집은 조선일보사에 근무하던 강병석(현,소설가)씨가 대표를, 크리스챤신문에 재직중이던 강정규(현,아동문학)씨가 편집을 맡았다. 사업은 김철배(시인 김하연, 작고)씨가 총무에는 체신부에 근무하던 한명로씨가 담당했다. 김철배씨와 강정규씨는 당시 대림재건학교 교장 이남하씨의 친구로 이후 대림재건학교는 <시인의 집> 모임의 장소가 되기도 했다. 1974년 12월 31일, 시인의 집은 멍석 제2집을 발간하였다.
매년 계간으로 동인지 멍석을 발간하기로 한 시인의 집은, 매월 첫 번째 일요일에 정기총회를 하여 임원개선 등 앞으로 나갈 방향을 토론하고, 매월 셋째주 목요일에는 기성작가 한 분씩을 초청연사로 맞아 시평회를 갖기로 하였다. 시인의 집에서 활동했던 많은 문학지망생들은 현제 문단의 중견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문협부회장인 이혜선 시인, 조계종 교무부장과 정토구현승가단 회장을 역임한 이청화(스님) 시인, 작고한 오진현(오남구) 시인과 박영웅 시인, 강병석 소설가와 강정규 소설가, 그리고 박재화 시인과 양준호 시인, 윤제철 시인과 김완용 시인, 장순금 시인 등 그 외 많은 분들이 등단하여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1975년 1월 정기총회를 통해 한명로씨가 회장으로 선임되었고, 총무에는 필자가, 편집에는 현재 필리핀에 거주하고 있는 박현모(교민회장 역임)씨가 선임되었다.
1975년 3월에는 시인의 집 지도위원으로 김광협 시인과 감태준 시인을 모셨다. 1975년 5월 22일에는 김광협 시인을 모시고 시평회를 가젔다. 1975년 6월 1일 발간한 멍석 3집에는 지도위원인 이문구 소설가의 글이 실렸다, 그해 강정규씨가 현대문학지에 소설로, 오진현씨가 시문학지에 시로 추천을 완료하였다. 월간지 심상 8월호(1974년)에 광복 30년 동인지 순례편에 ‘시인의 집’이 소개되었다. 1975년 7월 회원증가와 임원보선 및 기구개편을 결의하여, (1) 회장에 한명로, 그리고 5인의 상임이사(한명로, 강병석, 강정규, 김하연, 이남하)와 9명의 지역관리장을 선임하였다. (서울을 5구역으로 분할 관리하는 관리장 5명과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그리고 제주,강원,경기를 묶어 하나로 관리하는 9명의 관리장) (2) 동인 연락사무실을 성북구 돈암동 한명로씨 집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동인지 ‘멍석’을 제3집까지 발간한 후 1976년 회장 한명로씨의 개인 사정으로 인해 ‘시인의 집’ 동인은 해체되었다. 1976년 봄, 시인의 집 출신의 고영표(고산지), 김경호, 김완용, 박영웅, 박현모, 양준호, 이청화 등은 사화집 맥심부락(麥心部落) 제 1집을 발간하였다. “보리가 겨울을 나듯이 우리는 이 시대를 난다. 보리가 인동(忍冬) 속에서도 푸른 빛을 잃지 않듯이 우리는 과잉의 밤을 절제된 언어로 고발한다”는 주제의 사화집이었다. 1977년 겨울 발간한 맥심부락 2집은 박재화와 박찬중등이 참여했다. “ 하루의 해가 엄동(嚴冬)의 보리밭에 내려 앉는다. 모음을 찾아 파리한 얼굴을 드러낸 인식(認識)이 소멸(消滅)을 딛고 일어선다. 두근거리며 떠나는 순례의 길. 동구(洞口) 밖, 아직도 바람이 차다”는 주제였다
2] ‘창조문예’ 동인에 관하여
‘시인의 집’ 동인이 해체되자, 필자는 1976년 12월 24일, 김경호 시인과 함께 ‘창조문예’ 동인을 만들었다. 영등포우체국에 사서함 150호를 개설한 후, 사서함을 통하여 시도한 한국 최초의 통신동인이었다. 필자가 회장을, 김경호 시인이 주간으로 참여하였다. 창조문예는 비영리 문학단체로 창작활동 외에는 어떤 조직에도 동조하지 않는 순수 문학단체로 발족하였다. 이념과 수업과정에 편견을 두지않고 시, 소설, 수필 등을 구분하지않는 누구나 자유롭게 활동을 할 수 있는 문학공간으로 발족하였다. 당시 창조문예의 발기문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설레이는 명문장이다.
“현대의 진정한 의미는 파괴가 아닙니다
자연과 질서가 붕괴되어가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순 없습니다
또한 도처에서 구축되는 타산적 교류를 슬프게 생각하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무조건 수용(受容)은 사랑이 아닙니다
다수(多數)의 시대라 하여 만인(萬人)이 붉은 신호등을 무시해도
끝까지 푸른 신호등을 지킬 줄 아는 그 중의 하나가 우리가 되어야 겠습니다
문학예술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문학예술은 순간의 것이 아닙니다
문학예술은 절실한 것입니다
문학예술은 당신과 나의 꼭 필요한 한 마디이며
우리의 마음 속에 흐를 영혼의 강입니다
진실의 초원입니다. 양심의 기도입니다.
하여 여기 영혼의 강을 함께 유영하고 진실의 초원을 함께 뛰는
이 시대를 위한 창조의 혼(魂)들이 되는 것입니다
꾸밈없는 마음과 마음으로
공존(共存)하는 마음과 마음으로
친화(親和)하는 마음과 마음으로
모국어(母國語)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1977년 1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창조문예는 3월에 창간호 창조문예 1집을 프린트 판(가리방)으로 발간하였다. 창간호에는 김광협(金光協)시인의 격려사 ‘창조문예 창간에 부쳐’와 송기원(宋基元)시인의 시 ‘무제(無題)’가 게재되었다. 오진현(오남구), 장재훈, 박영웅, 박재화, 박찬중, 이숙희, 등 17명의 회원 시가 게재된, 창조문예 창간호는, 인천의 동암역 근처에 있던 필자의 집이 물난리로 지하가 침수되는 바람에 창조문예 2집-3집과 함께 없어져 버렸다. 귀중한 자료인데 구할 수 없어 안타깝다. 창조문예는 2집부터 1979년 1월에 발간한 9집까지는 공판인쇄로 발간하였다. 2집에는 소설가 현기영(순이 삼촌)씨의 콩트 ‘우리의 초상’이 게재되었다. 표지는 이숙희 시인이 담당하였으며 제호 - 창조문예 글자도 이숙희 시인의 작품이다. 3집부터 윤제철 시인과 양준호 시인, 권정남 시인 등이 참여하였다.
등단한 오진현(오남구) 시인이 회원 시평을 4집부터 담당하였다. 정건부 시인(후에 추리소설 덫으로 추리문학상을 받은 정건섭작가)이 창조문예에 참여한 것도 4집부터였다. 정건섭 작가는 필자의 시집 ‘상선약수마을’에서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시절- 창조문예와 고산지 시인’이라는 글을 통해 창조문예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 강산이 4번이나 변한 40여년 전, 그러니까 1970년대 후반 어떤 인연이 작용해서였을까? 나는 창조문예(創造文藝)라는 문학동호인 모임을 이끌고 있던 고영표(고산지)를 만났다. 당시 우리들은 부정기적으로 동인지를 발간했다. 동인들 중 대부분은 시인 지망생이었고, 소설가 지망생도 한 둘 섞여 있었다. 고영표를 중심으로 김경호, 박영웅(작고), 양준호, 박재화 등과 함께 윤제철, 장재훈, 이숙희, 조대환, 엄세우, 송지은 등이 눈에 뜨이는 작품을 들고 나왔다. 우리들은 매월 일요일 하루를 택해 한적한 다방에 모여서 열정적으로 서로의 작품을 평하면서 습작에 몰두하였다. 지금 생각을 해보면 그 시절이 내게는 가장 행복한 시절이였다. 김인만이라는 회원이 있었다. 그는 유일하게 소설을 쓰고 있었고, 우리에게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몇년도 인지는 분명하지않지만 중앙일보 신춘문예 최종예심까지 오른 화려한(?) 경력때문이었다. 원래 소설가가 꿈이었던 나는 시창작(詩創作)에 몰두하고 있었다. 시(詩) 쓰는 일 만큼 문장훈련에 도움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1979년 창조문예 제10집 특대호를 발간한 이후, 단단히 결집하던 창조문예 동인들이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비비고 입맞추어도 끊남이 없는 그리움이여“라는 시집으로 고영표(고산지)는 등단하였고, 박재화는 누구나 꿈에 그리는 현대문학 추천을 받아 시인이 되었다. 박영웅, 김경호는 김광협(작고)시인이 이끌고 있던 ’詩文章‘으로 등단했다. 나 또한 성기조, 박화목씨가 주축이 된 ’詩와 詩論‘을 통해 등단했다. 이 후 창조문예 동인은 해체되었지만 지금까지 40여년 동안 우리들의 우정은 이어젔다, 지금도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창조문예‘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함께 창조문예 동인으로 참여할 수 있어서 나는 행복했다고. 나에게 창조문예는 식어가는 문학에의 열정을 달궈주는 용광로였다, 1983년 작가로 데뷔하여 글만 써도 충분히 먹고 살 만큼 내 인생이 바뀐 것도 창조문예 덕분이다. 나는 틈틈이 고산지(고영표)시인에게 전화를 건다. ”내 인생에 창조문예 시절만큼 행복한 때는 없었다“ 라는 푸념과 함께. 소설가가 되어 평생을 신문연재, 방송, 강연으로 바삐, 바삐 살아왔지만 창조문예 시절 만큼 열정적이고 순수했던 시절은 없었다. 지금은 어디들 흐터저 사는지는 모르지만 그 시절 함께했던 동인들과 소주잔 한잔 기울이고 싶다. - ”
작고한 박영웅 시인과 필자는 김지하 시인과 관련되어 두 번에 걸처 보안사와 안기부의 내사를 받았다. 박영웅 시인은 원주 출신으로 지학순 주교 밑에서 신앙생활은 한 카톨릭 신자였다. 당시 김지하 시인도 장모인 박경리 소설가와 함께 원주에 거주하고 있었다. 김지하 시인의 담시(譚詩) ‘오적’이 사상계 1970년 5월호에 실렸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의 부정부패를 질타한 시였다. 이 작품이 문제가 되어 사상계는, 발행인 부완혁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고, 9월 29일 당국으로부터 폐간 처분을 받아 통권 205호로 종간됐다. 이후 사상계에 실린 시 “오적(五賊)”은 복사되어 문인들 사이에 은밀히 유통되어 읽히고 있었다. 박영웅 시인이 전해준 오적시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필자는 보안사에 구속되어 가택수사와 함께 내사를 받았다. 박영웅 시인에게 오적시 복사본을 전해준 사람이 군에 입대해 보안사의 정보망에 걸린 것이 화근이었다. 긴급조치 9호 위반-불온문서 유포죄라는 죄목이었다. 첫 번째는 박영웅 시인으로 인해 필자가 함께 내사를 받은 사건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는 필자로 인해 박영웅 시인이 함께 내사를 받았다. 오적시로 구속된 김지하 시인이 사형선고를 받은 상황에서, 제3세계의 노벨상이라 부르는,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에서 주는 로터스(LOTUS)상 수상자로, 1975년 선정되었다. 지학순 주교가 동경에 가 대리수상을 하였지만, 국내에서는 보도관제가 되어 모든 언론이 입을 닫고 있던 시대였다. 창조문예 모임 때 이 사실을 회원들에게 이야기한 게 화근이 되었다. 마산에 거주하며 언론에 종사하고 있던 김종석 회원이 술자리에서 이 사실을 발설하여 안기부가 내사에 착수했다. 박영웅 시인과 필자는 수갑을 찬 채 안기부 남산분실 화장실에서 만났다. 김지하 시인이 로터스상 수상자로 선정되자, 그의 구명운동의 세계적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지하 시인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게 되었다.
당시 필자는 경방에 근무하면서 밤에는 대림재건학교에서 국어와 국사를 가르첬다. 동인들은 필자가 야학을 끝내는 시간에 대림재건학교 근처에서 모여서 술 한잔 기울리며 문학에 대한 열정을 토로하곤 하였다. 취직이 되자 처음 받은 명함 1갑을 취기가 거나해지자 대림동에 있는 태평양화학 공장 앞에서 가서, 교대근무를 하는 종업원에게 모두 나누어 준 양준호 시인이 생각 난다. 격변의 시대를 살던 당시, 필자는 충북 음성에 범한전선을 설립한 종형으로부텨 회사를 옮기라는 부탁을 받았다. 긴급조치 위반으로 경방에서도 면이 서지않았던 시기였다. 단지 우려되는 것은 대림재건학교 야학이었다. 심사숙고 끝에 이직을 결정했다. 이직과 함께 필자는 야학도 그만두게 되었다. 이직 후 3개월 만에 대림재건학교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에 연루가 되어 교장과 교사 모두가 구속되었다. 교사 중 한명이 대모격문을 재건학교에서 가리방으로 긁은 것이 수사망에 포착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 교장은 1년6개월의 실형을, 남자 교사는 6개월, 여자 교사는 3개월의 실형을 살았다. 필자가 재건학교를 그만 두지 않았다면, 긴급조치 9호 위반의 경력때문에 가중처벌의 중형을 받을 뻔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숙희 시인과 지강수씨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창조문예 동인의 최초 커풀이 탄생한 사건이기도 했다.
1979년 7월 발간한 창조문예 제10집 표지는 전건섭 작가의 작품이다. 10집에는 “동인활동의 재조명”제목의 좌담이 실렸다. ‘80년대 전야에 살펴본 동인 활동의 알파와 오메가, 그 활성화를 위한 모색’이란 주제로 열린 좌담회였다. 김창완 시인(反詩동인), 현기영 소설가(作壇 9인동인), 박찬중(맥심부락 동인), 정건부(창조문예 동인), 그리고 필자가 사회를, 김인만 소설가가 기록을 담당한 좌담회는 필자가 다니던 범한전선 회의실에서 열렸다. 필자가 회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창조문예는 12집(1981년 5월)까지 발간하였다. 1980년 5.18은 필자의 삶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범한전선의 경영상황이 악화되자 필자는 독립을 결심하고 낙향했다. 당시 군대에서 갓 제대한 문창갑 시인을 데리고 광주로 내려오면서(노자배터리 전남 총판), 창조문예는 윤제철 시인과 김인만 소설가가 담당하여 15집까지 발간한 후, 동인이 해체되었다. 이후 노자배터리의 부도로 문창갑 시인과도 헤어젔다. 필자를 믿고 따랐던 문창갑 시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다시 한번 전하고 싶다. 돌이켜보면 ‘시인의 집’과 ‘맥심부락“ 그리고 ‘창조문예’는 필자에게는 청춘의 설레임이었고 기쁨이었다. 그리고 끝남이 없는 그리움이었다
"…지조 없는 예술가들이여, 너의 연기(演技)를 불사르라. 너의 연기는 독부(毒婦)의 미소 섞인 술잔이다. 부정에 반항할 줄 모르는 작가들이여, 너의 붓을 꺾어라. 너희들에게 더 바랄 것이 없노라. 양의 가죽을 쓴 이리떼 같은 교육자들이여, 토필을 던지고 관헌의 제복으로 갈아입거나 정당인(政黨人)의 탈을 쓰고 나서라. 너희들에게는 일제시대의 노예근성이 뿌리 깊이 서리어 있느니라. 지식을 팔아 영달을 꿈꾸는 학자들이여, 진리의 곡성(哭聲)은 너희들에게 반역자란 낙인을 찍으리라…"
'사상계' 창간 7주년 기념호(1960년 4월호)에 실린 장준하 선생의 권두언 중 일부이다. 시인의집과 맥심부락, 창조문예를 회상하다가 뇌성벽력처럼 들려오는 선생의 사자후에, 필자는 다시 한번 옷깃을 저미면서 이 글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