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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척들에게 문안하라
롬 16:7-11
7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그들은 사도들에게 존중히 여겨지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8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9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10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11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롬 16:7-11 / 나의 친척이며 나와 함께 옥에 갇힌 일도 있는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도 문안해 주십시오. 그들은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로 사도들에게도 존경받고 있습니다. 8)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의 자녀 암블리아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9) 그리고 나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해 주십시오. 10) 주님을 위해 숱한 고생을 겪은 아벨레와 아리스도불로의 가족들에게도 문안해 주십시오. 11) 나의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해 주시고 나깃수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믿음의 형제들에게도 문안해 주십시오.
바울이 문안하는 친척은 피를 나눈 혈족이라는 뜻이란, 같은 민족을 뜻하기도 합니다.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7) 이들은 유대인 부부 사역자로서 바울이 회심하기 전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신앙의 선배요, 바울과 함께 감옥에 갇히기까지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일반 사도들에게도 존중히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당시 예루살렘에서 베드로를 비롯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했던 많은 사역들이 많이 알려져 있는 일꾼이었기 때문입니다.
암블리아, 우르바노, 스다구, 아벨레,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8-10) 바울이 주 안에서 사랑하는 암블리아는 당시 황제 가문의 노예들이 가진 흔한 이름 중의 하나로서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보기도 합니다(빌 4:22). 바울의 동역자 우르바노와 바울이 사랑하는 스다구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바울과 함께 복음 전도를 위하여 함께 동역하던 각별한 사이로 보입니다. 바울이 인정한 아벨레는 자신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신앙을 지켰으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성도였습니다. 바울이 아리스도불로가 아닌 그의 권속에게 문안하라고 한 것은 아리스도불로가 아닌, 그의 집안에 있는 노예들이 성도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아리스도불로가 헤롯 대왕(주전 73-74년경)의 손자이자 헤롯 아그립바(주전 10년-주후 44년)의 형제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닙니다.
헤로디온, 나깃수 가족 중 주 안에 있는 자에게 문안(11) 바울의 친척인 헤로디온과 나깃수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의 가족 중에서도 주 안에 있는 자가 있었습니다. 나깃수의 가족은 나깃수의 집안에 있는 노예들을 가리킵니다. 어떤 학자들은 나깃수가 글라우디오 황제(주후 41-54년)를 섬겼고, 네로가 황제가 되었을 때(주후 54년) 네로의 어머니 아그리미나에 의해 자결하도록 강요받았던 부유한 자유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바울은 “주 안에서”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것은 당시 교회 안에는 주인과 노예가 상존하였으나, 주 안에서는 어떠한 신분의 귀천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한 것입니다(고전 7:21-23; 엡 6:5-9; 골 3:22-4:1; 딤전 6:1-2).
적용: 주 안에서는 신분의 귀천이 없습니다. 주 안에 있는 당신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교회는 많은 사람들의 헌신과 섬김을 통해 복음의 아름다운 역사들이 이어지고 세계 곳곳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 그렇게 협력해주는 이들을 잊지 말고 감사해야 합니다. 나와 함께 고난을 당했던 이들, 보호자가 되어주었던 이들, 교회에 수고를 아끼지 않는 이들에 대한 감사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설 교 >
내 마음에 각인된 이름
로마서 16:6-16 / 오정호 목사
인생이란 무엇인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하여 인생은 관계라고 저는 정의하고 싶습니다. 수직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 수평적으로는 사람과의 관계입니다. 관계에는 아픈 관계와 좋은 관계가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생애 가운데서도 그의 삶에 아픔을 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디모데후서는 디모데를 향한 사랑담긴 편지지만 또 유언적인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이 편지에서 바울은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의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딤후 4:14-15절) 알렉산더라는 사람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방해하고 복음을 대적한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에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가 바울의 마음에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또 있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딤후 4:10) 데마라고 하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해서 교회를 버리고 사도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버렸습니다. 사도바울의 마음에 잊혀 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로마서 16장에 약 서른일곱 명의 개인의 이름이 거론이 됩니다. 이들은 평신도들입니다. 사도바울과 동역했고 바울에게 기쁨을 준 사람들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대사회적 영향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목사들 몇 명만 잘해서 안 됩니다. 교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여러분, 왕 같은 제사장으로 부름 받은 평신도들이 로마서 16장에 소개된 사람들처럼 올바로 소명을 발견하고 깨어나게 될 때 한국교회에 미래가 있습니다.
많은 심리학자들이 인간을 파괴하는 요소들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그 중 세 가지.
첫째, 두려움입니다.
두려움이 있으면 그 사람이 주신 모든 것이 동결됩니다. 그에게 주신 지혜, 은사, 재능, 탤런트들이 묶여 버리고 맙니다.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자녀가 부모를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되지만, 부모 때문에 늘 두려움에 눌려 있게 되면 나중에 사회에 부적응자가 됩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두렵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님께서 두려움의 사슬로부터, 그 압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가운데 우리를 묶고 있는 압박으로부터 자유를 얻기를 바랍니다.
둘째, 분노입니다.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성을 잃어버립니다. 분노가 사랑을 지배하면, 나타나는 것은 파괴적인 것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분노는 나도 죽이고, 상대방도 죽이는 것입니다. “나는 원래 성격이 그래” 라고 하는 사람은 성격까지도 십자가 밑에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되면 성격적인 면도 주님이 씻으시고 새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분노는 열정과 통합니다. 분노가 많은 사람이 변화 받으면 열정 있는 주의 사람으로 변화 받습니다. 분노와 열정은 같이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타나는 결과는 다릅니다. 열정은 생산적입니다. 분노는 서로 죽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혹시 분노가 자리 잡은 것이 있으면, 주의 보혈의 은혜로 분노가 변하여 사랑으로 바뀌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셋째, 유혹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유혹과 항상 같이 갑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대적 사탄 마귀는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대하여 유혹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한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은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유혹을 뛰어 넘어야 됩니다. 치우치는 것에서 정도를 걷기 위해서 힘써야 되는 것이지, 우연히 잘되는 교회와 부흥하는 교회는 없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는 유혹들을 분별해내는 안목을 주시고, 그 영을 떨쳐 버리는 영력도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영력이 있어야 우리에게 오는 두려움과 분노와 유혹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이런 두려움과 분노와 유혹에 굴복하면서 살면 사람은 자존감을 상실해서 “나는 가치가 없는 존재인가 보다,” 자포자기합니다. 자포자기한 사람에게는 어떤 약도 들지 않습니다. 희망의 불이 꺼진 다음에 무엇을 가지고, 마음속에 희망의 불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도 마음의 분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유혹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에 눌리지 않았고, 분노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유혹에 굴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야 되는 것인가를 늘 마음에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6장에 이런 사람들, 즉 생산적이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의 명단을 열거 했습니다. 공통분모가 있습니다.
첫째, 사랑받은 사람들입니다.
관계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인데,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사랑이 있어야 다른 것이 빛이 납니다. 다른 것 다 갖추었는데 사랑이 빠져버리면, 불완전합니다. 사랑이 있을 때 모든 것은 완성이 됩니다. 우리 결혼 생활, 부부간의 관계, 부모와 자녀와의 관계, 스승과 제자와의 관계를 연결시켜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8절)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9절) 사랑을 받으면 영혼이 미소 짓고, 영혼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죄인인 영혼이 찌들어 있거나 눌려 있을 때 어떻게 다시 생기를 가질 수 있는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쬐는 만큼 그 영혼이 주님 앞에서 꽃처럼 활짝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아서 이 사랑을 유통하는 교회로 쓰임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새로남교회하면 사랑이 충만한 교회,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은 교회라고 이웃에 소문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둘째,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인격과 사명을 수행에 인정을 받았습니다. “너희를 위해서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6절) 마리아라는 여성은 주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땀 흘리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물질을 투자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인격이 검증되었고, 사명을 수행할 때 인정받았습니다. 우리교회 모든 성도들과 한국교회 모든 성도들이 인격적인 면에서 인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는 일들, 사명을 탁월하게 수행함으로 모두가 인정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셋째,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수고한 사람입니다.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아드로니고,”(7절) 함께 같이 있다는 것은 투옥 되었다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위하여! 온 몸을 던져 수고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10절) 인정함을 받았다는 것은 수고 많이 했다는 것입니다. 시험을 받고 검증되고, 그 인격이 아름답게 세워졌다 그런 의미입니다. 여기 보니까 교회를 위해서 공동체를 위해서 땀을 흘렸습니다. 적당한 선에 있지 않았습니다. 헌신에 열매가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손에 손을 잡고 함께 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여러분에게 맡겨진 사명과 직분을 사랑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인정받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과 주의 교회를 위하여 구체적으로 헌신한 흔적이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사람. 그것을 가리켜 영생의 관계라고 합니다. 10-12절에도 계속해서 “주안에서”라는 말이 계속 나옵니다. 동일한 영생의 선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가슴에 남습니까? 주안에서! 생명을 공유한 사람, 영생을 선물로 받은 사람이 영원히 남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의 기억에 남아 로마서 16장에 기록된 사람들은 이천년 동안 계속해서 알려지고 있습니다. 무명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주님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름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혹시 사람들은 못 알아주고, 혹시 나를 잊는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이런 확신을 가지고 우리의 미래를 뜨겁게 사랑하는 믿음의 용사들이 다 되십시다.
○○○교회는 신뢰와 사랑의 공동체로 든든히 서가기를 소원합시다.
나 자신과 우리 가정을 통하여 공동체의 건강성에 힘 있게 기여합시다.
대 사회적인 신뢰와 아름다운 평판을 통하여 생명의 복음을 확산 시킵시다.
주 안에서 서로 문안하라
롬16:1~23 / 양은익 목사
로마서 16장을 읽었는데 좀 지루하셨지요! 이름이 많이 나오는 장은 설교하지 않는 게 설교자들에게는 불문율인데 신약에서 족보 빼고 가장 이름이 많이 나온 장을 다 읽었습니다.
16장에 보면 26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름을 나열한 이유가 분명합니다. 그들에게 문안하라고 하는 권면 내지는 부탁을 하기 위해서 26명의 이름을 한사람씩 호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설명드리겠지만 ‘문안하라’고 하는 바울의 마음은 상당히 절박하고, 간절합니다.
바울이 지금 문안하라 하는데 누가 누구에게 문안하라는 것입니까? 3절에 보면 ‘너희’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너희’가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바울이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로마 교회 성도들, 그 ‘너희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문안하라’는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도 문안하고, 마리아에게도 문안하고, 암블리아에게도 문안하고, 우르바노와 스다구에도 문안하고. 문제는 서로 문안해야 할 로마의 성도들이 문안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반목하고 있고, 마음이 멀어져 있는 상황입니다. 편이 갈라져 있습니다. 한쪽은 보수파, 다른 한쪽은 진보파. 보수파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고, 진보파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두 진영이 심각하게 갈등하고 있는 중입니다. 바울이 편지를 쓸 때의 로마 교회 주도권은 이방파가 잡고 있었습니다.
49년까지는 유대파 그리스도인들이 로마교회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지만, 49년에 클라우디스 황제가 유대인들을 로마에서 추방시킵니다. 그 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뿔뿔히 흩어지게 됩니다. 그러다가 54년 네로 황제가 추방령을 풀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로 귀환하게 되는데 그 사이에 추방되지 않았던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교회의 주도 세력이 되있었습니다.
강자가 된 이방파 그리스도인들은 약자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의 방식에 대해서 폄하하고, 무시하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약자가 된 유대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정결법과 안식일 법에 대해서 무시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하면서 갈등 가운데 있게 된 것입니다.
26명의 이름이 나오는데, 이 사람들을 분석해 보면 로마 교회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26명 중에서 유대인이 5명인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전체 로마 교회 명단은 아니지만 전체로 따져도 15%~20%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추방 당한 사이에 교회의 주도권이 이방 기독교인들에게로 넘어가 있는 게 확연히 나타납니다.
사람 있는 곳에 갈등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교회 안에는 숱한 갈등이 있습니다. 보수파와 진보파의 갈등이 있고, 오래된 교인과 새로 들어온 교인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이런 저런 갈등이 있는게 교회 현장인데 이 갈등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금 바울은 그토록 가고 싶었던 로마 교회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면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온 말이 바로 ‘주 안에서 서로 문안하라’ 입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서 그들을 만나, 스페인 선교의 후원자가 되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그토록 중요한 로마 교회가 갈등 가운데 있는 것을 보면서 방문하기 전에 그들이 하나되어 하나님의 한 백성으로 살아 가기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보면 로마서에서 가장 중요한 장은 16장입니다. 갈등하고 있는 그들에게 ‘주 안에서 서로 문안하라’는 이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서 1장에서부터 15장까지 서술했다고 봐도 됩니다.
사람은 웬만하면 화해하지 않습니다. 숱한 사람들을 만나본 바울은 문안을 말하기 전에 문안할 수 밖에 없는 이유를 하나하나 짚어주게 되었던 것입니다.
너희들이 누구인지 아느냐? 너희들은 행위로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라 부활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된 사람들이다. 너희들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성령의 은혜가 있으니 갈등과 혐오로 상처 가운데 살아가는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 (롬12:1~2)
형제를 사랑하고 서로 우해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하라.(12:10). 할수 있거든 모든 사람들과 서로 화목하라(12:18).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2:21) 믿음이 연약한 자가 있으면 받아주고, 비판하지 말라(14:1)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자의 약점을 담당하자(1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심과 같이 너희도 서로 받으라(15:7)
16장과 로마서를 연결해 보면 그대로 맞아 떨어집니다. 바울은 갈등하고 있는 당사자들 사이에서 중재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문안은 마음에도 없는 겉치레 문안이 아닙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고, 복음 안에 있으니 그만 화해하라는 것입니다. 서로 welcom. 환영하라. 평화하라. 사랑하라. 연합하라. 긍휼을 베풀라.
‘문안’은 깊이 들어가면 사랑이고, 격려고, 인정함이고, 관심입니다. 이러한 문안이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살아있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바울은 ‘문안에서’ 부터 그들의 갈라지고, 갈등하는 마음, 주도권에 매여 있는 세상적인 마음이 없어지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문안은 관계를 시작하게 만들고, 유지하게 하고, 풍성하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문안의 마음과 정신이 살아있어야 합니다. 문안이 어렵고, 힘들수록 살아있어야 합니다. 문안이 없는 삶은 위험한 삶이고, 위험한 사회입니다. 환영하는 마음이 있을 때 사회와 가정과 교회는 온전히 설 수 있게 됩니다.
■ 한 문장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나는 내 정원에 증오를 키우지 않았습니다’. 지난 10월 20일에 85세로 정계를 은퇴한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이 남긴 말입니다. 증오가 있을만한 사람인데 증오를 키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분은 게릴라 출신으로 우루과이의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민주화 투쟁을 하다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52% 지지율로 당선된 사람이지만 퇴임할 때 지지율은 65%였다고 합니다. 궁금하신 분은 한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 분이 어떻게 대통령직을 수행했는지. 13년간을 감옥에서 고문당했지만 대통령이 된 후에도 자신을 고문한 군부에 보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노숙인들에게 대통령 궁을 내주고, 자신은 농장 주택에서 살면서 가장 가난하고 친근한 대통령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마음 한 구석에 증오를 키웠다면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문안을 하는 사람이 큰 사람이고, 문안을 거부하는 사람이 작은 사람입니다. 문안 속에 함께 하려고 하는 마음이 살아나게 됩니다. 이 마음을 그리스도인들이 바울처럼 살려내야 하고, 우리 자신이 살아내야 합니다.
문안에도 때가 있습니다. 문안하고 싶어도 하지 못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힘들어도 문안하고, 감사하고, 환대하는 마음으로 살게 되면 그게 밑천이 되서 내 마음의 정원에 꽃 피듯, 사랑이 피고, 감사가 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16절입니다.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 귀하고 복된 마음이 여러분들 가운데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겠습니다. 세상은 뭐라해도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바꿔야 하는 사람들인데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사랑이고, 환영이며 포용입니다.
이정록 시인이 한 마디 남긴 게 있습니다. ‘교회나 절간에 골백번 가는 것보다 동네 어르신께 문안 여쭙고 어미 한번 더 보는게 나은 거다’(이정록, 가슴 우물) 문안의 마음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으로 온전히 설 수 없다는 것, 기억하십시다.
요즘, 여러분들의 문안은 어느 정도이십니까?
문안하고, 문안받고, 또 문안하고 문안받으며 코로나 시대를 힘차게 이겨나갈 수 있기를 바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