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한 마리
생각의
끝을 달려도
풀릴 길 없는 매듭
불화살 맞은 짐승이 마지막으로 찢는 하늘
두 무릎
꿇고 앉은 밤은
쉬이 새지 않는다
그 누군가가
말이나 언어로 놓일 수 없는 그 무엇을
말 못할 사랑이라고 뼈에 아로새기는 밤
대못은
가슴 깊숙히
쿵 쿵 쿵 박힌다
헌사
물소리를 꺾어 그대에게 바치고 싶다
수천수만 줄기의 희디흰 나의 뼈대
저문 날
물소리를 꺾어
그대에게 바치고 싶다
꺾이고 꺾이어서 마디마디 다 꺾이어서
꺾이고 꺾이어서 마침내 사랑을 이룬
저문 날
모든 뼈대는
물소리를 내고 있다
매혹
내겐 미명이로다 어질머리 어질머리로다 수천수만 지느러
미 비단잉어 떼의 지느러미 내게는 어질머리로다 다만 미명
이로다
혼미로다 그대 내 안에 노니는 금빛잉어 불가해의 혼미
로다 내 안에 노니는 금빛잉어 못물도 천년의 못물 내 안에
노니는 금빛잉어
애월 바다
사랑을 아는 바다에 노을이 지고 있다
애월, 하고 부르면 명치 끝이 저린 저녁
노을은 하고 싶은 말들 다 풀어놓고 있다
누군가에게 문득 긴 편지를 쓰고 싶다
벼랑과 먼 파도와 수평선이 이끌고 온
그 말을 다 받아 담은 편지를 전하고 싶다
애월은 달빛 가장자리, 사랑을 하는 바다
무장 서럽도록 뼈저린 이가 찾아와서
물결을 매만지는 일만 거듭하게 하고 있다
새와 수면
강물 위로 새 한 마리 유유히 떠오르자
그 아래쪽 허공이 돌연 팽팽해져서
물결이 참지 못하고 일제히 퍼덕거린다
물 속에 숨어 있던 수천의 새떼들이
젖은 날개죽지 툭툭 털며 솟구쳐서
한순간 허공을 찢는다, 오오 저 파열음!
비가, 다르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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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부답
묵묵부답
볕살 속에
별빛 속에
묵묵부답의 한낮
묵묵부답의 한밤
꽃 피고
새 우짖는 것에
답하지를
못합니다
고신우체국
명덕역에 내리자
붉게
돋보이는 집
고신우체국에 앉아 네게 편지를 쓴다
매화꽃
이리 붉도록
종무소식인가 하고
시스루
곧장 내비칠 듯 내비치지 않는 것이
묘한 느낌으로 벼랑 끝을 달리나니,
그 깊은 골짜기는 아직 너의 것이 아니다
내비칠 듯 내비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찾아들길 바이없는 숲으로 우거져서
미칠 듯 미치게 하는 실루엣과 같은 것
말의 묘미를 좇아 일생을 달려온 이여
숨 막히는 길 앞에 곧장 기막힐지라도
끝까지 파고들지니, 꽃문 열어젖히기까지
친구야, 눈빛만 봐도
봄이면 꽃 피는 소리 두 귀는 듣는단다
겨울날 눈 내리는 소리 두 귀는 듣는단다
친구야, 눈빛만 봐도
네 마음의 소리 들린단다
- 이정환 시조전집 『서서 천년을 흐를지라도』 만인사,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