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색깔
김 난 석
철따라 변하는 색조에서 기다림의 즐거움을 느끼고
삶의 신선함을 호흡하게 된다.
파릇파릇한 봄이 나른하다 싶으면 여름이요
짙푸른 녹음이 무겁다 싶으면 황홀한 가을을 기다리는데
분홍단풍이 농염하다 싶으면 은백색 겨울이 찾아오니 말이다.
이런 순환은 계속되는 것이어서 지루할 겨를이 없고
아쉬워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우리네 감성이 풍부해지는지도 모른다.
일 년 내내 은백색의 설원(雪原)에서 뒹군다고 생각해보라.
일 년 내내 작열하는 태양빛만 이고 살아간다고 상상해보라.
기다림의 미학이 없을 뿐더러 너무 건조하지 아니한가.
그러나 계절의 변화만큼 감정의 굴곡도 심한 게
너나 없는 흠이기도 할게다.
사람들을 만나고 나서 돌아서면 여러 여운이 남게 마련이다.
됨됨이라고 일컫는 교양이나 지혜의 정도,
조화에서 우러나오는 호감의 정도,
또는 겉으로 나타나는 따뜻함이나 차가움의 정도,
색조 등이 그것일 게다.
얼마 전 처음 만난 글벗으로부터
나는 카키색으로 여운 지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카키(khaki)색은 누른빛에 담다색이 나는 것으로
인도어로 흙의 빛깔을 말하며, 군복용으로 많이 쓰인다.
내가 그런 것이었던가?
가만히 내 주변을 돌아본다.
어깨에 걸고 다니는 숄더백은 누런 가죽 소재이며
그 안엔 누런 표지의 낡은 잠언집이 들어있다.
약지엔 은반지가 끼어있고, 그 알은 누런 호박이다.
웃옷은 가끔 바꿔 입지만 바지는 늘 누런 빛깔이요
혁대도 누런 가죽이요 구두도 누런 소가죽이다.
책상 위엔 누런 대나무로 된 필통이 놓여있고
그 옆으론 누런 황금빛의 백제대향로(복제품)가 놓여있다.
이것들은 모두 내가 의식적으로 선택한 것들인데
이젠 멋으로만 지니고 있는 만년필을 제외하곤
모두 카키색 계열이다.
물론 나의 피부색도 황색이니
아, 그래서 난 카키색의 여운이었을까?
학업을 마치고 사회에 첫 발을 들여놓던 때
제일먼저 검정색 테트론 소재의 양복을 맞춰 입고 다녔다.
그 당시로선 넥타이를 매었다하면 모두 그걸 입고 다녔기에
자연스러운 걸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 후론 양복을 맞췄다 하면 검정색이거나
아니면 감색(흔히 일본말로 곤색) 일변도였으니
그것이 법도요 권위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십년 가까이 그런 색조 안에서 생활하다보니
생각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하나로 응축되었을 게다.
바로 기계적 합리성의 건조함이었을 터요
그러다보니 내 삶을 지배하는 건 감성이 아니라
오로지 이성이라 믿었을 뿐일 게다.
그렇게 단조한 색조에서 단조한 생활을 했으니
인생을 반쪽으로만 산 게 아니던가.
그동안의 사회생활을 접고 자연인으로 돌아가기로 한 건
즈문 해의 첫 가을인 9월 28일 이었다.
그때 제도권의 사회인에서 자연인으로 돌아간 것이니
구 이팔 서울 수복이 아니라
9, 28 자연 수복이란 말을 남기고 돌아서면서
검정색 또는 감색의 양복은 모두 장 깊숙이 쳐 넣었다.
그리곤 카키색의 옷들로 몸치장을 바꿨으니
색의 변화를 통해 생각과 생활방식을 바꿔보자는 심사였다.
그렇다면 내가 카키색으로 변신한 건 자연스러운 의지였을까?
나의 부친은 공과(工科)를 공부하셨기에
일제강점기에 조병창(造兵廠)에 근무하셨다 한다.
이 부분 친일행각으로 매도하면 할 말이 없다.
그 흔적으로 장 속엔 누런 모직의 일본국 제복이 들어있었다.
그걸 소재로 어머니는 가끔 나의 옷을 마름해주시기도 했다.
광복을 맞아 미군이 진주하자 나의 부친은
다시 미군의 조병창에 근무하시게 되었다.
이 부분도 반미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매도당해도 할 말 없다.
그 흔적으로 장 속엔 항상 미군의 카키복과
누런 모직의 군용 담요가 들어있었다.
그걸 소재로 어머니는 역시 나의 옷을 마름해주시곤 했었다.
그래서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란 한 나의 유소년시절엔
남들로부터 미국놈이란 농도 많이 들으며 자랐다.
왜냐하면 남들은 모두 무명지의 검은 바지저고리를 입었는데
나만 유달리 카키색 계열의 옷을 입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는 카키색 일변도로 감싸여 살았던 것이다.
인생을 흔히 무지개 빛 꿈을 실현하면서 살아가라 한다.
보라, 남, 파랑, 초록, 노랑, 주홍, 빨강.
그러나 꿈이 어디 이것뿐이랴.
삶에는 다양한 가치가 있으며 색깔이 있다.
그것이 어디 검정이나 카키색의 가치나 색깔뿐이랴.
삶의 대부분을 명암만이 있을 뿐인 무채색에 머물다가
이젠 겨우 유채색 중 카키색 계열에 머물고 있는데
그것도 아픈 과거의 시대적 흔적으로 여운지어 지는 색조이니
나는 온전한 삶을 살아왔다 할 수는 없겠다.
한 가지만 고집한다면 지조라든가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선
바람직하기도 할게다.
하지만 새로움이라든가 기다림의 맛이 없으며
다양한 삶을 수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다양한 색을 써보리란 생각을 해보게 되는데,
그러면 나의 인생도 조금은 폭넓게 변신되지 않을까 해서다.
하지만 병상에서 일어난 아내와 함께
장성의 축령산 숲속에 머물다 돌아오려니 첫눈이 내려앉아
이젠 도리 없이 하얀색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심신 치유의 숲으로 알려진 해발 육백여 미터의 축령산은
편백나무 숲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광복 당시의 산야가 모두 그렇지만 축령산도 민둥산이었다 한다.
여기에 춘원 임종국 선생이 20여 년 간(1956-1976) 물지게로
손수 물을 지어 나르며 240 헥타에 편백나무, 삼나무 등
120만 그루를 심어 우리나라 최초의 조림 성공지로 만들었다 한다.
하지만 정작 그는 수입을 생각지 않은 평생의 조림사업으로
가산 탕진에 더해 빚까지 짊어지고
한 평의 묻힐 땅도 없이 타계하고 말았다니(1915-1987)
참 딱하시다는 생각 외에 오로지 푸른 숲으로 삶을 엮어낸
선생의 지조에 경외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숲 속 작은 느티나무 아래 수목장 된 선생의 생애를 그려보다가
나의 색깔은 결국 카키색이 아닌 흙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고 말았으니,
아무리 하얀 눈으로 치장한들 지금의 형색이
그와 가장 닮은 게 아니던가.
그리 되면 종당엔 새로운 뭇 생명들의 어머니가 되는 셈이리라.
첫댓글 겨울 무채색의 어두움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색으로 맞을 봄이 오겠습니다.
카키색 옷 누런 바지 멋쟁이십니다.ㅎ
꽃이 피면 호숫가에 동행이 될테고요.
난석님~
저도 어릴적 카키색의 옷을 검정 물감 들여 입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당시 시장에 가면 카키색 군복을 얼마든지 살 수 있었거든요
참 옛날 얘기입니다
시인님을 비롯해서 장교들이 많이 입었으니까요.
선배님이
참 멋을 아시는거 지요 모
글 잘 쓰시지
대금 잘 부시지
후배들 만나면 잘 쏘시니까요
아이구우 그렇지도 못해요.
모자도 어울리시고
카키색은 멋쟁이 색이랍니다
안단테님은 무슨 색깔일까요?
하긴 여성들은 다양한 연출을 하지요.ㅎ
저도 카키색 좋아합니다
어느분이 제일 화려하게
돋보이는 게 검정 드레스라는
말이 생각나네요.
멋쟁이들은
어느 색이고 소화 시키는 듯
해요.
선배님 도 멋쟁이십니다.ㅎ
맞아요.
밋쟁이들은 걸치기만 하면 태가 나지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청솔님은 멋쟁이신가 봐요.
저는 단순한데요.
그런데 먼듯 가깝게 연결되기도 하는군요.
임종국선생의 아드님과 친구라니까요~
오늘은 임종국 선생과 관련한 글이 많습니다. 저도 어릴때 TV에서 그분이 나무를 심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동받아 그분처럼 살지는 못해도
작은 산을 사서 나무를 심고 지내다 중단한 적이 있습니다. 심는것도 어렵지만 가꾸는건 더어렵다 합니다. 임종국 선생님 참 존경스런 분입니다
그랬군요.
지금이라도 고향에 동산이라도 꾸며보면 좋을것 같은데요.
여유가 없었을때는 늘 베이지색 카키색 계통의 복장만 하고 다녔습니다.
이젠 용모도 늙어지고 여유도 생겨서 여성들의 장점인 팔색조로 살고 있습니다.
빨강.노랑.초록.핑크.화이트.보라.....
안경,모자, 가방,신발,소품도 구색을 맞추려니
비용도 많이 듭니다.
가끔 점잖게 베이지,회색.검정 톤으로도 꾸미기도합니다.ㅎ
여유 있고 가능하면 다양하게 꾸며보는게 좋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