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수 야고보 신부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루카 9,43-45
귀담아 들어라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늘 복음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하는" 상황에서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
라는 말씀으로 이어졌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고 하신 것을 보면 우연히 이 말을 하신 것은 아니고
의도적으로 하신 말씀임에 분명하다.
우선 사람들을 놀라게 할만큼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란 더러운 영을 쫓아내신 일이다.
예수님이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어 어린이를 고쳐주고 나니까
"사람들은 모두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몹시 놀랐다."고 하였다.
놀랄 만도 하다.
말씀 한 마디로 더러운 영을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일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워하고 있을 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고 그들의 주위를 환기시키려고 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제자들도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그들처럼 예수님이 하신 일을 보고 놀라워하며
들 떠 있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들과 제자들은 같은 사람들이 아니다.
어제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한 세례자, 엘리야, 예언자 중에 한 분"이라고 말했지만
제자들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을 한 사람들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싶어하고 그런 것을 바라고 거기에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잘 모르고 다만 병이나 고쳐달라고
그런 것만을 쫓아다니며 거기에 매달리는 신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제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
병을 고쳐주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자들이 고백한 그리스도는 단순히 병을 고쳐 주시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분이시다.
악령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을 보고 놀라는 것도 좋지만 그 상태에 머물지 말고
한 발짝 더 나아가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알아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은 병을 고쳐 달라는 수준에 머물고 만다.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는 것은
"당신은 나의 전부이십니다. 당신은 나를 구원해주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무엇이든지 당신께서 하라는 대로 나는 할 것이며
또 당신께서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 가겠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나의 구원자(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라는 마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면 오늘 하신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어떤 희생을 치루셔야 했는지를 알아야 하고
그분이 치루신 희생을 나도 치루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단순히 말씀 한 마디로 나의 병을 고쳐 달라고 청할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 당신이 가셨고 그 길이 곧 내가 구원받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아보고 믿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너희는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고 하셨다.
사람은 무엇을 듣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듣는 것에 따라서 그렇게 되기 때문이다.
귀담아 들은 것이 마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고 마음에 들어 간 말에 따라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그것에 의해 행동하게 된다.
마치 땅에 떨어진 씨가 그곳에서 싹이 나고 잎이 나고 열매를 맺는 것처럼
무슨 말을 귀에 담느냐에 따라서 거기에서부터 열매를 맺게 된다.
루카는 이 말씀 앞에 어린 아이에게서 더러운 영을 내쫓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영이 사로잡히기만 하면 아이가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영은 아이를 뒤흔들어 거품을 물게 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아들에게서
더러운 영을 쫓아내 달라고 청하는 어떤 남자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여기에다
"벙어리, 귀머거리 영아, 내가 너에게 명령한다. 그 아이에게서 나가라.
그리고 다시는 그에게 들어가지 마라."(마르 9,25)고 하였다.
더러운 영이 들어가면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되어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거품을 흘리며 땅에 뒹군다.
아이는 더러운 영이 들어갔고 그 영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귀에 무엇을 담느냐 즉
우리 마음 속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그렇게 행동하게 된다.
매일 욕하는 소리를 듣고 자란 아이는 욕을 하게 되고,
좋은 말을 듣고 자란 아이는 좋은 말을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법이다.
야훼 하느님은 이스라엘에게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라.
이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거듭거듭 들려 주어라.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신명 6,4-7)고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한 사람이 귀담아 들어야 할 말씀은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하느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했을 때
아마도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자들이 감히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제자들이 생각했던 그리스도와 지금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모습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사람의 아들은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을 귀에 담아두지 않으면
그리고 그 말씀이 마음 속으로 들어 가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는 아무 관계 없이 우리 나름대로 말하고 행동 할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이 말을 명심하여라."고 "이 말을"을 강조한 것이다.
예수님은 여러 가지 말을 많이 하셨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귀에 담아 두어야할 말은 바로 "이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예수님을 이해하는 열쇠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이해하게 되면 예수님의 다른 말씀과 행동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다른 어떤 말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만큼 "이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 말을 귀담아 들어라."는 말은
권고의 말씀이 아니라 명령이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질 것이다."라는 말은 내 생명을 바친다는 뜻이다.
내 운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내 손에 있어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는 것은 내 삶을 포기한다는 것이요,
다른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하는 종, 즉 봉사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듯이다.
성 바오로회 유광수 야고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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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코헬렛 11,9―12,8 루카 9,43ㄴ-45
제자들이 다가올 예수님의 수난을 두려워한 이유는 명백합니다. 자신들이 바란 예수님과 실제
예수님 사이의 깊고 깊은 간극 때문이었지요. 그 간극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로 더욱 뚜렷해졌습니다.
제자들의 두려움은 일종의 비겁함입니다. 대개 비겁함은 제 잇속 계산과 상응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랐던 이유가 종교적이고 신앙적이지만은 아닐 테지요. 당시는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멋진 메시아를 기다리던 시절이었습니다. 이른바 묵시적 열광의 시대를
예수님과 그 제자들은 살아갔습니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내일의 달콤한 인생을 향한
묵시적 환상은 활개를 칩니다. 그런 열망을 단번에 꺾어 버리신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제자들은
허탈과 허무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라 뚜벅뚜벅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루카 복음은 19장까지
열한 개의 장(9,51―19,48)에 걸쳐 예루살렘으로 오르시는 예수님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수난을 향한 예수님의 발걸음은 얼마간의 비겁함과 얼마간의 두려움이 뒤섞인,
그야말로 제자들이 복잡한 감정의 다발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여정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 다가갈수록 점차 다듬어진 신앙의 정수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꼬여 버린
삶의 방향에 안절부절못하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자들은 제자들입니다.
신앙이란 알아듣고 깨닫는 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몰라서 무모하게 내맡기는 의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어찌 그리스도의 신비와 그 수난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겠습니까.
그저 일상 속에 벌어지는 모든 일에 그분께서 함께하신다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 내는 것이겠지요.
잘 모르지만 이 몸짓이 앎의 또 다른 조각이라는 생각으로 오늘도 살아 내야 합니다.
대구대교구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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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수원 베드로 신부
연중 제25주간 토요일
코헬렛 11,9―12,8 루카 9,43ㄴ-45
제1독서 코헬렛의 저자는 인생의 젊음과 아름다운 시절을 기쁘게 즐기되, 하느님의 심판과
인생의 무상함을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세상이 주는 만족과 기쁨에 빠져 거기에
집착하지 말고, 노년과 죽음 그리고 심판의 때가 올 것을 알고 늘 하느님을 기억하며
살아가라고 권고합니다.
기쁘고 모든 일이 잘될 때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찾는 이라야 시련과 불행이 닥칠 때도
그 가운데서 하느님의 현존과 구원 의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첫 번째 수난 예고(루카 9,22)에 이어, 예수님께서 두 번째로 당신 수난을 예고하신
일을 전합니다. 사실 이때는 영광스러운 변모 사건(9,28-36)과 더러운 영을 권능으로
쫓아내신 일(9,37-43) 바로 다음으로, 모든 이가 예수님을 매우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영광을 돌리던 때였습니다.
‘사람들의 손에 넘겨진다.’라는 것은 예수님의 수난을 가리키는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루카 18,32; 24,7.20 참조).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으로 어깨가 으쓱하며 한껏 우쭐해졌던 탓인지,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선뜻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에 대하여 묻는 것조차 두려워하였습니다.
아직은 불길하고 굴욕적인 현실을 받아들일 용기가 없는 제자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한결같이 그들을 사랑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작은 시련과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곤혹스럽고 피하고 싶지만,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을
더 열심히 찾게 되고, 그분의 도움과 은총 없이 살아갈 수 없는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게 되니
그 또한 감사드릴 일입니다.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일상일수록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
시련과 단련의 시기를 만날 때도 한결같은 믿음과 평화 속에 굳건히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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