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현 다미아노 신부
연중 제26주일
민수기 11,25-29 야고보 5,1-6 마르코 9,38-43.45.47-48
하느님 나라의 이주민
캐나다로 교포사목을 할 때, 혼자 영어를 사용해야 익숙해진다는 생각에 패스트 푸드점을
간 적이 있습니다. 메뉴를 보다가 종업원에게 치킨버거 세트를 더듬더듬 주문하였더니
종업원이 뭔가 못 알아듣는 말로 길게 물어보는 것이었습니다.
눈치껏 뭔가를 추가하겠냐는 질문처럼 보여서 'Yes'라고 답하며 주문한 음식을 기다렸습니다.
제 차례에 나온 음식을 보며 순간 당황스러웠습니다.
글쎄 치킨버거 세트가 아닌 후라이드 치킨이 버켓에 가득 담겨 나왔기 때문입니다.
'내가 치킨을 많이 좋아하는 것을 알았나 보다'라고 위안을 삼기는 했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답답한 일이고 홀로 고립되는 일인지 느낄 수 있었고, 한편으로는 종업원이 제가 말 못
하는 것 같으니 일부러 바가지 씌운 건 아닌지 원망스럽기도 했습니다.
아마 한국에 오는 이주민들도 저와 같은 부분들을 한 번쯤 경험하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예전에 이주민 사목 야유회 때,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러 어떤 이주민이 줄을 서서 라떼를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휴게소 종업원이 라떼가 떨어졌다고 말하더라며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하며 다시 가보니 다른 이들에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커피를 주문 받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봉사자가 가서 이주민의 라떼를 대신 주문해 받아 왔습니다. 이 일들을 보며
내가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반대로 다른 이들에 대해 말이 통하지 않는다며
무시하거나 업신여기지는 않았는지 반성해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씀하시는지 무섭게 다가올 수도 있지만,
그만큼 다른 이들이 죄에 빠져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이 얼마나 악한 것인지
알려주시고자 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 스스로가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가장 작은 이가 될 수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악의를 가지는 마음보다 따뜻한 관심으로 선행과 사랑을 베풀 때,
그것이 마실 물 한 잔 일지라도 우리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라 합니다.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인 오늘, 이주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서로가 살아온 환경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더라도 더욱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가장 작은 이들(마태 11,11)이며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 전까지 '하느님 나라의 이주민들이기 때문입니다.
원주교구 백호현 다미아노 신부
2024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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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록 라우렌시오 신부
연중 제26주일
민수기 11,25-29 야고보 5,1-6 마르코 9,38-43.45.47-48
죄 짓지 않도록 늘 깨어있어야
예수님 당대부터 그분의 제자 무리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구마 행위를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마르 9,38-41)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막아보려고 하였던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이 당신의 제자 무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그들을 배척하지 말라고 하시며 제자들과는 상반된 입장을 분명하게 드러내십니다.
요한으로 대표되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추종하는 이들의 충실함을 엿볼 수도 있지만,
자신들과는 상이한 이들에 대한 경계와 배척의 태도가 드러납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마귀 들린 이들이 악한 세력에서 풀려나 회복되는 것을 당신 사명에
협력하는 것으로 보았기에 그 구마자들을 개방적 자세로 인정하십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일생을 사셨듯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특별히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새로운 계명을
일상에서 실천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이유로 다른 이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배척할 때가 있습니다. 크고 작은 공동체에서 편 가르기를 하며 서로 대립하기도 하고
편협한 마음과 시각에 갇혀 남을 판단하거나 단죄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에 대한 자신의 한정적인 체험을 절대화하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잘못된 길로 이끌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를
도우시어 자기 방식이나 주장만을 고집하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에 비추어 우리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성찰해 갈 때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다양성 안에서 풍요로움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후반부(마르 9,42-48)는 죄를 지으면 지옥으로 가고 죄를 끊으면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기 때문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죄 짓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내용입니다.
죄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 나오는데 이웃을 죄 짓게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나을 것이라고 하시며, 자신이 죄를 범하는 것도 경계해야 하지만
악한 표양으로 남을 죄 짓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이어서 죄를 짓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방해한다고 밝히시며 손과 발과 눈이
죄 짓도록 충동질하거든 가차없이 찍어 버리고 빼어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상징적 표현은 우리가 죄를 싫어하여 죄를 피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강하게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 인해 당신과의 일치에 균열이
생기고 죄로 인해 공동체가 분열된다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깨닫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화단이나 텃밭의 잡초를 제거해 보셨을 것입니다. 오랜 시간 미루다가 한참 자란 다음에
한꺼번에 잡초를 뽑으려고 하면 매우 힘들고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그때그때 잡초를 뽑아내는
것이 힘도 적게 들고 시간도 절약됩니다.
마찬가지로 죄로 이끄는 유혹도 초기에는 물리치기가 쉽습니다. 미루거나 틈을 주게 되면
단순한 유혹도 점점 강해져서 물리치기도 쉽지 않고, 때로는 그 유혹으로 악에 떨어져
헤어나기가 힘들어집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기도하며 예수님의 은총에 힘입어
죄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 묵상을 통해 예수님의 시선으로 이웃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마음,
그리고 죄 지을 기회를 피하도록 노력하는 마음을 새롭게 지니면 좋겠습니다.
서울대교구 유승록 라우렌시오 신부
가톨릭평화신문 2024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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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웅렬 하상 바오로 신부
연중 제26주일
민수기 11,25-29 야고보 5,1-6 마르코 9,38-43.45.47-48
내가 주님의 제자
사람이 많이 붐비는 어느 역 주변을 걷던 중, 저에게 말을 건네 오는 분이 있었습니다.
“저기요, 영이 정말 맑아 보이세요.” 어떤 의도인지 얼른 눈치 채고서, 저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답했습니다. “아⋯. 고맙습니다.” 저의 대답에 그분의 음성이 더욱 밝아졌습니다.
“잠시 대화하실 수 있을까요? 이렇게 얼굴이 환한 분, 오랜만에 만나요.”
저는 얼른 목례하며 걸음을 두 배로 빨리하여 벗어났습니다. “아, 일정이 있어서요⋯.”
그럼에도, 이유야 어찌되었든 얼굴이 환하다 하니 듣는 입장에서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기분이 매우 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거리에서 선교하시던 어떤 개신교 신자 한 분이,
성직자 셔츠에 로만 칼라까지 한 저에게 전단을 건네며 말했습니다.
“예수님 믿고 천국 가세요. 예수님은 사랑이십니다.”
저는 그분을 수 초 동안 빤히 보았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가톨릭교회 사제에게
‘예수 믿고 천국 가라’ 하다니. 제 낯빛이 냉랭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얼른 다른 사람에게
전단을 나누어주려 했기 때문인지, 그분은 곧 저에게서 멀어져 다른 쪽 길가로 이동했습니다.
그날, 왜 기분이 상했는지를 곰곰이 헤아려 보았습니다. 일단 가톨릭교회 사제를 대하는
그 태도에 화가 났던것 같습니다. ‘도대체 가톨릭교회를 어떻게 보았으면, 이토록 무례할 수가
있나!’ 그런데 제가 그날 입고 있었던 성직자 셔츠는 회색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분이
저의 복장만으로 제가 가톨릭교회의 사제인지 구분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 싶습니다.
만약에, 만약에 그렇다 한다면, 이제 제 마음이 상한 이유는 그분이 아닌 제 자신에게 있는 셈입니다.
네, 실은 그랬습니다. 저는 사제인 저에게 ‘감히’ 예수님 사랑을 운운하며 천국을 권하는
그분의 태도가 너무나 못마땅했던 것입니다. 영이 맑다는 소릴 들었을 때는 자못 즐거워했으면서
말이지요. 어쩌면 당시 저의 관심사는 예수님이 아니라 바로 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막지 마라.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39.40)
‘제자도 아닌 주제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들을 막아보려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그냥 놓아두라 하십니다. 오히려 죄짓게 할 수 있는 제 손을, 제 발을 잘라 버리고,
죄짓게 할 수 있는 제 자신의 눈을 빼 던져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강한 어조에 제자들이 다소 무안했을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말씀 안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다시금 묵상해 보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무얼 바라시는지 알 것만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판단하기보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바라보시는 당신 제자는 그가 아니라 나이기 때문입니다.
서울대교구 윤웅렬 하상 바오로 신부
2024년 9월 29일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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