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지 말라는 말을 곧잘 한다. 그런데 왜 웃느냐고 한다. 웃지 말라고 한다. 비웃는 것이 아니다. 분위기상 울지 않는 것이 어렵듯이 웃지 않고 참는 것이 더 어려울 수 있다. 억지로 웃는 웃음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거나 입가에 배시시 번지는 미소다. 때로는 기막혀 웃는 웃음도 있다. 혹자는 울을 자리와 웃을 자리 구분도 제대로 못 하는 넋 빠진 사람이라고 빈정거릴 수 있다. 웃고 있어도 웃는 것이 아니고 울고 있어도 우는 것이 아니라는 묘한 말도 있다. 해석이 분분할 수밖에 없다. 진정성은 어딘가에 숨겨놓고 너희가 좋은 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고는 뒷말로 구시렁거린다. 나도 모르게 먼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어쩌랴. 그런 짓 그런 분위기에 젖어 들다 보면 어쩔 수 없다. 아차, 하는 순간 이미 웃고 있다. 물은 가득 차야 넘친다. 그러나 웃음은 이것저것 눈치 볼 것 없이 갑자기 폭발하듯 솟구쳐 나온 것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네 기분은 네 기분이고 내 기분은 내 기분이다. 그러니 네 잣대로 강요하는 것은 언짢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쪽에서도 가릴 것 가리고 삼갈 것 삼가겠지만 생리현상처럼 손쓸 사이조차 없는 것이다. 그래도 웃을 수 있는 것은 삭막하거나 험악한 세상을 진정시키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유머와 위트에 코미디가 있어 즐겨보고 있다. 일소일소(一笑一少)이며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로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라고 한다. 물론 의식적으로 웃는 웃음이 아닌 무의식적이어서 더 순수성에 진실성이 있어 보여 값지다고 할 것이다. 이것저것 계산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인 것이다. 억지로라도 웃으면 엔도르핀이 생겨난다고 한다. 까닭 없이 찡그리고 울상인 것보다는 아무래도 웃는 것이 낫다. 남에게 강압적이거나, 구차스러우면서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라. 내가 먼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기회를 만들지 않아야 한다. 김상용 시인의 시 ‘남으로 창을 내겠소’ 마지막 3연의 ‘왜 사냐건/ 웃지요’가 뜬금없이 스쳐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