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현 시인이 2014년에 백석 평전을 펴냈다. 백석 시인은 원래 고향이 평안북도 정주이기 때문에 월북 작가가 아닌 엄연히 재북 작가이다. 백석 시인은 조선일보와 인연이 깊다.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 사장이었던 방응모가 1920년대에 금광개발에 뛰어들어 금맥을 발견하여 시쳇말로 대박을 쳤다. 많은 돈을 벌어 고향인 정주에 고학하는 사람들을 후원했었고, 백석도 후원받은 이 중 한 사람이다.
방응모는 1932년 광산을 일본인에게 135만 원이라는 거액을 받고 팔았는데 당시 서울 장안의 기와집 800여 채에 해당되는 금액이라 한다. 이 금액으로 자금난에 허덕이던 조선일보 경영권을 인수하고 부사장에 취임한다. 1935년 백석이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다.
조선일보 기자 생활 중 신현중과 허준은 같은 동료 기자로 백석의 인생에서 운명적인 인물들이다. 허준의 결혼식을 통해 백석이 한눈에 반한 여고생 박경련을 만나게 되고, 그녀를 위해 통영 길을 세 차례나 오간 일은 너무도 유명하다. 안타깝게도 박경련은 신현중과 결혼을 했다.
“구마산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갓갓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잘한 물맛도 짭잘한
전북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령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이라든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 객주집의 어린 딸은 난이라는 이 같고
난이라는 이는 명정 골에 산다든데
명정골은 산을 넘어 동백 나무 푸르른 감로같은 물이 솟는 명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깃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 꽃 피는 철엔 타관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서 오신 듯한데 동백 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넷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아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 바다에 뱃사공이 되여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통영>전문
백석의 두 번째 여인은 기생 '자야'이다. 본명 김영한(1916~1999)이다. 자야가 함흥에 있을 때 요릿집 하흥관 연회에서 백석을 만났다. 백석은 이백의 시를 떠올려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지어줬다. 흥미로웠던 건 백석의 사진을 보면 모던보이같은 헤어스타일, 잘 생긴 얼굴, 180센티미터 이상 되는 훤칠한 키 때문에 많은 여성들의 관심을 받았을 것이다. 백석이 교류했던 여류 문인들은 최정희, 노천명, 모윤숙이었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노천명의 시 <사슴>은 백석을 두고 그린 시라고 조심스레 얘기한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노천명<사슴>전문
이에 대한 근거로 1936년 백석의 첫 시집 제목이 <사슴>이다. 훤칠한 외모로 목이 긴 편이고 말이 별로 없었던 그를 주변인들은 뒤에서 '사슴군', '목이 긴 사슴'으로 불렀다고 한다. 그렇다고 노천명이 백석을 연모했다는 거에 대해선 안도현 작가는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백석이 이북에서 활동 중 57년 아동문학 논쟁으로 계급성 대신 창작성을 강조하다가 '부르주아 잔재'로 몰려 1961년 양강도 삼수 관평리로 보내졌다. 1963년부터 작고하신 1995년까지 아예 글을 쓰지 않고 양치기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때 백석의 삶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어서 백석 평전에서도 공백으로 남는 부분이다. 남북한이 통일이 되거나 교류가 되면 안도현 시인은 꼭 이 시기의 백석에 대한 자취를 연구하여 백석 평전 개정을 하고 싶다는 소망도 밝혔다.
백석 보다 5살 어린 윤동주는 백석의 시를 굉장히 좋아하여 백석의 시집<사슴>을 필사하고, 백석의 영향이 보인 시를 쓰기도 했다. 윤동주가 백석의 시를 사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안도현 작가는 백석은 일본 유학파에 영문과 출신이라 영어는 물론 러시아 작품을 번역할 정도로 러시아어에도 능통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에 드러난 정서나 시어엔 전혀 외국어들이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평안도의 사투리를 많이 사용하여 현재의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일제강점기를 보면 각자 살 길을 위해 친일적인 시를 쓴 시인들이 많았다. 이육사와 같은 저항시를 쓴 이들도 있다. 그러나 백석은 친일시를 한편도 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저항시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위 둘을 철저히 배제함으로써 아름다운 고향의 언어로 제3 지점에서 당당히 시 세계를 구축한 순수 서정 시인이었다.
백석의 후반부 인생에 정말 시를 한 편도 쓰지 않았을까? 근현대의 비극적 이념으로 인한 많은 문인들과 예술인들의 창작성이 사장된 역사는 안타깝다. 뒤늦게라도 백석이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지 이북에서의 생활에 대해 천재시인의 비밀이 풀리는 날이 오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