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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12: 7 성령을 나타내심 - 고전 12: 9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고전 12: 7 성령을 나타내심 -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
바울은 8-10절에서 은사의 목록을 열거하기에 앞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여러 은사를 주신 것은 유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대원칙을 소개하고 있다.
1]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1) 각 사람에게
(2) 성령의 나타남
'성령의'에 해당하는 헬라어 '투 프뉴마토스'(*)는 소유격으로서 본 구절에서는 목적격적 소유격으로 쓰였는지 주격적 소유격으로 쓰였는지 논의의 여지가 있다.
① 주격적 소유격의 용법으로 쓰였다면
성령께서 나타나신 것을 의미한다.
② 목적격적 소유격의 용법으로 쓰였다면
사람이 성령의 내주(來週)하심을 드러낸다는 의미가 된다.
이런 견해는 고후 4: 2의 '진리를 나타냄'(*, 파네로세이 테스 알레데이아스)과 연관지어 설명된다(Meyer, Hofmann).
* 고후 4: 2 - 이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을 버리고 속임으로 행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오직 진리를 나타냄으로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 대하여 스스로 추천하노라.
하지만 '성령'은 인격인 반면 '진리'는 비인격이라는 점에서 명백히 차이가 있기 때문에 동일하게 볼 수는 없다(Godet, Edwards).
따라서 ①의 견해가 더욱 타당하다. 즉 성령은 인격자로서 은사를 주시고 성령께서 나타내시는 증거가 은사임을 보여준다.
2]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려 하심이라'의 헬라어 '프로스'(*)는 목적이나 의도를 가리키는 전치사로서 본 구절은 은사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은사의 목적은 교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한 것임을 여기서 밝히고 있다.
성령께서 성도들에게 다양한 은사들을 주시는 목적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다. 그것은 개인에게 주시는 유익 뿐만 아니라, 또한 교회 전체의 유익을 말한다.
고전 12: 8 어떤 사람에게는 -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 어떤 이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
바울은 본 절에서 성령과 연관지어 전치사를 다르게 사용하고 있다.
혹자는 '지혜'(*, 소피아)와 '지식'(*, 그노시스)이 아무런 차이점이 없다는 성급한 결론을 내리지만, 바울은 그들을 구별하고 있다. ‘지혜의 말씀’은 현실에 바르게 대처하게 하는 말씀을 가리키며, ‘지식의 말씀’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깨달음과 지식을 가리킨다고 본다.
본문에서 벵겔(Bengel)에 의하면 '지혜'(소피아)는 이론적인 성질을 내포하고 '지식'(그노시스)은 실제적인 성질을 나타낸다고 한다.
1] 어떤 사람에게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말씀을,
(1) 말미암아
'말미암아'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아'(*)는 '...에 의해'(by means of)라는 뜻으로 '지혜'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지혜는 성령의 조명(照明)에 의한 것임을 나타낸다.
(2) 지혜
실제적인 적용을 의미한다.
특히 '지혜'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들어 있는 비밀을 설명하는데 쓰이는 용어로 이해되어야 한다.
'지혜'는 '사도'와 '선지자'를 만든다. (Godet) 이 점을 수용한다면, '지혜의 말씀'은 본서 28절에 나오는 직분들 가운데 첫째와 둘째 것인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직임과 관련 된다.
2] 어떤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을 따라 지식의 말씀을,
(1) 따라
'따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타'(*)는 '...의 기준에 따라'(according to the standard of)라는 뜻으로 '지식'과 관계되어 '지식'이 성령의 기준 내지 결정에 좌우되는 것임을 나타낸다.
(2) 지식
이론적인 지식을 의미한다.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것'(고후 10: 5)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고후 4: 6)이며,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빌 3: 8)이다.
* 고후 10: 5 -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 고후 4: 6 -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 빌 3: 8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결국 이 은사들은 성령의 조명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결합되어 성령께서 가르치는 말씀으로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데 사용된다.
* 고전 2: 6-13 – 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7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9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 엡 1: 8, 17 – 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 골 2: 3 -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지식'은 '교사'를 만든다고 한다(Godet). 이 점을 수용한다면, '지식의 말씀'은 그 다음의 직임인 '교사'의 직임과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다. 이 견해는 '지혜'와 '지식'을 '실제'와 '이론'으로 구분하여 생각하기보다는 동시적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결론적으로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첫번째와 두번째 은사로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을 성령과 연관지어 말한 것은 '구원의 계획'(Heilsplan)이나 '구원의 내용'(Heilsgut)은 성령께서 주시는 은혜로 이해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고전 12: 9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 다른 이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어떤 이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
‘믿음’의 은사는 기적에 대한 믿음을 가리키는 것 같다.
1] 다른 사람에게는 같은 성령으로 믿음을,
앞 구절에서는 '성령'을 제한하는 전치사가 '디아'와 '카타'였는데 본 절에서는 '엔'(*, '...안에', '...로')이 사용되었다.
전치사 '엔'은 성령께서 사역하시는 영역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수단으로서의 의미도 있어서 '디아'나 '카타'를 사용한 것보다 더 강력하게 성령께서 행동의 주체자임을 표현한다.
* 롬 9: 1-2 -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믿음은 모든 신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지만 본 절의 '믿음'은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지는 제한된 은사를 의미한다.
* 롬 1: 17 -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롬 3: 22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이는 바울이 8: 2에서 일반적인 믿음과 특별한 은사로서의 믿음을 구분하고 있는 것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Godet).
* 고전 8: 2 -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본 절에서의 '피스티스'(*, '믿음')는 영적인 것을 실제적인 것으로 발휘하는 능력의 개념을 내포한다. 믿음의 능력은 예언하고,
* 히 11: 3 -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기적을 행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이 된다.
* 마 21: 21 -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 고전 13: 2 -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일반적으로 '피스티스'는 모든 은사들의 기본이며, 이 '믿음'의 정도에 따라 은사는 보다 영향력 있게 행사(行使)될 수 있다.
믿음의 은사
본문을 보면 “어떤 이에게는 믿음의 은사를 주신다”고 했다. 믿음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우리들의 보편적인 믿음이다. 지극히 단순하고 얇고 가벼운 그런 믿음이다. 믿음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사소한 일들에 일일이 반응하고 걱정하고 울고 웃는 그런 가벼운 믿음이다. 이 믿음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믿음이다.
그런가 하면 한층 성숙한 믿음이 있다. 그 믿음은 의지적 신앙 고백이 포함된 믿음이다. 예를 들면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여인들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성으로 섬겼다. 제자들도 도망간 그때에도 이 여인들은 십자가까지 무덤까지 따라가고 부활의 아침 일찍 무덤까지 달려가는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또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그 위험한 시국에 자신들의 신분을 노출하고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인수해 무덤에 장사를 주도했다.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별소리를 다 하다가도 위급한 상황이 되면 거의 다 회피하고 숨어 버린다.
그런데 서슬이 퍼런 때 자칫 예수의 추종자로 몰리면 거세당할 수도 있는데 그것을 감수하고 자신을 보란 듯이 노출할 수 있는 용기, 이 용기가 믿음에서 나온 용기이다. 그 외에 더 특별한 믿음도 있을 수 있다. 내 믿음에 의지적인 신앙 고백이 내포된 그런 믿음이다. 그 믿음이 있을 때 내게 주어진 직분만큼의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오늘날은 이 의지적 믿음이 너무 부족한 시대이다. 그래서 믿음의 행동이 요구될 때 모두 낙오하고 후퇴하고 손해를 안 보려고 수단을 쓰기도 한다.
믿음은 평상시에는 평안을 주시니 감사하고 아픔이 주어졌을 때는 내게 아픔을 주신 데는 이유가 있을 것임을 알고 지긋이 기도하며 내가 십자가를 지게 되었을 때는 그 십자가를 잘 질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은 목요일 밤에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고 그 밤에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갔다. 갈 때 찬미하며 갔다고 했다. 그 상황은 찬미할 상황이 아니었다. 내일은 십자가를 져야 한다. 십자가의 길은 참혹할 것을 예수님은 미리 아셨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내일 져야할 십자가를 피해 달라고 피땀 흘려 기도하셨다. 그 기도는 회피의 기도가 아니고 잘 이기게 해 달라는 기도였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는 시간을 자신이 스스로 정하고 십자가를 지고 제물이 되셨다.
2] 어떤 사람에게는 한 성령으로 병 고치는 은사를,
'병 고치는'에 해당하는 헬라어 '야마톤'(*)은 복수 명사로서 여러 종류의 질병이 치유의 대상이었음을 시사한다.
'은사'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리스마타'(*) 역시 복수 명사로 은사가 각기 다른 종류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병 고치는 은사'는 단지 사람의 육체 뿐만 아니라 영혼자 마음과 정신의 치료까지 포괄하는 말이다.
본문은 병을 고치는 은사를 말한다(9, 28). 이것을 신유의 은사라고 말한다. 이 병 고침은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병이 고쳐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신유의 은사는 육신과 정신의 질병을 치료해 주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말한다.
예수님도 많은 병자들을 고치셨고 사도 바울도 선지자들도 많은 전도자들도 이 능력으로 육신의 병을 고쳤다. 질병을 고치는 단계가 몇 가지 있을 수 있다. 하나는 규칙적인 생활이다. 발병도 알고 보면 규칙적인 생활이 없어서 발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질서와 무절제 그리고 폭식과 폭주 등은 모두 병을 유발하게 하는 원인들이다. 무질서에서 유발된 질병은 대부분 질서를 찾으면 자연 치료가 가능하다. 질서의 삶은 기초적인 치유의 삶을 이룬다.
또 한 가지는 의학적인 치료이다. 의학적으로 치료받는 것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방법이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다. 간혹 신앙인들이 믿음으로 질병을 고친다고 해서 의학을 무시하고 믿음으로 고치려고 약도 치료도 거부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 믿음을 그렇게 자꾸 시험하면 안 된다. 하나님은 의사를 통해서 질병을 치료하시고 고치신다.
또 하나 의학적으로 불가능한 질병이 신적인 권위로 치유되는 방법이 있다. 그것이 본문에 나와 있는 신유의 능력이다. 신유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는 경우를 우리들이 흔히 볼 수 있다. 신유로 고침을 받은 사람들도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이 있다. 그래서 신유의 능력이 은사로 주어지기도 한다.
신유의 능력이 주어지면 참 편리할 것이다. 목회자들이 입원한 성도들을 위해서 병원에 갈 때마다 갈증을 느끼고 무력함을 느끼고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하고 그냥 돌아올 때 무능함을 절절히 느끼게 된다. 병원에 가서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이 임하여 병자가 고쳐지면 얼마나 좋겠는가? 기도하는 목회자 자신도 좋고 하나님도 좋고 전도되어 좋고 환자도 좋고 모두 다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생각이다. 그래서 어느 개척교회 목사가 40일간 금식하면서 병을 고치는 은사를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목회자들이 마음으로는 간절하지만 그런 기도를 하면 안 된다. 그 보다 먼저 나에게 사랑하는 은사를 달라고 기도하는 일이 중요하다.
사람에게는 모두 영웅심이 있어서 은사를 주셔도 대부분 영웅심을 위해서 사용할 위험이 있다. 그래서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은사를 주시지도 않고 고침도 주시지 않는다. 정말 좋은 신유의 은혜는 발병했을 때 고침을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소에 건강한 삶을 유지하도록 건강의 은혜를 힘입는 것이 더 좋은 은혜다. 진정한 신유의 삶은 평소 건강하게 하시는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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