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부 이승만 영결식에 한 미국 장의사의 눈물의 고백을 들어라
한 위대한 한국인을 눈물로 추모한다
지금부터 약 55여년 전인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35분
국부 리승만의 영결식의 울부짖음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였는지!
그것 때문에 네가
얼마나 수많은 고통을 격어 왔는지!
바로 잃어버린 조국,
빼앗긴 국토를 되찾으려는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그토록 온갖 조소와 비난받으며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 온 것을.
내가 알아."
그 미국인은 장의사였다.
그는 1920년에 미국에서 일하다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 이라는 중년의 조선인이 찾아와
중국인 유해를 안치할 그 관(棺)에 숨어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하는데 일본이 자신을 현상수배 중이라고 했다.
그가 바로 조선인 이승만이다.
이 이승만이 실제 관에 들어가 상하이 입국 밀항에 성공하였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고,
또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비난을 받아 왔는지 나는 안다"
피를 토하듯 한 절규!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온 통한의 절규였다.
이 위대한 대통령 묘 앞에서 나는
"만약 우리 건국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정치의 변동을 미리 내다 보는 혜안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자체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그였기에 그만이 할 수 있는 건국 이었기에 이 역사의 물음 앞에
나는 머리를 가로 저으며 흐느끼고 말았다.
그 없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없이 우리가 자유 민주 진영에 서고,
그 없이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그 없이 한·미 동맹의 대 전략이 가능 했겠느냐 는 질문에 누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
추모비에 적힌 지주(地主)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원자력발전조차
그에 의해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태어났으나 그렇게 살기를 거부했다.
열아홉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외국인들의 눈을 통해 나라 밖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했다.
썩은 조정을 언론으로 개혁해보려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그러한 상황의 감옥에서 낮에는 심문을 당하고 밤에는 영어 사전을 만들었다.
이 대통령은 독립하는 길은 미국을 통하는 길밖에 없다고 믿었기에
1905년 나이 서른에 조지 워싱턴 대학에 입학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을 거쳐 프린스턴대 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일본인은 옛 버릇대로 밖으로는 웃고, 내심으로는 악의를 품어서,
교활한 외교로 세계를 속이는,
그러면서도 조금도후회하거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 뿐더러...
미국인들은 지금도 이를 알지 못하고
일인들의 아첨을 좋아하며 뇌물에 속아 일본의 재무장과
재 확장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데도…
심지어는 우리에게
일본과 친선을 권고하고 있으니…."
‘우리는 미국이 어찌 하든지 간에 우리 백성이 다 죽어 없어질지언정
노예만은 되지 않겠다는 각오로 합심하여 국토를 지키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
뱁새가 봉황의 높은 뜻을 어찌 알리요 마는,
관에 들어가는 순간까지 반일(反日)로 살아온 그를, 친일(親日)이라고 하고,
평생 용미(用美)한 그를 친미(親美) 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매도하는 것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일.러 만 쳐다보고 있을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의 미국을 바라보았다.
합심하여 나라를 지키면 하늘이 도와준다
뭉치면 살고 헤치면 죽는다”
국부 이승만의 미래를 보는 혜안과 예지, 지혜와 용기로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되게 하였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분은 이승만이다
이승만은 온몸으로 대한민국을 사랑했다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우리가 자유 민주 진영에 서고,
6.25 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한·미 동맹의 대 전략으로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으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