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는 강의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책을 읽다가 갑자기 타자기가 갖고 싶었다. 소설가인 주인공이 타자기로 작품을 쓰는 게 멋져 보였다. 어머니를 졸랐다. 어머니는 곧바로 타자학원에 등록시켜주며 거기서 3급 자격증을 따오면 새 타자기를 사주겠다고 조건을 붙였다. 나는 학교 수업이 파하면 신나게 학원으로 달려갔다. 자움과 모음을 한 자씩 처 나아갈 때.탈각탈각 경쾌한 소리는 가슴과 귀를 즐겁게 했다. 손에 닿는 타자기의 감촉이 어깨로까지 전율로 번졌다. 바른 자세로 앉아 몇 시간이고 자판을 외우고 낱말을 찍었다. 진도는 빨랐고 표를 만들 차례가 왔다. 거기서부터 나에겐 벽이었다. 더는 나아가지지 않았다. 무언가에 붙들린 것처럼 꼼작달싹하지 못했다. 내 인생 처음으로 '포기'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토록 갖고 싶었던 타자기가 있었기에 곧바로 고개를 흔들었다.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강사의 지시대로 계산을 익히고 떠올려 그대로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나의 뇌 구조는 참으로 복잡하고 미묘해서 절대로 혼자서는 이뤄지지가 않았다.끙끙대다가 3급자격증 시험과 타자기를 같이 내려놓았다. 어머니는 더 이상 학원비를 달라고 하지 않아도, 타자기를 사달라고 조르지 않아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 후로 내 입에서도 머릿속에서도 타자기는 잊혀졌다. 서른이 훌쩍 넘어 컴퓨터를 갖게 되었다. 나의 손가락은 귀신같이 자판을 기억했다. 남들이 놀라는 건 당연했다. 영타(영여자판)는 몰라도 한타(한글자판)를 1분에 3백 타 이상 오타 없이 처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연습 없이 주루룩 주루룩 거침없었으니, 그것도 자판을 보지도 않고 전문가처럼 쳐댔으니 놀랄 수밖에. 지면으로만 뵀던 원로 수필가를 10여 년 전에 지인 소개로 만났다. 멀고 높게만 느꼈던 그분은 오랜만에 만난 친척 어른처럼 나를 가깝게 대해 주셨다. 그분의 육필원고를 그때부터 타이핑 했다. 한자가 많다는 것과 그분의 흘려 쓴 글씨가 문제였지만 나는 그 암호 같은 작가의 글씨를 잘 해독해냈다. 그분과 일하면서 즐거운 또한 가지는 내가 운전을 할 수 있어서 함께 드라이브를 겸한다는 거였다. 선생님을 운전석 옆에 모시고 확 트인 길을 달리면서 계절을, 날씨를 그때그때 상황들을 나는 곧잘 재잘거렸다. 길이 어떻다느니 하늘색이 어떻고 꽃은 어떻고 나무는 어떠하고:.. 기분이 울적할 때는 드라이브만 한 것이 없다면서 필요할 때 언제든지 '한 기사'를 이용하라는 등의 너스레는 기본 옵션으로 전달해드렸다
어쩌다가 우리도 정해본 적이 없는, 내가 그분의 제자라는 소문이 돌았다. 제자는 그 안에서 그분의 가르침과 문학성을 전수받아야 하는 것. 나는 그럴 만한 능력도 안 되고 많은 것이 부족하여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제자'라는 그 낱말이 너무나도 조심스러워서 그분께 여쭙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때였다. 작가의 문학의 결도 또 깊이도 내가 닿기에는 끝없이 멀고 달랐다. 다만 인간적인 부분에서 존경하고 싶은 건 맞았다. 사람을 아끼고 품는 능력이 넉넉한 분이었다. 두루 포용하고 누구나 적재적소에 심어두어 그가 맡은 바 할 수 있는 일을 충분히 해내게 하는 능력이 그 선생님께는 있었다. 그래서 그분을 존경하는 이가 많았고, 그들로 인해 때로, 나는 적이 되기도 했다. 깜도 안 되는 것이 크신 분 근처에서 뭔가 얻으려고 얼쩡거린다고 하는데,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그들에게 되레 묻고 싶었다.
누군가 내게 물어왔다. 그분과 내가 어떤 관계인지 오래전부터 궁금했다고. 나도 잠깐잠깐 궁금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문득문득 여줍고도 싶었다. 언젠가 편지 끄트머리에 '제자 올림'이라고 소심하게 적었다가 실례를 한 것 같아 후회한 기억도 있다. 그런 후에는 함부로 적지 못한다 그분이 그러라고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생각이 나서 문득 떠오른 대로, 그분의 오래된 운전기사라고 말씀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인데요. 그분 최고의 타이피스트이기도 해요 '라고 속삭여주었다. 그때 내 말을 들은 그 사람의 표정을 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나는 실제로 수필계 유명한 원로작가의 타이피스트이며 그분의 실력 있는 운전기사이다. 그분이 불편하지 않도록 아니, 편안하게 작품을 쓸 수있도록 적으나마 도움을 드리고 싶어 자발적으로 내민 일이었다.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고 우리 둘 중 수혜자를 따진다면 내 쪽일 테다. 덕분에 몰랐던 문학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깊고 넓게 들여다볼 수 있었으니까. 원고를 옮기다가 훌륭한 작가를 알게 되었고 그 작가의 작품을 읽고 미지의 세계를 알았고, 더 궁금해지면 책을 사서 전문을 읽기도 하는. 이런 특혜를 그런 일이 아니면 감히, 어떻게 누릴 수 있단 말인가
가끔 우리는 차로 이동을 하면서 '움직이는 강의실'이란 이런 게 아닌가 하면서 호탕하게 웃곤 했다. 문학 강연은 강의실에서만 듣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운전하는 자동차 안에서 그분을 통해 듣는 이야기가 진짜배기일 때가 많았다. 오롯이 두 사람만이 소통하는 세계 안에서 끝도 없이 펼쳐지는 이야기가 나는 좋았다. 그래서 되도록 건강하게 선생님이 오래오래 사셨으면 하고 바란다. 나에게 이런 기회 줄 분, 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누가 또 내게 오신다 해도 그분 같지는 않을 것이다. 계절은 가고 오면서 또다시 봄을 실어 왔다. 이 봄 그분의 안부가 궁금하다 이팝꽃 활짝 피기 전에 조금 먼 길로 드라이브해야겠다. 이번에는
남한강이나 북한강을 끼고 돌지도 모르겠다. 한적한 길로 접어들면 강을 마주한 곳에 차를 세우고 한차례 오수를 즐기자 할지도. 그분과의 그런 시간은 예고가 없기에 항상 설렘처럼 기대가 된다.
한복용
<인간과 문학>으로 문학평론 등단 hayeul67@hanmail.net
계절을 잃은 사람처럼 흐르는 시간 위를 걷는다. 숨이 차면 벤치에 앉아 꽃도 보고 향기도 느끼며 그 시간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