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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3. 묵상글 ( 연중 제5주간 금요일. - 섬세한 사랑, - 관상과 낙원. 등 )
^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아직 / 04:25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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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3. 연중 제5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2.13 04:15
- 섬세한 사랑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의 얘기는 마르코 복음에만 나오는 얘기인데
굳이 구분하자면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군중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주님께 데리고 온 일
-주님께서 그를 따로 데리고 나가 치유해주신 일
-사람들이 함구령을 어기고 있었던 일에 대해 떠벌린 일
그래서 오늘은 세 부분으로 나눠 묵상과 나눔을 하려고 하는데
‘왜 그랬을까?’라는 형식으로 하고자 합니다.
첫째로 사람들은 왜 장애인을 데리고 왔을까요?
스스로 걷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그는 왜 사람들에 의해 왔을까요?
치유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거나 수줍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의 치유는 사람들이 그를 데리고 온 것에서 시작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치유의 공동체성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치유가 공동체적으로 일어나기 위해서는
개인도 공동체에 열려있고 공동체도 개인의 필요에 열려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그를 치유해주실 때 “열려라!” 하고 명령하시는데
열려야 할 것은 귀와 입뿐 아니라 마음까지이고, 사실 마음이 먼저 열려야 합니다.
사실 많은 장애인이 장애로 인해 자기 안에 웅크리고 있기 쉬운데
그렇기에 치유를 위해서는 마음이 열리는 것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열리기 위해서는 개인도 열어야 하지만
공동체도 그가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섬세한 사랑을 보여야 합니다.
섬세한 사랑!
이것이 또한 주님께서 치유해주시며 보인 사랑입니다.
주님께서 왜 그를 굳이 사람들로부터 데리고 나가 치유해주셨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는 그 설명이 없지만 분명 그에게 그럴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다른 많은 경우 사람들 앞에서 또는 사람들 가운데 나오게 하여
고쳐주시던 주님께서 따로 데리고 나가 치유해주신 겁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열리라는 말씀 한마디로 얼마든지 고쳐주실 수 있는데도
침을 혀에 발라주시고 귀에 손을 대시고 숨을 불어 넣어주시는 등
오늘은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치유해주십니다.
섬세한 사랑에 모든 사랑을 더 하시는 주님의 사랑에
사람들은 감동하여 입을 닫으라는 데도 입을 열어 떠들어댑니다.
크고 섬세한 사랑에 마음이 열리고 입이 열려 복음과 구원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도 사랑하긴 하지만 우격다짐으로 사랑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작은 사랑으로 생색이나 내며 마음 열리길 바라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조금 더 큰 사랑에 조금 더 섬세한 사랑을 더 해야겠다는
자극을 듬뿍 받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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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3. 연중 제5주간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관상과 낙원(관상은 곧 낙원을 맛보는 길입니다.)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의 참된 자아를 발견한다는 것은, 다시금 에덴의 동산을 체험하는 것과 같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사진 생략>
인류가 원죄로 인해 에덴을 떠난 그 이후
관상과 낙원(관상은 곧 낙원을 맛보는 길입니다.)
2026년 2월 12일 목요일
관상 작가이자 수도승인 토머스 머튼의 저술 속에서, 심리치료사 피오나 가드너(Fioan Gardner)는 우리가 다시금 낙원을 체험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합니다: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은 어린 시절이 지나도 오래 남아, 구도자들로 하여금 내면과 세상 속에서 그 잃어버린 자리와 시간, 그리고 마음의 상태를 찾도록 이끕니다. 토머스 머튼에게 그것은 낙원에 대한 그리움, 혹은 직관이며, 곧 존재의 본래 상태인 에덴으로의 회복을 향한 갈망입니다. 그에게 이는 타락과 하느님과의 분리의 역전을 의미하며, 곧 시작을 향한 여정,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 안에서 누리던 원초적 일치와 조화의 회복"입니다. 이는 또한 참된 존재로 살아간다는 의미의 일부입니다.
머튼에게 있어 여정은 자기 내면에서 시작됩니다. 거짓된 자아는 분열과 현실로부터의 소외를 낳아 낙원의 삶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오직 그 거짓된 자아를 내려놓음으로써만 낙원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머튼은 "낙원에 산다는 것은 곧 참된 자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기록합니다.
머튼에게 낙원을 갈망한다는 것은 곧 순수함을 회복하려는 헌신을 의미합니다. 그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 성인에게 있어 낙원의 회복은 겸손과 영적 순수함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다시 말해, 의식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있는 그대로 존재하며 연약함을 드러내는 작은 아이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머튼은 낙원의 회복이 언제나 우리 안에 가능성으로 숨겨져 있으며, 이는 심리 안에서 반복되는 죽음과 부활의 순환을 포함하는 어려운 투쟁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은 여정을 걷는 동안 동시에 광야의 사막에 있으면서도 낙원의 동산에 있는 것입니다. [2]
관상적 수행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금 동산의 ‘신비로운 매혹’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줍니다:
현재 순간에 깨어 있음은 끊임없이 분주한 마음 속에 틈을 내는 것입니다…. 바로 그 맑은 공간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과 창조적 은총이 탄생하는 것입니다…. 바쁜 삶의 한가운데서도 내면의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잠시 멈추어 성찰할 수 있으 것입니다. 아마도 멈추어서 깊이 숙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시선은 생명을 목마름에서 해갈시키는 '생명의 물'에 대한 내적 갈망에 집중됩니다. 달리 말해서, 새로움과 부활의 자리로 나아가며, 성인기의 삶 속에서도 그림자와 가식 너머의 참된 생명을 엿보고, 잠시나마 어린아이의 영성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려지고 거짓된 자아의 삶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길은 의식의 눈을 열고 감각을 깨우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처럼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며 다시금 감각을 회복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중년의 어느 순간, 어린 시절 학대의 기억이 나를 멈추게 했습니다. 수치심은 내 안에 깊이 새겨져 있었고, 하느님에 대한 내 이미지도 상처 입었습니다. 그때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막으로 초대하신다는 내적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한동안 물러나 열린 상처를 탐구하라는 초대였습니다. "사막"에서 나는 영적 지도자와 상담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하느님과 함께 치유를 위한 다양한 영적 수행에 참여했습니다. 묵상은 수치스러운 생각들을 사랑받는 존재로 변화시켰습니다. 중심 기도는 마치 하느님의 치유적 치료와 같았습니다. 상상 기도는 하느님께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고 받아들이시는지를 보여주었습니다.
—Anne R.
References
[1] Thomas Merton, “The Recovery of Paradise,” Selected Essays, Patrick O’Connell ed. (Orbis, 2013), 56.
[2] Fiona Gardner, The Only Mind Worth Having: Thomas Merton and the Child Mind (Cascade Books, 2015), 135–136, 138.
[3] Gardner, Only Mind, 126–127.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Abishek Rana, untitled (detail), 2020,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동산 안에 있는 뱀이 우리를 멈추어 서게 합니다. 성숙한다는 것은 독과 도전을 식별하는 분별의 길임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순수에서 경험으로 나아가야 하지만, 그 모든 과정 속에서도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 머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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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주님의 지혜와 사랑의 힘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 지역인 데카폴리스에 계십니다. 어제의 치유 이야기에서는 달리 오늘은 예수님께서 직접 "안수(按手)"를 해 주시며 치유해 주십니다. 사람들이 청한 것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시기를" 간청했던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이상의 것을 행하십니다. 학자들은 당시 치유자들이 흔히 몸짓이나 외국어를 사용했으며, 일종의 마술적 의식처럼 보일 수도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침을 사용하는 것도 그 목록에 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오늘 복음에는 믿음에 대한 언급도, 마귀를 쫓아내는 구마에 대한 언급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점차 드러내시며, 당신의 방식과 정체성을 찾으시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으까요?! 어쩌면 예수님의 이런 이미지는 우리가 갖고 있던 기존의 이미지와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좋은 일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더 깊게 성찰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어제 언급해 드렸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인간적 삶 안에서 성장하셨음을 교회는 고백합니다. 따라서 그분의 공생활 안에서도 점차적으로 드러나는 성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청각장애가 곧 언어장애로 이어졌습니다. 말을 들을 수 없으니 말할 수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의 문제가 두 가지 문제가 되고, 더 나아가 말을 못한다는 이유로 지능까지 의심받으며 "벙어리"라는 낙인이 찍히곤 했습니다. 이렇게 사회적 편견과 배척이 겹겹이 쌓여, 청각장애인은 마치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 "제3인칭 단수"처럼 취급되었습니다. 이는 인간 존엄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 사람을 군중 속에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이는 단순한 치유 행위가 아니라, 그를 인격으로 존중하는 행위입니다. 군중은 그를 단순히 "제3인칭", 즉 자기들 관심 밖의 "저 사람"으로만 보았다면, 예수님은 그를 "제2인칭", 즉 직접적인 '나'와 '너', 즉, 마틴 부버의 말을 인용하자면, [주체와 또다른 주체]와의 관계 안에서 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에게 크게 소리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손가락을 귀에 넣고, 침으로 혀를 만지며, 하늘을 우러러보심으로써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몸짓으로 보여주십니다. 이는 단순한 치유가 아니라, 성사적 행위처럼 보이는 깊은 상징성을 지닙니다. 예수님의 손길과 시선은 곧 하느님의 은총이 그에게 흘러 들어감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인간 존엄을 회복시키는 구원의 표징입니다.
군중이 배척한 사람을 예수님은 따로 불러내어, 그를 존중하고 사랑으로 대하십니다. 이는 교회가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이들을 품어야 한다는 사명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몸짓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성사적 상징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이 인간에게 전달되는 방식과 닮아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오늘 복음은 단순한 치유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적 사랑과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인간의 존엄을 회복시키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날로 이런 지혜와 사랑의 힘을 더해 가셨던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섭리에 대한 크나큰 신뢰에서 나온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흔히 지혜가 나이가 들면서 저절로 생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옛말에 "늙은 바보만큼 어리석은 이는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젊은 시절에는 가장 지혜로웠던 솔로몬도 나이가 들면서 그 지혜를 잃었습니다. 또 어떤 이들은 교육을 통해 지혜를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는)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신다."(루카 10,21)고 말씀하셨습니다.
참된 지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의 선물입니다. 그러니 참된 지혜는 나이나 경험, 교육, 지능과 같은 것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지혜는 주님에게서 오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다."(집회 1,1). 그러므로 "여러분 가운데에 누구든지 지혜가 모자라면 하느님께 청하십시오. 하느님은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게 베푸시고 나무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의심하는 일 없이 믿음을 가지고 청해야 합니다."(야고 1,5-6).
그러니 매일 아침 지혜를 청하며 시작합시다. 날마다 주님께 기도합시다: "거룩한 하늘에서 지혜를 파견하시고 당신의 영광스러운 어좌에서 지혜를 보내시어 그가 제 곁에서 고생을 함께 나누게 하시고 당 마음에 드는 것이 무엇인지 제가 깨닫게 해 주십시오. 지혜는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기에 제가 일을 할 때에 저를 지혜롭게 이끌고 자기의 영광으로 저를 보호할 것입니다."(지혜 9,10-11).
그런데 이런 지혜와 사랑의 힘은 이미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지혜와 사랑의 힘이 우리 존재 안에 있음을 깊이 의식하며 주님께 그 지혜와 사랑을 더해 주십사고 청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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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3.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방인 지역인 티로와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지역을 지나 다시 갈릴래아로 오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마르 7,32)
사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혼자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에 따라 사는 종교입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귀’와 ‘입’은 신앙을 형성하는 기본적인 조건이 됩니다. 그러기에,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신앙형성에 있어 치명적입니다.
그러니 ‘귀먹은 이’란 단지 듣지 못하는 이가 아니라, 곧 귀가 있어도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입니다. 또한 ‘말 더듬는 이’란 입이 있어도 혀가 굳어져 말씀을 삼키지 않는 이입니다. 따라서 ‘귀먹고 말 더듬는다’는 것은 소통과 통교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친교를 나누지 않음이요, 단절과 분리요,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친교를 나누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일까?
그것은 귀와 입이 닫혀있어 말씀이 드나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막혀 있어서 흘러들고 흘러내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름 아닌 완고하여 고집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사실, 우리도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임에 틀림없습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광야로 불러내듯, 여인을 광야로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듯(호세 2,16-25 참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마르 7,33). 그리고 빵 다섯 개로 5천명을 먹이셨을 때처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의 뜻에 의탁하여 ‘숨을 내쉬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바로 그 순간, 저희는 그분 손가락을 통하여 만질 수 없는 신성을 만집니다. 곧바로 묶였던 ‘혀’가 풀리고 닫혔던 ‘귀’의 문이 열립니다. 마치, 아담이 말을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것처럼(창세 1,27-28;2,20), 힘들게 배워야 하는 말을 배우지도 않고도 말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당신 말씀을 듣도록 ‘듣는 귀’를 열어 당신 말씀을 심으십니다. 당신 손가락으로 혀를 도유하여 영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리고 이로써, “귀 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이사 35,5-6)는 이사야의 예언을 저희에게서 이루시고, 메시아 시대가 왔음을 알리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도유하십니다. 저희 귀를 열어주시어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주님, 저는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입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당신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당신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하고, 하고 싶지 않는 말은 하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주님, 저의 영혼을 도유하소서.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어 저의 귀와 입을 열어주소서.
저희 귀에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저의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소서.
제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시고,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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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3.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욥기 8, 7)라는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주로 새로 개업하는 사업을 축하하며 액자로 선물하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욥기의 이 말씀은 물질적인 부를 축복하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전체 문맥은 그와는 다른 의미입니다. 우리가 흔히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라는 말씀을 성공과 번영의 약속처럼 받아들이지만, 이 말은 하느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 아니라 고난받는 욥을 바라보던 인간의 해석에서 나온 말입니다. 욥기는 착하면 반드시 복을 받고, 실패하면 벌을 받는다는 단순한 계산을 조용히 무너뜨립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을 성공의 언어로 설명하지 않으시고, 인생을 성과표처럼 채점하지도 않으십니다. 욥의 마지막이 ‘창대해진 것’은 재산이 늘어난 데 있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을 붙들며 마침내 그분을 인격적으로 만났다는 데에 있습니다. 욥기의 끝에서 남는 것은 번영의 약속이 아니라,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그래서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 제 눈으로 당신을 뵙습니다.”(욥기 42, 5)
솔로몬은 지혜의 왕이었습니다. 다윗이 어느 날 궁궐의 대장장이에게 ‘반지’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대장장이는 반지를 아주 잘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대장장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 반지를 보면서 승리했을 때는 교만하지 않고, 패배했을 때라도 절망하지 않을 수 있는 글을 적어 놓으라고 했습니다. 대장장이는 반지는 잘 만들었지만, 그런 말을 넣을 만큼 지혜롭지는 않습니다. 그런 대장장이의 고민을 들었던 솔로몬 왕자는 대장장이에게 멋진 말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 말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였습니다. 승리의 기쁨도 지나갈 것이고, 패배의 아픔도 지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반지에 새겨진 글을 보고 기뻐하였습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는 있었지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약했습니다. 솔로몬은 이방의 신을 섬기는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지혜만으로는 솔로몬을 하느님께로 인도 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 어린이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마태오 11, 25) 예수님께서 사랑하셨던 사람들은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지식과 지혜로 무장했지만 교만했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록 지식과 지혜는 부족할지라도 ‘믿음’을 보여준 사람, 비록 죄를 지었을지라도 ‘회개’한 사람을 사랑하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던 여인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 기뻐하신다.”
지혜를 가졌고, 재물을 가졌고, 한 나라의 왕이었던 솔로몬은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왕은 자신이 자유롭게 날 수 있었던 ‘연줄’을 끊어버렸습니다. 지혜와 재물과 권력은 드러나는 표상일 뿐입니다. 마음과 정신의 건강을 잃어버린 솔로몬왕은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모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이방인의 여인은 아픈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지혜와 재물과 권력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이라는 ‘연줄’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가 보아라. 마귀가 이미 네 딸에게서 나갔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까요? 오늘 성서는 이야기합니다. “행복하여라, 공정하게 사는 이들, 언제나 정의를 실천하는 이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시고, 저를 찾아오시어 구원을 베푸소서. 그분은 목마른 이에게 물을 주시고, 굶주린 이를 좋은 것으로 배를 불리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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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3.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우리의 귀도 다시 한번 시원하게 뚫려지기를 소망합니다!
노화의 과정인지, 난청과 이명으로 인한 불편함이 만만치 않습니다.
여태껏 잘 사용했으면 됐지, 항상 이팔청춘으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려니 해야지, 하고 크게 마음먹어보지만, 일상적 불편은 삶을 크게 위축시킵니다.
더불어 아예 들리지 않는 분들의 삶이 얼마나 불편할까, 공감하며 연민의 마음도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베풀어진 예수님의 치유과정 한 동작 한 동작은
모두 하느님 자비와 은총으로 충만한 행위들이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환자를 군중 가운데서 불러내어 따로 데리고 가십니다.
대중 가운데서 오직 한 사람을 불러내십니다.
1대 1의 개별적인 관계,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치유작업을 시작하십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군중들 가운데서 오직 한사람, 나만을 따로 불러내고 계십니다.
1대 1의 각별하고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손가락을 환자의 귀에 넣으십니다.
마치 배앓이 하는 자녀를 배를 천천히 어루만져주는 엄마의 손길처럼 예수님께서는 환자의 아픈 곳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주십니다.
이 신체적 접촉행위로 인해 이미 환자는 심리적, 정신적 안정감을 체험합니다.
이미 치유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침을 발라 환자의 혀에 대십니다.
침은 당시 일종의 치료수단이었습니다.
마침내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와
밀접한 통교 속에 계셨음을, 모든 기적은 하느님 아버지의 능력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어서 한숨을 내쉽니다. 이 한숨은 환자에 대한 동정이 아니라 당신이 치유작업이 만만치 않음을 나타냅니다.
치유 활동에 대한 부담감을 아버지께 호소하고 도움을 청하는 심오한 동작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파타!”(열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에파타란 외침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이방인 지역이었던 데카폴리스 지방의 귀먹은 반벙어리는 전형적인 폐쇄형 인간의 상징입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절벽 같은 사람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폐쇄형 인간들 전체를 향해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에파타” 하고 외치십니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신비로 가득한 종교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을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나름의 수신 안테나를 높이 세워야 이해할 수 있고, 알아들을 수 있고,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주님의 “에파타” 하는 강력한 외침으로 인해 우리의 귀가 다시 한번 시원하게 뚫려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쏙쏙 들어오기를 기대합니다.
이웃의 충고나 격려의 말씀을 통해서 들려오는 그분의 음성을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귀가 뚫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예언자들의 예언서에 기록된 그대로였습니다.
이사야서 35장에 보면 이런 예언이 제시되어 있고, 예수님에 의해 예언은 그대로 적중되었습니다.
“그때에 소경은 눈을 뜨고 귀머거리는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우리의 귀가 제대로 뚫리기만 한다면, 우리의 눈이 제대로 열리기만 한다면, 우리의 혀가 제대로 풀리기만 한다면 세상만사가 다 기적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하루하루의 삶 전체가 기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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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3. 연중 제5주간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강만연님
■ 생활묵상 : 하느님 눈을 바라보는 사람과 바라보지 않는 사람의 차이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사람도 하느님을 직접 뵌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얼굴 모습이 어떤지를 아무도 잘 모릅니다. 이 세상에는 꼭 보고 확인을 해야만 본 게 되는 걸로 인정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 예를 드는 것은 적적하지 못해 생략하겠습니다. 제가 오늘 묵상글에 제목을 올릴 때 사용한 하느님의 눈 할 때 하느님의 눈은 우리의 얼굴에 눈썹 밑에 있는 눈처럼 하느님의 얼굴에 있는 눈을 의미하기도 있지만 저는 그런 눈보다 은유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느님은 육체로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영으로 계시는 분입니다. 무소부재하신 분이십니다. 이건 하느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존재를 하시는가 하는 가장 뛰어난 존재의 형식과 특성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최상의 표현입니다. 이 세상 어느 곳에 도 아니 계신 곳이 없다는 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적인 논리로 본다면 이건 하느님이 한 분으로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느님의 모습이 복제된 수많은 하느님이 각각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셔야 바로 무소부재하신 분이라는 게 설득력 있는 표현이 될 것입니다. 근데 하느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우리 인간의 눈과 의식 속에 있는 한계 안에서는 맞지만 하느님은 우리의 눈으로 생각하고 담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소부재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으실 수 있는 분입니다. 이것을 이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눈을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과 같은 그런 눈을 말하는 건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상상은 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은 거기에 있지 않습니다.
눈이라는 것의 기능은 보는 시각의 기능이 가장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신다고 할 때 그때 바라보시는 눈은 무소부재로 수도 없이 존재하는 하느님의 영이 계시는 곳에서 존재하는 그 자체가 바로 하느님의 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교 때 은유법을 배울 때 처음으로 그 개념을 배운 시가 바로 "내 마음은 호수" 할 때 바로 그 호수입니다. 수학적으로는 내 마음과 호수는 등식이 성립하지 않습니다. 바로 표현의 방식입니다. 오늘 묵상글에서 언급하는 하느님의 눈도 바로 이런 개념으로 이해를 하지 않으면 이해를 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시인은 내 마음은 호수라고 할 때 이때 호수는 실제 첫번째 의미는 실제 호수를 상징합니다. 그냥 단순히 자연물인 호수만을 상징하면 의미가 없습니다. 호수는 넓습니다.
즉, 내 마음은 넓다는 것도 의미할 수 있습니다. 호수는 맑습니다. 즉, 내 마음은 맑다는 의미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의미를 호수 하나를 통해 은유적으로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듯이 하느님의 눈도 이런 개념입니다. 인간의 눈은 보는 기능밖에 없지만 하느님의 눈은 다를 수 있습니다. 들을 수도 있습니다. 무슨 궤변이냐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게 궤변이라고 만약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은 영으로 계시는 분이 아니라고 부정하는 사람이 됩니다. 아주 어려운 개념인데 사실입니다.
신학적인 해석을 동원하지 않아도 방금 내 마음은 호수 할 때 호수의 특성을 두 개의 개념으로 나누어서 표현한 것처럼 말입니다. 잔잔한 호수라고 할 때 그땐 시각으로 표현했지만 그 시각 속에는 소리 청각의 느낌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영으로 계시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이런 하느님의 눈을 의식한다고 할 때 이런 사람은 그 순간만큼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사람과 하느님이 마치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미국과 한국처럼 그렇게 떨어져 있어도 말입니다. 인간의 의식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하느님은 바로 인간의 시공간을 초월하시기 때문에 그게 가능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이런 사실을 잘 의식하지 않기 때문에 죄라는 유혹에 쉽게 잘 빠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하느님의 눈을 의식하는 사람은 죄의 유혹에 빠질 수 없는 것입니다. 죄에 빠질 환경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젖은 종이가 불에 탈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바로 이게 하느님의 눈을 바라보는 사람과 하느님의 눈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라본다는 것은 결국은 우리 마음의 눈으로 하느님을 의식하듯이 하느님께서도 역시 우리를 그렇게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걸 의식하는 그 시간만큼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만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개념 하나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 '하느님 체험' 이 표현 이것 저는 아주 쉽게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걸 아주 특별한 사람만 체험하는 신비에 가까운 그런 개념으로 생각하는데 제가 오늘 올리는 이 묵상글을 잘 이해하시면 특별한 사람만 체험할 수 있는 그런 개념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아주 쉽습니다. 바로 자신이 하느님의 눈을 의식하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장소의 개념이 아닙니다. 이렇게만 하면 어디에서나 하느님과 항상 동행할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을 초청하는 새로운 방식이 되는 것이 됩니다. 하느님의 눈을 그렇다고 하느님에게서만 찾으려면 어려울 수 있고 또 잘 못 찾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눈이 어디에 가장 많이 계시는 줄 혹시 아시는지요?
바로 우리의 이웃과 형제자매 속에 있습니다. 특히나 소외된 이웃과 어렵고 곤궁에 처한 형제들 속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현세에서 그 속에 있는 하느님의 눈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나중에 우리의 영혼이 가게 되는 천국에서 하느님을 직접 뵌다고 해도 하느님을 볼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왜 그럴까요? 한국에서 앞을 못 보는 사람이 미국에 간다고 미국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냐고 하는 질문을 던지면 바로 이해가 될 것입니다. 결국 현세에서 하느님을 바라보는 눈을 만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게 나중에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최상의 가장 좋은 방법이 될 것입니다. 그 유일한 최고의 방법은 내가 이 세상에서 바로 그런 형제들 속으로 들어가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런 사람만이 결국 하느님을 나중에 천국에서 만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만이 성모님 품에 안길 수 있을 겁니다.
이 묵상글은 단순히 한두 페이지가 되겠지만 제가 그동안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작품인 삼위일체 그 어려운 책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책을 공부하면서 아주 쬐끔 정말 쥐꼬리도 안 되는 그런 얄팍한 지식을 동원해서 한 묵상입니다. 그러니 약간 4차원 같은 소리처럼 들릴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몇번 천천히 읽어보시면 무슨 느낌인지 그 정도는 와 닿을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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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3. 연중 제5주간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르 7,31–37
사람들은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말을 더듬습니다.
하지만 복음은, 이 사람이 단지 “의학적 문제”를 가진 존재가 아니라
관계와 공동체 안에서 닫혀 버린 삶을 지닌 사람임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군중 속에서 그를 치료하지 않으십니다.
그를 따로 데리고 가십니다.
치유는 구경거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존엄을 회복시키는 사랑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귀에 손을 대시고,
혀에 침을 바르신 뒤,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 “열려라!”
성 아우구스티노는
인간의 가장 깊은 병을
‘몸의 장애’보다 먼저
마음의 닫힘에서 찾습니다.
사람은 듣지 못하면 오해하며,
오해하면 두려워지고,
두려움은 사랑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에게 회복은
기능의 회복만이 아니라
사랑의 질서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열려라”는
귀와 혀를 여는 말씀이면서 동시에,
우리 영혼을 향한 부르심입니다.
•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열리고
• 이웃을 살리는 말을 건네는 혀가 열리며
• 무엇보다 사랑을 믿는 마음의 문이 열립니다.
친절/선행 주간의 금요일, 주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무엇에 닫혀 있는가?
상처 때문에, 분노 때문에, 피곤함 때문에
누군가를 향한 문을 걸어 잠그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주님은 오늘도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에파타. 너의 마음이 열려라.”
친절은 바로 그 열림에서 시작되고,
선행은 그 열린 마음이 남기는 작은 흔적입니다.
주님,
제 귀를 열어 당신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제 마음을 열어 이웃의 아픔을 알아듣게 하소서.
제가 친절로 먼저 열리고,
선행으로 당신의 사랑을 남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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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3. 연중 제5주간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07: 50 추가
마르 7,31-37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오늘 복음 속 치유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다른 병자들을 치유하실 때 보여주신 ‘일반적’인 모습과는 많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보통 당신께 오는 이들의 ‘믿음’이 그저 육체적 질병에서 낫는 수준을 넘어 구원에 이를 수 있을 정도로 깊어지도록 이끄시고 나서, ‘그들이 믿는대로’ 당신 말씀을 통해 치유해주셨지요. 병자들에게 직접 손을 대시는 경우도 있지만 따뜻한 손길로 어루만져 주시는 정도이지 어떤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다른 행동을 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귀 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시는 과정에서 총 세 단계에 걸쳐 특별한 행동을 하십니니다.
먼저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나가십니다. 그 모습에서 우리들 각자와 특별한 관계를 맺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바람이 드러납니다. 다음으로 그의 두 귀에 당신 손가락을 집어 넣으십니다. 토마스에게는 그의 손가락을 당신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심으로써 그를 향한 사랑을 보여주셨다면, 그 병자에게는 오히려 당신이 그의 아픈 부위에 손가락을 넣으심으로써 그의 아픔에 공감하시며 함께 하고자 하시는 사랑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마지막으로 당신 손가락에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십니다. 이는 그가 병에서 나아 건강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입니다. 사람들과 제대로 된 소통을 할 수 없어 늘 외톨이로 지냈던 그에게 필요한 건 어머니처럼 따스하게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손길’임을 아셨기에, 어머니가 벌레에 물린 자녀에게 자기 침을 발라주듯이, 배탈이 나 제대로 소화를 못시키는 자녀를 위해 자기가 대신 밥을 꼭꼭 씹어 입에 넣어주듯이, 사랑과 진심으로 당신 침을 그의 혀에 발라주신 겁니다.
자녀는 자기 환부에 본인 침을 발라주는 어머니의 행동을 더럽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행동이 자신을 향한 사랑에서 우러나온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 또한 어머니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침을 발라주는 행위가 곧 ‘사랑의 표징’이 되는 것이지요. 사랑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의 행동 안에 담긴 깊은 뜻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숨을 사람의 코에 불어 넣으시어 생명을 주신 것처럼, 예수님은 당신 침을 그 병자의 입에 넣으시어 그가 사랑의 관계에서 단절되어 외롭게 살던 과거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그리고 이웃 형제들과 제대로 소통하며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기쁨을 온전히 누리게 하려고 하신 겁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오해와 두려움으로 꽉 막혀있던 가슴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상처입기 싫어서, 귀찮은 일에 엮이거나 손해보고 싶지 않아서 굳게 걸어잠근 마음의 문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마음만 제대로 열려있다면 귀가 안들리거나 말을 더듬는 건 소통하는데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꼭 닫아두면 귀나 입이 멀쩡해도 듣고 싶은 대로만 듣고,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기에 소통이 끊기고 관계가 단절되는 것이지요. 그러니 우리도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활짝 열어야겠습니다. 귀를 활짝 열어 그분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말과 행동으로 널리 선포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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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213. 연중 제5주간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7:55 추가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예수님께서 다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1-37)”
1) 이 이야기는, “예수님은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창조 때의 좋았던 상태로 복구하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분이 모든 것을 좋게 하셨다.”인데,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에서 온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은,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 라는 뜻이기도 하고, “예수님은 이 세상을, 천지창조 때의 상태로 원상복구하시는 분”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는, 이사야서의 예언을 인용한 말입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이사 35,5-6).”
이사야서의 예언을 예수님께서 하신 일에 적용한 것은, ‘예수님은 메시아’ 라고 증언한 것과 같습니다.
2) 요한복음 9장에 있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스승님, 누가 죄를 지었기에 저이가 눈먼 사람으로 태어났습니까?
저 사람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저 사람이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그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요한 9,1-3)”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고통과 불행의 원인에 대한 말씀은 아니고,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일이 저 사람에게서 드러나려고 그리된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드러내려고 그 사람을 눈멀게 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고통과 불행에서도 하느님의 일이(하느님의 섭리와 자비가)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사람의 고통과 불행을
그 사람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물론 자기 죄 때문에 불행해지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정말로 억울하게 고통과 불행을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사람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죄를 통하여 죽음이 들어왔듯이, 또한 이렇게 모두 죄를 지었으므로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미치게 되었습니다(로마 5,12).”
“그 한 사람의 범죄로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죽음이 지배하게 되었지만, 은총과 의로움의 선물을
충만히 받은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통하여 생명을 누리며 지배할 것입니다(로마 5,17).”
<아담과 하와의 원죄 때문에 이 세상이 고장 나고,
이 세상에 고통과 불행이 생겼다는 설명을 들으면, 누구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사실 ‘원죄론’은 인간 세상 현실의 원인을 신학적으로 설명한 것일 뿐이고,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떻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 세상은 목적지가 아니라 경유지일 뿐이며, 우리 인생도 지나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영원한 목적지’로 데리고 가려고 오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학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3) “귀가 열리고”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었고”로,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는, “하느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할 수 있게 되었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말은 ‘신체장애’에 관한 말이 아니라,
‘말씀이신 분의 강생’에 관한 말이 됩니다.
어쩌다가 인간 세상이 이렇게 고장 났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원죄론은 아직도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입니다.>
그런데 원인을 알아낸다고 해서 인간의 힘만으로 고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메시아’로 오신 분만이 고장 난 세상과 고장 난 인생을 고쳐 주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아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안식일에 눈먼 사람을 고치는 일을 했다고 시비를 거는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자신이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는 것을 제대로 깨닫고, 인정하고, 고백하면서 자비를 간청하는 사람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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