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이후 중국 조선족,중국 정착 과정에서의 슬픈 역사-16]
그러나 미국의 참전소식을 접하면서 조선인사회는 동요했다.
이들의 염려는 무엇보다도 국공내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시 전쟁에 참여해야 될지도 모른다는 데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조선인의 수는 대략 10만여 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한다.이 수치는 당시 전체 조선인 111만여 명의 9%에 가까운 것이다.
한국전쟁 발발 이전 북한 주력부대에 배치된 조선인은 6만 5천여 명에 이른다.
이 수치는 전쟁 발발 당시 약 20만 명의 북한군 병력의 30%에 가깝다. 중국공산당은 1950년 10월 8일 공식으로 출병을 결의했으며 당시 소련에 머물고 있었던 주은래가 10월 14일 스탈린에게 통보했다.
조선인을 포함한 중국군은 10월 19일부터 인민지원군의 이름으로 북한으로 투입됐다.
동북지역 조선인사회에서는 전쟁 참여를 위한 참전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각 직장이나 학교 등에서는 군중 궐기대회를 개최해 참전을 호소했다. 조선인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젊은 층을 대상으로 참전을 독려했다. 그 결과 1950년 11월 이후 각급 대학에서 입대 신청이 쇄도했다. 연변의 거의 모든 조선인 청년들이 입대를 신청했다. 연변지역의 경우 전쟁기간 동안 연변 5개 현에서 5천여 명의 조선족 청년들이 입대했고 5천 740여 명이 공작대, 통역원, 운수대, 담가대 등의 일원으로 전선에 투입됐다.
중국의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인부대들은 1949년 여름과 1950년 봄에 북한으로 들어가 각각 북한인민군 5사단, 6사단, 12사단 그리고 18연대(제4사단 휘하)로 편재됐다.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 보병 21개 연대 가운데 47%에 해당하는 10개 연대가 조선인부대로 편성됐다.
조선인부대는 전투력이 대단히 뛰어났다.북한군부대의 전투력을 1로 평가할 때 조선인 부대는 1.5로 평가됐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도 중국에서는 한동안 조선인이나 조선민족이라는 호칭이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1952년 9월 3일 조선족 밀집지역에 최초로 민족구역자치제가 도입됐을 때도 ’연변조선민족자치구‘로 칭했었다.
이 명칭은 3년 후 자치구를 자치주로 축소하면서 조선민족에서 ’민‘자를 빼고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변경됐다
조선족 명칭이 이때 처음 공식적으로 사용됐다.
중국공산당은 조선민족을 조선족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적지 않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족 동포사회에서 조선족이라는 명칭이 보편적으로 사용된 것은 이보다 늦은 1950년대 말 동북지역에서 진행된, 조선족 대상의 민족 정풍운동을 겪고 난 이후부터인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연변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정관용의 글에서도 유추된다.
그는 1955년 소련 유학길에 올라 5년 후인 1960년에 귀국했다. 그는 연변으로 돌아온 직후 이곳의 변화 실상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학교를 떠날 때까지만 해도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조국이 도대체 중국인지 아니면 조선인지 잘 분간하지 못했었다. 도리상으로 우리가 중국에서 살고 중국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 속에서 사니까 중국을 조국으로 보아야 할 것만을 사실이나 조선도 조국으로 느껴졌다.
그리고 중국이 우리의 조국인 이상 우리도 크게 말하면 중국인이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중국사람이라고 하면 한족을 가리켰으나 이제부터는 중국인이라는 호칭이 우리에게도 해당되니 한족을 중국사람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말끝마다 한족, 한어, 조선족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1955년부터 1960년까지의 5년여 사이에 조선인 대신 조선족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결국 조선족이란 명칭은 중국공산당이 동북지역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지위를 정상화하는 과정에서 중국 공민을 구성하는 소수민족의 일원으로 인정함에 따라 사용된 것이다.
따라서 이 명칭은 민족적 관점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이 조선인을 다민족사회인 중국사회의 정상적인 일원으로 수용하기 위한 정책을 반영하고 있다.
중국에 공산정권이 수립되기 전 대부분의 조선인은 조선 국적을 보유하고 있었다. 일부만이 중국 국적을 보유하거나 무국적자였다. 또 일제의 이주정책에 따라 만주국 시기에 동북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들 중에는 만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1948년 남북한에 각각 정권이 수립됨에 따라 중국공산당은 중국 내 조선인의 국적문제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다.
중국공산당이 토지개혁 과정에서 조선인에게 이중국적을 부여하고 조선인도 국공내전에 참전하여 중국공산당을 위해 큰 공을 세웠지만 국적문제는 여전히 예민하고 중요한 문제였다.
참고서적
조선족, 그들은 누구인가
곽승지 지음, 인간사랑 출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