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천 사도 요한 신부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갈라티아 2,1-2.7-14 루카 11,1-4
월요일부터 우리는 제1독서에서 갈라티아서를 읽고 있습니다. 이 서간의 서두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고정된 양식(1코린 1,4-9 참조)을 생략한 채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꽤 조급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은총 안에서 여러분을 불러 주신 분을 여러분이 그토록 빨리 버리고 다른 복음으로
돌아서다니,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1,6). 대체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요?
갈라티아 지역에 공동체를 세우고 복음을 전파한 이는 바오로였지만 그와 다른 가르침을 전하는
이들, 곧 할례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신자들에게 혼란을 주었던 듯합니다. 게다가 그들은 예수님의 직제자가 아닌 바오로의 사도직에
의문을 제기하였던 모양입니다. 그의 권위가 열두 사도에 미치지 못한다거나 또는 그들에게
종속된다고 여기며 바오로를 폄하한 것입니다.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써 의롭게 되는 것이야말로 바오로가 전한 복음의 핵심이었습니다
(갈라 2,16 참조). 바오로는 이 복음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것”(1,11)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2), 곧 하느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고자 먼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하여 변론합니다(1─2장 참조).
바로 어제와 오늘의 독서 말씀이지요. 바오로는 다마스쿠스 회심 때 하느님께 직접 사도직을 받고
이를 한참 수행한 다음에야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사도들을 만났다고 전합니다.
이는 자신의 사도직이 예루살렘의 사도들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느님께 직접 받은 것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도직의 정당성은 바오로가 전한 복음의 진실성과도
바로 연결됩니다.
월등히 좋은 ‘새것’이 왔음에도 여전히 ‘옛것’에 미련을 두며 그 새로움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유다인들의 모습에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익숙한 것에만 머무르며 편히 살려는 신앙인이 아니라, 깨어 기도하며
늘 새롭게 자신을 성화하는 신앙인의 삶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합시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2코린 5,17).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
***********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갈라티아 2,1-2.7-14 루카 11,1-4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기도’는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기도를
'욕망의 해석자'라고 표현했습니다. 그의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지고 있습니다.“‘사도신경’은 우리에게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십계명’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며, ‘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그렇습니다.'주님의 기도'는 우리가 원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의 기도’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가장 완전한 기도이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올바르게 바랄 수 있는
것을 모두 청할 뿐 아니라, 우리가 마땅히 청해야 할 것을 순서대로 청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 기도는 청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줄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정서까지도 형성시켜준다.”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드림으로써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고, 욕망을 훈련시켜 하느님의 목적과 조화를 향하도록 변화한다.”
그렇습니다. ‘기도’를 보면, 그 사람이 보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이 기도에 담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 안에는 그 사람이 담겨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기도'에는 예수님이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당신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에 담기기를 바라시는 것들이 무엇인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문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시고자 하셨던 것들이 수정처럼 농축되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은 비록 짧지만, 그리스도교 신학과 신앙의 근본과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참으로 복음 전체를 요약한 것이다.
”사실 이 기도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준 기도’로서, ‘예수님의 기도’라는 사실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기도를 드릴 때 예수님과 함께 아버지께 기도드리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기도의 배후에는
언제나 예수님이 함께 동행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드님을 통하여 비로소 ‘아버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이처럼 이 기도는 우리에게 ‘아버지’를 선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이 되게 합니다.
곧 성자의 반열에 들게 하고 하느님이 되게 합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놀라운, 고귀한 기도인지요?
사실 올바르게 사는 것은 올바른 기도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오늘의 샘 기도>
주님!
당신께서는 저희를 성자의 반열로 들어 올리시어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지위에 들어 올리셨습니다.
이제는 제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소서.
제가 바라는 나라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나라를 이루소서.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생명의 빵이신 아드님을 양식으로 삼아 당신 안에서 영원히 살고,
당신과 한 몸이 되게 하소서.
다름 아닌 용서를 통하여 그러하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사람 되게 하시어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
윤명기 요한칸시오 신부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루카 11,1-4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달라고 청하고 있습니다.
이 대답으로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른바 '주님의 기도'라고 부르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이 기도의 본질적인 내용에 관심을 집중해 보도록 합시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 기도는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시작함으로써 하느님의 부성(父性)의
표지 아래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기도에 의해서 예수께서는 하느님이 당신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또한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사실 '아빠, 아버지'라는 아람어식 표현 그대로 하느님은 우리 아버지인 것입니다.
'아빠'라고 하는 이 표현은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다른 여러 표현들과
마찬가지의 의미에서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가장 원초적인 표현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그리고 우리는 서로 함께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릅니다. 예수께서 인간으로 오셨고
우리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신성으로는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인간으로서는 우리의 형제가 되셔서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양자, 양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하느님이시며 우리의 하느님이신 분을 같은 아버지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을 인식하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신과 인간과의 관계는 단순히 절대자와 피조물의 관계가 아니라 아버지와 자녀, 즉 부자(父子)
관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좋은 부모는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자녀가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그들이 자녀들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러합니다. 그것은 자유롭게 주어지는 사랑입니다.
하느님은 아버지로 그러한 방식으로 우리를 깊이 사랑하십니다. 자녀들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습니다. 세상에서도 부모는 자녀를 위해 온갖 희생과 수고를 기꺼이 아끼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인간의 부모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만을 베푸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이처럼 좋으신 아버지께 바치는 자녀의 기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즉 어린아이의 태도로서 아버지를 완전히 신뢰하고 의탁하고 순종하며 사랑하는 태도를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우리에게 주시면서 이것을 가르쳐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고자하는 진실된 의미를 가지고 기도함으로써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기도를 바치도록 해야겠습니다.
또한 이 기도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내용은 예수께서 무엇보다도 먼저 성부께
바쳐드려야 할 두 가지 기도내용에 관해 가르쳐주고 계시다는 점입니다.
즉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의 나라가 임하심, 그리고 영신적,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면서 땅의 필요,
즉 물질적 필요도 구해야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구하지 않은 채 땅의 필요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땅의 필요, 즉 물질적 필요도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이지만
하느님의 나라와 영적 사정을 위해 기도하고 은총을 청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내용과 그 지향들을 한 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혹시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만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의 물질적 필요만을 간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꾸준히 바쳐야 할 기도의 지향들을 생각해 봅시다.
교회를 위해서, 우리 본당공동체를 위해서,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을 위해서,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 성직자와 수도자를 위해서,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 젊은 이들을 위해서, 연옥영혼들을 위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 등등
세상은 우리의 기도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살고있는 이 시대는 사람들의 죄로 인해 너무 마음이 상하신 하느님을
위로해 드리고 그 죄들을 보속하는 것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입니다.
죄를 범했을 때는 정의의 차원에서 반드시 배상(보속)을 필요로 합니다.
죄를 짓는 사람만 많고 보속하는 이가 적기 때문에 많은 불행들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1917년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은 3명의 어린이들에게 지옥을 보여주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기도해 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다."
우리는 좀 더 시야를 넓혀 우리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또 물질적 필요만을 간구 할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해서, 또 영신적 사정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베푸신 그 헤아릴 길 없는 사랑에
진정 감사의 기도를 드립시다.
그리고 사랑이신 분이 사랑 받지 못하고 계시는 이 시대에 그분의 사랑에 응답하는 기도와
보속의 군대를 이룹시다. 아버지의 사랑에 마음을 열고 그분을 위해 결심하며
우리의 기도를 필요로 하는 이들을 매일 꼭 기억하도록 합시다.
부산교구 윤명기 요한칸시오 신부
- ‘오요안 신부의 가톨릭‘
가톨릭사랑방 catholics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