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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자유를 소망하는 공익인간 유지나의 오해 풀기 | ||
[필름 2.0 2005-12-08 18:40] | ||
평론가, 교수, 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 페미니스트 논객, 방송 진행자 등 유지나를 수식하는 말들은 많다. 오지랖도 넓다고? 아서라, 그건 당신의 오해다. 장병원 기자 요즘 하는 일이 너무 많은 거 아닌가? 유지나 전공이 영화고, 그걸로 글을 쓰고 영화를 가르친다. 또 내 생각을 실천하다 보니 스크린쿼터문화연대(이하 ‘문화연대’) 일도 하게 됐다. 그 모든 일이 따로 떨어진 건 아니다. 한국에서 평론가로만 활동하는 건 불가능하다. 내가 평론가나 교수가 아니라면 문화연대 이사장을 시켰겠는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거다.(웃음) 영화 관련 이슈가 있을 때 침묵해도 되겠지만 내 생각을 자주 발언하게 됐다. 그래서 방송도 가끔 나가고. 다들 그렇게 살지 않나? 나도 내 인생을 이렇게 풀려고 하지는 않았다.(웃음) 장병원 기자 어쩌다 그렇게 올라운드 플레이어가 됐나? 유지나 모든 일은 나에 대한 오해에서 시작됐다. 남들의 오해를 통해 또는 나 혼자 착각해서 일을 떠맡았다. 그 일을 하면서 생기는 재미, 그걸 해야 되는 책임감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모든 위대한 인물은 세상의 오해때문에 죽었다. 뭐, 내가 그런 위대한 인물은 아니지만 오해를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장병원 기자 한국 사회는 여러 가지 일을 하면 소위 오지랖 넓다, 평론가면 영화평론이나 잘하지 왜 여기저기 끼냐며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유지나 사실 낄 때는 더 많았지만 자제했다. 어느 순간부터 내가 혼자 잘나서 여기까지 온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공덕과 기대 속에서 일을 해왔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주변을 돌보고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힘이 다하는 한 도와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다. 장병원 기자 문화연대 이사장직도 그런 차원에서 맡은 건가? 유지나 스크린쿼터 관련해서는 90년대 말부터 국제연대 일을 계속 했다. 내가 프랑스에서 유학을 하고 그 쪽 문화에 대해 아는 게 있다고 믿었는지, 문성근 이사장이 있을 때부터 프랑스 사례나 상황에 대해 내게 문의를 자주 했고 거기에 응하다 보니 그게 내 일이 됐다. 문성근 이사장이 물러나면서 누군가 다음 사람을 찾아야 됐을 당시, 스크린쿼터 운동 방향이 국제연대를 강화하자는 쪽으로 모아졌다. 그래서 내가 천거됐다. 내 생각은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배우나 감독이 하는 게 더 좋겠다는 것이어서 처음에는 고사를 했다. 그러다가 배우나 감독 하나와 공동으로 한다는 조건을 걸고 수락했다. 장병원 기자 배우나 감독만큼 유명인사 아닌가? 유지나 이젠 그런 유명인사도 아니다. 나와 함께할 공동 이사장으로 여러 사람을 접촉하다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어 내가 독박을 쓴 거다. 장병원 기자 국제연대는 활발하지만 스크린쿼터에 대한 국내 여론은 영화인들에게 호의적인 쪽으로 흘러가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유지나 스크린쿼터 지지가 예전 같지 못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한국영화가 굉장히 잘되고 있기 때문에 쿼터가 없어도 여전히 잘될 것이라는 믿음이 첫 번째, 경제가 이렇게 안 좋은데 스크린쿼터가 국가 경제의 갈 길을 막고 있다는 의식이 두 번째다. 한마디로 영화인들의 밥그릇 챙기기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지고 다른 분야가 손해를 본다는 관념이다. 경제발전지상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쿼터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지만 난 영화를 경쟁력으로 보지 않는다. 스크린쿼터 운동을 하게 된 발단도 거기부터다. 소수가 재미있다고 하는 영화는 경쟁력이 없으니까 사라져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사라져야 할 것은 경쟁력이 있어야만 살아남는다는 일류 중심주의다. '세계와 경쟁하기'라는 관념이 우리를 길들이기 시작한 게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 와 접속한 김영삼 정권 때부터다. 그 때 공익 광고 보면 농부에게 “전 지구 저 편의 누구와 경쟁합니다”라는 말을 하도록 시킨다. 자연 환경, 농경 조건이 다른데 균등 경쟁이 되는가? 농업이, 영화가 맥도날드 햄버거도 아닌데. 그런 표준화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강한 저항심이 있다. 장병원 기자 한국영화가 잘되고 있는데 영화인들은 왜 저렇게 강경한가, 영화인들 스스로가 한국영화 점유율이 50% 이상 가면 축소 또는 폐지하겠다고 했는데 왜 말을 바꾸느냐, 하면서 의구심을 갖는 사람들도 많다. 유지나 맞는 지적이다. 나 스스로도 자문을 많이 한 부분이다. 그럼 이렇게 생각해 보자. 한국영화가 시장 점유율 30% 미만일 때는 ‘한국영화가 스크린쿼터 때문에 경쟁력이 없다. 온실처럼 보호 장치를 두고 경쟁력 키우기에 게으른 쿼터를 폐지하자’는 게 당시 논리였다. 그런데 한국영화가 성장한 지금은, ‘경쟁력이 있으니까 보호의 병풍을 걷으라’고 한다. 쿼터를 없애기 위해 만들어낸 논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스크린쿼터 투쟁은 한국영화 산업 침체기에 시작한 운동이다. 한국영화 점유율 올라간 게 2000년 이후다. 이제 겨우 5년이다. 지금도 1년에 한 번씩 한국영화 위기론이 고개를 든다. 언제고 사라질 수 있는 불안한 호황이라는 것이다. 쿼터 투쟁을 하면서 영화인들의 의식도 변했다. 쿼터 투쟁이 영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산업 전반, 경제 전반에 걸친 대단히 중요한 문제란 걸 자각하게 됐다. 그래서 상징적인 싸움이 돼버렸다. 그래서 논의는 산만해지고 핑계를 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방향으로 운동 목표를 확장하게 된 것이다. 장병원 기자 90년대 중반과 상황이 바뀌었다면 영화인들도 그에 맞는 대체 논리를 내세워야 하는데 그런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유지나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할리우드영화가 50% 이상 점유율이라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영화가 50% 이상이 되면 이상하다,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이 세계의 평균 수치와 모든 게 같아야 하는가? 전 세계 국가 중 한국의 경제 수준이 15위 안에 드는데 여성 인권이나 공적 영역 참여도는 교육 정도에 비해 뒤에서부터 세어야 한다.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 쿼터를 양보하면 경제도 나아지고 실업률도 떨어지게 되는 것처럼 호도되는 논리가 허구적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장병원 기자 한때는 스타 평론가로 이름을 날렸다. 유지나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한창 잘나갈 때 그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가 영화 얘기를 했는데, 그 때는 내가 생각해도 인기가 좀 있었다. 팬 레터를 수백 통씩 받았으니까. 세상에. 평론가에게 팬레터라니. 장병원 기자 평론 활동을 줄인 건 영화 문화나 비평 문화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인가. 아니면 평론보다 다른 쪽으로 활동 방향을 수정한건가? 유지나 물리적인 시간이 허락치 않고 예전처럼 많은 영화를 보지 못한다. 방송에 많이 안 나가고 지면 영화 저널에 기고하지 않기 때문에 평론 활동이 뜸하다고 느끼는데 일부러 그런 건 아니고 살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 사실 매일 글을 쓴다. 인터넷 웹진에 이슈와 논점 중심으로 하는 에세이 영화평을 쓴다. 장병원 기자 '유지나 하면 페미니스트. 영화를 봐도 페미니즘에 입각해서 본다’는 의식이 대중들 머리 속에 박혀 있다. 실제로 그런 방향에서 논쟁적으로 영화를 다루기도 했다. EBS 영화 토론 프로그램에서 <반지의 제왕>에 대해 남성중심적 제국주의 영화라고 주장해 논쟁을 일으킨 것이 기억에 남는다. 유지나 <반지의 제왕>은 남성 중심적이라기보다 제국주의적이기 때문에 비판했다. <반지의 제왕>을 칭찬했으면 사랑받았을까? 그렇지 않다. 평론이 객관적일 수 있다면 그건 평론가가 가진 주관적 관점 속에서의 객관성일 것이다. 종합적이고 객관적으로 모든 걸 보는 평론은 없다. 있다 해도 난 그런 걸 할 수 있는 주제가 못된다. 모든 걸 다 헤아려 둥글게 둥글게 봐지지 않는다. 그런 도 닦는 듯 한 자세는 인생 철학으로는 좋을지 몰라도 평론가가 가져야 할 태도는 아니라고 본다. 남이 만들어놓은 작품을 자신의 시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 평론이다. 나 보고 칭찬 일변도의 주례사 평론을 하란 말인가. 지금도 여기저기서 날 불러주는 건 눈치 보지 않고 내 입장에서 할 말을 다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장병원 기자 일각에서는 너무 편협하고 일면적으로 영화를 보는 게 아니냐고 공격하기도 하는데. 유지나 페미니즘 이론에 경도돼 한 말이든 아니든, 내겐 너무 자연스러운 발상에 대해 공격하는 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공격과 비판이 있는 건 좋지만 그렇게 공격하는 건 의미가 없다. 난 남성 평론가에게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남성 중심적으로 영화를 볼 수가 있는가라고 공격하지 않는다. 장애인이 장애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게 이상한가? 한국인이 한국인의 시각으로 보는 게 이상한가? 하물며 여성에게 여성의 시각으로 영화를 보지 말라는 것인가? 그건 비합리적이고 무리한 지적이다. 내가 지닌 강렬한 주체성이 페미니즘으로 인정받는 것이라면, 그런 시각으로 영화를 봤다고 문제 삼는 것은 이상하다. 그런 질문을 받는다면 그렇게 말하는 이에게 되돌려 주고 싶다. 그럼 당신은 어떤 입장에서 세상과 영화를 보는가? 장병원 기자 TV 토론에서도 자주 얼굴을 봤다. 대마초 합법화 논쟁 때도 나왔고 얼마 전 충무로 제작사와 매니지먼트사 갈등이 불거졌을 때도 여기저기 토론회에 나왔는데 논쟁을 즐기는 취향 탓인가? 유지나 다양성 확충을 통한 명랑 사회 도래를 위해서.(웃음) 대마초 논쟁은 사실 김부선 때문에 나간 것이다. 여배우들이 개인적으로 억울한 일을 당하거나 여성으로서 위해를 당하면 날 가끔 찾는다. 난 그걸 영광으로 생각한다. 내게 어려움이 있을 때 나를 지탱하고 도와준 사람들이 많다. 받은 게 있기 때문에 되돌려주는 차원에서 그런 경우에는 적극적으로 나선다. 또 대마에 대해서는 행위에 비해 너무 과잉 처벌한다는 생각에서 나갔다. 토론회 나가기 위해 대마초에 대한 공부를 엄청 했다. 과외도 많이 받고. 인터넷 서핑을 너무 해 손목이 나갔을 정도다. 장병원 기자 공부를 하니 의식화가 되던가? 유지나 대마 처벌은 범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잡아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완전히 전체주의적인 독재 정권이 만들어낸 논리다. 난 경제적인 인간만을 양성하는 사회에 반대하고 개인이 제 멋대로 널럴하게 사는 사회를 동경한다. 그래서 대마 흡연이 감옥에 갈 정도로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마초 처벌은 박정희가 신중현을 잡아 넣으려고 사문화된 법을 부활시켜 시작된 것이다. 신중현이 앨범에 건전 가요를 삽입하지 않은 유일한 가수였기에 그랬다는 심증과 법적 판례가 그걸 뒷받침한다. 대마관리법이라는 게 독재 권력이 비위 거스르는 예술가들을 적실에 잡아넣고 국민 교화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발전시킨 법인 셈이다. 이건 변호사 자문 다 받은 거다. 이런 법은 다시 손봐야 한다는 취지에서 나갔다. 호주제만큼의 악영향은 아니지만 내가 살고 싶어 하는 사회가 되는 데 장애가 되는 법이라는 생각에서다. 장병원 기자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수석 입학자였다. 일설로는 아카데미 재학 시절 만든 단편영화가 상당히 훌륭했다고 들었다. 영화 찍기를 포기하고 평론으로 전향한 셈인데 지금이라도 영화를 찍어볼 생각은 없나? 유지나 그것도 약간의 오해가 있었다. 나중에 영화아카데미 심사하신 유현목 감독에게 들었는데 "아카데미에 지적인 배우도 하나 있어야 되니까 유지나는 배우로 키우자"고 하고 뽑았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난 실패작이다.(웃음) 배우는커녕 영화를 만들지도 않고 파리 가서 공부해 교수가 됐으니까. 지금도 영화 안 만드냐, 만들어라는 얘기도 듣고 심지어 투자하겠다는 사람도 있었다. 영화를 만들어야 된다는 절실함이 없으니까 만들지 못한 게 아닐까. 난 시기마다 하고픈 일을 즐겁게 잘살면 된다는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평생 영화를 만들지 않겠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언젠가 만들 것이라는 말도 못한다. 장병원 기자 부친께서 60년대 초까지 영화감독으로 활동하신 유두연 감독이다. 유년기부터 가정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았겠다. 유지나 온 가족이 영화광이었다. 영화를 좋아한 건 아버지 영향이 확실하다. 한국영화, 외화 가릴 것 없이 당시 개봉하는 영화는 거의 다 봤다. 영화가 아버지 업종이었으니 현장 얘기, 배우들 얘기를 듣고 자랐다. 작은 언니는 영화에 아역으로 출연도 했다. 박정희 정권 들어선 뒤 <파멸>이라는 영화를 제작했다가 심의에 걸려 제작 중지를 당한 뒤 화병으로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영화를 해서 돌아가셨다는 생각 때문에 영화를 멀리하게 했다. ‘영화 했다간 고생만 하고 죽는다’는 의식이 박혀 있어서. 영화 아카데미에 붙었다는 소릴 했다가 어머니에게 혼이 났다. “엄마 난 만드는 거 안 하고 공부, 책상에 앉아서 하는 점잖은 일만 한다”고 한참을 설득했다. 장병원 기자 영화아카데미에 입학한 걸 보면 처음부터 영화평론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다. 유지나 파리에 유학 가서도 공동 작업으로 영화도 만들고 배우로 출연도 했다. 찍어 보니까 많이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공부를 시작했고, 공부를 하다 보니 논문도 쓰게 됐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주어진 일들이 평론이었고 교수가 됐다. 그리고 스크린쿼터 문화연대 일을 시작했다. 당장 풀어야 되는 숙제 속에서 그 시기에 절실하고 해야 될 것을 찾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 인생이 되게 불쌍해 보이네.(웃음) 장병원 기자 지금 시기에 가장 즐겁게 하고 싶은 일은 무언가? 유지나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젠 내가 공익 인간이 된 것 같다. 문화연대 이사장 임기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 미루고 미루다 끝내지 못한 책 번역 작업이 하나 있다. 신자유주의 속에서 어떻게 예술이 억압받고 있는가를 다룬 책인데 공익인간으로서의 짐을 좀 덜면 그걸 마저 끝내고 싶다. 올해가 내 안식년이라 그게 다 끝나기 전에 스스로 안식할 수 있는 시간을 좀 가져야 한다. 내가 동양화를 좋아한다. 화투말고 묵화로 그린 동양화. 그림 보는 게 영화 보는 것 이상으로 좋더라. 겨울방학 이용해서 우리 학교 미술학과 교수님에게 동양화를 배우려고 한다. 유학 시절 힘들 때마다, 그랑 쇼미에르라는 아틀리에에 가서 그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최근엔 남산 산책이나 요가에도 취미를 붙였다. 동양화나 산책을 하면서 내가 참 자연을 좋아하는 인간이구나 라는 걸 새롭게 깨달았다. 장병원 기자 영화는 얼마나 보나? 유지나 일주일에 두 편 정도. 심야 극장도 가끔 간다. 장병원 기자 개인적인 올해의 베스트는? 유지나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최근 본 영화로는 <나의 결혼원정기>가 좋았다. <내 생애...>는 인물들을 크고 작은 인연으로 엮어내는 기발한 이야기 솜씨가 일품이었다. 인연과 관계로 구성된 삶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관점을 전해준다. 내가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게 '영화는 그들만의 세상'이라는 관념을 좀 깨야 한다는 거다. <나의 결혼원정기>만 봐도 농촌 문제, 이농, 조선족, 제3세계 노동자, 탈북자 등의 문제가 다양하게 얽혀 있다. 환경 문제에 대해 말하는 한국영화가 있나? 환경 문제, 재미없다고? 그런 소재를 통해서도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 할리우드에는 <소피의 선택> <차이나 신드롬> 같은 영화가 있다. 환경 문제를 다루진 않지만 <에린 브로코비치>도 미국 사회가 가담해 논쟁을 일으켰던 사건을 기가 막히게 극화해낸다. 장병원 기자 글을 통해서 예술영화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했다. 어떤 영화를 옹호하는가? 유지나 영화는 어차피 짜여진 허구고 당의정이야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영화를 보는 것도 인생이다. 영화 보는 두 시간 동안에도 인생은 흘러가고 관객은 금쪽같은 시간 일부를 투자한다. 영화가 현실과 너무 괴리되는 건 좋지 않다. 현실을 더 이해하고 그 속에 담글 수 있는 접속 라인이 하나의 장르처럼 존재했으면 좋겠다. 또 하나, 나이 든 여배우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주는 영화, 나이든 여배우를 쓰는 영화를 보고 싶다. 할리우드에서는 수전 서랜든, 줄리아 로버츠, 샤론 스톤 같은 이들이 사십 넘으면서 성숙을 증거할 수 있는 영화들이 많이 나온다. 프랑스도 중년 여성들의 강렬한 섹슈얼리티를 다룬 영화들이 유행이다. <피아니스트> <포르노그래픽 어페어> <정사> <육체의 학교>. 남자배우는 그게 된다. 안성기, 송강호, 최민식, 다 나이듦으로 더욱 돋보이는 배우들이다. 여배우들은 주름살 생기고 삶의 흔적이 보이면 퇴출된다. 이게 웬일인가. 남자들은 다양한데 여자들은 협소하게만 다뤄진다. 장병원 기자 그런 가능성을 보이는 여배우가 한국에서 찾는다면? 유지나 이미숙. 나이 들면서 더 멋져지고 잘살아 남았으면 싶다. 문소리는 처음부터 다른 카테고리로 시작한 경우고. 섹시한 여배우가 나이 들어서 성숙해지는 것을 보고 싶다. 갈수록 너무 여배우의 섹시함만 파는 것 같다. 인간이 혼자 잘 나서 성장하는 경우는 없다. 한 계통에서 일가를 이룬 인재는 업계에서 투자한 결과다. 투자한 걸 버리고 매 번 새로운 인물로, 얼굴까지 사람들이 좋아한 것으로 바꾼 맞춤 얼굴을 갈아대는 건 좀 너무하다. 그러니까 경험이 축적되지 않고 층이 얇을 수밖에 없다. 장병원 기자 그 시기에 맞게 자연스럽게 사는 인생관이라 해도 미래의 계획은 세우지 않을까. 많은 일을 했지만 그래도 숙제가 남았다면? 유지나 아주 강렬한 욕망은 아니지만 혼자서 맘대로 할 수 있는 소설을 써볼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논문을 주로 쓰는데 논리를 만들고 참고 문헌을 동원하는 아카데믹한 글쓰기에 좀 질렸다. 구획된 틀로부터 벗어나는 자연스러운 글쓰기를 해보고 싶다. 일상도 책임감, 짜여진 생활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인생 나침반을 조금씩 돌리려 한다. 프로필 1960년 생 |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과 졸업,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졸업, 파리7대학 박사,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사)스크린쿼터문화연대 이사장, 계간 '이프' 편집위원 | 저서 <스크린쿼터와 문화주권> <유지나의 여성영화산책>, <한국영화, 섹슈얼리티를 만나다> 등 사진 김태일 기자 |
첫댓글 유지나교수, 마돈나와 함께 아직도 강렬한 나의 판타지. 여전히 멋지군.
별밤에서 처음 알게 되었는데. 벌써 46이나 되셨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