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부터 시골 한 동네에서 함께 자라고 놀던 친구들은 부담이 없고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다. 내가 초등학교 졸업하기 전 1959년 12월에 서울로 상경한 이후로 친구들과는 좀처럼 만날 수 없었으며, 서울 이웃에 살고있는 친구들을 사귀어 잊고 지내왔었다. 그러다가 나이 차이가 9살 연배인 누나가 1963년에 시집갈 때 시골집을 방문한 이후로부터 40대 들어서기까지 소식을 끊은 채 지냈었다.
그러니까 서울에서 중학교, 고등학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 후에는 전방에서 소대장시절부터 대대장까지 생활하다보니 친구들과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1985년 이후 후방지역에서 근무하고 나서부터는 좀 여유로운 시간이 남아 그때부터 친구들과 자주 연락하고 만남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1990년 연대장 시절부터는 시골 친구 모임회가 결성되어 분기단위로 모임을 갖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 끈끈한 우정이 이어져오고 있다..
내가 시골에서 자랄때는 6.25동란이 터지고나서 나라가 피폐하여 미국으로 부터 무상원조를 받던 시기였던 터라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살았던 때였다. 주로 수제비와 칼국수, 밥죽(미음죽), 호박죽이 단골 식사 메뉴였다. 쌀이 귀한 때라 집에서 농주(農酒)를 만들어 먹는 것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지방 세무공무원이 점검차 집집마다 샅샅이 뒤져 농주가 나오면 시냇가 모래사장에 집결하여 쏟아버리고 벌금도 물었다.
세무공무원이 까만 선글라스 안경을 끼고 막대기를 가지고 볏집을 푹푹 쑤시고 다니는 모습이 매우 무섭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나는 바닷가에 살아서 고막, 간장게장, 어리굴젖등을 주로 많이 먹고 자랐다. 나의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일찍이 서울로 올라오셔서 세무공무원으로 근무하고 계셨고, 어머니는 홀로 자식들 6남매를 시골에서 키우고 계셨다.
아버지가 매달 생활비를 보내주셨지만 부족하였을 뿐만아니라 농사지을 땅도 없어 큰 아버지로 부터 조그만 밭과 논(9 마지기)을 빌려 농사로 먹고 살며 근근이 자식들 6명을 교육시켰다. 아버지는 늦둥이로 태어나 큰아버지와의 나이 차이가 많아서 농사지을 땅을 물려받지 못하고 큰아버지한테 땅을 몽땅 물려 주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큰 아버지와의 나이 차이가 자식들과 같은 차이로,
할머니가 아버지를 낳고 나서 돌아가신후에는 큰어머니 젖을 먹고 자라셨다고 한다. 아버지께서는 큰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오실 때마다 깍듯하게 절을 하시곤 하셨다. 아버지는 어릴적 나이 두살 세살 연상인 조카들과 함께 자라다보니 조카들로 부터 구박받으며 생활하셨다고 한다. 큰 아버지는 어린나이에도 무서워 할 정도로 매우 엄하셨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핫바지에 검정 고무신 신고 ,
책을 보자기에 두루말아 대각선으로 어깨에 메든가 아니면 허리에 둘러메고 4km를 걸어 등교하였다. 장마철이 되면 도당천을 건널 수 없어 웅소성리를 거쳐 학교에 가야하기 때문에 불편을 겪기도 하였으며, 등교시간이 늦어 몰래 성벽을 넘다가 들켜 선생님한테 혼날 때도 있었다. 그리고 대교(도당천) 밑에 살고 있는 문둥이가 사람의 간을 빼앗아 먹으면 낫는다고 하여 다리를 건널때마다 무서워 도망치듯 달아나곤 하였다.
그 당시에는 책이 많지 않아 도시락과 함께 싸가지고 갈 정도였다. 초등학교 시절은 철없이 놀던 때라 방과후에는 책 보따리를 내동댕이치고 친구들과 노는것에 정신이 팔려 마냥 즐겁게 보냈던 시절이었다. 매우 어렵게 생활했지만 친구들이 있어 든든한 버팀목이었고 낭만적인 생활을 즐겼던 것 같다. 조수의 간만 차이로 밀물때면 도당천과 신장천까지 바닷물이 올라오곤 하였다.
도당천과 신장천은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썰물때는 갯벌에 기어다니는 게와 뱀장어, 털게를 잡았으며, 밀물때는 낚시질하여 망둥이를 건져 올리곤하였다. 그 당시는 1950년 중반이라 썰물때는 시냇물(신장천)이 맑고 깨끗하여 미역을 자주 감곤 하였다. 그리고 신장천 모래사장에서 친구들과 씨름을 즐기곤 하였다. 고등학교, 육사시절에 유도부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다름아닌 씨름 덕택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씨름은 잘했다고 생각된다. 같은 나이 또래에서 항상1등 하였으니까. 그 해 겨울이 다가오면 신장천에서 배추와 무우, 파, 생강을 맨 손으로 깨끗하게 씻어 김장배추를 하였다. 손이 시려워 두 무릎사이에 두손을 꽉끼고 열심히 비비면서 어머니를 정성껏 도와드렸다. 겨울철에는 밤나무를 깎아 둥근 구술를 넣은 팽이를 직접 만들어 팽이치기도 하고,
썰매타기, 연날리기 , 딱지치기, 자치기, 기마타기 , 쥐불놓이 등 친구들과 함께 추위도 모르는 채 마냥 즐거워 하는 모습이 60년이상이 흘렀지만 머리속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연날리기 하다가 똥독에 빠져 시냇가에 나가 혜엄치듯 하여 옷을 깨끗하게 빨고 돌아온 적도 있었다. 그래서 '똥독에 빠진 얼간이'라고 놀림을 당하기도 하였다. 해미초등학교 시절에는 축구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초등학교에서 축구부 생활을 같이했던 친구인 이택호를 초등학교 졸업 후 7년만에 육군사관학교 입교 당시 우연히 마주쳐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이택호는 해미중학교를 졸업 후 예산농고를 나와 육사에 진학하였던 것이다. 나는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육사에서 만날 줄이야 꿈에도 몰랐다. 인연이라는게 묘하다. 그리고 육사 1년 후배로 입교한 홍성균도 마찬가지다.
홍성균은 공주사대부고를 졸업하고 육사에 합격하였다. 나를 포함하여 세명이 해미초등학교 46회 졸업생인 동시에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었다. 해미초등학교 역사 유래 처음으로 육사에 입교한 것이다. 이택호는 육사 졸업후 철학과 교수로 남고 나는 전방 야전생활을 하였으며, 홍성균은 1년 늦게 부관병과로 근무하였다. 해미초등학교는 그 당시 해미읍성안에 자리한 학교였다.
해미읍성은 전북의 고창읍성과 전남의 순천 낙안읍성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읍성 중 하나다. 3개 읍성 중 유일하게 주민이 거주하지 않는 읍성이다. 해미읍성은 해미초등학교및 행정관서(면사무소, 우체국 등)가 성 내부에 있었으나, 해미 초등학교 졸업후 10년후인 1970년대 모두 철거되어 성밖으로 이전하였다. 해미초등학교는 일제시대 강점기인 1912년 5월 10일 개교하여 금년이 105년째 되는 해로 역사가 깊다.
나는 초등학교 다닐 때 왜 하필이면 성스러운 성안에 학교가 들어설 수 있을까 의심스럽게 생각했지만 일제가 문화정책을 말살하기 위하여 세운 학교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해미읍성은 이순신 장군과 천주교 박해와 연관성이 깊은 곳이다. 이순신 장군은 1579년에 10개월간 해미에서 훈련원 봉사(군관)로 근무하였다. 해미읍성 안에 호야나무(회화나무)가 있다.
호야나무는 천주교 신도들의 집단학살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선 후기 천주교 신도들의 형벌의 도구이자 박해의 상징인 호야나무는 나뭇가지에 굵은 철사를 매달아 신자들의 머리를 묶어놓거나 심하게는 나무에서 그대로 처형된 신자도 있다고 한다. 호야나무는 이곳 발음으로 호야로 부른것이 시초가 되어 호야나무로 전해져 오고있으며, 일명 교수목이라고도 부른다.
해미읍성은 500년 이상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천주교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는 순교성지이다. 해미읍성은 1491년 성종 22년에 완공되었으며, 그로부터 101년 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해미(海美)는 아름다운 바다란 뜻이다. 그러나 현대건설의 A,B방조제공사로 인하여 바다가 없어지고 대신 군용비행장이 들어서 있다. 그 당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현대건설의 정주영 회장의 맨땅에 헤딩정신이다. 원래 천수만은 물살이 센 바다였다. 아무리 흙을 쌓아도 바닷물에 휩쓸려 나가자 폐유조선을 벽을 삼아 흙을 쌓아 방조제를 건설했다. 그러다 보니 아름다웠던 해미는 더 이상 낭만의 바다가 아니다. 해미는 내가 어렸을 적 추억과 낭만이 깃든 곳이라, 여우가 죽을 때 머리를 자기 살던 굴로 향한다는 수구초심(首丘初心)처럼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육사 동기생들과 해미 공군비행장에서 1년에 두번정도는 골프를 동반하기도 하고 1박하면서 골프를 하여 들르지만 차타고 그냥 지나쳐 오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나이가 점점 먹어갈수록 친구들이 보고싶고 함께 동행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그리고 어릴적 순순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귀소본능이 저절로 느껴진다. 시골 친구들은 대부분 서울에 거주하고있으나,
아직도 4명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친구와의 원만한 관계는 장수비결이기도 하다. 대화할 상대와 어려울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있으면 덜 외롭다. 친구간에 서로 의지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포용하면서 베풀며 살아가는 것이 진실된 우정이라 생각된다.
첫댓글 참 재미 있게 읽었네. 동해안에서 자란 나는 바다가 조석 간만의 차이가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네. 시간 여행 잘 했네. 동해안 출신(강원도 삼척)이 충청도 천안 출신과 부부 되어 살면서 어릴 적 얘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참 다른 인생을 시작했다는 걸 느낀다네. 요즘 자네 글을 자주 보며 죽기 전에 꼭 한 번 만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네. 부디 건강하게 지내게 좋은 글 읽으며 오랜만에 시간 여행을 즐겼다네. 고맙네.
형기 고맙네. 형기의 지금 모습이 고교학창 시절과 변함없는 미남형이지. 한 번 꼭 보고싶은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이렇게 카페글을 통하여 만날 수 있다니 정말 다행이네. 새해에도 건강하게 지내시게
나의 어린시절과 흡사해 놀라웠다 그땐 다 그러했지 나는 바다가 아니라 낙동강 이었지 사발에 된장넣고 천으로 입구를 싸고 구멍 뚫어 물속 에 넣고 수영하며 놀다보면 사발속에 피라미가 가득했었지 그리운 옛시절을 생각나게 해주어 감사하네
손창인 박사는 어릴적부터 창의적인 머리가 대단해. 고교학창 시절에도 농구공을 프라스틱으로 만들고 튕겨서 골대에 넣는 기막힌 아이디어 깜짝 놀랬었지. 사발속에 미끼를넣고 구멍뚫어 고기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한 아이디어가 과학적인 두뇌지. 손박사는 머리가 비상해. 그러니까 내노라하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서울대 치대에 합격했지. 성동고의 위상를 한 단계 발전시킨 업적이지. 한마디로 대단해. 손박사 사랑한다.
그쪽 시골도 경상도 산골 우리와 많이 비슷했네래가 약속이나 한듯 같이 피고 단풍이 같이들고 하듯이 말일세.대야.
왕래가 적던 시절이라 문화가 서로 단절되었을 법도 한데 참 신기하게도 같아.
마치 이산 저산 진
어릴적 추억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우리는 참 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