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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하수와 백합
 
 
 
카페 게시글
시 해석 및 시 맛있게 읽기 스크랩 부인근로대/ 노천명
은하수 추천 0 조회 62 18.08.17 23: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부인근로대/ 노천명


부인근로대 작업장으로

군복을 지으러 나온 여인들

머리엔 흰 수건 아미 숙이고

바쁘게 나르는 흰 손길은 나비인가


총알에 맞아 뚫어진 자리

손으로 만지며 기우려 하니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


한 땀 두 땀 무운을 빌며

바늘을 옮기는 양 든든도 하다

일본의 명예를 걸고 나간 이여

훌륭히 싸워주 공을 세워주

나라를 생각하는 누나와 어머니의 아름다운 정성은

오늘도 산만한 군복 위에 꽃으로 피었네  


- 매일신보. 1942. 3. 4

..........................................................

 

90년대 초반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란 프로에서 진행자 손범수 아나운서는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란 시구에서 이 '짐승'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라는 문제를 냈다. 곧바로 부저가 울렸고 패널로 출연한 당시 인기 여가수 이지연은 서슴없이 '기린'이라고 대답했다. 참으로 틀리기가 쉽지 않은 문제였기에 이 일화는 지금까지 유머 소재로 이용될 정도이다. 그 정답인 사슴의 시인 노천명이 2차 대전이 점차 가열되어가던 시기에 부인근로대라는 이름으로 군복 수리에 동원된 부인들을 통해서 임전 태세를 고취시키고 애국의 지성을 노래한 일제 부역 시다. 일본을 위해 희생과 충성을 강조하며 동원된 여성들을 고무 찬양한 시로 일본의 침략 전쟁을 옹호하고 미화했다.

 

노천명은 이화여전 영문과를 나와 <조선중앙일보> 학예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해오다가 <조선문인협회> 간사로 일하기 시작한 40년대부터 본격적인 친일활동에 참여하게 된다. 1942년에는 군복수리 근로에도 직접 참가하였다. 여러 친일단체에도 참여하면서 그의 부역 시는 참전 군인들의 무운을 기원하거나 죽은 병사들을 추모하는데 그치지 않고 학병 출전을 권유하고 일군의 승전을 찬양하며 후방의 여성들이 지녀야할 마음가짐을 다독이는 등 광범위하다. 일본의 겁박에 심리적인 부담도 없지 않았으리라 짐작되나, 이토록 전력으로 영혼을 팔 수 있었을까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탄환을 맞던 광경 머리에 떠올라 뜨거운 눈물이 피잉 도네라는 대목에선 할 말을 잃었다.

 

노천명은 같은 해 8남아면 군복에 총을 메고 나라 위해 전장에 나감이 소원이리니. 이 영광의 날, 나도 사나이였다면 귀한 부르심 입는 것을이란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란 시도 쓴 바 있다. 그가 팔았던 것은 자신의 영혼만이 아니라 문학이란 외피를 뒤집어쓰고 겨레의 혼까지 팔아치웠던 건 아닐까. 당시 일본을 위해 징병 징용에 임할 것을 권하고 일본을 찬양하는 시는 이것 말고도 쌔고 쌨다. 그 내용들을 들여다보면 보신을 위해서거나 강요에 의해 마지못해 조류에 영합하고 아첨했다기보다는 완벽하게 내선일체된 것은 아닐까란 의혹이 내내 맴돈다. 이들 반민족적 일탈이 가져온 폐단의 그림자는 지금까지 드리워져 있다. 온전히 친일잔재 청산을 못한 것도, 민족적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 현실을 보면서도 그렇다.

 

1937820일은 <애국금차회>가 조직된 날이다. 총독부의 사주로 탄생된 이 단체는 고위 친일귀족의 아내들과 상류층 부녀들, 여류 명망가들이 중심이 되어 금비녀 등 금제 장신구의 헌납과 군인환송연· 위문 기타 황군원호의 강화를 설립목적으로 하였다. 노천명 모윤숙 등의 참여도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김활란(전 이화여대 초대 총장), 송금선(덕성여대 설립자), 고황경 (전 서울여대 명예총장), 황신덕(전 추계학원 이사장) 등이 중추적으로 활동했다. 당시 <조선일보> 사주 방응모도 애국금차회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결성식 즉석에서만 금비녀 11, 금반지 3, 금귀거리 2, 은비녀 1, 현금 88990전을 갹출, 헌납하였다. 이 헌납광경을 김은호는 동양화 표제 금채헌납으로 작품화해서 총독 미나미에게 증정한 바 있다.

 

금차는 금비녀를 뜻한다. 이들은 금비녀의 헌납뿐 아니라 말기에는 조선의 혼과 어린 딸들까지 갖다 바치는 치욕적인 황국 사업에도 간여했다. 정신대 할머니들의 맺힌 한 속에 이들의 존재는 전혀 없는 걸까. 그들이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노천명 시인은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46세에 백혈병으로 생을 마감한 가련하고 안쓰러운 여인이기도 하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친일 부역에 대한 사과 한 미디 없었다. 그는 6·25가 발발하자, 피난을 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았다가 북한군에 협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서울 수복 후 부역자처벌특별법에 의해 20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나중에 문인들의 석방운동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그러나 긴 목의 천사 같고 고결한 사슴시인으로 각인된 그는 아무리 후하게 봐줘도 자신의 영달만을 쫓아 살아온 기회주의자의 다름 아니다.



권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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